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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지 않는 ‘나’들 너머를 기다리며(신종환)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3-04-25 10:54
조회
233

신종환 / 공무원


이번 글을 얼마 전에 개봉했던 ‘다음 소희’에 대한 스포일을 담고 있다.


 

학생운동과 노동운동 사이 어딘가에서 활동하던 친구는 종종 ‘운동에는 반동이 따른다’고 했다. 나는 구 공산권의 몰락에 좌절했다는 과거의 대학생들이 겪은 일을 책으로 알고는 남 얘기인양 측은해하는 한편 조소하며 ‘우리’라는 개념이 소실되는 반동이 물러가길 바라며 ‘동지’라는 구호를 부르짖으며 짧은 시절을 보냈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니 나는 7급 지방행정직으로 2023년을 살고 있다. 그리고 그때는 몰랐던 ‘반동 또한 운동이며, 반동에는 운동이 생긴’다는 사실을 조금씩 느낀다.


 

영화 '다음 소희' 중


 

영화 ‘다음 소희’를 봤다. 반짝이는 꿈을 가진 소희는 욕받이인 직장, 고충을 말하기 어려운 집, 사정과 무시가 섞인 담임, 자신처럼 무너져가는 남자 동기 사이에서 추위에 얼어가는 성냥팔이 소녀처럼 죽어가고 소녀의 성냥불처럼 영롱한 그녀의 춤이 참담한 현실에 대비되어 더욱 암담하게 그녀를 비춘다. 그녀를 보며 폰 샤미소의 소설 ‘그림자를 판 사나이’에서 그림자의 개념을 김현경 씨가 본인의 책에서 ‘환대’에 비교하여 언급한 것이 생각났다. 환대란 이를테면 가치에 부응한다는 인정이고 그림자는 그 상징인데 소설의 주인공에 빗대자면 그녀는 그림자를 팔지도 않았지만 박탈당했다. 어디에서도 그녀는 응당한 대우를 받지 못한다. 그녀 주변은 그녀의 상황에 대해 잘 모르고 나아가 굳이 알려 하지 않았다. 주변에서 어떠한 노력의 증여도 받지 못했으므로 그녀는 자신의 자리를 잃었고 방향과 좌표를 잃었다. 방향과 좌표를 잃은 사람은 고통을 해석할 실마리가 없고 그것은 지옥이다. 그리고 그녀는 자살한다. 그녀는 찬 물 속으로 들어갔다. 돌아나올 순간이 계속 있었을 자살방식을 그녀가 택함으로써 영화는 소희의 내면이 완전히 붕괴되었다고 보여주는 것 같다.


 

후반부터는 소희의 죽음을 규명하려는 배두나를 주목하지만 거기에 이르기까지 영화가 연출한 소희의 부모, 담임, 교장, 교육청, 회사 사람들이 렌즈에 더 많이 비춰진다.


 

영화 특성상 화나게 하는 사람들이 음성이나 극중 인물로 등장하지만 결국 직접적인 가해자는 보이지 않는다. 물론 누구도 타인에게 욕을 해서는 안되지만 대기업 하청 콜센터의 업무특성 상 서비스 해지까지 아주 어렵게 만들어진 구조는 가뜩이나 화 많은 사람들을 더 화나게 한다. 죽은 팀장도, 새로 부임한 팀장도, 주변 동료, 담인 선생, 교육청 직원 모두 비슷한 결을 가진다. 손에 바늘을 쥐고 다른 이의 항문을 꿰메지 않으면 자신의 항문이 꿰메일 것처럼 도망치는 동시에 타인을 쫓는 쥐처럼 보인다.


 

배두나는 그런 간접 가해자들 속에서 진범을 찾다 실패한다. 그림자가 누구인지는 알지만 거기까지 이르는 길은 좁고 복잡하기에. 김수영 시인이 ‘아, 그림자가 없다’에서 사람들이 정처 없듯이.


 

영화를 보며 쓰면서 몇몇 순간들이 머릿속에서 겹쳤다. 자기도 처음 들어왔을 때 찻길에 발을 넣었다 뺐다 했다는 선배. 씨발놈 개발놈 하는 민원인 앞에서 소희처럼 욕하지는 못하고 울더니 공황장애가 생겨 휴직하고 다시 복직하기는 무섭다던 누나. 조직에는 희망이 없다며 면직 후에 교육행정직으로 다시 시험 쳐서 들어간 동기. 과거의 자신을 타자화하는 데 성공한 사람은 조직에 남아 선두에 섰고, 무너진 자신과 이별하지 못한 사람들은 휴직자란 이름을 달고 조직에서 언젠가 떠날 사람으로 분류되었다. 몇몇은 그사이 어딘가에서 울기에도 웃기에도 애매한 마음으로 월급표를 기다린다.


 

노동 가수 ‘박준’은 본인의 노래에서 ‘옆을 쳐다’보라고 했다. 우리가 앞만 보지 않고 옆을 쳐다볼 때 모두 노동해방에 대한 열의와 동료의 부당함에 대한 의분이 생기리라 믿었던 것 같다. 신영복 선생님의 마지막 책인 ‘담론’에서 선생께선 ‘인간’이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그 존재의 핵심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때에는 너와 내가 남이 아닌 ‘우리’라는 자각이 옳은 사회로 가는 원동력이라고 모두들 여겼던 것 같다.


 

이제 사람들은 공공적 연대, 우리라는 개념에 기반해 의분을 느끼지는 않지만 개별적인 분노가 투명한 사회에서 응집한다. 부당함에 대한 투명한 분노가 동시에 많은 사안들을 바라보고 향한다.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면 참을 수 없으니 너에게 일어난 일도 참을 수 없고, 기술은 서로의 분노를 적나라하게 보여주어 연대보다는 산불처럼 타오른다.


 

학대와 비인간화가 치밀하게 계획되어 아래로 흐른다면 우리의 분노는 직관적으로 위로 향해 올라간다.


 

‘다음 소희’의 관객은 11만명 정도로 기록된다. 최소 500만명부터 시작된다고 여겨졌던 ‘헤어질 결심’의 관객이 189만명임을 감안하면 20만명이 손익분기점이라던 영화가 사람들의 외면을 받았다고 속단하기는 어렵다. 속초에서 우리 노조 모임은 영화를 단체관람 하려 했지만 영화가 이틀만에 내려버리는 통에 관람하지 못했다. 그런 상황이 지방에는 훨씬 많았을 것을 감안하면 더더욱 그렇다.


 

하지만 적지 않은 호응에도 어떤 갈증같은 아쉬움이 남는 것은 배두나가 소희의 친구에게 연락하라고 말하는 선제적 온정과 사회 전반에 타오르는 분노의 궤가 다소 다르게 느껴지기 때문인 것 같다. 무수한 ‘나’들은 응징하지만, ‘우리’는 어떤 ‘나’가 허물어지기 전에 서로를 지킨다. 영화가 주는 강렬함과 아쉬움은 아마 ‘나’들이 아직 ‘우리’로 발아하지 못했음을 느끼고 또 한편으로는 그런 열망을 강하게 촉발하기 때문인 것 같다. 영화가 모두에게 이 일말의 갈증을 느끼게 하고 같이 발아하는 마중물의 역할을 하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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