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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로 선정된 김태민, 이서하, 전예원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칼럼니스트를 위해 안동환(서울신문), 안영춘(한겨레), 우성규(국민일보), 기자가 멘토 역할을 맡아 전문적인 도움을 줍니다.

우리는 언제 ‘우리의 말’을 할 수 있게 될까요 (김은성)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6-27 15:31
조회
319

김은성/ 청년 칼럼니스트



“무서워요. 저 이러다 히키코모리 되는 거 아닐까요.”

카카오 톡 알람에 잠이 깼다. 시간도 시간이지만 더 놀라웠던 것은 발신자의 정체. 내가 가르치는 모 수업의 수강생 중에서 가장 앞날이 걱정 없어 보이는 아이였기 때문이다. 사소한 질문을 할 때조차 “저어, 뭣 좀 여쭈어 봐도 될까요?” 하던, 예의에 있어 보기 드물게 조심스러웠던 그녀의 갑작스러운 메시지. 잠이 화들짝 달아나서 10줄이 넘어가는 카톡 창을 읽고 또 읽었다. ‘자살’과 같은 불경스러운 단어를 떠올릴 수밖에 없는 새벽 4시 30분이었다.

그녀를 ‘우리 모범생’이라고 부르며 맘에 드는 여자아이에게 치근대는 초등학생처럼 농담을 걸곤 했던 나다. (번역과 작문 등을 가르치는) 아카데미의 수강생 중 물리적 나이가 가장 젊은 스물 넷, 마감 기한을 100퍼센트 정확하게 엄수하는 성실성, 과제의 내용이 ‘너무 월등해서 샘조차 안 날 정도로’ 기발하고 매력적이라는 점. 호감의 이유는 충분했다.

말을 걸고 싶던 이유는 하나 더 있었다. 그녀가 일절 말을 하지 않았으니까! 겁에 질린 토끼 같은 표정이 안쓰러웠다. 웃으면 정말 예쁠 얼굴인데 웃질 않으니 그 속내가 자못 궁금했다. 필요한 질의응답 외의 이야기를 삼가는 그녀의 표정변화란 성과를 칭찬했을 때 지어보이는 예의바른 미소 뿐. 각자 제 말을 하고 싶어 팔을 휘두르는 에너지 넘치는 학생들 사이에서 사적인 이야기는 일절 하지 않은 채 뒤풀이 시간을 채우는 그녀는 “지구인들과 말하지 말라”는 지령을 엄수 중인 외계인 같기도 했다.

새벽 4시 30분까지 잠 못 이룬 채, 인사와 질의응답만 주고받던 강사에게 SOS 신호를 보낸 마음이 어떠할까. 악착같이 부여잡고 있던 예의와 자존심을 외면하고 send 버튼을 누르도록 그녀를 패닉상태로 몰아넣은 것은 무엇일까.

“졸업한지 1년이나 됐는데 아직까지 월세를 부쳐주시는 부모님께 면목이 없다, 면접 거절문자를 볼 때마다 심장이 터질 것 같다, 멋지게 입사하고 나서 친구들을 만나려고 했는데 이젠 자신이 없다,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어 숨어만 있고 싶다, 그런데 은둔자가 될까 봐 두렵다”는, 신문과 방송에서 100번은 본 요즘 청춘들의 고민이 메시지의 주 내용이었다.

잠옷 바람으로 당장 그녀에게 장문의 E-메일을 썼다. ‘너만 힘든 것은 아니야’라는 무책임한 문장만은 피하고 싶었지만, 결과적으로 이지성이나 김난도의 자기계발서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이 진심이었듯, 나도 진심이었다. “누구도 너를 흔들지 못하게 밥 잘 먹고 잠 잘 자고 땅을 잘 딛고 서 있자. 아직 포기하기엔 이르잖아. 너는 재능이 넘치는 소중한 존재란다.” 로 요약될 마음을 A4 1장 가득 썼던 것은 ‘죽거나 망가지지 말자’고 프리랜서인 나 스스로에게 보내는 주문 같은 것이었을 테다. 모든 위로는 결국 자신에게 하는 말에 다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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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광화문 교보문고 판매대에 진열된 자기계발서들.
사진 출처 - 한겨레



말없는 자는 자기계발서에 줄을 긋는다

두 주 정도 지났을까. 입사 합격 문자를 받자마자 그녀가 찾아왔다. 해방감 때문인지 흥분 때문인지 그녀는 발갛게 홍조를 띄고 자신의 이야기를 쏟아냈다. 그토록 귀엽고 수다스러운 사람인지 처음 알았다.

그녀는 마음을 열듯, 두꺼운 일기 노트도 열어 보여주었다. 세상에! 그렇게 많은 종류의 자기계발서가 존재하는지 처음 알았다. 게으를 때, 포기하고 싶을 때, 두려울 때, 남과 비교하게 될 때, 죄책감에 시달릴 때 읽으면 좋은 자기계발적인 문장들을 빼곡히 필사해 놓았더라. 입을 닫았던 시간 동안 그 문장들을 꼭꼭 눌러 쓰고 있었던 거였다. 호감 가는 여자아이와 친해진 초등학생처럼, 나는 많이 기뻤지만 조금 서글펐다. 바보 같은 말, 별 것 없는 말, 못난 말, 기운 빠진 말, 분노하는 말... 그런 ‘나의 말’도 좀 해도 좋았을 텐데. 입 꾹 다물고 빛나고 자랑스러운 말들만을 받아 적었을 청춘은 그녀뿐이 아닐 거다.

나의 말이 아닌 말들을 하며 살아가는 모습은 면접장에 선 자아의 확장판이다. 옳은 말, 진취적인 말, 백번 맞는 말, 하지만 그건 자신이 아니다. 그리고 그 말들의 모음집들이 힐링, 멘토, 치유 등의 띠지를 두르고 서점에 누워 있다. “세상을 내가 이렇게 만들었니. 그렇다고 네가 그렇게 만든 것도 아니야. 누가 그렇게 만들었는지가 중요하겠니, 네가 살아남는 게 중요하겠니? 답이 나와 있잖아. 분노할 시간에 너의 성공에 충실해”라고 <아프니까 청춘이다>의 저자는 말했고, 그 말들의 모음집은 천만 청춘의 사랑을 받았다.

친한 후배가 힘들다고 찾아오면 소주 한 잔 따라주며 나도 김난도 교수처럼 말할 것 같다. 우선 너부터 살고 보라고, 만 원짜리 구겨졌다고 오천원 되겠냐고, 너는 빛나는 존재라고. 하지만 고통의 시간은 쉽사리 끝나지 않고, ‘나중에 해야지’ 마음먹은 자신의 말들이 사그라진다. 일상의 세심한 결들을 표현한 예쁜 말, 속이지 않는 진심으로 “졸라 힘드네!” 소리치는 성난 말이 놓일 공간과 시간은 어디에도 없다. 신입사원이 된 그녀는 이제 자신의 말을 할 수 있을까. 그다지 희망적이지는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