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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갱이 이야기 (김종현)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6-27 15:29
조회
293
김종현/ 청년 칼럼니스트

지난 4월, 총선을 앞두고 사회과학을 공부하는 대학 동아리 후배들과 작은 세미나를 준비했다. 선거를 계기로 국회의사당 안에만 갇혀있는 정치가 아닌, 바로 지금 여기에서 주권자인 우리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정치를 상상하자는 주제였다. 많은 학생들이 함께 하길 바라며 세미나 포스터와 현수막을 만들고, 게시 허가를 받으러 학교 행정실을 찾았다.

그런데 웬걸? 행정실 직원은 부착 허가를 내줄 수 없다고 말했다. 세미나 주최 측에 민주노총이 포함돼있다는 이유였다. 총선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정치적 색깔이 있는 민감한 행사를 여는 것은 다른 학생들이 동요할 수 있고, 보기에도 별로 안 좋다는 것이었다.

엄연히 투표권을 가진 성인인 학생들이 동요한다는 게 무슨 뜻인지, 도대체 누가 보기에 별로 안 좋다는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사실 행정실의 이런 태도는 예상된 일이었다. 우리 동아리는 이미 학교 당국에 ‘빨갱이 동아리’로 낙인찍힌 상태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동안 교내 청소 노동자, 비정규직 교수 노동조합과 함께 학교에서 벌어지는 노동권 탄압 사례에 문제를 제기해왔다. 교육 환경 상품화 비판, 장애인권 보장에 대해서도 목소리를 높여왔다. 이런 우리는 학교 측에서 볼 때 눈에 거슬리는 문제아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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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대 외부세력 대놓고 지지합니다
사진 출처 - 공잠


 

당황스러운 것은 동아리 학생자치회마저 우리 편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자치회는 ‘학교와 싸우는 시대는 갔다’며, 학교와 자치회의 화합을 위해 괜한 분란을 일으키지 말라고 압박해왔다. 학교의 평화를 위해 우리는 침묵해야 한다는 얘기다.

사실 언젠가부터 침묵은 내 익숙한 습관이다. 대학 친구들 사이에서 내 별명은 빨갱이다. 노동자의 권리에 대해 말하거나, 기존 관념에 비판적인 이야기를 해도 친구들은 내 얘기를 진지하게 듣지 않는다. “넌 빨갱이니까”하고 치부해버리는 것이다. 거기서 내 의견을 무리하게 고집해봐야 감정싸움이 되고 이래저래 서로 상처받고 피곤해질 뿐이다. 우정의 평화를 위해 내가 침묵하는 셈이다.

빨갱이라는 말이 무시무시한 위력을 가진 시절이 있었다. 반공 이데올로기가 맹위를 떨치던 시절, 빨갱이로 몰리는 것은 글자 그대로 죽음을 의미하던 때가 있었다. 전쟁까지 겪은 극한적인 이념 대립의 산물이었다.

이제 언뜻 시대는 바뀐 것처럼 보인다. 빨갱이 소리를 예사로 듣고 살지만 난 아직 살아있다. 어떻게 보면 친구에게 빨갱이라는 말을 서슴없이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색깔론이 사라졌다는 것을 보여주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든다. 과거 무고한 사람을 빨갱이로 몰아 처형했던 사건에 대해선 집권 여당의 유력 대선 후보도, 진정성에 의문을 품는 사람들이 있긴 하지만, 어쨌든 공식적으로 사과의 뜻을 밝혔다. 정치권에서도 이제 색깔론이라는 말은 청산해야 할 구태 정치의 대명사로 쓰인다.

하지만 색깔론은 진짜 사라진 걸까? 비판적 시각을 불온하게 여기고 거부하는 태도는 여전하다. 대상이 ‘친북 세력’에서 ‘반시장 세력’으로 바뀐 것뿐이다. 돈이 아니라 사람이 먼저라고, 인간의 권리와 자유를 보장해달라고 말하는 사람은 또 다른 빨갱이가 돼 억압받는다. 대학 당국이 우리 동아리를 못마땅해 하는 이유도 이런 것일 테다. 당장 돈이 안 되는 기초학문은 구조조정의 대상일 뿐이고, 취업에 유리한 실용 학과를 유치하는 데 여념이 없는 대학이 우리의 문제제기를 달가워할 리 없다.

대통령 선거가 다가온다. 모든 후보들이 국민 통합, 사회 통합을 강조한다. 그게 우리 학교에서 내가 겪었듯이, 나라의 평화를 위해 누군가 침묵을 강요받는 그런 형태의 통합이 아니길 바란다. 21세기를 살아가는 한 빨갱이의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