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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로 선정된 김태민, 이서하, 전예원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칼럼니스트를 위해 안동환(서울신문), 안영춘(한겨레), 우성규(국민일보), 기자가 멘토 역할을 맡아 전문적인 도움을 줍니다.

대통령씨, 정말 나를 사랑하나요? (정다운)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6-27 15:21
조회
320

정다운/ 청년 칼럼니스트


 

나는 사랑을 믿는다. 사랑이 가진 힘을 믿는다. 이건 신파 드라마 속 대사가 아니다. 감수성 풍부한 20대 처녀가 그저 새벽감성에 취해 뱉은 말도 아니다. 가슴 저 밑의 깊은 확신을 끌어올려 진지하게 고백하는 것이다. 세상 모든 일은 사랑하는 일이다. 세상 모든 일이라고 한 만큼, 사랑을 주고받는 모습은 다양하다. 그것이 넘치거나 모자라서 혹은 달기보단 씁쓸해서 이런 저런 일들이 생긴다. 오늘 내가 페이스북에 남긴 한 자락 글은 사랑 받기 원하는 내 마음이다. 가수 싸이 신드롬은 곧 서로가 서로를 공유하고 싶었던 사랑이다. 지난날 김진숙 지도위원이 한진중공업 크레인 위에서 벌인 사투는 나보다 너와 우리를 사랑해서 벌어진 일이었다. 하다못해 얼마 전까지 신문 지면을 가득 채우던 치정과 흉악범죄들도 사랑이 모자라서 혹은 사랑을 오해해서 벌어진 일들이었다. 추석연휴에 친척들로 북적 이는 밥상 앞에서 나는 혼자 사랑타령을 하고 있었다.

‘사랑이 답이구나.’

내가 혼자 사랑을 논하는 동안, 어른들은 간만에 대화의 꽃을 피웠다. 서로 못보고 지낸 시간만큼 할 말도 많았다. 끝날 줄 모르는 수다는 역시 저녁상을 물리고, 과일을 먹으며 절정에 달했다. 초저녁부터 혼자 연신 떠들어대던 텔레비전이 간만에 재미있는 화두를 던졌다. 화면에는 이번 대선후보들의 얼굴이 나오고 있었다.

“누구는 이래서 안 되고, 저래서 안 되고. 누구는 어디 출신이라 성격이 어떻고, 누구는 공약이 맘에 안 든다.”

모두 한마디씩 보태며 유력한 세 후보에 대해 평가했다. 그런데 계속 듣고 있다 보니, 이야기가 뱅뱅 돌고 있는 느낌이었다. 대통령 자격 평가 기준이 모두 달라서였을까? 아니, 실은 기준이라고 할 것이 딱히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나마 공약보다는 과거 경력을 먼저 보겠다는 우선순위라도 있으면 다행이었다. 사관학교 생도인 내 동생은 말을 빨리 하거나 짧게 하는 후보를 선택하겠다고 했다. 사열을 빨리 끝내야 한다나. 그 말에 남자 어른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농담으로 던진 말이었지만, 왠지 나는 웃을 수가 없었다. 기업에서 신입사원 한 명을 뽑을 때도, 3차, 4차에 걸쳐 시험과 면접을 진행한다. 그런데 정작 우리가 대통령을 뽑을 때 그런 체계적이고 깐깐한 기준은 없었다. 연일 후보들과 관련하여 터지는 ‘뉴스’와 그 뉴스에서 오는 ‘이미지’가 우리의 판단을 좌우하는 듯 했다. 무엇보다도, 그러한 이미지가 시대의 요구, 그리고 나의 욕망과 맞아 떨어졌을 때, 우리는 그이와 흠뻑 사랑에 빠진다. 그이의 얼굴에 난 여드름자국도 사랑스러운 주근깨처럼 보인다. 그야말로 눈에 콩깍지가 쓰인다. 그런데 슬프게도 이것은 짝사랑이다.

2007년 12월 우리의 선택이 그러했다. 우리는 당시 이명박 후보가 선함이나 인간성, 정직, 청렴 등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를 선택했다. 30대에 최연소 CEO로 자수성가한 독종, 청계천, 버스중앙차로 등 가시적인 결과가 두드러졌던 야무진 행정가. 사람들은 BBK를 비롯한 여러 비리의혹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 그 당시 이명박이 가진 ‘경제 및 경영능력’에 관한 이미지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그는 우리에게 반드시 잘 살게 해주겠노라 장담했다. 그리고 우리는 다른 것이 어찌되었든, 일 하나는 끝내주게 ‘잘’하는 저이라면…… 나도 ‘잘’ 살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으로, 열렬히 그를 사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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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전 대선에서 선거유세에 나선 MB가 시민들을 향해 ‘사랑해요’ 하트 모양을 만들며 인사하고 있다.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잘’살고 있는가? 747이라는 환상적인 비전은 벌써 한참 전에 파쇄기로 들어가 드르륵 갈려 없어졌다. 대규모의 촛불집회와, 시위. 그리고 죽어나간 사람들. 대한문 앞의 쌍용차 분향소나, 연일 신문에 오르내리는 ‘자살’사건만 보아도, 지난 5년은 유난히 삶의 무게를 견뎌내지 못한 사람들이 많았다.

우리는 정말 잘 살고 있는 것일까?

슬로건은 곧 콤플렉스라고 한다. 현재 대선 후보들의 슬로건을 보면, 우리의 콤플렉스가 드러난다. 저녁이 없는 삶, 사람이 나중인 사회, 공평과 정의가 없어서 내 꿈이 이루어지기 힘든 나라. 우리는 지난 5년을 이렇게 회고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우리를 잘 살게 해주겠다고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우리는 지금 ‘잘’ 못살고 있다. 모두 눈 뜬 채로 속았다. 이명박 대통령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에게 말이다. 그가 말한 ‘우리’가 실제 우리일 것이라 착각했고, 자수성가한 저 사람, 저 반짝반짝 빛나는 사람을 찍으면 내 삶도 그렇게 되겠지 하는 환상에 빠졌다. 그리고 내 선택의 이유를 시대의 부름인 양 합리적 근거들을 붙여 포장했다. 개혁을 위해! 대한민국의 발전을 위해!

우리는 아직도 ‘잘’살고 싶다. 그렇다면 이제는 방점을 ‘잘’이 아니라 ‘살다’ 그 자체로 바꿔야 한다. 좋은 대학에 못 가도, 당장 취업에 실패해도, 늙어 능력이 없어도 ‘사는 것’이 당연해야 한다. ‘비관자살’처럼 말도 안 되는 일들이 횡행 하다면, 그 사회는 가치관부터 잘못되었다. 삶은 삶 자체로 아름다워야 하고 우리 스스로가 그렇게 느껴야 한다. 그러려면 우리는 존재 자체로 충분히 사랑 받고 있다고 느껴야 한다.

그래서 사랑이 답이다. 새 대통령은 반드시 사랑을 할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한다. 사랑의 그릇이 큰 사람이어야 한다. ‘내가 해봐서 아는데~’로 말문을 여는 사람은, 안 해본 일은 모른다. 아니 관심이 없다. 해보지 않고 겪어보지 않은 일일 지라도, 눈물을 흘릴 줄 아는 사람. 그런 공감의 능력이 있는 사람. 그래서 도저히 나서지 않고는 밤에 두 다리 뻗고 못 자는 그런 오지랖 넓은 사람이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 대통령의 오지랖은 소수의 ‘우리’가 아니라 5천만 국민 전체를 향해 있어야 한다. 그이의 주변에 그처럼 감수성 풍부한 이들이 많은지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사랑하는 사람들의 비판을 겸허히 수용하는 자세가 되어있는지도 중요하다. 자신의 방식대로 사랑을 주는 것에만 집착하는 것은 상대를 행복하게 할 수 없다.

어쩌다 마주친 김수영의 시 <누이야 장하고나>의 한 구절이 가슴 한 구석을 쿡 찌른다.

모르는 것 앞에는 엎드리는 것이 / 모르는 것 앞에는 무조건 숭배하는 것이 / 나의 습관이니까

우리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과거에 저 후보가 어떤 일을 했는지. 그게 그 당시엔 왜 문제였는지. 지금에 와서는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지금 이 공약은 얼마나 실현 가능성이 있는지. 이 사람이 얼마나 그 일을 해낼 수 있을지. 수학문제 풀듯이 답이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더욱 잘못된 감각에 판단을 맡겨왔는지도 모른다. 모르는 것 앞에서 습관처럼 엎드려 절하면서, 판단의 순간엔 눈에 콩깍지를 쓰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것이 인내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이번엔 반드시, 사랑에서 답을 찾아보자. 사람을 제대로 사랑할 줄 아는, 사랑의 그릇이 큰 사람인지 그런 감수성이 있는지. 즉 인권을 좀 아는 사람인지 보자는 것이다. 인권이 살아 있을 때, 바로 당신이 ‘잘’ 그리고 ‘살 수’있다. 사랑, 즉 인권 감수성은 대통령을 선택하는 모든 기준 가운데 가장 선명하고 옳다.

후보들의 삶의 이력을 보며, 공약을 보며 꼭 물어보자.

정말 나를 잘 살게 해줄 수 있나요? 가 아니라,
정말 나를 사랑하나요? 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