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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순 시장은 왜 노부부를 만나지 못했을까 (이상욱)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6-27 15:34
조회
292

이상욱/ 청년 칼럼니스트



18년이라는 시간은 한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 성인으로 성장해가는 긴 시간이다. 그 동안 누군가는 걸음마를 배우고, 말을 배우고,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하나의 인격으로 자라난다. 어느 시인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18년 정도의 시간이라면 그야말로 ‘한 세상이 오고 있는’ 무게를 갖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도 묵직한 시간을 길에서 싸워온 노부부가 있다. 성북구 안암동에서 대학생들이 생활하는 하숙집을 운영하면서 생계를 이어오던 어느 부부는, 어느 날 삶의 터전을 빼앗기는 일을 겪었다. 지역의 유지이자 건축사업가인 구의원 한 명이, 부부의 집이 있는 땅이 자신의 소유로 되어 있다면서 불법건축물을 철거해달라고 행정기관에 요청한 것이다. 노부부의 생계는 막막해졌다. 노부부는 하루아침에 집도 빼앗기고, 차가운 행정논리 앞에 원통함을 삼켜야만 하는 삶을 강요받게 됐다. 그리고 기나긴 18년간의 투쟁이 시작되었다.

18년 동안 노부부는 힘겨운 날들을 버텨 왔다. 구청과 시청 앞에서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외로운 투쟁을 벌여 왔다. 그 과정에서 뜻있는 학생들 몇이 지속적으로 연대해오고 있다. 하지만 성북구청의 말 바꾸기와 모르쇠, 서울시청의 무관심 속에서 노부부의 아픔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기란 난망해 보일 따름이다.

얼마 전, 할머니는 1년 전에 당선된 서울시장에게 문제의 해결을 청원하기 위하여 시청을 찾아갔다. 하지만 서울시장을 만나기란 쉽지 않았고, 노쇠한 할머니는 이윽고 혜화동에 있는 서울시장 관사 앞에서 하염없이 그를 기다렸다. 벌써 며칠 째, 해가 지면 퇴근하는 그를 만날 수 있을까 하여 늦은 밤까지 문 앞에서 기다리곤 했다. 학생들도 최대한 시간을 내어 할머니와 이야기를 나누며 관사 앞을 지켰다. 그러나 며칠 전 어느 날, 시장은 수위 아저씨를 통해 ‘만날 용의가 없다’는 말을 전해왔다.

관사 대문 구석에 쪼그려 앉으면 언뜻 발견하기도 쉽지 않은, 작은 체구의 할머니가 차가운 밤공기를 견디면서 기다린 결과는 겨우 그것이었다. 할머니가 전하려고 한 이야기는 구청과 시청의 공무원들이 그간의 행정적 실책을 숨기려고 사건의 해결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는 읍소에 다름없었다. 그리고 수많은 이들의 기대를 안고 당선된 서울시장이 그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처리해달라는 하소연이었다.

어려운 이야기도, 정치적으로 책임을 요구하는 일도 아니었건만 그 짧은 대화를 성의 있게 진행할 ‘용의’는 왜 없었던 것일까. 그 시각에 모 대선후보에게 퀵서비스로 핸드폰 케이스를 선물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다음날엔, 작년 서울시장 선거에서 대학생유세단으로 활동했던 자신이 부끄러워지기까지 했다.

물론 막중한 지위에 있는 분이, 시민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사연을 모두 경청하기란 어려운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매일매일 억울함을 호소하려 집 앞을 직접 찾아오는 사람에게 5분, 10분을 내어주기란 그다지도 어려운 일이었을까. 서울시장 그 분을 원망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밤공기보다 차갑게 느껴졌던 전언(傳言)은, 다른 누군가의 느낌을 공유하는 일의 진정성을 고민케 했다. 외로운 싸움을 계속해나가는 할머니의 눈물과, 그것을 대하는 서울시장의 태도는 그 사람의 진정성을 의심케 했다.

좋은 대학을 나온 박원순 시장은 시민운동을 오래 했지만 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에 비하여 훨씬 유복한 환경에서 생활한 분이다. 할머니가 하숙을 하면서 맺었던 학생들과의 인연을, 동네에서의 추억과 데모하는 학생들을 숨겨주던 그 마음을, 그 분은 알지 못할 것이다. 소박한 생활이 파괴되었을 때의 원통함과, 나랏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느끼는 허탈함을 온전히 받아들이지는 못할 것이다. 사람은 모두 자신의 그릇에서 밥과 국을 떠먹을 따름이다. 그렇기 때문에 타인의 슬픔을 공감하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 분은 노부부의 사연에 진심을 기울일 만큼 노력하지는 않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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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후보들의 지혜로운 정책들은 나름의 합리성을 담보할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진정성은
정치권력의 획득을 둘러싼 열정에 국한되는 협소한 성격을 쉽게 벗을 수 없다.
사진 출처 - 노컷뉴스


 

세간의 기대와 상찬을 모으고 있는 이 덕망 높은 분의 문제만은 아닐 것이다. 한 사람의 20대로서 매일매일 맞부딪히는 삭막한 일상, 이 노부부와 같이 주변에서 접할 수 있는 아픈 사연들, 여전히 생생하게 살아있는 사회의 사각지대는 우리 사회가 ‘진정성의 위기’에 놓여 있음을 웅변하고 있다. 그것은 전사회적인 공감의 빈곤이기도 하다. 옹색한 생활 속에 갇혀서 바쁘게 살아가는 생활인들의 가슴 속에 드넓은 공감의 영토를 확보하기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나 같은 20대들만 해도 당장 눈앞에 가로놓여 있는 야멸찬 교육환경과 청년실업에 대한 공포의 무게 때문에 ‘느낌이 없는’ 대학생활을 보내고 있다.

그리고 이 황량한 사회를 넘어서보려고 하는 이들의 노력 속에서도 다른 차원의 ‘진정성의 위기’가 발견되고 있다. 대선을 얼마 앞두고, 우리 사회의 황폐함을 치유하기 위한 이런저런 담론들이 쏟아져 나온다. 장삼이사들의 생활을 담보하라는 요구에 ‘경제민주화’ 논의가 나오는가 하면, 정치혐오에 물든 국민들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각종 ‘정치혁신’ 대책이 출시되는 형국이다. 그러나 정작 공감있는 사회를 필요로 하는 이들은 논의의 주인공이 되지 못하고 있다. 노부부 앞에 기다리고 있던 시장 관사의 높은 대문은 그러한 역설을 상징하는 광경일 것이다. 새로운 세상을 이야기하는 대선주자들의 열정은 아래로 흐르지 않는 못과도 같아 보인다.

오히려 불우한 이들의 너덜너덜한 삶에서 더 확실한 진심을 본다. 그것은 지금과는 다른 세상을 절실하게 원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근거하고 있을 것이다. 벌써 4년째 힘겹게 싸우고 있는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은 온몸으로 진심을 번져나가게 하고 있다. 서울시청이 보이는 단식농성장의 풍경은, 정리해고 반대투쟁을 하던 2009년 여름의 기억을 다시금 호출한다. 눈앞에서 뜯겨나가던 쌍용차 공장 앞 가족대책위원회 천막을 떠올린다. 공장이 함락되던 날, 전투경찰과 용역깡패들을 저지하려던 우리의 연약한 연대대오를 생각한다. 폭력투쟁을 통해서라도 저 억울한 사람들을 구해내려던 기이한 절박함과, 내 손에 들려 있던 끝내 쓰지 못한 짱돌을 기억한다.

그러한 기억들은 비로소 우리 모두가 나눌 수 있는 공감의 지반을 조금씩 넓혀나간다. 대선후보들의 지혜로운 정책들은 나름의 합리성을 담보할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진정성은 정치권력의 획득을 둘러싼 열정에 국한되는 협소한 성격을 쉽게 벗을 수 없다. 통치의 영역에 차마 다 담길 수 없는 아픈 진실이 아직 우리 사회에는 존재하고 있다. 그 인간적 진실에 조금씩 접근해가는 일은 몸으로 부딪히고 눈으로 목격한 아픔의 현장에 한 발짝씩 다가가는 일일 것이며, 현장에서 호흡한 공기는 오래도록 공감의 토대를 이루는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타인의 삶을 껴안고, 공동체의 힘겨움을 책임진다는 것은 역시 현실적 방책을 필요로 한다. 정치권력이 근본적으로 지향해야 하는 것은 ‘책임성’이며, 그것을 위해 각종의 방책을 고민해야 한다. 12월 선거를 앞둔 우리 사회의 양지에는 그러한 대안적 구상과 정책들이 범람한다.

하지만 문제의 정확한 해결을 지향하는 대책은, 사람 사는 세상에서는 대안의 한 짝일 뿐이다. 다른 한 짝은 어디까지나 뒤켠에서 이루어지는 고통의 공감과 슬픔의 공유에 있다. 삭막한 세상에서 힘겨운 싸움을 이어나가는 노부부에게 필요한 것은 확실한 행정적 처방이기도 하지만, 그분들의 응어리진 억울함을 조금이나마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일 것이다.

높은 대문을 열고 나와 더 아픈 마음, 더 낮은 곳을 정직하게 응시하는 순간에, 비로소 많은 삶을 지켜낼 수 있는 가장 정확한 방책도 떠올릴 수 있지 않을까. 이것이야말로 진정으로 타인의 아픔을 책임지는 자세이며, 새로운 미래를 열어가는 지름길이다. 결국 사랑하는 사람이 책임진다. 마음의 온도가 높은 사람이 책임진다. 서울시장 관사의 문이 오늘밤엔 활짝 열리기를 기대한다. 그리고 그 광경을 확인하기 위한 나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을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