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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나무 숲이 자라난 자리 (신종환)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6-28 13:42
조회
430

신종환/ 청년 칼럼니스트


841년 신라 48대왕인 경문왕은 즉위 후 별안간 귀가 당나귀처럼 길어졌다고 한다. 아무도 이 사실을 몰랐으나 왕의 감투를 만드는 복두장은 부득이하게 왕의 당나귀 귀를 보고 말았다. 경문왕은 복두장에게 자신의 귀가 당나귀와 같다는 것을 남에게 말하지 않을 것을 명하였다. 복두장은 명에 따라 평생 이를 비밀로 간직하다 죽기 전 도림사지 근처의 대숲에 들어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소리 지른다. 이후 그 대나무 숲에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소리가 들렸다는 것이 대나무 숲 설화이다.


SNS에서는 그 이름을 딴 ‘○○ 대나무 숲’ 이라는 이름의 커뮤니티가 유행처럼 생겨났다. 처음에는 ‘출판사 옆 대나무 숲’ ‘언론사 대나무 숲’ 등 여러 분야의 관계자들이 모이는 대나무 숲들이 열풍을 주도했다. 하지만 지금 단연 눈에 띄는 것은 페이스북에서 각 대학교의 커뮤니티 사이트 역할을 겸하는 ‘○○ 대학교 대나무 숲’이다. 대학교 커뮤니티의 주된 형태인 페이스북 ‘대나무 숲’은 익명을 보장하는 제보 시스템을 기반으로 글이 게시되고 실명 댓글이 달리는 방식으로 운용된다.


‘대나무 숲’이란 이름으로 운영되는 커뮤니티가 대학교에 한정되는 것은 아닐 텐데 유독 대학교의 커뮤니티로 기능하는 ‘대나무 숲’이 눈에 띄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작년 1월 중앙대는 청소 노동자들의 대자보와 이에 동조하는 대자보 일체에 대해 장당 100만 원을 내라는 간접강제신청을 법원에 제출했다. 두 달 전 서울여대 학보는 대자보에 관한 동문들의 비판 성명을 싣지 못해 백지학보를 발행했다. 앞서 나열한 사건들과 그 외의 대학 당국이 직·간접적으로 자행한 억압에 의해서라고 단언할 수는 없어도 무관하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여러 대학교의 페이스북 익명 커뮤니티를 통칭해서 ‘○○ 대학교 대나무 숲’으로 묶었지만 각 커뮤니티의 문화에 차이는 분명 존재한다. 그럼에도 그 다양한 커뮤니티들을 하나의 현상으로 묶어서 볼 수 있는 것은 ‘억압’과 ‘욕구’라는 공통된 요인이다. ‘억압’은 어느 곳에서는 대학 당국이 직접 행사하는 억압에서 구성원이 대학의 문화에서 느끼는 일상적인 억압까지 있을 것이다. 그중 아무래도 동성애 등 사회적으로 민감한 이슈나 구조적인 문제에 대한 의견제시 등이 자주 눈에 띄게 된다. 그러나 결국 모든 제보들은 털어놓지 않을 수 없는 욕구들이 만든 현상이다. 다만 욕구의 공·사적임과 비중에 따라 달라 보일 따름이다. 최근에 대나무 숲의 새로운 흐름인 ‘어둠의 대나무 숲’ 페이지 또한 좀 더 검열로부터 자유로운 제보를 특징으로 한다.


20150715web01.jpg몸이 없이 목소리만 오가는 대나무숲은 서로 관계를 맺기 쉽지 않은 단편적인 공간이다.
그 단편성이 앞으로는 어떻게 작용할까
사진 출처 - 산림청


앞서 열거한 대나무 숲의 특징들에 대해 무분별한 익명의 폭력을 우려하는 의견도 있고, 새로운 공론장의 가능성을 점치는 의견도 있다. 대나무 숲마다 차이는 있지만 폭력성과 공격성에 대한 대책을 강구하고 자정하려는 노력들이 보이고 비난 보다는 토론이 이루어지는 모습이 더 눈에 띤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기대를 갖고 지켜봐도 좋을 듯하다.


그러나, 긍정성과 부정성을 떠나 그 이름이 말하는 것처럼 대나무 숲은 말의 기회를 박탈당한 욕구들이 모인 곳이다. 긍정적인 면도 부정적인 면도 억압이 만들어낸 대안공간에서 발생했다. 대나무 숲이 활발해지는 까닭에는 건강한 문화를 만들려는 노력의 축적과 대나무 숲만의 장점도 있겠지만, 응어리져 있고 말할 길이 막혀있는 현상이 더 널리 일상화되고 있다는 뜻도 된다. 대나무 숲이 새로운 공론장으로써 자리할 수 있겠냐는 앞의 물음들에, 나는 절반의 동의를 표할 수 있다. 건설적인 의견교환의 가능성도 존재하고, 사적인 고민을 얘기했을 때, 위로와 동감으로 누군가에게 힘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앞서 말한 긍정성들은 오직 허공에의 외침으로서만 긍정적이다. 새로운 공론장이나 대안이 되기 위해서는 현실에 닿는 디딤돌이 하나쯤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대나무 숲의 긍정성 중에 아직 디딤돌의 역할을 할 징후는 보이지 않는다. 대나무 숲에 올라오는 제보들을 ‘외침’이라고 칭한다. ‘외침’들은 외쳐지고, 이내 사라진다.


사회에서 억압받는 일이 없을 수 없고, 그 억압들을 줄이는 것이 대나무 숲의 몫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기에 또한 대나무 숲의 기능 이상으로 기대를 갖고 대나무 숲에 기대와 관심을 표하는 것은 우려스럽다. 억압에 대한 물음의 꼬리를 물고 쌓이고 해결의 변증법의 토대로서의 대나무 숲이 가능할까. 구성원들의 의지와는 별개로 빠르고 유동적이며 다양한 제보들이 수시로 올라오는 구조의 대나무 숲이 그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숙성되지 못하는 짧은 논의와 위로들에 익숙해지고 더 의지하게 되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이 가시지 않는다.


신종환씨는 노동 인권에 관심을 갖고 활동하는 청년입니다.


이 글은 2015년 7월 15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