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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로 선정된 김태민, 이서하, 전예원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칼럼니스트를 위해 안동환(서울신문), 안영춘(한겨레), 우성규(국민일보), 기자가 멘토 역할을 맡아 전문적인 도움을 줍니다.

국가 없는 시대의 안전 (남소연)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6-28 13:37
조회
256

남소연/ 청년 칼럼니스트


중동의 낙타가 옮긴 질병이 요란하다. 병원은 물론이고 사람이 모일 양 싶은 곳-심지어 명동마저도-은 모조리 기피지역이 되었다. 약국과 편의점 등지에서 파는 손 소독제와 마스크는 이미 동난 지 오래다. 한국이 중동의 여러 나라를 제치고 발병국 2위라고 하니 의미 없는 소란은 아닐 듯싶다. 컨트롤타워 역할을 해야 할 정부는 책임을 떠넘기기 일쑤다. 한국의 청년들을 중동으로 다 보내라며, 중동으로의 국외 취업을 알선했던 정부는 ‘부재’했다. 언제나 그랬듯이 위기에서 한 발짝 물러난 관조자의 모습이다.


한편 치사율이 95%나 된다는 탄저균은 불현듯 한국으로 ‘배송’됐다. 발송지인 미국으로부터 살아있는 채로 날아온 것이다. 이 균을 대도시에 100kg만 살포해도 적게는 100만 명, 많게는 300만 명을 살상할 수 있다고 하니 새삼 섬찟하다. 심지어 한국정부는 미국 당국의 성명서 발표가 있은 후에야 너무나 손쉽게 위험물질이 국경을 넘나든다는 것을 알아챘다니 늑장도 이만하면 고질병이다. 모든 병원성 위험물질이 국내에 들어오면 질병관리본부의 통제를 받는 것이 원칙이나, 미군 측은 표본이 비활성화 상태인 줄 알았기에 사전에 알리지 않았다고 해명했다. 한국에 반입되는 물질의 위험성 판단은 전적으로 미국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불합리한 협정 탓에 미국은 언제나 당당하고, 한국의 정부는 여전히 ‘부재’한다.


국가는 수차례 제자리를 지키지 못했다. 세월호 참사는 또 어떠한가. 우리는 모두 배의 침몰을 생중계로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 사람이 있었다. 서서히 물 밑으로 사라져가는 지점이 늘어날수록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은 가슴속에 새겨진 낙인이다. 하지만 여전히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보호해야할 주체는 ‘부재’했다. 컨트롤타워인 수장의 행적은 묘연했고, 유가족에게 고개를 숙이는 대신 돈다발을 흔들었다.


더욱 암울한 사실은, 오늘의 한국을 휘어 감고 있는 불안이란 놈이, 지도자의 무능함이나 국민들의 정치에 대한 불신에서만 오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날선 표현이지만, 국가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이다. 국가라는 껍데기(형체)는 존재하고 있지만, 국가를 체감(본질)할 수 없는 시대. 프랑스 철학자 에티엔 발리바르의 말처럼, 책임은 지지 않으면서 통치하려 드는 이른바 ‘국가 없는 국가주의’다. 국민들에게는 갖가지 의무를 요구하면서도 권리에 대한 요구는 모른 체다. 어쩌면 도둑놈 심보 일는지도 모르겠다. 세금을 거둬들이고, 의무를 수행하지 않으면 강제력을 사용해 처벌하지만 정작 국가가 필요한 순간들에서는 어김없이 사라진다. 메르스는 병원 탓이고, 탄저균이 국내에 유입된 사실은 사고일 뿐이고, 세월호는 유병언 탓이다. 이렇게 책임을 덧씌우다 보면 국가의 혐의는 옅어진다.


국가의 유일한 목표이자 존재 이유는 국민을 보호하는 것이다. 비극은 신자유주의와 국가의 맞잡음으로부터 시작된다. 국가는 국민과의 약속을 하나둘 외면한다. 국가의 최대 임무인 안전 보장은 이제 더 이상 국가의 수중에 놓여있지 않고, 사회적 가치들은 시장의 숫자로만 존재한다. 시장의 영역에서 안전은 반드시 사수해야 할 가치가 아니다. 사실 신자유주의에서 (정신적)가치는 환대받지 못한다. 계산기를 두드려가면서 셈할 수 있는 (물질적)이익만이 신자유주의의 본령이다.


PYH2015060409670001300_P2.jpg메르스 여파로 한산한 명동 모습.
사진 출처 - 연합뉴스


메르스 사태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삼성서울병원의 응급실 이송요원은 메르스 증상을 앓고 있었으나 관리대상으로도 파악되지 못했다. 환자의 안전과 직결되는 병원의 업무는 간접고용된 직원에게 맡겨졌다. 병원의 외주화가 메르스를 키운 셈이라는 지적은 일견 타당한 듯하다. 몇 푼 아끼고자 하는 탐욕 속에 소중한 가치들이 소멸된 것이다. 안전 역시 비슷한 모양새다. 어떻게 안전할 수 있느냐 보다는, 적은 비용으로 최대의 안전을 만들어 내자는 무자비한 합리성이다.


우리가 느끼는 공포의 핵심은 위기의 순간, 국가가 외면한다는 사실이다. 세월호가 그랬고, 탄저균이 반입됐을 때도, 메르스가 확산됐을 때도 또다시 되풀이 됐다. 메르스가 사라지고, 박근혜 정권이 막을 내리면 안전할까. 다시금 그 빈자리를 어떤 위험이 차지할지 모르는 일이다. 국가는 자신들의 역할을 시장에 넘겨줬고, 시장은 이를 싼 값에 처리했다. 이들의 짬짜미 속에서 소외된 것은 사람들이다.


우리가 되찾아야 할 국가는 국민에 대해 책임지는 국가다. 안전과 생명처럼 시장에 휘둘렸을 때 부작용이 심각한 몇몇 영역은 국가의 수중에 남겨두자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성남시의 공공 의료 확충 정책이 눈에 띈다. 성남시는 적자로 인해 병원들이 철수한 자리에 시립병원을 건립하고, 가정마다 주치의를 두는 의료서비스 정책인 국민 주치의 제도를 도입하려 한다. 적어도 의료부분에는 경제적 논리로 판단하지 않고, 인간으로서 당연히 누려야 하는 권리들을 책임지고 보장해주자는 것이다.


국가 역시 자신들이 제자리에 있음을, 즉 국민을 책임지고 있음을 보여줘야 한다. 시장에게 넘겨 준 권력을 다시금 찾아와야 하는 곳은 비단 의료영역뿐만이 아니다. 위기는 사고로, 질병으로 이어졌지만 끊임없이 발생할 것이고, 국가의 해결을 필요로 한다. 국민들은 국가의 존재에 대해 끊임없이 묻고 있다. 희망의 시작은 국가가 책임을 지는 순간부터다.


남소연씨는 소수자와 약자를 대하는 언론의 문제점을 느끼고 민주언론시민연합에서 신문 모니터링을 하고 있습니다.


이 글은 2015년 7월 8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