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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로 선정된 김태민, 이서하, 전예원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칼럼니스트를 위해 안동환(서울신문), 안영춘(한겨레), 우성규(국민일보), 기자가 멘토 역할을 맡아 전문적인 도움을 줍니다.

고독한 청년 (안상현)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6-28 13:36
조회
282

안상현/ 청년 칼럼니스트


중국 당나라 시대 형법인 <당률>에는 이런 문구가 있다. ‘고독(蠱毒)’을 만들거나 기르는 자는 처벌한다(賊盜律, 造畜蠱毒). 조선시대의 법률에도 비슷한 내용이 있다. 도대체 고독이 뭐 길래 처벌까지 하는 걸까. 고독 자체는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가상의 독이다. 세 마리 독충(蟲)을 하나의 항아리(皿)에 담아 마지막 한 마리가 남을 때까지 싸우게 한다. 살아남은 벌레는 이전보다 더 치명적인 독을 품게 되는데 벌레를 고(蠱)라 하고 그 독을 고독이라 한다. 설화에 가까운 오래된 이야기다. 하지만 상상 속 이야기로만 즐길 순 없다. 지금 이 사회에서 고독이 만들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네 청년들 이야기다.


얼마 전 한 지방대학교 축제가 논란이 된 적이 있다. 축제무대 앞에 총학생회 간부들을 위한 VIP석을 따로 마련했기 때문이다. 총학생회의 특권의식과 일반 학우들에 대한 차별이 문제였다. 하지만 청년들이 바라본 지점은 달랐다. ‘역시 지잡대’, ‘공부도 못하는 것들이 머리에 X만 차서는...’식의 말이 들려온다. 마치 악폐습의 원인이 입시성적인 것 같았다. 이런 인격비하에 가까운 발언에도 해당 대학 출신이라는 사람들은 그저 부끄러워만 한다. 간혹 여기에 반발하는 이들도 있지만 그들에게 돌아가는 건 ‘노력하지 않는 자들의 불평불만’이나 ‘실패자의 변명’, ‘열등감’ 같은 낙인이다.


2015071web01.jpg한 유명 웹툰에서 모 대학의 ‘VIP석 사건’을 풍자했다. 그에 관한 ‘BEST’ 댓글들
사진 출처 - 네이버 웹툰 (2015년 6월 20일자 캡처)


같은 대학, 같은 전공 내에서도 비슷한 일들은 빈번했다. 처음 대학을 들어갔을 때 동기로부터 받은 질문은 ‘정시 출신이냐?’였다. 당시 정시 출신은 성골에 가까웠다. 지균충, 기균충이라는 말도 있었다. 서울 지역 내 각 대학 인터넷 커뮤니티에선 지역균형선발전형과 기회균등선발전형으로 입학한 학생들을 벌레로 묘사했다. 지방캠퍼스, 전과, 편입 등 우리는 같은 대학, 같은 전공 안에서도 출신을 구분하며 서로의 우월감과 열등감을 확인했다.


이런 차별이 어느 순간부터 너무 당당해졌다. “초·중·고 12년 간 악써서 공부했는데 그 정도 차별은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실제 보면 능력의 차이가 있어요.” 등 차별의식의 뒷배에는 ‘능력주의’가 있었다. 우리는 차별이 ‘능력과 노력에 따른 정당한 대우’라고 여겼다. 자신보다 못한 조건의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끼더라도 능력의 우열을 가르는 것만큼은 확고했다. 능력과 노력에 있어 ‘옆’은 없다. 오직 ‘위’, ‘아래’만 있을 뿐. 위에 있는 자는 상위 포식자처럼, 아래에 있는 자는 먹잇감처럼 행동한다. 먹잇감이라 생각되면 자신도 모르게 입맛을 다시고 상위포식자라 여겨지면 천적을 만난 것처럼 위축된다. 먹이사슬에 순종하는 청년들은 고독을 긍정한다. 되레 독충이 더 강한 독을 갖는 게 뭐가 문제냐며 반문한다.


20150701web02.jpg청년의 실업률과 고용률은 서로 반대되는 추세다.
사진 출처: 통계청 「경제활동인구조사」


강해져 가는 능력주의는 정말 정당할까. 노력해서 온전히 능력을 갖출 수 있다면, 능력과 성공의 관계가 1:1에 가깝다면 그럴지 모른다. 하지만 점점 치열해지는 경쟁사회가 능력주의와 가까워 보이진 않는다. 경제협력개발기구 보고서(OECD Skills Outlook, 2015)에 따르면 우리나라 청년들 중 취업자와 무직자 간 능력 차이는 1% 이하로 회원국 중 가장 낮았다. 이대로 낙오자들의 평균능력이 계속 높아진다면 결국 마주하는 건 누구도 성공하지 못하는 세상, 능력만으론 성공할 수 없는 세상일 것이다. 그만큼 양극화로 인한 사회적 제약도 선명해지고 있다. 청년들의 교육과 임금수준이 부모의 교육과 임금수준에 비례한다는 연구결과들은 이제 식상할 정도다. 성공과 실패에 개인의 몫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경쟁이 치열해질수록 개인의 몫이 줄어든다는 의미다.


능력이 더 이상 성공의 충분조건이 아니라면 왜 우리는 노예 검투사마냥 서로를 공격하면서 살아남아야 하는가. 최후의 승자에게 수여되는 명예와 재물이 얼핏 정당해 보일지 모른다. 관중이 보내는 환호에 중독될 수도 있다. 하지만 영웅 같던 챔피언마저 결국 노예에 불과하다면, 우리가 겨루는 경쟁이 최고의 노예를 가리는 시합에 불과하다면 고독한 승자가 되는 게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안상현씨는 다문화 사회에 관심을 갖고 문제점을 고민하는 청년입니다.


이 글은 2015년 7월 1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