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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무자를 위한 변명 (정원)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6-26 22:20
조회
259

정원/ 인권연대 운영위원



한ㆍ미 쇠고기 협상 과정에서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는 정부측 해명을 전혀 신뢰할 수 없게 만드는 일이 생겼다. 정부 스스로, 30개월 이상의 소를 수입하는 전제조건이 된 미국의 강화된 사료조치 내용을 오역했다고 인정한 것이다. 100분 토론에서 문제를 제기한 송기호 변호사에게 그가 오히려 사료조치를 오해한 것이라고 몰아붙이던 정부측 실무자의 기백은 온데간데 없다. 그도 그럴 것이 ‘unless’(~가 아니라면)를 ‘even though’(~에도 불구하고)로 오역했다는 것이니 변명할 염치가 없을 것이다.

이를 두고 인터넷 ‘괴담유포자’들은 영어몰입교육의 당위성을 국민에게 설득하기 위한 이명박 정부의 고도의 전략이라는 음모론까지 제기하고 있다. 국민의 생명ㆍ건강과 직결되는 사안을 다루는 정부 관계자들의 영어실력이 이 정도이니 영어몰입교육을 당장 실시해야 한다는 우려가 생길 만도 하다.

하지만 이 문제는 영어실력과는 관계가 없다. 협상단에 포함된 사람 중에 정상적인 상황에서 ‘unless’와 ‘even though’를 착각할 사람은 없다. 협상단 멤버들은 이 문제를 최초로 제기한 송기호 변호사보다 아마도 영어를 더 잘할 것이다. 다만 그들은 자신들이 믿고 싶은 대로 믿었을 뿐이고, 송기호 변호사는 사안을 있는 그대로 투명하게 바라보려고 하는 마음가짐을 갖고 있었을 뿐이다. 또 송기호 변호사가 그 동안 다른 사람들이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던 국제통상법 문제에 대하여 꾸준히 관심을 가지고 연구해 온 것이 적절한 문제제기의 바탕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오역 사건은 영어교육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영어라는 도구를 이용해 전달할 수 있는 콘텐츠를 키워주는 교육임을 여실히 보여준 사례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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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의 송기호 변호사(오른쪽)가 지난 11일 서울 서초동 민변
사무실에서 열린 긴급 기자회견에서 미국의 동물성 사료금지조치의 문제점을 설명하고 있다.
사진 출처 - 경향신문



  오역 사건에서 더 실망스러운 것은 이에 대한 청와대의 해명이었다.

‘언론친화적’(press friendly)이라는 용어의 의미를 여러 사건들을 통해 몸소 설명해 주고 있는 이동관 대변인은 오역과 관련해 “본질과는 관련없는 우리측의 실무적인 실수”라고 해명했다. 실무적인 실수라는 것이 무엇일까. 국립국어원에서 발간한 표준국어대사전을 찾아보니 ‘실무(實務)’란 “실제의 업무나 사무”를 가리키는 말이다. 도대체 정부가 해야 하는 일 중에서 ‘실무’가 아닌 것이 어디 있는가. 그러기에 이명박 정부는 내각도 ‘실무형 내각’으로 구성하지 않았던가. 솔직히 실수라고 인정할 것이지 거기에 왜 ‘실무’라는 단어를 갖다 붙이는가. 그래서 곰곰히 생각해 보니 ‘실무’ 내지 ‘실무자’라는 말은 우리나라에서 주로 “내 실수가 아니고 아랫사람이 실수한 것입니다”라는 문맥에서 주로 쓰였다.

최근의 사례만 보아도 그렇다. 이영희 노동부장관은 내정자 시절 허위경력을 국회에 제출한 사실이 드러나자 실무자의 실수라고 했고, 창조한국당 이한정 비례대표 당선자도 선거공보에 인쇄된 허위경력은 실무자 착오로 기재된 것이라고 하였으며, 이춘호 여성부 장관 내정자가 재산을 축소신고한 것도 실무자 실수였다. 실무자가 실수를 저지른 사례는 수도 없이 많다. 도대체 우리나라는 왜 윗사람들은 실수한 것이 없고, 실무자들만 늘 일을 저지를까.

그 답은 2008년 OECD 통계연보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통계연보에 따르면 2006년 우리나라의 연간근로시간은 2005년보다 3시간 늘어나 2357시간을 기록했다. OECD 평균 1777시간을 크게 웃도는 수치다. 이렇게 일을 많이 하니 실무자들이 실수를 저지를 수 밖에 없을 터이다. 앞으로는 실무자들 탓으로 돌리지 말고 본인 탓을 하는 높은 분들을 많이 보았으면 한다.

 

정 원 위원은 변호사로 활동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