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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과 ‘돈’의 혼돈, 그리고 인문학 (김 녕)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6-29 22:08
조회
241

김 녕/ 인권연대 운영위원



“37살에 대기업 부장이 된 친구는 1억 원 연봉계약을 마친 날 자랑스레 저녁을 샀다. 서울 강남의 집은 나날이 가격이 오르고 있었고, 맏딸은 전국 단위 영어경시대회에서 메달을 땄다고 했다. 입가에는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단둘이 앉은 3차의 호프집에서, 그는 축축한 눈으로 이렇게 물었다. ‘근데, 산다는 게 뭐냐? 내가 왜 사는지를 모르겠다. 돈을 위해서? 딸을 위해서?’ 말을 마친 그는 급하게 취해갔다.” 이 글은 “CEO가 인문학에 빠진 날”이라는 제목의 어느 잡지(2009년 4월 20일자)의 첫 부분이다. ‘돈’만 추구하다가 ‘혼’을 잃는 건 아닌가 싶은 두려움과 ‘잘 나가는 삶’의 척박함, 그런 깨달음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싶다.

이 기사를 보며 대학시절에 필자의 친구들이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당시에 참으로 잘 나가던 신문방송학과 학생인 친구가 철학과 학생인 다른 친구에게 “넌 왜 철학과를 택했니?”라고 묻자 들려온 답인즉슨, “넌 왜 사니?”였다. 이삼십 년이 지난 지금의 대학에서도 문학, 사학, 철학(문·사·철)로 대표되는 인문학 과목들은 학생 수가 아주 적거나 폐강이 속출하는 반면, 경영학 과목들은 200명 가까운 대형 강의가 늘고 있다.

우리 사회는 기업이 지배하는, 기업 중심 사회로 들어선 지 이미 오래이며, 기업 중심의 경제 정책과 기업 문화는 대중들의 민생고와 의식 구조 뿐 아니라 대학 교육까지 흔들고 있다. 대학 교육이 지녀야 할 ‘혼’과 대학 교육의 뒤를 받치는 ‘돈’이 혼돈되고 있는 형국이다. 대학 고유의 교육이념과 교육 철학에 대한 이해가 턱없이 부족한 재계 인물이 대학총장으로 영입되어 기업식으로 효율을 강조하고, 기업이 요구하는 맞춤형 인재 양성을 목표로 해야 대학이 경쟁력이 있다는 식의 척박한 혹은 천박한 철학을 내세우고 있다. 헤르만 헤세, 쌩 떽쥐페리 등의 작품이 젊은 가슴들에게 희망과 삶의 의미를 잔잔히 전해주던 시절에는 적어도 ‘돈’이 전부는 아니었다. ‘혼’이 있었고, 배움과 깨우침이 있었고, 스승이 있었다. 민주주의에 대한 ‘타는 목마름’도 있었다. 허나, 지금은? ‘혼’에 대한 목마름이라도 있는가?

사실상 보수와 극우만을 대표하는 정치적 대표체제 속에서 서민과 노동계급의 이익 및 요구는 대표되지 못하고 좌절될 뿐이며, 노동을 천대하는 사회분위기가 만들어져, 부동산 투기나 재테크, 펀드 관리와 같은, 생산적 노동을 동반하지 않는 그야말로 돈벌이 그 자체에 우리 사회가 열병처럼 휘말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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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15일 서울대 신양학술정보관에서 기업인 등
미래지도자 인문학 과정에 참여한 수강생들 모습.
사진 출처 - 한겨레21



   이런 가운데 무엇이 ‘정의’이며 무엇에 저항할 것인가 하는, 1980년대 민주화운동이 제기한 문제의식과 ‘사회정의’ 관련 문제의식은 찾아보기 힘들어지며, ‘효율성’이라는 ‘무규범적 기술합리성의 논리’가 사회 지도층 및 정치인의 언어를 지배한다. 아울러, 이른바 ‘명품’에 대한 맹목적 선호, 외모지상주의가 처절한 생존경쟁, 출세경쟁과 함께 두드러지며, “부자 되세요”라는 터무니없는 인사가 유행한다. 이러한 사회에서 인간 내면은 돌본 지 이미 오래되어 극도로 황폐하다. 아울러, 대학사회는 더 이상 비판적 지성의 터전이 아니라 사회입시 학원같이 변했고, 지식인들, 학자들 중에서 안락한 보수주의에 빠져 있지 않은 참여적 지성인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어느 진보적인 원로 정치학자가 이렇게 한탄하는 우리 사회에도 희망이 있을까?

다시, 이 글의 첫 부분에서 언급한 인문학 강좌로 되돌아가보자. 중견기업의 대표이사, 대기업·중견기업의 임원·간부, 현직 판사, 병원장 등이 서울대 인문대학의 미래지도자 인문학 과정에 모여 스스로에게 ‘왜 살까?’ 질문하며 이제라도 ‘잘 먹고 잘 살자’가 아닌 ‘제대로 살자’고 스스로에게 외치는 자리가 이번 달에 시작되어 성황리에 열리고 있다는 그 기사에 따르면, “술과 골프, 부동산 이야기를 바꾸고 싶었다,” “정신적 삶이 없으니 가난하다”며 인간이 빵만으로는 살 수가 없음을 새삼 느끼기에 지금껏 돈 안 되는 공부라서 쓸 데 없다고만 여겨진 인문학이 바야흐로 성황을 이루는 거란다. 커다란 조직이나 기업일수록, 그리고 최고위 의사결정권자일수록 최종 결정을 내려야 할 순간엔 외롭고 두렵기조차 하며, 그러한 결정을 좌우하는 것, 혹은 좌우해야 하는 것은 경영학적인 지식이 아니라 그 사람의 가치관, 세계관, 인생관, 인간관, 혹은 이념, 신념, 신앙이라 한다. 그래서 세계적 기업의 성공한 CEO들 중에는 경영학 전공자보다 인문학 내지 사회과학 전공자가 더 많다고 한다.

위의 기사는 ‘가난한 자들을 위한 인문학 강의’라는 별칭을 갖고 있는 ‘클레멘트 코스’의 유래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미국의 언론인 얼 쇼리스가 지난 1995년 뉴욕의 한 교도소에서 20대 초반의 한 여죄수를 인터뷰했을 때의 일이다. 살인 혐의로 8년째 복역 중이던 여죄수는 ‘사람들이 왜 가난하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시내 중심가 사람들이 누리고 있는 정신적 삶이 없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정신적 삶이 뭐냐’고 되묻는 질문에 그녀는 ‘극장과 연주회, 박물관, 강연 같은 거죠. 그냥 인문학이오’라고 답했다. 그 말에 깨달음을 얻은 얼 쇼리스는 곧바로 뉴욕의 노숙자와 알코올 중독자들을 위한 인문학 강의를 시작했다.” “클레멘트 코스의 첫 수료자 17명 중 2명이 의사, 1명은 간호사가 됐다. 그들은 그렇게 삶을 되찾았다”고 한다. 인권실천시민연대도 이러한 소신을 갖고 재소자 대상의 인문학 강좌를 열어오고 있으며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이렇듯, 인문학은 사람을 되살린다. ‘고기를 잡아주는 것’이 아니라 ‘고기 잡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 교육이라지만, 더 나은 교육은 학생들로 하여금 ‘바다를 사랑하게 만드는 것’이라 한다. 각자가 자기의 인생을 사랑하고 ‘삶’이라는 큰 바다를 아직 항해할 수 있음을 고마워하게 된다면, 그리고, 정신적 세계에서 맛보는 기쁨과 재미가 얼마나 쏠쏠한지 깨달아 퇴근 후에 종종 서점을 들르는 게 일과가 된다면, 자기의 ‘혼’과 자주 만나 친해지리라. 극도로 황폐해진 마음에 물을 대기 시작하리라.

‘정신’이 황폐해진 자는 ‘인권’을 알 수도 존중할 수도 없다. 현 시기에 더욱 척박해진 인권 현실은 이 시대 지도층 인사들의 ‘정신적 황폐’에 연유하는 바 크다. 이 글 맨 앞처럼, 그들이 축축한 눈으로 “근데, 정치인이라는 게, 사업가라는 게, 가방 끈 길다는 게 다 뭐냐? 내가 왜 사는지를 모르겠다”며 급하게 술에라도 취해갔으면 좋겠다. 그러한 인문학적 목마름과 방황을 거쳐 풍요로워진 정신 속에서 ‘인간’이 왜 그리 귀한 것인지, 왜 ‘인간’이 곧 ‘하늘’인지 새로이 터득하길 기대한다. 자, 건배!

 

김 녕 위원은 현재 서강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