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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들이 용산으로 간 까닭은 (서상덕 위원)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7-13 16:02
조회
177

서상덕/ 인권연대 운영위원



서울 명동성당 맞은편에는 세칭 ‘판넬골목’이라 불리는 좁은 골목이 있다. 차 한대가 근근이 드나들 수 있는 100미터 남짓한 길이의 골목인데, 한때 이 골목 초입에서 끝이 나는 지점까지 대부분의 담벼락에는 마이클 잭슨, 제임스 딘, 오드리 헵번, 올리비아 핫세, 소피 마르소 등 내로라하는 월드스타 사진부터 그리스도교 성화, 이발소에나 걸림직한 풍경 사진 등 다양한 그림들이 액자에 담겨 걸려 소박하지만 인상적인 풍경을 연출해냈다. 지금은 표구하는 가게는 모조리 사라지고 술집과 밥집들만이 자리를 대신하고 있지만 이름은 여전히 판넬골목이다.

이강서 신부(천주교 서울대교구)를 처음 만난 곳도 판넬골목에 위치한 한 허름한 주점에서였다. 내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술이 몇 순배 돈 후 군종장교 전역을 앞둔 그가 풀어낸 교회에 대한 비전이나 삶에 대한 진지함이 꽤나 인상적으로 다가왔던 것 같다.

이 신부를 다시 만난 것은 몇 년인가 지난 후 당시 출입처로 드나들던 서울대교구 빈민사목위원회에서였다. 속으로 ‘그럼 그렇지’ 하는 탄성을 질렀던 기억이 지금도 새롭다. 빈민사목위원회는 이름에서도 드러나듯 가난한 이들 가운데서 함께하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천주교 서울대교구의 공식 조직이다.

몇 년이나 알고 지내왔는지 정확한 기억은 없지만, 이 신부의 활동이 늘 열성적이면서도 인간적으로 다가왔던 기억만은 뚜렷하다. 그런 그를 용산 참사 현장에서 다시 만날 수 있었다. 그가 그 곳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다시 한 번 무릎을 쳤다. ‘그럼 그렇지.’

알려진 대로 이제 용산은 대표적인 ‘국민’ 전자상가로서의 이미지를 비롯해 미군기지, 호남선 기점, 쪽방촌, 국립박물관 등 수많은 이미지 속에 ‘참사 현장’이라는 새로운 이미지를 더하게 됐다.

입동을 지내며 겨울의 초입을 넘어선 어느 날 바람이 숭숭 통하는 용산거리 한쪽에 친 천막에서 만난 이 신부는 생각대로 따뜻함을 잃지 않고 있었다. 경찰들에 밀려 찢기고 쓰러졌을 때도 그 특유의 따뜻함으로 냉정을 잃지 않았던 그였다. 그런 그에게 내 물음은 조금은 당혹스러울 수도 있는 것이었는데 결국은 오히려 내가 당황하고 말았다.

“왜 다른 사람도 아닌 신부들이 꼭 그 자리에 있어야만 하는가?”

신부들이 용산을 지키고 있는 현재의 핵심을 찌르면서도 교회 안팎에서 적잖이 들리는 질문들의 요지였다. 이 신부는 “순교를 해야만 할 상황이라면 다른 사람이 하는 걸 보고, 누구의 허락을 받고 할 것이냐”는 답을 돌려주었다. 속이 뚫리는 듯 한 느낌이 가슴을 뿌듯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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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서 신부는 ‘용산 참사’가 일어난 지 300일이 되도록 누구 하나 나서서 책임 있는 사과
한마디 없는 모습에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사진 출처 - 가톨릭신문


“어떤 삶을 선택하는가 하는 것은 어떤 종교, 어떤 지위에 있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양심에 따라 실존적 결단을 하는 문제입니다.”

4, 50년 넘게 신앙생활을 했다는 신자들이나 타 종교인들이 내게 자주 하는 질문 가운데 하나가 “왜 하필 ‘또’ 신부들이냐?”는 거였다. 이러한 물음에 이 신부는 “얼마만큼 하면 충분히 기도했다고 할 수 있습니까, 얼마나 신앙생활을 하면 충분히 했다고 할 수 있습니까”하는 물음을 되돌려 주었다.

200일 넘게 용산 현장에서 참사 유가족들과 함께 지내며 나까지 38번째 언론 인터뷰를 한다는 이 신부, ‘시간의 무게’를 누구 못지않게 무겁게 느낄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는 그였지만 시간에 대한 기준은 달랐다.

“믿음에도 다양한 편차가 존재합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신자와 세례를 준비하는 예비신자로 곧잘 나눕니다. 그러나 ‘신자’와 ‘예비신자’는 세례로 구분되는 게 아니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계명을 하느님의 기준에 따라 사느냐 아니냐가 기준입니다. 하느님 이름으로 모였지만 하느님의 기준이 아니라 세속적 시선만을 유지한 채 충분히 영글지 못한 신앙을 지닌 채 살아간다면 아무리 신앙생활을 오래한다 해도 그것이 신앙 성숙의 지표가 될 수 없습니다.”

속이 후련해졌다. 대화가 깊어지면서 이 신부의 목소리에 조금씩 떨림이 실렸다. 눌러 왔던 생각들이 조금씩 고개를 드는 모양이었다.

“이제 곧 참사가 일어난 지 300일이 되고 계절이 네 번 바뀌는데, 누구 하나 나서 책임 있는 사과 한마디 없는 이 모습이 과연 이성적이고 올바른 것이라 할 수 있을까요. 그런 커다란 부조리는 바라보지 못하고 남의 티끌만 눈에 띈다면 그 또한 잘못된 것이 아닐까요.”

한 번이라도 용산 참사 현장에 발걸음을 한 1000명이 넘는 신부들, 그들은 우리 시대 헐벗고 굶주리며 병들고 나그네 된 이들을 찾고 있음을 몸으로 보여주고 있는 듯했다.


서상덕 위원은 현재 가톨릭 신문사에 재직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