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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판결 이야기(도재형 위원)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7-14 09:53
조회
197

도재형/ 인권연대 운영위원



법학자의 책무 중 하나는 현실 법률문제에 대해 내려지는 법원의 판결을 살펴보고 비판하는 일입니다. 그 목적은 좀 더 나은 판례가 정립되도록 하기 위함이고, 따라서 법학자가 구체적 판결에 관해 칭찬하는 것은 흔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저는 얼마 전 대법원이 비정규 근로자에 관해 좋은 판결을 선고한 것과 관련하여 칭찬을 하려고 합니다.

같은 사업장에서 근무하는 정규직 근로자와 비정규 근로자 사이에서조차 임금이나 복지·고용 등에서 차별이 있다는 것은 이제 우리 사회의 구성원 대부분이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많은 젊은이들은 비정규 근로자로 자신의 직업 생활을 시작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공무원 시험 준비에 몇 년을 소비하곤 합니다. 우리 사회에서 정규직 근로자가 되지 못한다는 것은 자신의 노동력의 가치인 임금액이 낮아지고 그 지급 기간조차 짧아진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임금 외에 특별한 사회보장적 기반이 없는 우리 사회에서 이는 노후를 보장받지 못한다는 의미로 다가오게 됩니다.

이런 차별이 우리 사회에 널리 퍼지게 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기업의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 정책입니다. 1990년대 이후 기업들은 노동력에 대한 보상을 줄였고, 정규직 인원을 삭감하고 비정규 근로를 확대하였습니다. 결국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의 차별이 확대된 1차적 원인은 기업에게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기업이 이런 사회적 양극화에 대해 모든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기업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정부가 그것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권장하였기 때문입니다. 외환위기 당시 우리 정부는 인원을 삭감하는 구조조정 방식을 적극 권장하였고, 그 스스로도 공공 부문 근로자의 약 30%를 삭감하는 방식으로 모범을 보였었습니다.

법원 역시 기업의 구조조정 정책에 동조하고 지원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1990년대 초 이후 약 20년 동안 법원은 비정규 근로자를 사법적 보호 범위에서 배제하는 판례를 만들었습니다. 저는 당시 법원의 모습을 보면서 이따금씩 “법리(法理)라는 안대(眼帶)를 스스로 끼고선 현실 문제를 보지 않으려고 노력한 시기”였다고 생각하곤 하였습니다.

다행히 2008년 이후부터 비정규 근로에 대한 대법원의 태도가 변화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른바 “사내하청 대법원 판결 3부작”이 그것입니다. 그리고 7월 22일 대법원은 현대자동차의 사내하청 근로자 관련 판결에서 더욱 분명하게 비정규 근로자를 보호하는 입장을 밝혔습니다(대법원 2010. 7. 22. 선고 2008두4367 판결).

이 판결에서 대법원은 사내하청 근로자가 자동 흐름 방식의 컨베이어 벨트에서 일하는 점, 본사가 내려준 작업지시서에 따르는 점, 본사가 근로자의 근태를 파악하는 점 등 고용의 형식보다 실질을 관찰하여 현대자동차가 이들에 대한 노무관리를 하고 있다는 점을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현대자동차가 사내하청 근로자에 대한 노무관리를 실질적으로 행한 이상 이들과 현대자동차 사이에는, 노동법적 보호가 배제되는 도급 관계가 아니라, 파견근로 관계가 성립하고 사내하청 근로자들은 파견법에 따른 보호를 받을 수 있다고 판단하였습니다. 이 판결의 의미를 평가하자면, 대법원은 쓰고 있던 안대(眼帶)를 풀고 스스로의 눈으로 현실을 바라보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노력하기 시작하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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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2일 대법원은 현대자동차의 사내하청 근로자 관련 판결에서 비정규 근로자를 보호하는
입장을 밝혔습니다.사진은 현대차 울산공장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얼마 전 저는 외교부의 고위층이 젊은이들의 투표 행태를 비난하였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야당에 대한 투표를 친북행위로 평가한 그 단순함을 별론으로 한다면, 그 분의 말씀이 맞는 부분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민주주의는 투쟁을 통해 획득하고 지켜져 왔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분은, 민주적 체제를 지키기 위하여 필요한, 한 가지를 간과하고 있습니다. 역사를 통해 알 수 있듯이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는 적대감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즉 시민이 자신의 민주적 체제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전력을 다할 때 민주주의는 지켜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민주주의 제도가 건강한 시민을 육성하고 보호하여야 합니다. 이 점에서 대법원의 이번 판결은 우리 사회가 그와 같은, 좀 더 나은, 민주적 체제를 가질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합니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비정규 근로자 등 사회안전망에서 배제된 자들에 대한 보호를 통해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 논의가 활발해지기를 희망합니다. 정부와 법원, 정당 그리고 시민사회가 계속 노력한다면, 얼마든지 의미 있는 개선 방안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시민들이 자신의 소질에 맞는 직장에서 열심히 일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생활하고 노후를 보장받는 좋은 사회, 그리고 모든 시민들이 그 체제를 지키려고 하는 민주주의를 만들 수 있을 겁니다.
참고) “사내하청 대법원 판결 3부작” - 현대미포조선 사건(대법원 2008. 7. 10. 선고 2005다75088 판결), 예스코 사건(대법원 2009. 9. 18. 선고 2007두22320 판결), 현대중공업 사건(2010. 3. 25. 선고 2007두8881 판결).

도재형 위원은 현재 이화여대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