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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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산책’은 각계 전문가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수요산책’에는 강대중(서울대학교 교육학과 교수), 도재형(이화여자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박록삼(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박상경(인권연대 회원), 염운옥(경희대 글로컬역사문화연구소 교수), 윤동호(국민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이동우(변호사), 이윤(경찰관), 이재환(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책임관), 장은주(영산대학교 성심교양대학 교수),  조광제(철학아카데미 대표)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조광제/ 철학아카데미 대표   1 정치적 에포케  정치적 에포케 즉 판단중지는 기본적으로 법적·제도적인 체계로서의 정치를 대상으로 한다. 그리하여 그 바탕에서 작동하는 근원적인 사태를 발견·포착하고자 한다. 정치적 에포케를 하고 나면, 민주주의는 단지 법적인 제도로만 작동하는 게 아님이 드러난다. 말하자면 민주주의는 국가 형성의 문제만이 아님이 드러난다. 민주주의는 국가 이전에 생활세계에 뿌리를 두고 있음이 드러난다. 이때 민주주의는 기본적으로 나와 타인과의 관계, 즉 사람들이 서로에게 어떻게 나타나는가? 하는 문제로 환원된다. 우리의 대의민주주의 정치가 국가 형성을 위해 헌법을 통해 규정한 결과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직접 민주주의를 실행하는 광장의 정치는 이러한 대의민주주의 정치에 대한 예외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이를 정치적 에포케에 연결해 말하면, 광장 정치의 현상은 정치적 에포케를 생각이 아니라 직접 행동을 통해 실현함으로써 드러난 것이라 할 것이다.  정치적 에포케를 하면, 정치 감각이 근본에서부터 드러난다. 이 정치 감각은 근본적으로 타인과의 생활세계적인 지각을 통한 만남에서 비롯한다. 그리고 이 정치 감각은 기본적으로 몸과 사물 내지는 사건과의 만남에서 맨 처음 생겨나는 정동을 통해 생겨난다. 그런가 하면, 이 정치 감각은 ‘함께 잘 살자’를 체화한 의식을 통해 사회적인 불균등과 불평등을 느낄 때, 게다가 자신이 그에 따라 사회적으로 배제되어 불리하다고 느낄 때 특히 더 강하게 나타난다. 말하자면, 생활 세계적인 정치 감각은 사회의 장벽에 몸으로 부딪쳐 튕겨 나 자신이 고통의 정동에 휩싸일 때 더 강하게 나타난다.   2 광장에서의 정치적 정동  정동은 기본적으로 몸과 사물과의 물질적인 만남에서 이루어지지만, 무엇보다 사람과 사람 간의 몸의 부대낌에서 그 밀도와 강도가 가장 높게 나타날 뿐만 아니라, 뭇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몸은 삶의 경험을 통해 계속 새로운 크고 작은 몸틀들을 구비한다. 그리고 그 몸틀은 감각-운동적인 선험적 규정으로 작동함으로써 경험을 달리하게끔 한다. 이때 사물이나 타인들과의 만남에서 이루어지는 정동의 형태와 밀도나 강도 역시 달라진다. 그리고 그 정동은 행동을 다르게 하고, 그 다른 행동을 통해 역으로 다르게 이루어진다. 몸에서 정동과 행동은 상호 순환적인 작용을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광장에 모인 숱한 종류의 직업과 신분 및 정체성을 지닌 시민들의 몸들은 그들이 살아온 방식에 따라 서로 다른 몸틀들을 구비하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만날 때 온갖 다양한 정동과 그에 따른 감각 및 감정이 복합 다층적으로 생겨날 것이다. 하지만 광장이라는 장소의 정치적인 특수성에 따라 그 복합 다층의 정동과 감각은 서로를 관통하면서 수렴 축적될 것이다. 서로 오가면서 부대끼고 악수하고, 아스팔트에 자리 깔고 앉고, 구호를 외치고, 손뼉 치고, 촛불과 응원 봉을 흔들고, 손을 높이 들어 환호하고, 한데 모여 행진하면서 또 구호를 외치는 등 할 때, 거기에서 각자의 몸에서 그리고 서로의 몸을 오가면서 형성되고 발휘되는 정동과 감각은 당연히 강렬한 느낌으로 공동과 공통의 위력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모인 시민들은 각양각색이기에 그 삶의 다양성에 따른 다양한 크고 작은 몸틀들이 엮이면서 자아내는 정동은 그야말로 다양하게 중첩된 주름들에 따라 강렬한 탄성을 지닌 위력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회사원, 룸펜 지식인, 여러 부문의 노동자들, 편의점 아르바이트 일꾼, 여러 형태의 장애자, 페미니스트, 성소수자, 갑질을 당한 자, 몰락한 자영업자, 취준생, 가정주부, 중고등학생, 대학생, 각 영역의 사회활동가, 농사꾼, 심지어 부도내고 도망 다니는 자 등등 그 다양한 면면이 화려할 정도로 다양한 몸들이 모여 그들 나름의 정동을 표출하고 그 정동들이 수렴 축적되어 광장의 혁명적인 위력으로 나타난다.  그러니까 시민들이 신성한 예외 상태를 정확하게 오인하여 반헌법적 계엄과 군대 동원의 내란을 일으킨 윤석열 세력의 파시즘적 폭력을 진압하고자 광장에 모이고 거리를 행진할 때 거기에서 발휘되는 정동과 감각들은, 비록 행동을 통해 동일한 방식으로 수렴되어 나타날지라도 그 저변에서 각양각색의 무늬와 리듬으로 발휘될 수밖에 없는 것이고, 그만큼 다양성이 어우러져 강도 높은 방식으로 분출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특히 4월 4일 송현공원을 비롯한 광화문 앞까지 잔뜩 모여든 그 수많은 형형색색의 깃발들이 이를 여실히 일러주었다.   3 광장 혁명의 근본 정동: 용납할 수 없음  광장에서의 정동은 정치적인 방향으로 분출되는 것일 텐데, 그 핵심 원인 또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건 한 마디로 ‘용납할 수 없는’ 사건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용납할 수 없음’을 이성이나 지성적인 판단에 앞서 몸에서 먼저 즉각적으로 느꼈기 때문이다.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는 몸의 직관은 근본적으로 몸의 정동에 따른 것이고, 그럴 때 몸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을 분쇄하고 정상으로 되돌리고자 행동에 나설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용납할 수 없음’이야말로 광장 민주주의 정치의 근본 정동이라 하겠다.  ‘용납할 수 없음inacceptablité’은 몸 철학자이자 정치철학자이기도 한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 1908〜1961가 정치적 문제가 무엇인가를 결정하고 다루기 위해 제시한 개념이다. 그는 변증법에 대한 교조적인 이해를 비판하는 내용을 담아 『변증법의 모험Les aventures de la dialectique』(1955)이란 책을 썼다. 이 책의 서문에서 그는 이렇게 피력한다.   여기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문제들을 다루기 위해서는 역사와 정신에 관한 철학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정치적인 것을 철학적으로 말하기 위해 완전히 정교하게 만든 원리들을 기대하는 건 엄밀성을 추구하는 체하는 잘못된 태도일 것이다. 사건들에 부딪혔을 때 우리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것과 맞닥뜨리게 되고, 바로 그것을 해석한 경험이 하나의 테제가 되고 철학이 된다. (p. 9)    이 인용문에서 줄 친 부분을 특별히 유념하게 된다. ‘정치적인 것’이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사건을 만났을 때, 거기에서 성립한다는 것으로 읽었다. 완전하게 정교한 철학적인 원리를 완성해서 그 이념에 따라 교조적으로 정치적인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사건들에서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것을 만났을 때, 거기에서 정치적인 것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저 앞에서 제시한 정치적 에포케와 맥락이 닿는다. 미리 설정된 정치적인 원리나 이념에 따라 정치적인 현상을 추출하고 해석하려 하는, 이른바 체계에 따른 정치 과학적인 태도를 에포케하고, 그 바탕에서 작동하는 ‘용납할 수 없는’ 사건들을 발견하여 들여다보아야 한다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치적인 사건들에서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사건을 맞닥뜨릴 때, 그러니까 어떤 정치적 사건에 대해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는 정동이 몸에서부터 일어날 때, 그 정동이야말로 정치적 감각과 행동이 제대로 작동하는 시발점임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정치 철학과 정치적인 테제를 정립하려 한다면, 바로 이러한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사건을 찾아 그 전모를 데이터로 삼아 해석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정치의 핵심은 ‘용납할 수 없음'이라는 정동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것이겠는데, 우리로서는 이를 광장의 직접 민주주의 정치 현장에서 여실히 확인하게 된다.   사진 출처    다시 빛의 혁명이 이루어진 광장으로 돌아가 본다. 무능력한 국정에 사법적 정치적 부정부패로 크게 얼룩져 수없이 용납할 수 없는 일들을 저질러 온 윤석열 정권이었다. 그래서 이미 ‘촛불행동’, ‘비상 국민 행동’ 등의 이름으로 수없이 퇴진 운동의 시위가 이루어진 상황이었다. 그런데 12·3 계엄과 내란처럼 그야말로 목숨을 바쳐서라도 결단코 용납해서는 안 될 일이 터지고 말았으니, 그에 따른 정동은 말 그대로 전율일 수밖에 없었다. 절망, 분노, 좌절, 탄식, 에 이어 함께 모임과 돌봄이 일차적인 정동으로 나타났고, 이에 광장의 행동에 나섰을 때, 모두의 정동이 한데 결집해 말 그대로 대대적인 혁명의 ‘발기’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말하자면, 정동을 통해 모두가 하나의 역동적인 근원적 물질로 되돌아가 팽팽한 탄성으로 솟구쳐 오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런 뒤, 되돌려야 한다는 절박한 심정에 한데 모여 외치고 행동함으로써 급기야 신성한 예외 상태를 주장하던 윤석열의 파시즘적인 야망을 꺾어버렸을 때, 이차적인 정동인 환호와 환희에 이어 ‘함께 잘살기의 민주정치’를 위한 새로운 정치적인 연대와 돌봄의 정동이 작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용납할 수 없음’은 ‘논의해 볼 수 있음’과 대립한다. 논의해 볼 수 있음은 ‘함께 할 수 있음’의 한계 내에서의 일이지만, 용납할 수 없음은 금기의 한계선을 넘어섰다는 절망과 그에 따른 분노를 수반하면서 ‘논의할 가치조차 없음’과 직결된다. 용납할 수 없는 일을 벌이는 건 함께 잘살자는 정치 공동성을 향한 의사소통의 가능성, 즉 공론장을 아예 파괴하는 짓이다. 온건한 의미의 정치는 정치 공동성의 기반 위에서 현안을 놓고서 경쟁하는 가운데 토론하고 협의해서 타협하고 결정한 약속을 지키고, 의무와 책임을 다하면서 그 위반 사항들을 감시하고 처벌을 수행하는 일이다. 하지만, 이러한 정치의 근본 틀을 깨뜨려 의사소통의 정치를 아예 불가능하게 만드는 짓은 결단코 용납할 수 없음에 해당하고, 이를 바로 잡기 위한 정치적 행위는 예외적인 방식의 혁명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그때 작동하는 일차적인 정동이 절망과 분노이고, 혁명이 성공했을 때 오는 이차적인 정동은 환희와 환호, 희열인 것이다.  나의 개인적인 입장에서 돌이켜 보면 환희와 희열이 가장 컸던 사건은 1979년 젊은 시절 부마항쟁 끝에 다락방에 숨어 있다가 라디오를 통해 독재자 박정희가 10월 26일 사살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던 10월 27일 아침에 일어났지 않았나 싶다. 절망과 분노는 용납할 수 없는 일에 대해 목숨을 걸게 만드는 정동이며, 환희와 희열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을 바로 잡았을 때 일어나는 정동임을 처음으로 제대로 깨달은 사건이라 할 것이다. 나 개인으로서는 그보다는 강도가 덜하지만, 작년 12월 14일 여의도 광장에서 들었던 국회에서의 대통령 윤석열의 탄핵 결정과 올해 4월 4일 헌법재판소 근처 송현공원에서 들었던 대통령 탄핵 인용의 파면 결정 역시 그에 못지않은 정치적 정동의 대사건이겠다.   4 광장 이후의 광장  문제는 ‘용납할 수 없음’이라는 정동을 일으켰던 직접적인 사건이 해결되었다고는 하나, 그 용납할 수 없음의 뿌리가 깊어 계속해서 그 가지들이 뻗어 나와 감당하기가 버거울 정도로 기성을 부린다는 점이다. 이러한 썩은 가지들 쳐내는 일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것으로 예상된다.  ‘광장’은 지난한 투쟁을 통해 거둔 열매를 제도권 정치에 넘겨주었다. 급기야 새로운 대선을 치러 ‘광장’에 연합한 다수당인 더불어민주당이 대통령을 당선시켜 정권을 인수하도록 했고, 그들과 더불어 조국혁신당 및 진보당 소속의 진보 진영의 국회의원들이 순조롭게 제도 정치를 하도록 판을 꾸려 주었다. 이제 반헌법 계엄 내란 세력들을 척결하는 일이 급선무임에는 분명하다. 그래서 재빨리 이를 위한 특검들이 꾸려졌고, 그래서 이제 광장의 비상 정치는 거의 정지되었으며 합법적인 절차에 따라 빛의 혁명을 완수하는 일이 진행되는 중이다.  하지만 다들 알다시피 정세의 흐름이 전혀 만만치가 않다. ‘광장’의 관점에서 보면, 도무지 용납할 수 없는 일들이 합법의 우산 아래에서 다소 움츠러들긴 했으나 도대체 물러날 기세를 전혀 보이지 않는다. 내란을 척결하는 일에 선봉에 서야 할 내란 재판부가 내란 수괴를 괴이한 수법으로 석방한 인물을 재판장으로 해서 계속 진행하고 있다. 그 배후에는 내란 주요 종사자를 대통령으로 만들고자 하여 정치 중립의 의무를 위반하고서도 전혀 물러날 기색이 없는 대법원장 조희대가 있음이 분명하다. 그런가 하면, 누가 봐도 내란 주요 임무 종사자임에 분명한 전 법무장관 박성재의 구속 영장을 그가 계엄이 과연 불법인지를 정확하게 알았는지 몰랐는지에 다툴 여지가 있다는 터무니없는  이유를 들어 법원이 두 번씩이나 거부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게다가 내란 척결을 위해 설립한 특검에서조차 내란 과정에서 핵심 역할을 한 노상원에 대해 징역 3년 구형을 하는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내란 수괴인 윤석열의 손발 역할을 한 검찰은 대장동 사건에서 피의자 남욱에게 “배를 갈라서 장기를 꺼낼 수도 있고, 환부만 도려낼 수도 있으니, 네가 선택하라고 했다.”라는 식의 강압 조작 수사를 바탕으로 기소한 사실이 법정의 증언을 통해 드러나자, 그 일이 2심에서 정식으로 드러날 것이 염려되어 항소를 포기한 것을 대통령 이재명과 법무부 장관인 정성호가 압력을 가한 탓이라고 하여 18명의 검사장이 사표를 내는 등 집단으로 항명하는 진풍경도 벌어지고 있다. 내란 수괴를 배출한 당인 ‘국민의힘’은 함부로 내란 운운하지 말라는 말을 예사로 하면서 전혀 반성의 기미를 보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대표라는 자인 장동혁은 구속된 내란 수괴인 윤석열을 방문한 뒤 모두 힘을 모아 이재명 정권과 싸워야 한다면서 ‘이재명 탄핵’을 주장하고, 황교안이 내란 선전 선동 혐의로 내란특검팀에 조사를 받게 되자 ‘우리가 황교안이다!’는 등의 말로써 노골적으로 내란의 선동 선전에 동조한다. 다들 알다시피, 그 외 관련해서 주목할 사건이 한둘이 아니다. 자칫 이대로 가다가는 속된 말로 ‘죽도 밥도 안 되는’ 낭패를 볼 것 같아서 불안한 마음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사진 출처     무슨 말을 하려고 다들 아는 일들을 굳이 입에 올리는가 하면, ‘도무지 용납할 수 없음’이라는 정동을 일으키는 사건들에 대해 과연 어떤 정치적인 태도를 보여야 하는가를 말하고 싶어서다. 광장에서의 직접 민주주의를 통한 시민혁명이 성공함으로써 제도권 정치가 정상화되었다고 해서 광장 정치가 문을 닫은 게 아닐 것이다. 제도권 정치인들은 광장의 시민들이 그들을 도왔다고 할지 모르지만, 오히려 그 반대로 광장의 직접 민주주의 정치가 제도권 대의민주주의 정치를 수단으로 싸안았다고 봐야 한다. 말하자면, 얼마 전 그때만 비상시국이 아니라, 현재에도 여전히 비상시국이라는 사실을 정확하게 인식해야 한다는 거다.  그래서 이제 ‘광장 이후의 광장’에 대해 나름으로 제안해 본다. 우선 광장의 직접 민주주의를 비상하게 열어야 한다. 그 핵심 의제는 내란 정당인 ‘국민의힘’의 해산이어야 한다. ‘국힘’은 오랜 세월 수구 보수의 정치적인 진영으로서 경제, 언론, 교육, 사법 등을 장악한 사회권력의 카르텔을 위한 정치적인 선봉 역할을 하면서 국가의 정치권력을 오남용해 온 국가 공동체의 암적 존재다. 그렇기에 도무지 용납할 수 없는 정치 집단이라는 사실이 이번 반헌법 계엄 내란을 통해 여실히 드러났고, 또 계속 드러나고 있다. 만약 ‘국힘’을 성공적으로 해산한다면, 그야말로 광장 직접 민주주의 시민혁명이 완성 단계에 이르렀다고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국가를 책임지고 운영하는 국회를 비롯한 각급 지방단체장과 지방의회는 물론이고 국가의 폭력적 지배를 뒷받침하는 군대와 경찰과 검찰 그리고 법원 등의 사법 권력의 영역에서도 비정상적인 부정부패의 인물들을 ‘숙청’할 수 있는 정치 개혁의 공간이 크게 열릴 것이다.  더불어민주당 대표인 정청래 의원이 수시로 힘주어 말하는 ‘국힘당의 해산’이 그저 수사적인 정치적 압박에 불과한 것이어서는 안 된다. 2014년 내란 음모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통합진보당을 해산했고, 그로 인해 당시 5명의 국회의원이 즉시 의원직을 상실했다는 건 다들 안다. 이번에는 실제로 내란을 일으킨 수괴를 둔 108명의 국회의원을 둔 거대 야당이다. 더불어민주당을 비롯한 진보 진영의 국회의원들과 소속 정당들의 움직임만으로는 전혀 쉽지 않은 과제다. 『빛의 혁명 183』이라는 책을 써서 빛의 혁명에 관한 일지를 어마어마한 실천적 기록으로 남긴 조정환 선생은 책의 마지막에 마르크스Karl Marx, 1818〜1883가 “인류는 언제나 자기 자신이 해결할 수 있는 과제만을 제기한다.”라고 했음을 특별히 명기하고 있다.  광장의 민주시민들이 먼저 국힘당이 도무지 용납할 수 없는 정당임을 확실하게 규정하고 그 해산을 대대적으로 몰아붙여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광장의 명령’을 받아 더불어민주당을 비롯한 민주 진보 진영의 정당들이 일치단결해 움직여야 한다. 그리하여 정당 해산 청구권이 있는 정부가 연이어 확실하게 움직이게 하고 미흡하면 법무부 장관을 바꾸어서라도 헌법재판소에 ‘국힘’의 정당 해산 청구를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광장 이후의 광장’이란 문구를 만들어 제시하는 까닭은 이제 한국의 정치가 헌법에 명기된 제도적인 대의민주주의를 비제도적인 광장의 직접 민주주의가 뒷받침하지 않고서는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다는 판단에서다. 광장의 직접 민주주의는 헌법에 전혀 명기되지 않았지만, 여러 영역에 각종 형태로 현존하는 시민사회의 주권적인 활력을 북돋우고, 그러한 시민 주권의 활력을 통해 명실상부하게 국민 주권을 행사하는 방향으로 자리를 잡아가야 할 것이다. 달리 말하면, 이는 생활 세계적인 민주정치의 기반을 공고히 확대해 나가야만 제도적인 민주정치가 그 바탕 위에서 건전하게 자리를 잡고서 정의롭게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울러 ‘함께 잘살기’를 중심으로 한 정치 사회적인 정동과 감각이 일상의 생활 속에서 생생하게 살아 움직일 때, 언제라도 직접 민주주의를 위한 광장에의 참여가 건전한 방향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 걸 의미한다고 할 것이다.  
2025-11-24 | hrights | 조회: 35 | 추천: 1
이재환/ 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책임관   지난 11월 10일, 경기도소상공인연합회와 경기도상인연합회는 경기도청 브리핑룸에서 기자회견을 가졌다. 이들은 “이해관계자와 충분한 소통 없이 일방적으로 지역화폐 정책을 변경하는 것에 강한 유감을 표한다”고 밝혔다. 두 단체가 지적한 ‘일방적인 정책’은 11월 3일 경기도 지역화폐 심의위원회의 ‘경기지역화폐 발행지원사업 운영지침 개정안’ 의결 건 중 지역화폐 가맹점 매출기준 변경에 관한 것이었다. 경기도의 운영지침은 이전까지 ‘연 매출 12억 원 이하’ 사업장만 지역화폐 가맹점을 허용하도록 31개 경기도 시군에 권고하는 것이었다. 이를 준수하지 않으면 도의 지원금에 차등을 두기도 했다. 그런데 이번 개정안 의결을 통해 가맹점 매출기준이 행정안전부의 운영지침 기준인 ‘연 매출 30억 원 이하’로 상향된 것이다. 또한 가맹점 매출기준을 준수하지 않으면 적용했던 예산 차등도 철회하기로 했다. 경기도의 방침은 올해 ‘지역사랑상품권법’ 개정으로 지역화폐 할인예산의 국비 의무지원이 확정된 데 따른 것이다. 도는 국비사업 전환으로 행안부 운영지침과의 정합성 제고와 시군별 특성과 수요에 맞는 정책 추진을 위한 시군 자율성 강화를 개정 이유로 들었다. 또 지역화폐 운영과 관련해 시군의 자율성을 대폭 확대, 각 지역의 경제 여건에 맞는 제도 운용이 가능하도록 한 것이 핵심이라고 강조했다. 이에 따라 가맹점 등록 기준이 매출 30억 원 이하 정부 지침 범위 내에서 시군이 지역 여건에 맞게 자율적으로 정할 수 있게 됐다.   사진 출처   언론의 반응도 나쁘지 않다. <경인일보> 11월 7일 자 보도에 따르면, “지역화폐가 골목 상권에서 더 효과적으로 기능하려면 가맹점 등록 기준을 완화해야 한다는 현장의 목소리를 꾸준히 보도했다”고 밝혔다. 같은 기사에서 경기도 관계자는 “31개 시군 특성과 인구, 산업, 상권 구조 등이 모두 다른데 기준이 동일해 지역 실정에 맞는 정책 추진에 어려움이 있었던 만큼 시군의 운영상 자율성을 확대해 현장 중심의 운영을 강화하는 취지”라고 말했다. 그런데 왜 현장의 경기도소상공인연합회와 경기도상인연합회는 반발하고 나선 것일까. 언론의 보도를 살펴보자. <뉴시스> 보도기사에 따르면, 이들은 “전통시장, 상점가, 골목상권, 소상공인 등 찾아가기 어려운 동네 점포를 이용함으로 인해 그에 따른 인센티브를 제공하고, 영세 소상공인 매출 증가와 지역경제 발전을 도모한다는 정책 목표에 반하는 결정”이라고 지적했다. 또한 “지난해 경기도 지역화폐 가맹점 매출액 기준 상한선을 10억 원에서 12억 원으로 올릴 때도 엄청난 혼란이 있었다. 변경될 경우 소비가 전통시장, 골목상권, 소상공인 대신 식자재 마트 등 지역 대형마트로 집중돼 불공정 경쟁이 유발된다”라고 했다. “도내 소상공인들은 이 문제 해결을 위해 끝까지 행동할 것”이라고 덧붙인 두 단체의 반대 이유는 ‘지역화폐 본래 정책 목표를 훼손’이었다. 지역화폐는 소비자, 소상공인, 지방정부라는 세 주체에 의해 굴러간다. 이번 이슈에 대해 소비자들은 더 다양한 지역화폐 사용처를 이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환영할 터이다. 반대로 그동안 지역화폐 가맹점이었던 ‘영세’ 소상공인들의 반발은 당연하다. 지방정부는 이 두 주체 간의 이견을 조율해 모두의 이해와 요구에 최대한 부합하는 결정을 새로 마련해야 하는 곤란을 겪게 됐다. 이쯤에서 만일 연 매출 30억 원까지로 가맹점 기준을 상향한다면 얼마나 많은 사용처가 생길까 궁금해진다. 신용카드사의 기준을 보자면, ‘영세’ 소상공인의 기준은 연 매출 3억 원 이하이다. 시흥시 기준 자료를 살펴보면 이 구간의 소상공인은 전체 소상공인의 50%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3억 원 이상, 12억 원 이하는 20%로 추산된다. 12억 원 이상, 30억 원 이하 소상공인들은 지역화폐 사용처가 되기 힘든 공장 제조업, 도매업 등도 상당히 포함되어 있다. 그래서 이 구간의 지역화폐 사용처 등록 가능 사업장은 10%가 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10%의 사업장이 10%만큼만 지역화폐 결제 비중을 차지하진 않을 것이라는 게 영세 소상공인들이 반발하는 이유다. 소비자들이 선호하는 중급 규모 이상의 마트와 대기업 프랜차이즈 사업장이 이 구간에 몰려 있다 보니 지역화폐 결제의 쏠림현상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지역화폐는 무한정 할인 혜택을 제공하지 않는다. 대체로 할인 혜택만큼 구매해서 사용하게 된다. 한정된 자원인 셈이다. 이 자원의 쏠림현상은 결국 가맹점 간 지역화폐 결제의 빈익빈 부익부를 불러일으킬 것으로 보인다. 경기도의 이번 조치는 영세 소상공인 중심에서 소비자 편익 측면으로 무게추를 옮길 수 있는 여지를 부여하며 결정(또는 짐?)을 시군의 자율에 맡겼다. 그 배경에는 점차 강화되는 지역화폐 활성화 정책이 있다. 너무나 눈에 보이는 지역화폐의 열매를 나누자 하는데 누굴 뭐라 할 것인가. 어려운 문제다. 그래도 잊지는 말자. 오늘날의 지역화폐는 예산을 투입해야 굴러가는 한정된 자원이라는 것을. 나중에 공유지의 비극이라고, 또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르는 일이라고 말을 듣지 않으려면 수시로 왜 지역화폐를 했는지, 처음으로 돌아가 거울 앞에 서서 물어볼 일이다.
2025-11-19 | hrights | 조회: 107 | 추천: 3
김규원/ 한겨레신문 선임기자   지난 9월 26일 검찰청을 폐지하고 공소청과 중대범죄수사청을 설치하는 정부조직법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이에 따라 1987년 이후 한국의 가장 강력한 합법적 폭력 기관이었던 검찰청이 내년 9월이면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검찰 개혁에 깊은 관심을 두게 된 것이 2009년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 때부터였으니, 개인적으로는 16년 만의 중대한 변화였다. 그러나 지금도 전혀 안심하지 못한다. 검찰청 폐지는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 가운데 하나를 제거한 일에 불과하다. 검찰청 폐지 이후 곧바로 여권에서 터져 나온 ‘보완수사권’ 논란은 지속되는 위험을 잘 보여준다. 검사에게 보완수사권을 줘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이번 검찰 개혁의 본질을 오해하고 있다. 이번 검찰 개혁은 시민에게 더 나은 형사사법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민주주의와 인권에 근본적 위협을 가하는, 합법의 탈을 쓴 불법적 폭력 집단을 뿌리뽑기 위한 일이다. 따라서 이번 검찰 개혁 과정에서 검사에게 보완수사권을 준다면 검찰이라는 ‘괴물’에게 다시 민주주의를 위협할 여지를 남길 것이다. 나는 검사들이 ‘반드시’ 이 권한을 남용할 것으로 본다. 그것은 ‘관성’이란 물리 법칙이고, 강한 권한을 가진 사람이나 기관이 반복적인 역사를 통해 일반적으로 보여온 행태다. 검사들은 1987년부터 현재까지 합법적 권한을 남용해왔고, 불법적 행위도 서슴지 않았다. 어떻게 그들이 보완수사권을 남용하지 않겠는가. 법과 제도는 성기고, 검사가 악용할 틈은 엄청나게 넓은데 말이다.   관건은 보완수사권이 아니다 정상적인 사회에서라면 검사에게 보완수사권이 아니라, 수사권과 수사통제권까지 줄 수 있다. 실제로 대부분의 나라에서 검사들은 수사권과 수사통제권을 갖고 있다. 동시에 그 대부분의 나라에서 검사는 실제로 수사를 하지 않는다. 애초 검사에게 수사권을 준 것은 직접 수사를 하라는 뜻이 아니라, 수사관의 잘못된 수사를 통제하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한국의 검사들은 그 수사권을 남김없이 악용해서 국가의 최고 권력을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어떻게 이들에게 보완수사권을 주겠는가. 이번 검찰 개혁의 제1 목표는 검사에 대한 무장(수사권) 해제여야 한다. 검사의 수사권을 100% 박탈해야 한다. 보완수사권이 없으면 검사가 수사관의 잘못된 수사를 바로잡기 어렵다는 말은 이해하기 어렵다. 중요 사건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수사관과 검사가 초기부터 협력해서 사건을 처리할 수 있다. 그 과정에 문제가 있다면 수사관과 검사가 서로 견제하는 장치를 만들면 된다. 사실 이런 문제에 대해선 이미 ‘검사와 사법경찰관의 상호 협력과 일반적 수사 준칙에 관한 규정’이 만들어져 있다. 이번에 이것을 더 발전시키면 된다. 관건은 검사들이 수사관들과 사건 초기부터 머리를 맞대고 상의하고 협력할 것이냐다. 보완수사권이 아니다. 나아가 검사들이 가진 독점적이고 편의적인 기소 권한도 제한해야 한다. 예를 들어 시민으로 이뤄진 기소배심(대배심)이나 민주적 구성의 기소심의위원회를 도입해야 하고, 법원에 제기하는 재정 신청도 더 활성화해야 한다. 또 검사가 기소권이나 영장 청구권을 가지고 저지른 불법 행위에 대한 수사나 징계도 강화해야 한다. 검사 범죄에 대해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의 수사나 국회의 검사 탄핵, 법무부의 검사 징계를 더 활성화해야 한다.   MBC 뉴스데스크 영상 갈무리   우리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두 가지 요소 2019년 시작된 윤석열의 검찰 쿠데타는 윤석열에 대한 탄핵과 처벌, 검찰청 폐지와 공소청․중수청 설치만으로 종결되지 않는다. 이 6년 동안의 쿠데타를 통해 한국 민주주의의 취약성과 그에 대한 위협이 전면적으로 드러났다. 두 가지 핵심적 위협 세력은 권력화한 관료와 극우파 시민들이다. 이 두 세력을 적절히 통제․견제하지 못한다면 한국의 민주주의는 상시적인 붕괴 위험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먼저 권력화한 관료의 위험성은 윤석열의 계엄 쿠데타 과정에서 남김없이 드러났다. 행정부의 군과 경찰, 국가정보원 등 합법적 폭력 기관들은 이번 계엄 쿠데타에 가담했다. 이들은 이것이 불법 행위라는 것을 알고도 협력했다. 쿠데타를 수습하는 과정에서도 한덕수와 최상목을 비롯한 관료 출신들은 협조하지 않았다. 사법부와 검찰은 윤석열을 풀어주고 이재명을 날리려고 했다. 사법부에서 오직 헌법재판소만 진통 끝에 민주주의의 손을 들었다. 결국 한국 정부의 3부인 입법부와 행정부, 사법부 가운데 입법부만 쿠데타에 저항했다. 행정부는 쿠데타에 가담했고, 사법부는 오락가락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시민 대표성의 차이라고 본다. 입법부는 시민의 대표가 주도하고, 행정부는 시민 대표가 극소수이고, 사법부엔 시민 대표가 없다. 따라서 시민 다수가 반대하는 쿠데타가 일어나도 행정부와 사법부는 시민 다수의 뜻이 아니라, 권력자의 뜻에 따른다. 이 구조를 깨지 못하면 이번처럼 권력자가 관료들을 동원해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일은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다. 그래서 행정부의 고위직을 직업 공무원이 아니라, 선출직․임명직 공무원이 다수를 차지하는 구조로 바꿔나가야 한다. 또 연합정부(연정)를 적극 도입해 내각을 여러 정당이 함께 구성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 헌법재판소와 대법원의 구성도 대통령이 전원이나 다수를 임명하는 방식이 아니라, 국회의 의석수에 따라 각 정당이 추천․임명하는 방식으로 바꿔야 한다. 그래야 대통령에 따라 헌재와 대법원의 판단이 극단적으로 널뛰기하는 위험을 배제할 수 있다.   더 큰 도전에 직면한 민주주의 가장 본질적인 위험은 한국의 시민 가운데 20~25%가량이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행위에 동조한다는 점이다. 이들은 윤석열의 계엄 쿠데타를 옹호했고, 윤석열의 탄핵에 반대했고, 윤석열의 쿠데타에 동조한 정당을 일관되게 지지하고 있다. 2019~2025년 윤석열의 쿠데타는 이런 ‘극우파’라는 괴물을 무대 위로 불러냈다. 이 괴물은 반북한주의, 반공주의, 친일주의, 친미주의, 영남 패권주의, 보수 개신교 신앙, 세대간 증오 등 다양한 요소로 이뤄져 있다. 이들은 앞으로도 검찰 등 권력화한 관료의 쿠데타와 집권, 민주주의와 인권의 파괴에 동조할 수 있다. 아마도 이 괴물에 맞설 가장 강력한 무기는 더 많은, 더 강한 민주주의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으로도 당장 이 괴물을 제압할 순 없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거대한 도전에 직면했다.    
2025-11-19 | hrights | 조회: 70 | 추천: 2
이동우/ 변호사   정부가 서울 전체와 경기도 일부 지역을 토지거래허가구역으로 묶은 뒤 주택 가격에 대한 논의가 한창이다. 이번 조치로 가파르게 상승하던 집값을 잡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에 찬 예측부터, 도리어 집값 상승을 더 부채질할 거라는 부정적 예측까지 그 범주도 다양하다. 한편으론 우리나라의 주택 가격 상승은 서울과 수도권을 중심으로 한 극단적인 불균형발전이 원인이므로 지방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조금 더 원론적인 해법을 제시하는 목소리도 들려온다. 모든 의견이 다 나름의 근거를 가지고 있기에 무엇이 맞고, 무엇이 틀렸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또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도 저마다의 생각이 다르기에 쉽게 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주거정책과 관련해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한 가지가 있다면, 바로 보유세 논쟁이 아닐까 싶다. 오늘은 가장 논쟁적인 정책인 보유세를 강화하자는 주장과 관련해 대해 몇 가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보유세를 강화하자는 의견은 다주택자에 대한 비판적 시각에 근거를 두고 있다. 한정된 재화인 주택을 일부 개인이 소유하여 주거안정을 위협하고 있으니, 보유세를 높여 다주택을 소유하는 것을 부담스럽게 하자는 거다. 그렇다면 이 논리가 구현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첫째, 보유세가 말 그대로 굉장히 높아야 한다. 보유세 강화를 찬성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갈리는 1주택소유자를 제외한 다주택자에 한정해서 논의한다면, 보유세 강화의 목적은 다주택자가 주택을 보유하는 것이 부담스러워 집을 팔아야 하기 때문에 보유세는 그러한 부담이 느껴질 정도가 되어야 한다. 정확한 수치는 없지만 통상 이야기되는 수치는 집값의 1% 수준이다. 기재부장관은 미국을 언급하면서 50억 원을 예로 들어 5000만 원을 이야기했으나, 서울 평균 아파트값인 약 10억 원을 기준으로 생각하면 1천만 원이다. 1달에 약 80만 원 정도인데 과연 이 정도 금액이 부담스러워 다주택자가 집을 내놓을까? 일부는 집을 팔 수도 있겠으나 대부분이 그럴지는 다소 회의적이다. 결국 OECD나 여러 국제 통계 등을 바탕으로 논의되는 1% 수준의 보유세로는 다주택자가 주택을 팔 유인이 되기에는 부족하다. 그렇다고 5%나 10%로 결정하면 대부분이 지나치게 높다고 반대의견을 밝힌다. 위헌심판청구도 적지 않게 제기될 것이다. 결국 1~3% 정도가 현실적으로 고려해볼 수 있는 수치인데, 적정치를 찾는 게 쉽지 않다. 높을수록 주택소유자들의 반발이 크고 낮을수록 그 효과는 반감되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론 적어도 2% 이상은 되어야 보유세 강화의 의미가 있지 않을까 한다.   사진 출처    두 번째로 고려해야 할 사항은 다주택 소유제한에 따른 여파다. 보유세 강화의 목적은 앞서 이야기한 대로 다주택자의 주택 소유를 제한하고자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실제로 거주하는 주택 이외에는 소유하지 말라는 게 정책의 목적이자 메시지인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될 경우, 예상치 못한 변수가 생긴다. 주택의 상품성이 약화함에 따라 신규 주택이 잘 생기지 않는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주거는 사는 것(buying)이 아니라 사는 곳(living)’이란 명제는 이미 친숙하고, 커다란 거부감도 생기지 않는다. 그러나 주택의 상품성이 약화되면 그 상품을 통해 이익을 얻고자 하는 사람들이 줄어든다. 다시 말해 새로운 집을 지어 팔고자 하는 유인이 떨어지고 그 결과 지금과 같은 주택공급방식이 사라질 수 있음을 고려해야 한다. 실제로 독일 통일 전 동독은 민간이 새집을 짓지 않음에 따라 정부가 집을 지은 일부 도시를 제외하고는 오래된 주택으로 인한 슬럼화가 크게 사회문제화되었다. 동독의 붕괴 원인 중 하나가 이러한 오래된 주거에 따른 도시 슬럼화와 주민들의 불만이었다는 분석도 있다. 따라서 만약 보유세를 강화해서 다주택자의 주택 소유를 제한하고 주거의 상품성을 약화하려면 반드시 정부 주도의 ‘대규모’의 ‘지속적인’ 주택공급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동독과 같은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보유세 도입 목적에 맞게 양도소득세를 낮춰야 한다. 때에 따라 다르지만 대체로 다주택자의 경우 주택을 팔 경우, 65~75% 수준의 양도소득세를 내야 한다. 현재는 중과가 유예되어 있지만 어디까지나 임시적인 조치이며, 중과되지 않는 일반 세율도 6~45%로 절대 적지 않다. 주거도 상품성이 있기 때문에 양도소득세를 걷지 않을 순 없다. 그러나 다주택자의 주택 매각, 그리고 개인들의 자유로운 주거이동이라는 정책 목표를 고려한다면 ‘보유세는 높게, 양도소득세는 낮게’ 유지하는 것이 논리적이다.   주택정책은 정말 어려운 분야다. 그중에서도 보유세는 더욱 어려운 문제다. 강화하면 이런 문제가 생기고, 그대로 두면 저런 문제가 생긴다. 저마다의 생각과 이해관계가 다른 데다가 선거까지 고려하면 현실적으로 보유세를 강화하는 정책을 내놓기란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폭등하는 집값 때문이든 일관된 정책 목표 때문이든) 보유세를 강화하고자 한다면 앞서 언급한 내용을 고려해 효과적인 결정이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2025-11-12 | hrights | 조회: 56 | 추천: 2
장은주/영산대학교 성심교양대학 교수   12.3 내란은 단순히 알코올 중독자이자 망상장애에 사로잡힌 윤석열 개인이 충동적으로 일으킨 사건이 아니었다. 그가 막강한 제왕적 권력을 가진 대통령이기는 했어도, 내란을 통해 이런저런 사적이거나 정치적인 이익을 챙길 수 있다고 믿었던 많은 고급 관료와 장성 그리고 정치인이 없었다면 그는 처음부터 친위 쿠데타를 기획하고 실행하지 못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에 대한 정치적 지지기반이 중요하다. 비록 그는 인기 없는 대통령이긴 했어도, 어떤 경우에도 그를 지지할 20~30% 내외의 지지자들이 뒤를 받치고 있었다. 계엄 실패 후 윤석열은 중국 혐오와 부정선거라는 거짓 선동을 통해 특히 바로 이들을, 자신을 위한 적극적 수호 부대로 만들려 했는데, 이런 시도는 꽤 성공을 거두었다. 1.19 서부지법 폭동, 전광훈 목사와 손현보 목사가 주도했던 극우 집회들, ‘백골단’이나 ‘자유대학’ 같은 청년 극우들의 준동 등은 바로 그 결과였다. 이런 점에서 12.3 내란은 파시즘이 21세기 한국에서도 유사한 모습으로 발흥하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를 불러일으켰다. 과거의 파시즘에서는 특히 ‘폭민(暴民;mob)’이라고 규정되는 대중들이 지도자와 일체감을 느끼며 자발적으로 나서 정치적 적으로 규정된 사람이나 세력에 대해 극단적인 증오와 혐오를 폭력적인 방식으로 분출하는 양상을 보였다. 이 열성적 대중 동원은 파시즘을 단순한 군부 독재와 구분시켜 주는 가장 중요한 지표다. 다른 사안들은 제쳐두고라도, 윤석열의 내란 시도와 그 이후의 사태 전개에서 이런 파시즘적 징후를 읽어내야 하는 가장 큰 이유도 바로 이런 식의 광범위한 극우 대중, 특히 ‘청년 극우’의 준동이었다. 얼핏 윤석열의 내란은 우리 현대사의 파시즘 전통을 부활시키려 했던 시도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번 내란이 촉발한 파시즘적 정치 흐름은 과거와는 기본 성격이 다르다고 해야 한다. 그것은 바로 이 흐름이 고도로 선진화된 자본주의와 어느 정도 안정적으로 안착한 민주주의 체제에서 출현했기 때문이다. 민주화 이후 과거의 파시스트 세력은 어떻게든 보수라는 이름으로 민주적 헌정질서라는 틀 안에 머물러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바로 우리 국민 상당수가 이 세력의 내란 옹호 선동에 흔들리는 모습을 보였다. 이런 현상을 단순히 과거 군사 파시즘의 잔재나 부활이라고만 볼 수는 없다.   사진 출처    카스 무데의 널리 알려진 구분을 빌리자면, 극우(far right)는 ‘극단 우익(extreme right)’과 ‘급진 우익(radical right)’으로 나눌 수 있다. 극단 우익은 파시즘같이 민주주의의 본질인 국민주권과 다수통치를 부정하는 데 반해, 급진 우익은 민주주의의 본질은 수용하지만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기본 요소인 법치나 권력분립, 소수자 권리 등에는 반대한다. 그 대표적인 예가 최근 들어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극우 포퓰리즘’이다. 이번에 우리는 우리 사회에서도 이 극우 포퓰리즘의 준동을 목격했다. 이 포퓰리즘 개념을 단순하게 규정하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러나 통상 포퓰리즘은, 사회가 선량하고 순수한 보통 사람들인 ‘우리’와 부패한 엘리트 및 그들이 지지하는 불순한 외부의 적으로 구성된 ‘그들’로 나뉜다고 주장하면서, 이 ‘우리’와 ‘그들’의 대결을 부추기는 정치를 지칭한다.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주로 이주민들과 난민들 및 그들을 나라 안으로 끌어들인 좌파 정치인들이 포퓰리스트 세력이 배척하고자 하는 ‘그들’로 지목된다. 한국에서는 대표적으로 이준석 개혁신당 대표가 다름 아닌 ‘중국’의 위협을 강조하고 여성이나 장애인 같은 소수자에 대한 혐오를 조장하면서 이런 서구 포퓰리즘의 정치 행태를 모방하고 있다. 12.3 내란 이후 우리 사회에서 확인된 파시즘적 정치 흐름에서 가장 새로운 점은 바로 이런 극우 포퓰리즘의 전략을 채택하는 데 있다. 오늘날 극우 포퓰리즘과 파시즘 사이 또는 극단 우익과 급진 우익 사이의 경계는 언제나 명확하지 않고 서로 유동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이 새로운 파시즘을 단순히 과거 군부 파시즘의 부활이라는 차원에서만 이해해서는 안 되는 이유다. 이것은 또한 파시즘을 좁게 과거 유럽과 일본에서 나타났던 특정한 정치 운동이나 정부 형태라고만 이해해서는 안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오늘날 파시즘은 21세기라는 새로운 조건 속에서 과거와는 다른 새로운 양상으로 등장하고 있는데, 우리 사회에서도 나름의 고유한 방식으로 이 새로운 파시즘이 등장하고 있다. “모든 시대는 그 시대만의 파시즘이 있다.”라는 프리모 레비의 지적이 참으로 뼈아프게 다가온다. 나는 오늘날 파시즘을 단순한 역사적 파시즘의 부활이나 특정한 정부 형태라기보다는 “권력을 획득하기 위한 전술(전략)”이라는 차원에서 파악하자는 미국의 철학자 제이슨 스탠리(홀로코스트를 피해 미국으로 이주한 부모를 둔 그는 최근 트럼프의 두 번째 대통령 당선을 보면서 반-파시즘의 중심지를 만들기 위해 캐나다로 이주했다.)의 제안에 주목하고 싶다. 이런 접근이 역사적 파시즘이나 우리의 과거 군부 파시즘과의 관련성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다양한 맥락과 조건 속에서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 다양한 극우적 정치 흐름의 핵심을 포착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스탠리는 그 핵심을 “‘우리’와 ‘그들’의 정치”로 규정하는데, 이 ‘파시즘적 정치’는 기본적으로 혐오와 배제의 정치다. 그러니까 선량하고 애국적인 ‘우리’와 반국가적이고 불의하며, 따라서 배제하고 혐오하는 게 정당화되는 ‘그들(난민, 페미니스트, 노동조합, 인종적, 종교적, 성적 소수자 등)’을 갈라치기함으로써 권력을 획득하고 유지하려는 모든 정치를 이 틀에서 파악할 수 있다. 오늘날 유럽과 미국의 극우 포퓰리즘 운동에서는 물론, 폴란드, 헝가리, 터키, 심지어 브라질과 인도에서도 이런 파시즘적 정치가 판을 치고 있다. 12.3 내란 이후 윤석열이 촉발한 한국 극우 정치의 전개 양상도 이런 맥락에서 그 본질을 이해할 수 있다.   사진 출처    최근 우리 사회에서 현재화하고 있는 파시즘적 정치는 단순한 과거 회귀의 시도라기보다는 오늘날의 새로운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조건 위에서 발생한 정치적 병리라고 이해해야 한다. 이 병리는 전 세계적인 수준에서 보편적으로 확인되고 있다. 신자유주의의 실패와 투기적 금융자본주의의 지배가 빚어낸 극심한 경제적 불평등과 사회적 불안정성 그리고 문제해결력을 상실한 정치 체제에 대한 대중적 불신과 반감을 에너지원으로 삼아 권력을 획득하려는 일부 엘리트의 모험주의적 정치 기획이 전 세계적으로 파시즘적 정치를 불러내고 있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21세기 새롭게 창궐하고 있는 이 파시즘적 정치는 과거와 같은 폭압적 통치 양식을 반복하지 않을 수도 있다. 특히, 민주주의가 어느 정도 안착한 나라들의 경우 민주주의의 외피를 완전히 벗어던지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때 민주주의는, 러시아, 헝가리, 터키, 인도 등에서 확인되듯이, 선거라는 민주주의의 외양은 유지하면서도 시민의 기본권에 대한 온전한 보장이 없고 정치적 반대자들에 대한 교묘하거나 노골적인 탄압이 일상화되는 ‘비-자유 민주주의(illiberal democracy)’ 또는 ‘경쟁적 권위주의(competitive authoritarianism)’로 나타난다. 지금 세계 최초의 민주공화국인 미국도 트럼프 대통령의 2기 집권 이후 바로 이런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진단이 넘쳐난다. 그리고 이런 미국은 우리의 반면교사다. 물론 우리나라는 새 정부가 구성됨으로써 12.3 계엄령으로 크게 흔들렸던 헌정질서는 일단 회복되기는 했다. 그러나 민주당 정부가 극우로 치닫고 있는 대중들의 불만을 제대로 잠재우지 못해 5년 후에는 다시 미국처럼 더욱 강력한 극우 정부를 불러들일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 사실 윤석열 대통령은 앞선 민주당 정부가 경제 정책 등에서 보인 무능이 빚어낸 산물인데, 비슷한 일이 반복될 수도 있다. 만약 극우화한 국민의힘이나 그 후속 정당이 다시 집권한다면, 그때 한국의 민주주의는 이번과 같은 방식으로 회복하지 못할 수도 있다. 이런 가능성을 차단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 민주주의를 더 강하게 회복력 있는 상태로 만들어 민주주의를 파괴하려는 이런저런 시도들에 맞서 방어해 내야 한다. 설사 민주 정치가 ‘파시즘 바이러스’의 확산을 제때 막지 못하거나 파시즘적 정치 전술이 예기치 못한 승리를 거두게 될 때도 민주적 헌정질서만큼은 굳건하게 유지될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한다.      
2025-11-04 | hrights | 조회: 131 | 추천: 9
강대중/ 서울대학교 교육학과 교수   올해 국정감사는 사법권과 대법원이 가장 큰 주목 대상이었지만, 개인적으로는 보건복지위원회와 교육위원회에서 제기된 ADHD(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 약물의 오남용 문제에 시선이 갔다. ADHD 약물 문제는 의약품 관리의 차원을 넘어 교육 현장에서 확산되고 있는 ‘학교교육의 의료화’를 보여주는 단면이기 때문이다. 올여름 무렵부터 일부 언론에서 ADHD 치료제인 메틸페니데이트(상품명 ‘콘서타’ 등)의 처방이 급증하고 있다고 보도하며, 이를 우리 사회의 과잉 교육열과 병리 현상으로 연결 짓고 있기도 했다. 국정감사를 계기로 공개된 실태 자료는 몇 가지 점에서 충격적이었다. 첫째, 국민건강보험공단 자료에 따르면 ADHD 진료 인원은 2020년 7만9,244명에서 2024년 26만334명으로 3.3배 늘었다. 진료비도 같은 기간 652억여 원에서 2,402억여 원으로 급증했다. 20대 이상은 2만5,297명에서 12만2,614명으로 4.8배나 증가했다. 성인 10만명 이상이 ADHD로 진료받은 것도 지난해가 처음이었다. 30대가 6,194명에서 4만679명으로 크게 늘었는데, 그중 여성은 2,325명에서 2만624명으로 급증했다. '성인 ADHD'가 사회현상으로 급부상하고 있는 셈이다. 둘째, 초등학생 ADHD 진료 인원도 2021년 3만8,452명에서 2024년 7만6,873명으로 두 배 가까이 늘었다. 한 언론은 현장체험학습에서 교사가 손을 붙들고 다녀야 하는 아이가 과거에는 전교에 1명 꼴이었는데 요즘은 한 반에 2~3명 꼴로 늘었다는 교사들의 체감을 전하기도 했다. 교사들이 체감하는 ADHD 진료 대상은 훨씬 더 많다는 의미다. 셋째, 초등학생보다 중고생 환자 수는 더 가파르게 증가하고 있다. 그런데, 메틸페니데이트 10대 처방이 많은 지역이 사교육 과열 지역과 겹친다. 2024년 청소년 처방량이 많은 상위 5개 지역은 서울 강남구, 서울 송파구, 성남 분당구, 대구 수성구, 서울 서초구 순이었다. 이 지역에서는 입시 철인 10월과 11월에 처방량이 늘었다가 12월이 되면 감소하는 경향이 있다는 보도까지 나왔다. ADHD 약이 ‘공부 잘하게 해주는 약’이라는 황당한 말까지 유통된다. 넷째, 더욱 심각한 것은 개인이 도저히 복용할 수 없을 정도의 과다 처방 사례다. 복지위 백종헌 의원에 따르면, 2020년부터 2025년 6월까지 5년 6개월 동안 메틸페니데이트 최다 처방 환자들의 사용량은 총 20만 정이었다. 연간 1만 4,736정(하루 평균 40정)을 처방받은 사례도 있었는데, 가장 낮은 용량(5mg)이라도 식약처가 정한 성인 최대 안전용량(80mg)의 2.5배에 해당한다. 이 약들이 다른 경로로 다시 유통됐을 가능성도 있다. ADHD는 교육위원회 국감에서도 논란이 됐다. 전남교육청이 2020년부터 ADHD 처방 약을 무상지원하고 있는데, 관련 예산이 급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남교육청의 ADHD 심사 학생 수는 2020년 689명에서 2024년 2,110명으로 세 배 넘게 늘었다. 처방 약 지원 학생 수도 2023년 140명에서 2024년 321명으로 한 해 사이 두 배 이상 증가했다. 학생 1인당 최대 200만 원이 지원됐다. 약값 지원이 진단 의뢰 학생과 실제 진단 학생을 함께 늘리고 있는 것은 아니냐는 비판이 제기됐다.   KBC광주방송 영상 갈무리    한편, 세종시교육청은 2026년부터 초등학교 3학년 전원을 대상으로 ADHD 검사를 할 계획이라고 한다. ADHD를 조기 발견·치료해야 중·고등학교까지 부적응 문제가 이어지는 것을 막을 수 있다고 하지만, 낙인 효과를 걱정하는 목소리도 높다. 보도에 따르면, 전수조사를 추진하는 배경에는 교사가 학부모에게 개별적으로 ADHD가 의심된다고 전할 경우 아동학대로 민원의 대상이 될 것을 우려하는 교사노조의 요구가 있다고 한다. 국감장의 ADHD 약물 오남용 논란이나 전수조사 논란은 의료화 담론이 학교교육에 깊숙이 스며들고 있음을 보여준다. 학교교육의 의료화는 이제 예외적 사건이 아니라 일상적 풍경이 되고 있다. 2010년대 초 시·도 교육청에는 학습종합클리닉센터가 설치됐다. 경계선 지능 학생이나 다양한 심리·정서적인 어려움이 학업 부진으로 이어진 학생들에게 학습하는 힘을 회복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목적이다. 그런데, ‘클리닉’이라는 명칭에서 드러나듯, 이곳은 교사가 교실에서 일상적 교수 활동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를 진단, 처방, 개입하는 곳이다. 학교 바깥의 병원도 학습발달클리닉, 학습인지클리닉, 학습장애클리닉을 열고 의료적으로 교육 문제를 접근하는 것을 이제 흔히 볼 수 있다. 교육과 의료는 서로 다른 언어로 작동하지만, 돌봄이라는 차원에서 보면 매우 유사하다. 의료가 상처 입은 몸을 회복시키는 돌봄이라면, 교육은 마음과 관계를 성장시키는 돌봄이다. 전자의 돌봄이 진단과 처방을 기초로 한다면, 후자의 돌봄은 인지·정서·사회적 기술의 습득과 공동체의 참여를 토대로 한다. 오늘의 학교와 그 주변부의 사교육 현장에서는 이 두 언어가 뒤섞이며 교육의 언어가 후퇴하고 의료의 언어가 부상하고 있다. 학교교육의 의료화는 교육의 주체를 증상과 위험, 나아가 잠재적 위협의 존재로 해석하고, 학교생활의 어려움을 질환으로 번역한다. 의료의 언어가 관계, 배움, 경험, 성장과 같은 교육의 언어를 밀어낸다. 교사는 이상 행동을 식별하는 관리자가 되고, 교육청은 위험 예방의 논리를 앞세워 조기 선별을 위한 전수조사를 제도화한다. 인지 능력을 높이기 위해 ADHD 약물이 오남용되고 있다는 합리적 의심이 국감장에서 제기된다. 교육적인 돌봄과는 점점 거리가 멀어지는 우리 시대의 풍경이다. 약물과 검사가 몸을 고칠 수 있지만, 마음과 관계를 성장시키지는 못한다. 하물며 건강한 사람이 약물에 의존하면, 잠깐의 효과를 얻을 수 있을지 몰라도 감당하기 어려운 부작용이 뒤따른다. 결국 자기 자신을 잃을 수도 있다. 마음과 관계의 성장을 위해서는 학교와 교육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돌봄을 자기의 언어로 내장하고, 그 언어로 관계와 학습을 다시 연결해야 한다. 학습은 우리의 뇌를 변화시킨다. 이렇게 변화된 뇌는 같은 경험도 다르게 인식할 수 있는 더 큰 힘을 갖는다. 그런 경험의 변화가 관계의 변화를 불러오고, 관계의 변화가 사회를 다르게 조직한다. 이 변화를 촉진하는 힘이 바로 교육이다. 돌봄의 언어가 충만한 교육이 사회를 발전시키는 원동력인 이유다.  
2025-10-28 | hrights | 조회: 104 | 추천: 4
길윤형/ 한겨레 논설 위원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라는 구호를 내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재등장으로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만들어낸 자유주의적 국제질서 속에서 착실히 성장해 온 대한민국은 ‘국난’이란 말이 전혀 어색하지 않은 큰 위기를 맞게 됐다. 한국은 미국이 떠받쳐 온 ‘자유무역 질서’ 속에서 지금의 번영을 이뤄냈고, 미국과 맺은 ‘상호방위조약’(1953)을 통해 안보 문제를 해결해 왔다. 트럼프 대통령의 등장으로 이 두 기둥이 동시에 무너져 내리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제 세계는 미국·중국·러시아 등 여러 강대국이 자신들의 국익을 배타적으로 추구하면서 필요한 경우엔 ‘더러운 거래’마저 서슴지 않는 ‘다극 체제’의 시대로 접어들려 하고 있다. 충격적인 사태 – 조지아주 구금사태 이런 가운데 우리에게 매우 큰 충격을 안겨 준 사건이 발생했다. 미국 이민세관단속국(ICE)과 국토안보수사국(HSI)이 지난 9월 4일 새벽 조지아주 엘라벨에 위치한 현대차와 LG에너지솔루션의 합작 배터리 공장 건설 현장을 급습해 한국 국적자 317명을 포함한 475명을 체포·구금한 것이다. 이들은 배터리 공장을 가동하기 위해 꼭 필요한 장비를 설치하기 위해 입국한 단기 인력들이었다. ‘하늘의 별따기’라고 불리는 미국의 ‘전문직 비자’(H1B)나 ‘일반 주재원 비자’(L1)를 얻지 못해 ‘단기 상용비자’(B1)나 ‘무비자 전자여행허가’(ESTA) 등을 통해 공장 가동을 위한 작업을 수행해왔다. 이런 사정을 뻔히 잘 아는 미 이민당국은 문제를 합리적으로 푸는 대신, 단속 실적을 올리기 위해 장갑차·헬리콥터 등을 동원해 300명이 넘는 동맹국 국민을 수갑과 쇠사슬로 잡아 가뒀다.   사진 출처   지난달 12일 귀국한 이들이 증언한 체포 과정과 구금 시설 내의 상황은 우리의 상식을 초월한 수준이었다. <한겨레>의 9월 15일 3면 보도에 따르면 피해자들이 증언한 구금 시설의 상황은 △위생 △외부와 연락 △이의 제기 상황 설명 등과 관련해 국제 사회가 정한 ‘구금자 처우의 최소 규칙’(넬슨 만델라)을 어긴 것이었다. 이민세관단속국 요원 등은 쇠사슬로 노동자들의 팔·다리를 묶다가 부족해지자 ‘케이블 타이’를 사용했다. 구금 초기엔 많은 이들을 72인실에 몰아넣다가, 3~4일 정도가 지나자 순차적으로 4.96㎡(1.5평) 정도 되는 2인 1실 방을 배정했다. 심각한 인권침해 당한 한국인들 졸지에 구금된 이들이 가장 고통을 느낀 것은 배변을 보는 일이었다. 화장실이 하체를 가릴 천 하나만 둔 채 완전히 노출된 구조였기 때문이었다. 협력업체의 노동자 조영희(44)씨는 <한겨레>에 “생리 현상에 있어 인권 보장이 안 되는 상황이었다”며 “오픈된 화장실에서(이를) 해결할 수 없었다”고 했다. 바깥 공기를 쐴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은 하루 2시간씩 농구장 절반 크기의 ‘야드’에 나가는 것뿐이었다. <연합뉴스>가 9월 14일 소개한 한 노동자의 구금일지를 보면, 구금시설 안 침대 매트에는 곰팡이가 핀 상태였고, 치약·칫솔·담요 등 기본적인 물품들도 구금 이튿날에야 전해졌다. 물에서는 냄새가 나 입술만 축이는 노동자도 여럿이었다. 제공된 음식도 통조림·콩·토스트 정도였다. LG에너지솔루션의 협력직원 ㄱ씨는 <한겨레>에 “(내가) 무엇을 이렇게까지 잘못했는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반인권적 감금을 강하고 있는데, 누구도 사과하지 않은 현실이 크게 다가왔다”고 말다. 미국 정부의 법률 위반 이번 단속이 단순한 인권침해가 아닌 법 위반일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하는 목소리도 있다. 미국 인권변호사 캐럴라인 오코너는 9월 28일 <한겨레> 인터뷰에서 “영국 <가디언> 등의 보도를 보면 이민관세단속국은 B1을 가진 노동자가 체류자격을 위반하지 않은 사실을 알고도 자진 출국을 요구했다”며 이에 대해 “행정권 남용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고 했다. 미국의 ‘이민 및 국적법’에 따르면, B1을 가진 노동자는 미국이 아닌 본국에서 급여를 받으면서 최대 6개월까지 공사를 감독하는 일을 할 수 있다. 즉 체포·구금된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비자가 정한 업무 범위 안에서 정상적으로 일을 하던 중, 즉 아무런 잘못도 저지르지 않은 상황에서 며칠 동안 끔찍한 일을 당한 뒤 출국당하는 험한 꼴을 겪었다는 얘기다. 미국 정부가 자신들을 위해 공장을 설치하던 동맹국 국민을 대상으로 이런 반인권적이고, 위법적 단속을 벌인 것이라면, 그에 적합한 사과가 이뤄져야 한다. 사과를 구성하는 요소는 크게 세 가지다. 먼저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명확한 사실관계를 밝히는 것’, 두 번째는 상대가 ‘납득할 수 있을 만큼 용서를 구하는 것’, 마지막은 다시 같은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재발 방지 대책 등 후속 조처를 하는 것’이다. 이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제일 첫 단계인 ‘사실관계를 인정하는 것’, 즉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밝히는 것이다. 하지만, 미국 정부는 지금까지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사실관계를 인정한 적이 없다. 두 번째 용서와 관련해선 9월 14일 방한 중이던 크리스토퍼 랜다우 미 국무부 부장관이 박윤주 외교부 제1차관에게 “이번 사태가 일어나게 된 데 대해 유감”을 표했을 뿐이다. 피해 당사자들은 지금껏 아무 얘기도 듣지 못했다. 재발방지 대책 마련 이전에 필요한 것들 현재 모든 논의는 재발방지 대책 마련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외교부 발표에 따르면, 9월 30일 열린 첫 ‘한-미 상용방문 및 비자 워킹그룹’ 회의에서 미국은 “우리 기업의 대미 투자 과정에서 수반되는 해외 구매 장비의 설치·점검·보수를 위해 B1을 활용할 수 있”고 “ESTA로도 이와 동일한 활동이 가능하다는 점을 재확인”했다. 또, 대미 투자기업들의 비자 문제에 관한 전담 소통창구를 주한 미국 대사관 내에 만들고, 우리 공관과 미 이민당국과 사이에 접촉선을 구축해 협력하기로 했다. 이재명 정부는 이 정도 선에서 조지아 한국인 체포·구금사태를 마무리해선 안 된다. 이번 사태는 미국 정부가 비인도적이며 위법 가능성이 큰 단속을 통해 우리 국민의 인권을 심각하게 침해한 문제이자, 트럼프 정부가 진행 중인 안하무인식의 대외정책의 야만성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다. 이 전선에서 쉽게 물러나면 자칫 우리 경제를 파국으로 몰아갈 수 있는 3500억 달러 대미 투자나 우리나라를 미-중 경쟁의 최전선에 ‘소총수’로 내몰게 되는 주한미군 ‘전략적 유연성’ 교섭 등에서도 불리한 위치에 설 수밖에 없다. 우리 국민의 인권을 보호하고 우리의 소중한 국익을 지켜내기 위해 미국을 상대로 끝까지 할 말을 하며 물고 늘어져야 한다. 조지아 사태에 대해서도, 관세·투자 문제에 대해서도, 한미동맹의 미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2025-10-21 | hrights | 조회: 47 | 추천: 4
도재형/ 이화여자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한국 사회는 1997년 외환위기를 기점으로 신자유주의 체제로 전환되고, 강력한 노동시장 유연화가 진행되었다. 그런데 1990년대는 우리나라에서 4대 사회보험 체계가 확립된 시기이기도 했다. 우리는 서구 복지국가 시스템을 도입하면 산업재해, 실업, 노령, 질병 등의 사회적 위험에 성공적으로 대응할 수 있다고 예상했다. 그러나 이 전망은 실현되지 못했다. 이 시기 제도화된 사회보장 체계가 유연화된 노동시장에 조응하지 못한, 포드주의적 대량 생산 시스템에 기반한 서구 사회보험 제도를 근간으로 했기 때문이다. 즉 당시 도입된 사회보험 제도는 남성 정규직-풀타임 근로자를 수급자로 상정하고, 그가 종신고용 관행에 의해 한 기업에서 정년까지 일하다 은퇴한 후 퇴직금과 사회보험을 통해 노후 소득 보장의 혜택을 받아 가족을 부양하는 것을 전제하였다. 그러나 그런 일자리는 외환위기 이후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 정책이 본격화되면서 사라지고, 비정규직이 이를 대체했다. 그 결과로 역진적 사회보험 시스템이 출현했다. 노동시장과 소득 보장 체계 간의 비정합성이 확대되고 사회보험은 오히려 노동시장 내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기제가 되었다. 사회보험은 종사상 지위에 따른 차별적 보호 체계를 구성하고, 그 지위에 따라 차별적으로 적용됨으로써 제도가 차별을 강화하였다. 보호의 필요성이 덜한 정규직은 사회보험의 보호 아래 일하고, 그 필요성이 큰 비정규직은 도리어 그로부터 배제되었다. 사회적 위험 발생이 큰 집단이 위험에 대비하지 못하고 소득재분배 기능을 발휘해야 할 사회보험이, 분배의 불균형을 방관한 것이다. 이렇게 1990년대 이후 사회보장이 노동시장과의 정합성을 갖추는 데 실패한 결과의 가장 큰 피해자는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결과는 여성 고용의 증가 추세와 연결된다. 우리나라에서 여성 고용이 증가한 것은 1990년대 이후였다. 고용 형태의 유연화와 함께 사회서비스와 같은 여성 친화적 산업의 성장, 여성 취업에 대한 사회적 인식의 개선이 진행되었다. 여기에 여성의 고학력화와 성평등 의식의 고조, 자아실현의 욕구 증대와 같은 요인이 겹쳐 여성의 경제활동은 지속적으로 확대되었다. 이처럼 여성 고용은 늘었지만, 그 일자리는 위에서 본 유연화 정책과 겹쳐 비정규직에 편중되다 보니 사회보험의 보호 대상이 되기 어려웠다. 한국노동연구원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1998년의 외환위기, 2003년 신용대란, 그리고 2009년의 글로벌 금융위기 등의 위기 때마다 여성의 취업자 감소 폭이 남성보다 훨씬 심각하였다. 이 현상은 여성 일자리의 질이 취약하다는 점과 관련된다. 여성은 비정규직에 종사하는 비중이 높고 직장의 규모도 작다. 그런데 경영 위기 상황에서 기업은 비정규직과 같은 주변부 인력부터 정리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리고 불황에 취약한 것이 영세 중소기업이다. 따라서 영세 중소기업에 비정규직으로 취업한 여성들이 위기의 희생양이 된 것이다. 이런 여성 노동자의 상황은 지금도 여전하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의 조사 결과에 의하면, 2023년 여성 비정규직 규모는 2023년 456만 명으로 여성 임금근로자의 45.5%를 차지하며, 이는 남성 29.8%의 1.5배에 달한다. 특히 시간제 일자리 규모는 2023년 8월에 273만 명으로 전년 대비 17만 명이 증가하였고, 이는 2014년 204만 명보단 거의 70만 명이 늘어난 수치이다. 이들은 종사상 지위와 노동시간 등 인적 속성을 가입 조건으로 삼는 사회보험 체제에서 자주 배제된다.   사진 출처   여성은 비정규직, 특고, 프리랜서 등의 지위로 노동시장에 참여하고 경력 단절을 겪으면서 사회보험의 보호 대상에서 제외되거나 짧은 가입 기간으로 인해 낮은 액수의 사회보험 급여를 받는다. 1990년대 이후 비정규 중심의 여성 일자리는 정규직 중심의 사회보험 체계에서 배제된 채 확대된 것이다. 그런데 사회적 시민권이 부착되지 못한 노동은 노동시장에서 상품의 지위를 갖는 데 불과하다. 노동시장에서 여성 노동의 취약성은 사회보험 영역에서도 그대로 유지됨으로써 여성 노동자는 사회적 시민권을 획득하지 못하거나 불완전한 권리를 얻는 데 그치곤 한다. 즉 그들 상당수는 일하는 시민임에도 사회보험에서 시민권을 갖지 못한 채 여전히 미성년자로 남아 있다. 위와 같은 노동 현실을 개선하기 위한 입법적 노력은 「기간제 및 단시간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의 제정, 「파견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의 개정 등 비정규직 보호 입법을 이끌어냈다. 그리고 저임금 근로자의 소득을 올리기 위해 최저임금 인상 정책 및 근로장려세제의 확대 등이 추진되었다. 그런데 노동시장과 관련한 이러한 정책 또는 법적 대응에 관한 논의를 별론으로 한다면, 다양한 형태의 여성 노동에 사회적 시민권, 그중에서도 사회보험수급권을 부착하는 사회정책적 대응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여성 노동자가 다수인 특정 직종 등을 대상으로 특별법을 제정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기존 사회보장 제도를 보편적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먼저 특별법을 만드는 대응의 예로는, 2021년 제정된 「가사근로자의 고용개선 등에 관한 법률」과 「사회서비스 지원 및 사회서비스원 설립․운영에 관한 법률」을 들 수 있다. 이 두 법률은 여성들이 많이 일하는 사회서비스 업종의 노동자를 공식화하기 위한 특별법이다. 다음으로, 정규직 근로자 중심의 현행 사회보험 제도를 모든 유형의 노동자를 적용 대상으로 하는 제도로 개편하는 대응이다. 2020년 12월 발표된 「전 국민 고용보험 로드맵」에선 소득 기반 고용보험 추진도 포함되었는데, 이에 따르면 소득정보 기반으로 고용보험 체계를 전면 개편함으로써 취업 형태와 관계없이 일정 소득 이상인 일자리는 고용보험 가입이 가능하고, 사각지대 없이 모두 적용되게 된다. 계획대로 진행된다면, 고용보험은 건강보험이나 국민연금과 유사하게 관리 체계를 개인별로 변경하여 전 생애에 걸친 다양한 취업 형태 변화가 빠짐없이 적용될 수 있다. 위와 같은 조금 긴 안목의 입법 정책적 대응을 제쳐두고 당장 시급한 먼저 생각한다면, 사회보험 보호 대상에서 초단시간 근로자(1주당 15시간 미만 일하는 근로자)를 배제하는 문제를 들 수 있다. 백번 양보하여 업종이나 사업장 규모에 따라 사회보험의 적용을 배제하는 걸 받아들일 수 있다 하더라도, 단지 노동시간이 짧다는 이유만으로, 사용자가 관련 행정 업무에 응할 능력이 있는데도 그 노동자를 사회보험에서 배제하는 건 불합리하기 때문이다. 이는 초단시간 근로자의 경우 생업을 책임지지 않는다는, 과거의 편견에 기인한 것이며 오늘날 노동시장의 현실과 맞지 않다. 결국 사회보험에서 여성 노동자의 배제란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은 우리 사회에서 비정규직 노동자에 대한 차별을 해소하는 작업과 연결된다. 이 과정은 우리가 사회보험 시스템 도입 과정에서 한 실수를 교정하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2025-10-21 | hrights | 조회: 50 | 추천: 6
윤동호/ 국민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법학에 입문하여 한동안 이런 의문이 있었다. 진실은 하나이고 명백할 텐데, 왜 법적 다툼이 있고, 정해진 진실을 두고 변호사는 왜 돈을 벌까. 그 이후 형법을 전공으로 공부하면서 그 의문이 조금 해소되었다. 진실을 밝히기 어렵다. 과거의 일이고 인간의 인식능력과 기억력에는 한계가 있다. 바라보는 입장이나 관점에 따라 진실을 다르게 본다. 심지어 의도적으로 진실을 숨기거나 조작하기도 한다. 진실을 밝히기도 어렵지만, 밝혀진 진실이 형법이 금지하는 범죄에 해당하는지 판단도 간단하지 않다. 이는 사람의 행위에 대한 유·무죄를 판단하는 것인데, 행위의 상황과 의도에 따라 그 행위가 다양한 의미가 있을 수 있고, 또 이를 처벌하는 형법규정에서 표현된 문언의 의미는 해석관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예컨대 남성이 고속버스 안에서 음란동영상을 보면서 자위행위를 하던 중 그의 팔이 잠이 들어 있던 옆자리 여성의 신체에 닿은 경우 법원은 추행의 고의를 인정할 수 없다는 이유로 강제추행죄를 인정하지 않고, 공연음란죄가 성립한다고 봤다. 형사절차는 진실을 밝히고 그 진실이 범죄에 해당하는지 판단하는 절차이다. 범죄혐의의 유·무를 판단하고 처벌 가능 여부 및 그 정도(양형)를 결정하는 절차이다. 형사절차는 흔히 신고, 수사, 기소, 재판, 교정(집행)의 순서로 진행된다. 그런데 각 단계의 권한을 누가, 어떻게, 어느 정도로 행사하고, 다음 단계에 영향을 미치도록 할지는 나라마다 차이가 있다.   사진 출처   한국의 검찰청 검사는 형사절차의 중심에서 다양한 권한을 행사하면서 형사절차를 좌우해 왔다. 검사의 형사절차상 권한이 상대를 압박하고 함부로 할 수 있는 힘의 원천이다. 그런데 검찰공화국이란 말이 등장할 정도로 검찰청 검사의 권한 오·남용이 심각하여 결국 검찰청 폐지가 확정되었다. 내년 9월 검찰청은 중수청과 공소청으로 분리된다. 검찰청 검사의 수사권은 신설하는 중수청에, 기소권은 신설하는 공소청에 각각 부여된다. 검찰청을 폐지하고 이를 대신하거나 보완하는 기구를 신설시킬 법률들은 검사가 타인을 함부로 할 수 없게 하는 법률이라고 말할 수 있다. 경찰의 수사에 대한 검사의 지휘권을 2021년부터 폐지했다. 수사에 관한 경찰과 검찰의 관계를 상명하복의 지휘관계에서 상호협력관계로 바꾼 것이다. 이렇게 하면서 전건송치제도를 선별송치제도로 전환하고 경찰에게 불송치결정권을 부여했다. 여기에는 검사가 수사하는 경찰을 함부로 하지 말고, 그 판단을 존중하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불송치결정권은 경찰이 수사한 결과 범죄 혐의가 없다고 판단하면 사건을 검사에게 송치하지 않을 수 있는 권한이다. 2020년까지는 경찰이 수사 후 범죄 혐의가 없다고 판단하더라도 무조건 검사에게 송치해야만 했다. 송치하면서 기소나 불기소의 의견만 제시할 수 있었을 뿐이다. 경찰에게는 범죄 혐의 여부를 결정할 권한을 주지 않고, 검사에게만 준 것이다. 경찰은 사건을 검찰로 나르는 지게꾼에 불과했다. 그런데 중수청과 공소청을 신설하면서 전건송치제도를 부활하여 불송치결정권을 폐지하자는 주장이 나왔다. 사건의 신속한 처리와 수사경찰의 권한 오·남용에 대한 검사의 통제 필요성이 그 이유이다. 그러나 불송치결정권에 대한 검사의 통제장치는 현재도 마련되어있다. 진실을 밝히기 어려운 사건, 법리적 다툼이 있는 사건, 증거 확보에 어려움이 있는 사건 등은 경찰이 아니라 검사가 하더라도 신속한 처리가 어려울 수 있다. 오히려 불송치결정을 하면서 고소인에게 그 취지와 이유를 모두 통지해야 하는 것이 신속한 처리에 장애가 될 수 있다. 현재 검사는 불기소결정을 할 경우 그 취지만 고소인에게 통지하고, 고소인의 청구가 있는 때만 불기소결정의 이유서를 통지한다. 경찰도 불송치결정을 하면서 그 취지만 고소인에게 통지하고, 고소인이 요구할 때만 이유서를 통지하도록 할 필요가 있다. 경찰의 불송치결정은 잠정적 결정이다. 확정적인 것이 아니다. 이후 검사가 기소결정으로 변경할 수 있다. 불송치결정은 받은 피의자는 일단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다. 그러나 고소인이 이의신청을 하면 검사에게 송치되고, 검사가 기소결정으로 변경하면 다시 대응해야 한다. 따라서 경찰은 범죄 혐의 여부가 의심스러운 경우에는 불송치결정이 아니라 송치결정을 하여 사건 처리가 신속히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또한 하나의 사건에 대해서 불송치결정과 송치결정이 병존하는 사건은 분리하지 않고 모두 송치결정을 하여 검사가 일괄적으로 처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보안업체 직원이 근무 도중 협력사인 물류 기업의 사무실 냉장고에 있던 1,050원가량의 음식을 무단으로 먹은 것을 두고 법원이 절도죄를 인정하였다. 그런데 이처럼 지극히 가벼운 사건은 검사의 기소유예결정이 옳고, 나아가서 경찰이 이런 사건도 검사에게 송치하지 않을 수 있도록 제도적 설계를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 검찰개혁은 검사가 타인을 함부로 할 수 없게 하는 것 경찰의 불송치결정권은 존치가 타당하나 개선 필요    
2025-10-14 | hrights | 조회: 108 | 추천: 7
박상경/ 인권연대 회원   어릴 적 나의 놀이터는 골목이었다. 골목을 벗어나면 흙먼지 날리는 신작로가 나왔고, 논두렁을 뛰어다니며 메뚜기를 잡던 기억도 있다. 술래잡기하다 꼭꼭 숨는다고 친구와 골목을 벗어나 먼 시장까지 갔다가, 늦도록 돌아오지 않는 딸을 기다리며 애태우던 엄마한테 회초리로 종아리를 맞은 적도 있다. 저녁 무렵이면 집집의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밥 짓는 냄새가 온 골목에 퍼졌다. 우리 부모님이 농사를 짓는 것은 아니지만, 친구들 가운데는 부모님이 농사짓는 분들도 많았다. 비 오는 날 부침개라도 부치면 앞집 뒷집으로 접시에 담아 돌렸고, 아주머니들은 접시를 씻어서 주면, 다음에 얻어먹지 못한다고 접시를 그냥 손에 들려 보냈다. 김장하는 날이면 집집이 아주머니들이 모여서 시끌벅적한 가운데 담그곤 하였다. 어릴 적 이런저런 기억의 잔상들은 이렇게 땅에 발을 디딘 농경사회의 끝물을 보여준다. 어린것들이 미처 느끼기 전에 우리는 급격한 변화 속으로 내던져졌다. 산업화의 물결이 밀려오고 있었다. 마을은 점차 도시화하기 시작하여 논밭이 사라지고, 공장이 들어서고, 아이들이 뛰놀던 들판이 사라졌다. 친구들 가운데 공부는 잘하나 형편이 어려운 집 아이들은 일찍이 진로를 정하기도 했다. 남자아이들은 공고로 여자아이들은 여상으로. 여상을 졸업하고 은행원이 되어 가난한 살림에 보탬이 되는 아주 착한 딸의 진로였다. 고등학교 때 영어 선생님은 사우디아라비아에 진출하는 산업체에 스카우트되어 가기도 하였다. 세상은 바야흐로 자본이라는 새로운 질서로 편입되고 있었다. 이후 세상은 내가 느끼든 못 느끼든 더욱 빠르게 변했다. 산업사회를 거쳐 정보사회로 접어들면서 컴퓨터와 인터넷이 내 일상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중지에 굳은살이 박이도록 원고지에 볼펜으로 쓰던 기사를 처음 PC로 작성했을 때의 그 낯선 기분, 그런데 지금은 그게 일상이 되었다. 인터넷으로 연결되는 세상에서, 손안에 쥔 휴대전화로 일상을 살아가는 일이.   사진 출처 한데 지금, 이 순간에 내가 느끼는 건 어지럼증이다. 인공지능이라는 거대한 파도가 모든 것을 삼킬 것만 같은 세상에서, 내가 발을 딛고 있는 이 자리가 빙빙 돌고 있는 것만 같다. 예전의 변화가 삶의 도구를 바꾸는 것이었다면, 지금의 변화는 사고방식 자체를 뒤흔들고 있다는 두려움. 인공지능은 질문에 답하고,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며, 심지어 내 감정까지 이해하려 한다. 그리고 이 시대에 태어난 아이들은 태어날 때부터 스마트폰을 장난감처럼 다루며, 가상세계와 현실 세계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든다. 흙먼지를 마시며 자란 내가, 디지털 세상에서 태어난 아이들과 어떻게 소통할 수 있을까? 내게 '놀이'는 흙먼지를 뒤집어쓰거나 개울에서 물장구를 치고 나무에 오르는 것이었지만, 요즘 아이들에게 놀이는 화면 속에서 펼쳐진다. 내게 '배움'은 선생님의 목소리와 칠판에 쓰인 글자였지만, 요즘 아이들에게는 유튜브와 인공지능이 선생님이다. 얼마 전 모임에서 지인들과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농경사회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농경문화 속에서 보냈고, 청소년기에는 산업사회의 세례를 고스란히 받으며 어른이 되었어. 그런데 지금은 현기증이 날 정도로 격변하는, 종잡을 수 없는 시절을 살아가고 있잖아. 내가 살아온 감수성과 지금 이 시대 아이들의 감수성이 공감하는 지점을 만들 수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어. 아이들과 어떻게 소통할 수 있을까?” 그러자 반 농담 반 진담으로 한 지인이 이런 말을 했다. “그런 꼰대 같은 생각하지 마.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잘 지내. 잘 지내고 있어! 네 생각으로 아이들을 끌어들이려고 하지 마.” 농경사회의 느림, 산업사회의 역동성, 정보사회의 연결성, 지금 현기증 나는 인공지능 시대를 관통하는 감수성은 무엇일까? 한편으론 흥미진진한 기대감과 한편으론 “어떻게?”라는 물음. 아마도 그것은 불확실성 속에서도 서로를 잇고, 인간다운 길을 잃지 않으려는 ‘깊은 성찰이라는 감수성’이 아닐까?!    
2025-09-30 | hrights | 조회: 107 | 추천: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