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에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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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에가시’는 현장을 살아가는 활동가들의 목소리를 담기 위한 칼럼 공간입니다.

‘목에가시’는 김형수(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 총장), 신종환(공무원), 윤요왕(재)춘천시마을자치지원센터장), 이동화(아디 활동가), 이승은(경찰관), 이원영(용산시민연대 공동대표), 정한별(사회복지사) 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이동화/ 아디(아시아인권평화디딤돌) 활동가  2014년 6월 이전 활동단체에서 7년간 활동하며 모 재단의 ‘활동가 충전프로그램’에 운이 좋게 선정되었을 때의 이야기이다.  당시 ‘활동가 충전프로그램으로 팔레스타인에 여행을 가려는 나에게 주변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아니 왜 거길? 위험하지 않아?”하며 걱정어린 충고를 해주었다. 걱정하는 그들에게 “팔레스타인은 충분히 매력적이고 그 곳 사람들을 만나면 기를 받아.”하며 설명해도 주변의 걱정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 내가 그들의 걱정을 뒤로하고 방문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스라엘은 가자지구와 서안지구에 군사행동을 진행했다. 이른바 ’2014 이스라엘 가자침공‘이 벌어졌다. 현지에서 벌어지는 일방적인 인권침해 사태를 기록하며 국내 온라인 매체에 현지소식을 전했던 나는 한국을 포함한 많은 해외언론이 현장의 소식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무장 세력간 전쟁이라는 프레임에 이 사태를 끼워맞추고 있고, 그로 인해 이 사태의 원인과 결과가 두루뭉실하게 왜곡되고 있음을 깨달았다.  2016년도 단체를 창립하면서 시작한 팔레스타인 평화사업은 크게 3가지로 구분되어 진행되는데 그 중 하나가 ‘팔레스 타인 평화여행’ 사업이다.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팔레스타인 평화여행’ 사업은 직접 팔레스타인에 방문하여 참가자의 눈과 귀로 현장의 모습과 목소리를 파악하고 언론과 학습을 통해 만들어진 ‘테러와 안보의 프레임’을 걷어내는데 그 목적이 있다. 2018년 평화여행에 참여한 7인의 일반 참가자들은 한결같이 팔레스타인의 모습이 우리와 그리 다르지 않음에 놀랐고 이스라엘의 점령이 만들어낸 현지 삶의 제약과 억압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무엇보다 서안지구내에서 암처럼 퍼져나가는 이스라엘 불법정착촌과 군사기지가 얼마나 피해를 양산하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여행을 기획했던 입장에서 참가자와 현지 활동가들이 거리낌없이 서로 친구가 되어가는 과정을 지켜보며 여행의 원래 목적이상이 이뤄지고 있음을 확인 할 수 있었다. 팔레스타인 현지 풀뿌리 단체 활동가들과 함께 사진 출처 - 필자  2005년 겨울 처음으로 방문했던 팔레스타인에서 내가 가장 많이 들었던 현지의 이야기는 “직접 이곳에 와서 보고, 돌아가서 본 것을 그대로 이야기 해다오. 우리는 테러리스트가 아니다”였다. 그리고 2018년 한국 참가자들을 맞이한 현지의 활동가들과 주민들은 여전히 “우리가 필요한 것은 돈이 아니다. 정의다. 이 곳에서 보고 들은 것을 한국에 돌아가서 이야기 해다오”라고 한다. 여전히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외침은 국제사회와 언론이 만들어낸 ‘테러와 안보의 프레임’을 뚫지 못한 채 왜곡되거나 전달되지 못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강고한 군사력과 무력점령 속에 그들의 권리는 부정당하고 있다.  2019년 아디는 팔레스타인 평화여행을 준비 중에 있다. 사람들은 다시 이야기 한다. “아니 거길 왜? 위험하지 않아?” 맞는 말이다. 하지만 팔레스타인 지역이 위험할 순 있지만 팔레스타인 사람이 위험한 게 아니다. 도리어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위험에 처해 있다. 매년 한국인 만명이상은 팔레스타인 지역을 여행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그들이 방문한 예루살렘, 베들레헴, 헤브론 지역이 팔레스타인 지역인지도 그 곳에서 만난 사람이 팔레스타인 사람인지조차 모르고 있다. 무지는 공포를 양산하고 프레임은 공포를 반복 생산하고 강화시킨다. 아디의 팔레스타인 평화여행은 현지인들의 목소리를 듣고 삶을 목격하기 위함이다. 개인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팔레스타인에 직접 가보면 좋겠다. 그게 아디의 평화여행을 통해서건 아니면 다른 경우를 통해서이건 상관없다. 왜냐하면 그것이 한반도 평화문제만큼이나 심각한 이 지역의 평화를 마련하기 위한 첫 걸음일 수 있기 때문이다.
2019-05-01 | hrights | 조회: 1062 | 추천: 9
이회림/ 00경찰서  1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 당시 저는 서울시내 모 경찰서 형사과에서 성폭행 피해자 수사를 전담하고 있었습니다. 매일 출근하면 만나는 사건이 늘 강제추행, 준강간, 강간, 특수강간 등등 오로지 성범죄 사건만 담당하기를 2년이 넘게 되자 마음이 슬슬 힘들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가장 힘든 점은 바로 생존자들 앞에서 눈물을 참는 것이었습니다.  냉철한 판단이 요구되는 형사가, 누구보다도 마음이 아플 사람들 앞에서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는 것은 자격 미달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섣불리 동정하는 모습으로 오해받지 않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어떤 때는 책상 아래에서 손등의 얇은 살을 꼬집어 가며 감정을 추스려야 할때도 있었습니다. 금방이라도 자살을 할 것만 같은 분들을 만나게 되면 한동안 사적으로 만남을 이어가며 괜찮은지 확인하지 않으면 마음이 늘 불편했습니다. 그래서 형사과 3년째부터는 되도록 성범죄 사건을 전담하는 형사가 되지는 말아야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신문기사를 통해서 8세 소녀가 화장실 안에서 성인 남성에게 몹쓸 짓을 당한 사건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미 발생한 지 한참이 지나서 수사기관에서도 이미 조사가 다 끝난 후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제가 그 기사를 읽고 나서부터는 잠이 오지 않을 정도로 마음이 괴로워졌다는 것입니다. 머리속에 온통 그 피해 아동 생각뿐이었습니다. 그 아이가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지 않으면 마음이 편하지가 않을 것 같았습니다. 고민 끝에 아이가 심리치료를 받으러 다니는 해바라기 아동센터로 전화를 걸어 센터 직원에게 제 소개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무슨 일이든 도움을 주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며칠 후 아이의 아버지께서 저에게 직접 전화를 해 오셨고 그렇게 해서 우리는 인연을 맺게 되었습니다.  처음 만났던 때를 떠 올리면 지금도 코끝이 시큰해 옵니다. 그때도 저는 동정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으려고 탁자 밑에서 연신 손등을 꼬집어 댔습니다. 첫인사를 나누던 순간, 저는 다짜고짜 귀여운 무당벌레 모양의 초콜릿을 아이 앞에 불쑥 내밀었습니다. 무표정했던 얼굴에 환하게 조명이 켜지며 생기가 도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 날 이후로 그 아이가 웃을 만한, 좋아할 만한 선물을 구하는 것이 저의 즐거운 숙제가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병원을 함께 가는 것으로 만남을 시작하였지만 조금씩 다른 장소에서 만나기 시작했습니다. 어린이대공원, 롯데월드 등 놀이공원도 함께 다니게 되었습니다. 나중에는 아이의 두 살 터울 언니도 함께 만나 다 같이 시간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아이와, 아이의 언니 그리고 저, 우리 셋은 점점 친척처럼 가까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주말에 예쁜 카페에 모여 수다를 떨고 좋아하는 만화 캐릭터를 보며 따라 그리기도 하고 홍대에 있는 합주실을 빌려 드럼치고 기타 치며 놀면서 ‘츄러스’라는 제목의 밴드를 결성해 보기도 했습니다. 합주연습 1회로 끝난 일회용 밴드였지만요.  회색빛 도시가 답답하게 느껴지면 셋이서 혹은 둘이서 짧은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습니다. 겨울 바다를 보러 문무대왕릉이 있는 감포 바닷가로 가기도 했고, 4월이면 벚꽃구경을 하며 함께 꽃비를 맞아 보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재미나게 노는 동안 어느덧 10년이 훌쩍 지나갔습니다.  아이가 고3을 잘 버텨내고 대학에 합격하자마자 우리 셋은 벼르고 벼르던 해외여행까지 다녀오게 되었습니다. 가까운 일본의 오키나와로 2박 3일간 짧게 말이죠. 오키나와의 1월은 포근한 가을 날씨여서 참 좋았습니다. 조금 더 시간이 있었더라면 제가 제일 좋아하는 토카시키 섬의 아하렌 비치에도 데려가고 싶었는데 그러지를 못해 너무나 아쉬웠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오키나와에서도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어 왔습니다. 셋이 함께 해변에서 BTS의 <고민보다GO>를 부르며 ‘탕진잼 탕진잼~’하면서 안무를 따라 춰 보기도 했습니다. 어설피 ‘탕진잼’을 따라 추던 저에게 안무가 틀렸다며 디테일한 지적을 아끼지 않던 모습은 정말 두고두고 생각날 것 같습니다. 사진 출처 - 여성신문  10년 전, 제가 이 아이와 처음 인연을 맺게 되었을 때 마음속으로 생각한 것이 있었습니다. ‘내가 이 친구를 10년 뒤에도 만나고 있을까?’ 라구요. 이렇게 스스로에게 질문을 하고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10년 뒤에도 20년 뒤에도 이 친구와 계속 만나고 있는 장면이 자연스럽게 머릿속에 그려졌습니다. 너무나 당연하게 느껴졌던 것 같습니다. 인연을 끊게 될 이유라는 것이 있을까? 싶었습니다.  10년이 지나고 나서 되돌아보니, 저의 예감이 조금도 틀리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 친구가 제 곁에 있는 것이 든든합니다. 왜냐하면 전쟁과도 같은 피해를 입고도 용감무쌍하게 삶을 살아내고 있는, 그야말로 엄청난 생명력을 가진 생존자이니까요. 가히 어벤져스 급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입니다.  큰 수술을 받느라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가 되었을 여덟 살 무렵에도 좋아하는 만화 캐릭터들을 멋드러지게 그려주면서 각각의 캐릭터를 설명해주면서도 웃어댔고, 그 만화에 영향 받은 것이 틀림없는 실없는 농담을 저에게 툭툭 던지기도 했습니다.  제가 원스탑인권센터에서 피해자 조사 업무를 하고 있던 2012년 여름, 언니랑 둘이서 함께 사무실로 놀러온 적이 있었습니다. 사무실 안을 리모델링 중이여서 벽에 아무것도 없어서 썰렁한 분위기였습니다. 뭔가 디자이너의 숨결이 필요한 때였습니다. 그런데 이 친구가 그 황량한 하얀 벽에 붙어 서서는 슥슥 뭔가를 장난삼아 그리는 것 같더니만 제가 은행나무 잎을 꽂아 둔 전기 스위치 옆에다가 팬더곰 한 마리를 그려놓았습니다. 순간, 차가워만 보이던 흰 벽에 따뜻한 온기가 확 퍼지는 것 같았습니다. 특히 팬더곰의 축 처진 눈은 말이죠, ‘나도 너희들 아픔을 잘 안다, 그러니까 기운 내’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습니다.  대학생이 되면서는 어려움에 처한 타인을 돕는 일과 연관 있는 학과에 진학을 했습니다. 와~ 정말이지 도대체 얼마나 더 강해지려고 그러는지, 저는 앞으로도 더 곁에서 귀찮게 하고 같이 놀자고 보채면서 어깨너머로라도 좀 더 배워야겠습니다. ※위 내용은 ‘이회림 저. “미친놈들에게 당하지 않고 살아남는 법” - 청림출판- <제 5 장 당신은 피해자가 아닌 생존자>를 일부 인용, 재구성한 글임을 알립니다.
2019-04-24 | hrights | 조회: 890 | 추천: 13
이상재/ 대전충남인권연대 사무국장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5년이 지났다. 정부 기관을 비롯해 많은 지인의 개인 SNS에서도 추모하는 분위기가 넘쳐난다.  5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참사 당시 무능한 대응으로 일관했던 대통령은 교도소에 갔고 새로운 정부가 들어섰다. 사회적 참사 특별조사위원회가 만들어져 조금씩이나마 그날의 사고에 대한 새로운 사실들도 밝혀내 가고 있다.  이제껏 겪어보지 못한 큰 사고를 겪고 난 뒤라면 사고의 원인에 대한 철저한 분석과 진상조사와 함께 제대로 된 구체적인 재발방지대책이 세워지는 것은 당연하다. 이와 함께 사회적 차원의 반성과 변화가 이루어지는 것 또한 정상적인 국가와 사회의 작동방식일 것이다.  10대 학생이 대부분인 3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육지에서 그리 멀지도 않은 바다에서 배가 뒤집혀 서서히 가라앉고 있었는데 국가는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았고 구조를 위한 정상적인 조치가 작동하지 않았다. 이러한 세월호 참사의 전 과정은 우리 사회 전반에 대한 근본적인 개혁을 요구하는 무거운 신호였다고 생각한다.  특히 잘못된 판단과 무책임의 결정체와 같은 ‘선실에 가만히 있어라’는 어른들의 지시에 순순히 따른 결과가 더 큰 참사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세월호 사고는 우리 교육 현장에도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사진 출처 - 416연대  올해 1월 인권연대 교원 직무연수를 듣는 자리에서 만난 중앙대 김누리 교수는 독일 교육의 목표는 생태교육, 자아(性) 교육과 함께 저항권 교육이라고 설명했다.  실제 독일 노르트라인 베스트팔렌 주 교육부 지침 같은 경우는 “수용할 수 없는 지배 관계와 사회적 억압에 대한 저항능력”, “저항기술에 대한 지식”, “개혁적 혹은 혁명적 성격의 기획을 실현하는 능력”, “주어진 사회적 규범을 자유로이 받아들이거나 거부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다른 규범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학교에서 가르쳐야 한다고 아주 구체적으로 저항권을 명기하고 있다고 한다.  익히 알려진 것처럼 나치의 파시즘과 그로 인한 아우슈비츠 학살을 경험한 독일은 일찍부터 교육과정에 저항권 교육을 구체적으로 넣었고, 거짓 정치 선동을 분별하는 ‘선동가 판별 교육’과 잘못된 권위에 굴종하지 않는 ‘반권위주의 교육’까지 실시하고 있다고 한다.  독일의 아우슈비츠 비극이 저항권 교육을 낳았다면 세월호의 비극은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을까?  ‘세월호 이전으로 우리는 다시 돌아갈 수 없습니다.’란 말을 다짐처럼 하는 경우를 주변에서 많이 봤지만 과연 우리 사회, 특히 교육환경이 세월호 이전과 많이 달라졌는지는 의문이다. 입시 위주의 교육환경은 여전하고 교육의 내용도 별반 달라진 것이 없는 것 같다. 권리교육으로서의 인권교육은 드물게 만날 수 있지만 개인의 의무를 중요시하는 충과 효 사상을 중심으로 한 인성교육은 교육청마다 관련 부서까지 만들어서 장려하고 있다.  우리 헌법 10조는 국민을 권리주체로 국가는 개인의 인권을 확인하고 보장할 의무주체로 정확히 명시하고 있지만 정작 시민이 보장받아야 할 헌법적 권리가 무엇인지 우리 교육에서 배울 기회는 많지 않다. 다만 학교 다닐 때 징글징글하게 외웠던 국민의 4대 의무는 학교를 졸업한지 수 십 년이 지나도 명확하게 기억을 하고 있다.  독일과 같은 저항권 교육은 고사하고 대전의 일부 학교 교칙에는 교내 단체 행동은 이유를 불문하고 징계한다는 규정이 버젓이 존재하고 있다. 이 교칙대로라면 학생들의 미투 단체행동도 징계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얼마 전 광주에 재판받으러 간 전두환에게 법원 인근 초등학교 학생들이 ‘전두환은 물러가라’를 외쳐 화제가 된 적이 있다. 4.19항쟁 당시의 사진에서 본 초등학생들의 시위 모습이 생각날 만큼 인상적인 소식이었다. 하지만 일부 못난 어른들은 칭찬을 해주지는 못할망정 학생들이 구호를 외쳤다고 초등학교 앞에서 항의 기자회견을 하는 추태를 보여주었다.  세월호 참사에 대해서 ‘잊지 않겠습니다.’ ‘가만히 있지 않겠습니다.’라는 구호는 적절한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세월호를 잊지 않기 위해서는, 그와 같은 일이 두 번 다시 벌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말로만의 외침만이 아닌 실질적인 변화와 동참이 필요하다.  작년 우연한 기회에 미국의 한인 동포 2세 고등학생 두 명이 집에서 홈스테이를 한 적이 있다. 딸아이와 나이도 비슷해서 이런저런 얘기를 많이 나누었는데 학교 수업 과정을 서로 얘기하다 체육 수업이 화제가 되었다. 딸아이가 다니는 고등학교는 일주일에 2~3시간 정도 체육 시간이라고 얘기하자 미국에서 온 친구들이 놀라며 미국학교는 거의 매일 체육 시간이 배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딸아이는 그 이야기에 더해 우리는 시험 때가 되면 체육 시간에 자습을 한다고 말해서 미국에서 온 아이들을 다시 놀라게 했다.  독일의 학교에서 수영 수업은 필수라고 한다. 초등학교 2, 3학년부터 시작하는 수영 수업은 8, 9학년까지 계속되는데 마지막 단계인 인명구조 시험에 합격해서 자격증을 받고 나서야 끝이 난다고 한다.  세월호 이후 아이들의 안전을 위해서 이 사회는 무엇이 바뀌었는지 생각해보지만 마땅한 답을 찾을 수 없다. 그래서 세월호 참사 5주기는 슬픔을 넘어 답답한 마음도 같이 밀려온다.
2019-04-17 | hrights | 조회: 990 | 추천: 7
김형수/ 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 총장 「당신의 편견에 도전하라. 아니면 그것들이 당신에게 도전할 것이다.」 - 미국 드라마 스타트렉 엔터프라이즈 시즌 1기 4부 중에서 1. 우리에게 ‘장애’란 무엇인가?  장애는, 장애인이 된 것은 억울한 것인가? 자연스러운 것인가? 이름인가? 정체성인가? 개별성인가? 사회와 국가의 효과적인 지원을 위한 분류 제도인가? 분류제도일 뿐이라면 이름으로 쓰는게 타당한가? 장애인(人)은 생물학적으로 태어난 것인가? 사회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인가? 장애인은 비장애인과의 생물학적 차이를 밝히는 정의인가? 아니면 사회적인 가치와 구조적인 차별에 의한 사회정의인가? 장애인 단체와 기관들은 장애인의 이익을 대변하는 이익 단체인가? 장애인 문제 해결을 통해서 전체 인권 문제를 견인하려는 인권 단체인가? 서비스 기관인가? 운동단체인가? 이익 단체라면 장애인의 이익에 충실한가? 인권단체라면 장애인의 인권 문제에 충실한가? 서비스 기관이라면 전문성을 높이는데 충실한가? 운동단체라면 장애인 운동을 열심히 하고 있는가?  그런데 장애인이란 실재로 개개인을 특정할 수 있는 것인가? 아니면 개개인이 생물학적 위치, 사회경제적인 위치에서 동시에 가질 수 있는 여러 가지 정체성과 개별성 중에 하나인가? 장애인 제도 자체가 국가와 사회가 만든 정의여서 개인을 특정할 수 없는 중첩된 정체성이자 위치성이라면 그것을 무시하면 장애인의 문제는 해결되는 것인가?  간단히 말해서 여성 문제를 고민하지 않고 장애인 문제만 해결하면 장애 여성 문제는 해결 되는 것인가? 장애인 기관에 종사하는 많은 활동가 중 여성들도 많은데 그들에게 기계적으로도 동등한 조직적 권리와 구조를 가지는가? 그 많은 활동가들이 비정규직 계약직임에도 장애인 노동권을 대변해 줌에도 불구하고 왜 그들은 느슨한 노조 결성조차 못하고 있는 것일까? 장애인 기관들이 중증 장애인들이나 감각 장애인, 발달 장애인, 정신 장애인을 활동가로 고용하기를 꺼려하면서 국가나 기업에게 그것을 요구할 수 있는가? 현실적으로 어렵더라도 기계적으로 의식적으로 형식적으로도 추구해야 하지 않는가?  그런데 왜 지금은 활동을 잘하고, 오래했고, 기존의 권력과 인맥을 가진 장애인만이 현장에 진입하고 있는가? 왜 다양한 청년들이, 왜 다양한 젠더들이, 왜 사회적 이슈들이 장애인 문제와 융합되거나 교차하지 못하는가? 우리는 비장애인들에게, 국가와 사회에게 장애를 차이로 받아들이고 다양성을 인정하라고 요구하면서 우리는 정작 그들을 설득하고 이끌어 낼만큼 차이의 정치, 다양성을 실현하고 있는가? 아니 실천이라도 차치하더라도 사유라도 하고 있는가?  장애인이 태어나는 것이라면 다(多)문화 가족이나 자녀들을 호칭할 때 만들어진 다문화는 태어날 때부터 ‘다문화’인가? 스스로 ‘다문화’ 인가? 내부인이나 동질적인 사람들이 외부인이나 이질적인 사람들을 이름 붙이는 권력이 있을 때 ‘다문화’라고 누구를 부를 수 있는 것인가? ‘다문화’ 사람1)들은 분명히 신체적으로 이질적인데 왜 이들은 장애란 이름을 쉬이 붙이지 않고 문화란 이름을 붙이는가?  장애인의 정치 권력이 중요하다면 장애인 등록이 가능한 사람을 확대하는 것이 중요한가?  한정된 예산과 지원을 효율적으로 쓰기 위해서 ‘장애인’에 대한 진입을 어렵게 하는 것이 중요한가?  장애가 ‘정체성’이라면 당연히 서로 다른 장애인들끼리 소속감과 연대의식이 생겨야 하는데 장애인 대학생이나 교수들과 시설의 장애인들은 정말 서로의 연대의식과 소속감을 가지고 있을까? 동질감과 연대의식이 있다면 왜 많은 장애인 단체에서 지적 자폐성 장애인이나, 정신 장애인2), 감각 장애인을 같은 동료로 선발하는 운동이나 구체적인 정관을 만들지 않고 있는 것일까?  아주 소수를 빼고는 단체장들이 거의 남성이거나 지체 장애인이거나 척수 장애인이거나, 고학력자들3)인데 이들은 결국 젠더 차별의 결과로, 중증 장애, 장애유형에 따른 사회적 자산에 의한 차별의 결과가 아닌가?  우리는 그동안 노인, 어르신의 사회 문제가 인권문제가 장애인 문제와 동일하다 인식하면서도 현실에서는 지하철에서 승강장에서 서로 갈등하고 혐오하지 않는가? 우리는 왜 어르신들을 설득하지 못하고 유아차를 끄는 사람들과 뜨겁게 연대하지 못했을까? 왜 우리는 특수학교를 지어달라고 무릎을 꿇는 부모들에게 자립을 꿈꾸는 우리가 먼저 나서서 싸우겠다고 학교 현장의 혐오와 차별에 저항하겠다고 못하는가?   출처: 미디어 제주 2. 우리에게 젠더란 무엇인가?  젠더는 사회적으로 구조화된 남성 및 여성의 역할, 신념 체계 및 태도, 이미지, 가치, 기대 등을 말한다.4) 우리는 역사적으로, 직관적으로, 경험적으로, 학문적으로, 통계적으로, 다른 사회의 소수자가 가졌던 차별과 소외의 문제가 장애인의 그것과 같음을 깨닫고 있다.  우월함과 열등함에서 여성의 문제가, 정상과 비정상의 논의에서 동성애 문제가, 공포와 무지의 난민 문제 –그렇게 좋으면 너희가 데리고 살아라– 가 장애인 문제와 강력하게 연결되고 같이 작동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 그러나 실제적이며 구체적으로 단체에서 그 아는 것을 실천하며 사회를 이끌고 있는지는 사회를 보아야 한다. 장애인 단체나 활동가들이 이익 단체가 아닌 ‘인권’이란 이름 아래 당당히 일을 하려면 젠더 의식과 젠더 이슈의 실천은 충분 조건이 아닌 필수 조건이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장애인 단체는 아직까지 성평등도 아닌 한참 뒤쳐진 ‘양성평등’도 제도적, 절차적으로 기대하기 어렵다.  성도우미 논제에서의 남성 중심성, 이성애 중심 때문에 장애여성은 욕구없는 존재가 되어버렸고 돌봄 노동의 여성 편중과 모성 중심의 구조는 젠더 문제에서 장애인을 착취의 주체인 동시에 도구로 전락시켜 버렸다. 3. 우리에게 상호 교차성 다양성은 무엇인가?  작금의 헐리우드 영화들은 'PC(Political Correctness) 운동'이 한창이다. 한국말로 '정치적 올바름'이란 뜻인데, 차별적인 언어나 활동을 중립적으로 바꾸자는 운동으로서 여성이나 소수인종 문화를 영화의 소재나 주인공으로 삼는 운동이다. 때로는 작위적 해석과 억지스러움으로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기획이나 각본 단계에서의 당사자의 참여와 전문가들의 자문으로 질이 높은 작품이 나오기도 한다. 그래서 영화에서도 성평등이 이루어져 있는지를 평가하는 테스트가 있다. 바로 ‘벡델 테스트’이다. ‘벡델 테스트’란 1985년 미국의 여성 만화가 엘리슨 벡델(Alison Bechdel)이 얼마나 남성 중심의 영화가 많은지를 측정하기 위한 방법이다. 1.이름을 가진 여성 캐릭터가 두 명 이상 등장 할 것 2. 이들이 서로 이야기를 나눌 것 3. 남성와 관련된 주제 외에 다른 대화를 나눌 것. 이럼에도 장애인을 비하하거나 혐오할 수 있음으로 영국 연극에서 나온 스핑크스 테스트란 것도 있다. “무대 중앙에 여성이 있는가?”, “여성 캐릭터가 수동적이기보다 능동적인가?”, “여성 캐릭터가 호소력이 있고 복잡한 인물인가?” 등 극작가가 스스로에게 물을 수 있는 질문들로 구성된 것이다. 여기서 여성 대신에 ‘장애인’을 넣어도 참으로 유효하다.  장애인 부부들 특히 발달 장애인, 정신 장애인끼리 제도적으로는 결혼이 인정 받고 있지만 가족들에게 터부시되고 사회적인 금기가 되어있는 것처럼 동성애 부부들이 역시 그러하고 장애인 부모나 게이 레즈비언 부모들이나 현행법상 아이들을 입양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니 동성애 결혼 합법화에 장애인들이 적극 나서야 하지 않겠는가? 외국에 장애아동을 입양보내는 것보다 동성애 커플들이 장애아동을 입양해서 잘 키우는게 더 인권적이지 않는가? 장애인 당사자가 동성애자라고 하면 우리 기관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그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에 아무 거리낌없게 지원할 수 있겠는가?  불과 10년전에만 해도 재활난민이란 이름으로 전세계에 이민을 갔던 한국의 장애인 부모들, 이제 외국의 장애인들이 전쟁 때문에, 고문 때문에 한국에서 난민 신청을 하는데 한국의 우리들은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5)  결국에는 장기적으로는 대부분의 활동지원서비스에 대학생, 외국인 노동자, 북한주민들이 참여하게 될텐데 그들이 인권을 외면한 채로 질 좋고 인권적인 서비스를 요구할 수 있을까? 언제까지고 외부의 그들에게 연대와 도움이 필요할 때만 연대와 도움을 요청할 수는 없다. 우리가 먼저 문을 열고 만나며 공부를 해야 그들에게도 ‘문을 열어달라, 만나달라 공부해라’ 요구할 수 있을 것이다.  장애인 문제가 모든 비장애인들이 장애인이 되었을 때, 장애인 가족이 되었을 때, 장애인과 만났을 때 발생하는 ‘비장애인’ 의 문제이듯이 모든 인권의 문제는 모든 장애인의 문제이다. 장애인의 발생이 자연 발생적인 차이의 문제라면 장애인 단체가 이익 단체가 아니라 인권단체라고 한다면 우리는 서로 교차해야 하고 만나야 한다. 설사 그것이 내키지 않고 싫고, 귀찮다 하더라도 그래야 한다. 그래야 그게 차별철폐이기 때문이다. 다중 억압에 있는 장애인 문제를 장애라는 억압문제만 덜어 낸다고 해결 되는 것인가? 애초부터 장애라는 문제는 한 인간에게서 분리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닐뿐더러 다른 억압받는 사람들에게서 이를 해결해 준다고 그 사람을 억압에서 해방한 것인가? 장애 억압이든 다른 억압이든 중요한건 사람에 대한 억압이고 차별이란 것이다. 사람은 실체가 존재하지만 장애란 실체는 그저 개념일 뿐이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가 만든 개념에 집중해야 하는가? 실체에 집중해야 하는가? 한때 사회 이슈를 선점하고 사회운동의 신선한 자극을 주었던 장애인 운동이, 장애여성의 존재성을 제일 먼저 이끌어냈던 장애인 운동이 퇴행하는 것은 바로 장애인 운동이 사회 문제와 인간 차별 혐오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1)「“교육현장서 ‘다문화’란 말 쓰지 말자”」 (경향신문, 2019.02.21.) ‘다문화가족’이라는 용어를 교육현장에서 쓰지 말자는 제안이 나왔다.전남도의회 교육위원회 최명수 의원(민주당·나주)은 21일 “전남도교육청 업무보고에 다문화가족 학생들에 대한 지원사업 개선이 필요하다”며 이같이 주장했다. 최 의원은 “ ‘다문화가족’이라는 말은 ‘국제결혼’ 또는 ‘혼혈’이라는 차별적이고 부정적인 인식이 들어 있다”면서 “ ‘다문화가족’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말자”고 했다.최 의원은 또 “다문화가족 학생은 필요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취약계층으로 분류돼 지원사업에 참여하게 되면서 해당 학생들의 거부감이 있고, ‘다문화’란 명칭이 학생의 호칭과 별명으로 변질되는 등 문제점이 많다”고 개선을 요구했다. 2)한 유명한 정치인의 정신장애인 비하 발언에 대하여 공식적으로 문제제기를 할만큼 인식은 민감해졌으나 그 민감해진 인식만큼 구체적인 실천을 하고 있는가는 다른 문제이다. 3)한편으로 장애인 고학력자들은 종종 다른 장애 유형들의 관계자들에게 혐오당하거나 소외당한다. 4)출처: www.nonviolence.wri-irg.org/ko/resources/2011/jendeolan-mueosinga?language=ko 5)참조 「11살 파키스탄 소년, 국내 첫 난민 장애인 등록」 세계일보 2018-07-10
2019-03-29 | hrights | 조회: 1163 | 추천: 4
서동기/ 인권연대 간사 새 정부 출범 이후 공휴일이면 무슨 날인가를 슬쩍 보고 정부기념식을 챙겨본다. 올해 3·1절 기념식은 더욱 기대되었다. 2017년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 느꼈던 감동과 벅참을 이번 3·1절 기념식에서는 어떻게 만들어낼까 하는 기대와 궁금증도 있었다. 올해 초부터 정부와 언론이 대대적으로 홍보했던 3·1운동 100주년을 드디어 맞이했기 때문이다. 슬프게도 기대는 당황과 실망으로 서서히 바뀌었다. 래퍼 비와이씨의 공연 때 화면에 잡힌 영화 ‘아이 캔 스피크’의 실제 모델 이용수 할머니와 김정숙씨의 당혹스런 표정들에 격하게 공감하다가 가수 인순이씨의 ‘아름다운 강산’ 공연에 이르러 실망은 절정에 달했다. 행사 내내 비딱하게 걸려있던 중앙무대 위의 대형 태극기처럼 행사는 뭔가 아쉬웠다. 다양한 공연들이야 좋다면 좋겠지만, 딱 맞아 떨어지는 느낌을 주지 못하는 공연들과 어수선하게 느껴지는 구성들은 아쉬움만 더해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짙은 여운을 남긴 장면은 3·1독립선언서를 현대말로 쉽게 풀어써 여러 시민들이 함께한 낭독이었다. 국민의례나 애국가 제창 이전에 함께 읽은 것도 좋았다. 함께 읽고 그 내용을 나눌 때 떨림은 살아났고 여운은 짙었다. 쉽게 풀어 쓴 선언문을 검색해 천천히 읽어보면서 3·1운동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는 것을 서서히 깨달았다. ‘오등(吾等)은 자(慈)에 아(我)’를 동그라미치고 달달 외우며 짜증을 내던 것이 끝이었다. 시험을 위해 빠르게 외우고 문제를 풀기에 바빴고 금세 잊어버렸다. 3·1독립선언이 ‘인류가 모두 평등하다는 큰 뜻을 분명히 하고, 우리 후손이 민족 스스로 살아갈 정당한 권리를 영원히 누리게 할 것이다.’로 시작하여 ‘마지막 한 사람까지, 마지막 한 순간까지, 민족의 정당한 뜻을 마음껏 드러내라.’는 멋진 약속으로 끝났다니. 내용과 떨림이 이제야 눈에 들어왔다. 사진출처-YTN 감동은 그들의 이야기와 고민들을 알아갈 때 지속된다. 한겨레신문은 올해 초부터 ‘1919 한겨레’ 지면을 구성해 100년 전 하루하루를 날짜에 맞춰 보여주고 있다. 고종이 죽었을 때 나도 모르게 한숨이 쉬어지고 2.8독립선언의 그날에는 적국 일본의 한 가운데 모인 청년들을 떠올리며 가슴이 뛴다. 그 하루들을 따라가니 당시의 이야기들은 조금씩 살아난다. 그들의 이야기와 암중모색이 지면에서 일상으로 스며들기도 한다. 최근에는 올해 3월 1일 출간된 권보드래 교수의 <3월 1일의 밤>을 읽는다. 남녀노소 ‘민족자결’과 ‘독립만세’를 말하고, 황해도 연백군 혜성면의 한 농민이 파리강화회의를 말하며 면장을 설득했다는 100년 전 그날들의 기록을 읽으면, 장삼이사 무명씨들의 이야기는 어떤 장면이 되어 살아난다. 좋은 기념은 무엇일까? 역사적인 해를 맞아 새로운 백년을 준비하는 최고의 방법은 그들의 고민을 기억하며, 이어받아 그들의 외침과 고민들을 우리의 오늘과 연결시키는 것은 아닐까. 그 시작은 아는 것이다. 새로 쉽게 풀어쓴 독립선언서부터도 좋겠다. 한겨레신문을 구독하며 1919년의 그날들을 따라가는 것도 좋고, 새로 나온 <3월 1일의 밤>을 함께 읽는 것도 좋을 것 같다. 한 세기를 지나 새로운 백년을 맞이하기 위해 우리 다 같이 3·1운동을 읽자.
2019-03-08 | hrights | 조회: 1225 | 추천: 9
이동화/ 아디(아시아인권평화디딤돌) 활동가 2008년 여름, 주한 미얀마대사관 앞에서 소수의 한국 활동가들과 미얀마 활동가들은 미얀마의 군부독재를 규탄하며 시위를 거의 매주 진행했다. 당시 무리중 한 명이었던 필자도 미얀마의 민주주의와 아웅산 수치여사의 가택연금 해제를 소리높여 외쳤으나 큰 희망을 갖긴 어려웠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2015년 아웅산 수치여사가 이끄는 NLD 정당이 총선에서 압승을 거뒀고 53년간 이어온 군부독재는 막을 내린 듯 했다. 미얀마의 민주주의를 바랐던 국내외 시민들과 활동가들은 열광하며 희망에 부풀었다. 2016년과 2017년 미얀마에서 벌어진 로힝야족에 대한 대대적인 군사작전과 인권침해는 인류사에 기록될 최악의 비극이고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수천 명의 민간인들이 집단 살해되고 여성들은 성폭행을 당했으며 영유아들도 무자비하게 살해되었다. 불과 몇 개월만에 100만명에 가까운 로힝야 사람들은 난민이 되어 최빈국 방글라데시 국경 부근에 머물러 있다. 유엔을 포함한 국제기구는 이를 인종청소와 제노사이드(집단학살)라 규정하며 난민보호와 진상규명을 미얀마 정부에 요구했다. 그러나 아웅산 수치는 침묵과 무대응 더 나아가 로힝야족의 인권탄압 자체를 부인했다. 국제사회의 진상조사 방문도 거부하고 사고지역의 접근을 막으며 외부로부터 오는 인도주의 구호마저 막았다. 국제사회의 신망을 받았던 아웅산 수치는 소극적 침묵자에서 적극적 가해자로 변해버렸다. 지금도 로힝야 난민의 강제송환을 추진하며 로힝야의 비극에 가담하고 있다. 2013년 3월 미얀마 중부 인구 40만 규모의 도시 메이크틸라에서는 도시에서는 무슬림을 대상으로 한 집단학살이 발생하여 단 3일만에 100명이 넘는 사망자, 1300채 이상의 가옥 전소, 13000명의 피난민을 낳은 끔직한 폭력사태가 발생했다. 폭력과 광기에 휩싸였던 메이크틸라는 우리내 역사속 일제강점기 이후 민간인 학살, 제주 4․3학살과 그 모습이 유사했다. 이 사태가 최고조에 달했을때 거의 700명이 넘는 메이크틸라 무슬림은 칼과 무기를 든 가해 집단을 피해 밤중에 도시 외곽의 야다나우 사원으로 피신했고 사원의 주지스님인 우친페인 스님은 그들을 기꺼이 받아주었다. 그리고 무슬림의 피신소식을 들은 가해집단은 야다나우 사원으로 쳐들어가 주지스님인 우친페인 스님에게 당장 무슬림들을 내놓으라고 하였고 우친페인 스님은 “나를 죽이지 않고는 절대 내어 줄 수 없다”라고 단언하며 당신의 목숨을 걸고 피신한 무슬림을 보호했다. 그리고 더 많은 무슬림들이 이 사원에 피신하여 1000명에 가까운 무슬림들이 살해의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영화와 같은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우친페인 스님은 현재 아시아인권평화디딤돌 아디가 메이크틸라 평화세대를 양성하기 위한 ‘메이크틸라평화도서관’ 사업에 함께하며 사원의 땅 일부를 도서관 부지로 흔쾌히 기부해주셨다. 우친페인 스님 사진 출처 - 필자 미얀마에서 들려오는 로힝야의 소식은 평화로운 불교국가에서 도대체 가능한 일인가 싶을 정도로 끔찍하고 안타까운 소식이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한때 국제 민주주의 연대운동의 정점이었던 아웅산 수치가 로힝야 인권탄압 사태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고 여전히 미얀마내 반로힝야 반무슬림정서에 기대고 있다는 점이다. 한편으로 미얀마 내부에서 우친페인 스님처럼 종교(이슬람/불교)를 넘어서 생명의 위협을 피해 자신에게 피난온 이들을 목숨을 걸고 지키려는 이들도 존재한다. 2008년 미얀마 활동가와 함께 미얀마의 민주주의를 외쳤던 여러 사람들에게 현재 미얀마의 모습은 절망일 수도 희망일수도 있다.
2019-02-27 | hrights | 조회: 1031 | 추천: 9
이회림/ 00경찰서  사하라에서의 사막 투어는 현지의 투어 회사를 통해 신청하여야 합니다.  사하라는 모로코 마라케시 시내에서 8시간 정도 차로 이동을 하여야 갈 수 있기 때문에 차 안에서 전혀 모르는 사람들과 함께 시간을 보냅니다. 저는 독일인 대학생 커플, 미국인 커플, 이탈리아인 커플 이렇게 세 커플과 함께 차에 올랐습니다. 우리 팀 커플들은 모두 성격들이 차분하고 조용한 편이라 차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라고는 베르베르인 투어 가이드 아저씨의 새된 목소리뿐이었습니다. 북아프리카의 척추라고 불리는 광활한 아틀라스 산맥을 넘어 한 5시간 정도 지났을 때, 11세기에 건설된 베르베르인의 거주지 ‘아인트 밴 하두 성채’에 도착했습니다. 붉은 진흙으로 만들어진 도시인데 그곳을 걷고 있노라니 제가 마치 미드 ‘왕좌의 게임’의 칼리시가 된 기분이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곳에서 ‘왕좌의 게임’을 촬영하기도 하였답니다. 이외에도 영화 ‘글래디에이터’, ‘아라비아의 로렌스’, ‘인디아나 존스’ 등의 촬영지이기도 했습니다.  성채 꼭대기로 올라가는 동안 베르베르인 노부부가 당나귀를 가운데 두고 서서 부부싸움을 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는데 할머니가 당나귀를 가리키며 일방적으로 할아버지를 향해 마구 화를 내시더니 휙 가버렸습니다. 할아버지께서는 머쓱하셨는지 말도 안 통하는 저에게 어깨를 으쓱하시면서 무슨 말을 하셨습니다. 뉘앙스로 추측컨대 ‘아휴~우리 마나님 잔소리에 진이 다 빠지네~ 별것도 아닌것 가지고..’ 뭐 이런 거 아닌가 싶습니다. 저는 그런 할아버지가 너무 귀여워서 몰래 사진 한장 찍고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아인트 밴 하두’ 관광을 끝낸 후 다 함께 점심식사를 했습니다. 그제야 우리는 어색함을 깨고 대화를 시작하였고 조금씩 서로를 알아가게 되었습니다. 독일 대학생 커플은 정말 수줍음이 많았고 이탈리아 커플은 서로에게 장난 잘 치는 알콩달콩 귀여운 커플이었습니다. 미국 커플은 마치 토크쇼의 사회자처럼 분위기를 이끌고 유머감각은 넘쳤습니다. 점심을 다 먹고 다시 차로 3시간 정도를 달리니 길 한 가운데서 덩그러니 낙타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다들 처음으로 사막에 와 낙타를 타게 되니 입가에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낙타를 타고 또 2시간 정도 정처없이 가다보니 서서히 해가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화장실도 가고 싶을 즈음에 도착했다는 소리가 들려 반가웠습니다.  숙소는 큰 텐트였고 안에 침대와 테이블이 있어 굉장히 아늑했습니다. 화장실과 욕실도 있었고 사막 한 가운데에서도 이렇게 물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습니다. 다 같이 둘러 앉아 모로코 전통 민트차를 마시며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땅거미지며 하늘이 어두워지자 한국에서는 희미하게 보이던 화성이 너무나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흥분한 나머지 ‘Look! That is Mars’ 라고 소리를 쳤습니다.  평소 별보기를 너무나 좋아해서 저도 모르게 입이 트였는지 어느 때보다도 말이 많아졌습니다. 다들 제가 마구 감탄사를 내뱉어가며 이건 무슨자리, 저건 무슨자리 이러는 것을 보며 놀라는 눈치였습니다. 의외로 저보다는 별자리에 대해 모르고 있기에 자신감 넘치게 이 별, 저 별 잘 설명해 주었습니다. 고등학교때 천체관측 동아리 회장 출신인데 이 정도는 해야겠지요?  저녁 식사를 마치자마자 8시부터 저는 별바라기답게 모래언덕 꼭대기에서 밤을 지샐 준비를 하였습니다. 다행히 입고 간 패딩점퍼가 침낭처럼 따뜻했기에 2월 초 사막의 밤은 그리 춥지 않았습니다. 사구 꼭대기에 올라가니 저처럼 별을 보러 온 커플들이 하나 둘 보였는데, 밤 10시경부터는 모두 숙소로 돌아갔습니다. 커플들이 떠나고 나서는 오롯이 혼자 넓은 사구 꼭대기에 드러누워 별들이 고요히 흐르는 것을 지켜보았습니다. 아,,, 정말 말로 표현하기 힘든 아름다운 밤하늘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정말 너무 믿기지 않을 만큼 행복해서 연신 혼잣말로 ‘와. 이거 뭔데 진짜.. 와.. 이거 뭐야 진짜.. 이게 말이 되나,,’ 이러고 있었습니다.  단순히 아,, 좋다 너무 멋있다,, 이런 정도가 아니라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말도 안되게 신비하고 아름다워서 그런 반응이 저절로 나왔습니다.   사진 출처 - 필자  사하라의 2월 밤,,  서늘한 미풍이 느껴지는데 얼굴에 와 닿는 느낌은 부드럽고 달콤했습니다. 오리온자리가 제 얼굴 바로 옆에 누워서 넓게 펼쳐져 있었는데 그 존재감이란, 한국에서도 자주 보던 오리온자리였음에도 불구하고 사하라에서는 정말 큰 거인이 옆에 누워있는 것처럼 더 멋지고 든든했습니다. 이럴때 제가 마음에 품고 있던 사람이 옆에 있었으면 더 좋겠다는 마음도 생겼다가, ‘아니다,, 이런 순간에는 오롯이 혼자 즐기는 것이 가장 순수하고 좋다’는 생각이 들기도했습니다. 나와 우주, 나와 별, 나와 달. 나와 내 몸 아래에 있는 모래의 촉감. 그리고 너무나 부드럽고 달콤하기까지 했던 밤공기의 느낌... 그리고 밤의 소리.. 공기 속에 소리가 있는 듯이 느껴졌습니다. 밤이 흐르고 공기가 흐르고 시간도 흐르고,, 별도 흐르고,, 이런 광경을 뭐라고 묘사해야 될지 모르겠습니다. 이 세상을 만든 커다란 존재가 저에게 깜짝 선물을 주신 것 아닌가 싶었습니다.  ‘야~ 너 그동안 많이 힘들었지, 내가 니 마음 안다, 오늘은 너만을 위한 최고의 무대를 준비했으니 실컷 즐기렴. 자~ 여기!!’ 이러시면서 말입니다.  우리가 일상 속에서 크고 작은 갈등을 마주하고 거기에 몰입되어 있을 때는 우리 자신이 마치 현미경이 된 듯 시야가 좁아져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도 아주 어두운 오목거울로만 대상을 바라보듯이 말입니다.  그런데 여행, 특히 다른 나라로의 여행은 비행기를 타는 것부터 시작해서 망원경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과 비슷합니다. 거창한 표현으로는 미시세계에서 거시세계로의 전환인가요? 진부한 이야기일 수 있지만 여행을 통해서 모르고 있던 내 모습을 발견하고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가 넓어지는 것은 확실합니다. 특히 정신적으로 너무나 힘들 때는 의사선생님의 약 처방 보다도 대자연의 속삭임을 느낄 수 있는 이런 여행이 최고의 특효약인 것 같습니다.  일상에서 겪은 힘든 일들이 일단 여행의 세계로 들어오면 거울을 통해 어렴풋이 보인다고나 할까요? 힘든 기억이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지만, 불투명한 유리판을 앞에 몇 장 갖다 댄 것 처럼 약간 희미해지는 것 같습니다.  물론 항상 숙제는 숙제로 남아있지만 여행을 통해서 확실히 전에 없던 에너지를 얻게 됩니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을 때 여행가기 전과 후의 나는 사뭇 다른 사람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기에 여행은 여럿이 즐기는 목적으로 가도 좋지만 뭐니 뭐니 해도 가장 좋은 것은 혼자여행이라고 생각합니다. 혼행을 하고 나서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혼자 갔던 그 길을 다시 함께 가서 나의 경험을 나눌 수 있다면 행복은 배가 될 것입니다.  저는 여태껏 다닌 여행 중에서 사하라 사막에서 보낸 낮과 밤들이 가장 기억에 남아있습니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사하라의 밤이 제 곁에 다가오는 듯합니다. 혹시 힘든 일이 있고 머리 속이 정리가 안되면 과감히 사막으로 떠나보십시오. 물론 사하라까지 가는 과정은 피곤할 수 있지만 사막에서의 낮과 밤은 모든 수고로움을 보상하고도 남는다는 것을 경험하실 테니까요.
2019-02-27 | hrights | 조회: 815 | 추천: 6
이상재/ 대전충남인권연대 사무국장  설 명절을 앞둔 지난 1월 29일 정부는 총 24조 1,000억 규모의 예비타당성조사(이하 예타) 면제 사업 23개를 발표했다. 천문학적인 사업비가 들어가는 사업에 대해 ‘예비’로 ‘타당성’을 조사하는 절차를 건너뛰는 것이 정당한지 의문이 들었지만 정작 선정된 SOC 위주의 전국 사업들 면면을 들여다보면 ‘이런 사업을 왜 굳이?’ 하며 고개가 더 갸우뚱해지는 사업들도 많았다.  대전광역시는 전임 시장 때부터 추진해 오던 도시철도 2호선 트램 건설이 예타면제사업에 선정되었는데 다른 지역의 사업들보다는 그나마 나아 보인다.  대전의 도시철도 기본계획은 1996년에 승인이 났지만 2007년 1호선 개통 이후 2호선은 고가자기부상열차와 트램 방식이라는 갈등 속에 지지부진을 면치 못하다가 이번에 드디어 트램 방식 건설로 일단락된 것이다.  사실 트램 방식도 일부 정치권과 시민들은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반대하지만 고가자기부상열차 방식은 사업비가 트램에 비해 두 배 이상 많이 들고 도시 미관과 환경을 크게 해칠 수 있다는 점과 오랫동안 끌어온 지역 갈등을 끝낼 수 있다는 점에서 트램 방식은 그나마 차선의 결정이었다고 생각한다.  1호선 지하철만으로는 경제성을 담보할 수 없다는 이유로 2호선, 3호선을 추가했던 다른 광역도시들이 추가한 노선만큼 운영비 오히려 적자 폭이 늘어났다. 이런 점에서 건설비가 저렴한 트램 방식은 향후 대전시의 부담도 줄여줄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대전의 도시철도 2호선이 트램 방식으로 결정되면서 불만과 걱정을 하는 이들의 가장 큰 이유는 트램의 노선이 기존 도로를 점유하는 방식에서 오는 자가용 운전자들의 불편인 것 같다.  허태정 대전시장은 대전 트램의 예타면제를 환영하는 기자회견에서 기대효과를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취업 유발효과 9천661명, 생산유발 효과 1조5천463억 원을 거둘 것이란 경제적 전망과 트램과 연계한 교통체계 개편을 통해 2016년 37%였던 공공교통 분담률을 2030년 50%까지 올린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개인적으로는 트램 건설이 유발하는 취업과 생산증대는 4대강 사업으로 인해 수십만의 일자리가 생긴다고 했던 것처럼 손에 와 닿지도 않고 현실감도 없다. 하지만 공공교통 분담률을 50%까지 올린다는 계획은 눈에 확 띌 만큼 획기적이고 타당한 목표라고 생각한다.  사실 대전의 공공교통 분담률은 서울을 포함한 7대 특·광역시 중에서 최하위권이고 상대적으로 승용차 분담률은 광주, 울산과 함께 선두권을 이루고 있다. 다른 지역 특히 수도권에서 온 사람들은 대전의 교통이 좋은데 자가 운전하기가 편리하다는 얘기를 많이 한다. 이는 대전시의 교통정책이 60%에 이르는 승용차 편리 위주로 발전해 왔기 때문이라는 반증이기도 하다. 대전 트램 사진 출처 - 대전광역시  실제로 구도심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대전평생교육진흥원의 주차장은 수백 대가 주차할 수 있는 규모이며 무료로 사용할 수 있다. 무료이다 보니 5분 거리에 지하철 정거장이 있고 다수의 버스 노선이 지나다녀도 평생교육원을 이용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가용을 이용한다. 그러다 보니 넓은 주차장이 언제나 꽉 차서 관리인들도 꽤 고생하는 눈치다.  신도심이라고 별반 다를 것이 없는 것이 대전시청 맞은편에 있는 대전교육청도 주차장을 무료로 사용할 수 있다. 들어갈 때 경비실에서 용무를 물어보지만 적당히 둘러대면 그만이다.  대전시청은 유료이긴 하지만 1시간 30분까지는 무료이기 때문에 간단한 업무나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오는 사람들 다수가 자가용으로 온다. 대전시청도 대전교육청도 바로 코앞에 지하철 정거장이 있고 버스노선도 적지 않은데 말이다.  앞서 열거한 기관 이외에도 대전시의 많은 자치단체와 공공기관의 주차장은 무료다. 주차비를 받아도 대전시청처럼 거의 무료에 가깝게 이용할 수 있다.  그동안 대전시의 도로나 교통정책은 공공기관의 주차장 정책에서 볼 수 있듯이 자가용 운전자의 불편을 최소화하는데 중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 같았다. 자가용 이용이 편한데 누가 불편한 대중교통을 이용하겠는가 말이다.  트램 건설 방식을 비판하는 언론에서는 대전 일부 지역에서 운영되고 있는 버스전용차로 때문에 주민들이 겪는 어려움을 예로 든다. 하지만 전용차로를 없애는 것이 그 지역 주민들의 어려움을 해소하는 방법이 될 수 있을까? 대한민국의 도로는 예외 없이 도로가 새로 생기면 얼마 지나지 않아 그만큼의 교통 수요가 새롭게 생기거나 넘쳐나는 것을 반복해 왔다.  대중교통을 빠르고 편하게 이용하고 자가용 운전도 편리하게 하는 방법은 적어도 우리나라에서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대중교통을 빠르고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는 전제는 자가용 운전의 불편함이어야 할 것이다.  계획대로라면 대전을 둘러서 건설되는 도시철도 2호선 트램은 2025년 완공될 것이다.  기존의 1호선 지하철과 함께 2호선 트램은 대전시가 대중교통 중심으로 교통체계가 개편되는 전환점이 되었으면 한다. 트램이 도시의 차선 하나를 점유하니 당연히 자가용 운전자들은 불편할 것이다. 대신 어디서나 대중교통을 쉽게 접할 수 있고 목적지까지 쉽고 편하게 갈 수 있는 공공교통 시스템이 정착된다면 시민들의 자가용 운전에 따른 불만은 곧 사그라질 것이다. 아예 공공교통 분담률 목표를 2030년 50%까지 끌어올리는 것이 아니라 70% 정도 상향 조정하면 어떨까 싶다. 그게 가능하다면 시민들의 교통비 부담을 덜게 하는 것은 물론이고 날로 심해지는 미세먼지까지 줄일 수 있는 획기적인 방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얼마 전에 읽은 책 <걷는 남자, 하정우>는 영화배우 하정우 씨의 남다른 걷기 예찬을 보여주어 인상 깊었다. 하루 평균 3만 보 이상을 걷는다는 하정우 씨와 그의 걷기 동료들은 약속장소를 정할 때 ‘차로 몇 시간 거리’ 이렇게 설명하지 않고 걸어서 몇 분, 혹은 걷기 몇 보 정도면 도착한다는 표현을 쓴다고 한다. 시간 많은 영화배우니까 가능한 일상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하정우 씨는 실제로 약속장소나 미팅에 걸어서 가기 위해 새벽에 집에서 출발하기도 한단다.  2030년 어느 날 고향 친구가 대전을 방문한다면 약속장소를 이렇게 설명해 주고 싶다.  “대전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서대전 사거리역에서 2호선 트램을 갈아타고 세 정거장만 와서 내려, 그리고 10분 정도만 걸어오면 돼. 대전은 차가 별로 없어서 걷는 동안 도시 공기도 엄청 상쾌하게 느껴질 거야. 친구!” 
2019-02-14 | hrights | 조회: 1104 | 추천: 2
김형수/ 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 사무국장  “두 아이가 굴뚝 청소를 한다. 한 아이는 얼굴이 새까맣게 되어 내려왔고 또 한 아이는 멀쩡한 얼굴로 내려왔다. 누가 얼굴을 씻을 것인가. 학생들은 더러운 아이라고 답한다. 선생은 아니라고 말한다. 얼굴이 멀쩡한 아이는 더러운 아이의 얼굴을 보고 자기 얼굴을 보고 자기 얼굴에도 그을음이 묻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노릇 아닌가. 선생은 다시 묻는다. 누가 얼굴을 닦았을까. 그러나 학생들은 이번에도 정답을 맞히지 못했다. 선생은 말한다. 두 아이가 똑같이 굴뚝을 청소하고서 한 아이만 얼굴이 깨끗하다는 일은 있을 수 없다. 교사는 분필을 들고 돌아섰다. 그는 칠판 위에서 "뫼비우스의 띠"라고 썼다”. 1)  차별은 하나의 ‘문화’적인 행동양식이다.  그래서 어떤 특정 대상에 대해 차별을 가하는 의식, 가치관, 행동 방식도 인간의 문제이지만 사실은 그 차별의 가치와 행위를 정당화는 '과정'이 인간에게는 오히려 더 심각한 문제이다.2)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그것은 우생학과 파시즘이란 이름으로 포장되어 ‘근대’를 풍미 했고, ‘복지’란 명찰을 달고 ‘현대’를 선전하여 왔으며, 신자유주의와 인적자본 개발이라는 능력개발주의로 미래로 내달리는 것이 이러한 차별이 시대에 맞게 우리를 설득하고 합리화 해온 모습이다. 현대 사회에서 우리 모두가 100% 장애인이 될 위험 환경에 노출될 가능성이 있으며 생물학적으로 늙음으로서 ‘장애 상태’로 나아간다는 것을 우리는 이성적으로 공감한다.  그래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차별의 결과 또는 차별의 목적보다도 그 차별의 과정과 변화의 모습이다.  어떻게 차별을 합리화해왔고, 하고 있고, 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우리 스스로에게 던질 필요가 있다. 그 차별의 합리화 도구들은 다음과 같은 인식체계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왜 우리 사회는 장애인이란 존재를 무언가를 도와주어야 하고 베려해 주어야 할 ‘대상’으로만 이해하는 것일까? (for The disabled) 여성들에게 여자 화장실이 꼭 필요한 것처럼 장애인들에게는 장애인이용 가능한 것들의 지원과 환경이 꼭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왜 사회는 그 '필요', 필수적인 것(necessity)을 왜 항상 사랑과 배려로 이야기하려고 할까?  왜 장애인 문제는 장애인 당사자로부터 쉬이 들을 수 없고 말해지지 않는 것일까? (not of The disabled)  또 이런 문제에 대한 대안들이 왜 장애인들에 의해 민주적으로 만들어지거나 시행되지 않는 것일까? (not by The disabled)      아울러 장애인의 권리와 인권에 대해 단체가 왜 그 문제를 구체적으로 개선하거나 변화시키지 못하고 관찰만 하고 분석에만 머무르는가? (only about The disabled)    사회 구성원 모두가 이미 장애인이란 존재의 차별과 소외를, 존재 근거 자체와 동일시하는 것을 내면화 하고 있기 때문이다. 차별의 직접적인 모습은 그 대상에게 스스로 차별 받는 존재임을 드러내라고 공격 받는 것일 것이다.  ‘자 , 장애인에 대해 한번 떠들어 보시오, 얼마나 차별받았는지 말해 보시오라고 면접하는 것 자체가 억압이지 않은가?  그것은 마치 많은 남자들 앞에서 한 여성이 알몸을 드러내며 자신이 여성임을 증명해야 하는 것과 같은 꼴이다.  사람들은 흔히들 어떤 사람들에 대한 편견과 차별은 그들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소외 받고 억압받는 그들에게 그들의 문제에 대해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해 달라고 요구한다. 하지만 바꾸어 생각해 보면 ‘잘 모르는 것’은 알고자 하지 않았던 사람들의 잘 모르고자 하는 의지를 나타내는 것이고 그것은 곧 편견이지 않을까? 장애인을 비롯한 어떠한 개인도 다수의 대중 앞에서 또는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자신에 대해 더 말하거나 덜 진술해야할 책임을 가지고 태어나지는 않았다.  이러한 내면화를 엿볼 수 있는 개념으로 장애인 인식 개선 캠페인이나 프로그램으로 많이 이루어지고 있는 ‘장애 체험’이다. 물론 이 개념의 실천이나 그 목적의 순수함은 인정받아야 하지만 그것 자체가 온당한 개념인지는 활발한 논의가 필요하다. 시각장애인 인식개선 교육 ‘찾아가는 장애체험스쿨’ 모습 사진 출처 -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  우리 사회는 '장애인'이란 존재를 이해하고 편견과 선입견을 없애고 잘 알기 위해 '장애 체험'을 권장하곤 한다. 체험(體驗)이란 낱말은 원래 본래 독일어 'Erlebnis'의 역어(譯語)로 만든 철학 상의 술어였다. 경험이라는 말이 대상(對象)과 얼마간의 거리를 예상한 것임에 대하여, 체험은 대상과의 직접적이고 전체적인 접촉을 의미하면서 개개의 주관, 속에서 직접적으로 볼 수 있는 의식내용이나 의식과정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왜 '장애인' 체험이 아니라 '장애' 체험인가? 또한 장애는 과연 체험될 수 있는 것인가? 본질적으로 장애가 체험될 수 있는 성질의 대상이라면 '비장애' 역시 상대적 경험 주체인 장애인에게 체험 가능한 것이어야 한다. 또한 체험은 그 주체들이 언제 어떻게 체험을 할 것인가? 그만둘 것인가? 라는 것을 선택할 수 있는 성질을 갖고 있다. 그러나 장애인의 장애는 개인의 자의적 선택이 아니라 타의에 의해 구조적으로 규정당하는 것이기 때문에 장애인의 장애에 대한 체험 역시 사실상 언어적으로 기만이다. 사실상 그것은 비장애인의 장애인의 차별을 합리화하려는 이해와 선행의 선전도구에 불과한 것이다.    장애인의 문제와 차별을 인식하기 위한 지금의 비장애인들이 하는 장애 체험 프로그램이 어느 정도 교육적으로 유용하다 할지라도 진보적인 관점에서는 언제든 정상적인 상태, 즉 비장애적인 상태로 회귀한다는 것을 언제나 약속하고 돌아갈 수 있는 장애 체험은 또 다른 편견과 선입관을 만들어 낼 위험이 있다. 장애인이 겪는 '장애 상태'는 장기간에 걸친 사회적 상호 작용 속에 있다. 현재의 장애 체험의 대부분이 장애인이 겪는 일시적인 물리적 고통이나 단편적이고 직접적인 편견에만 노출되어 있어서 그 차별의 원인과 구조 등은 은폐시켜 버린다. 이는 또한 장애인들이 응당 풀어야 개인 삶의 부담으로만 전가되어 버릴 수 있다. 오히려 장애를 장애인 스스로의 의지로 극복해야 한다는 장애극복이데올로기를 조장하고 합리화 할 수 있다.  현실적으로 목발을 오랫동안 이용해 온 장애인이나 휠체어를 이용해 온 장애인의 경우 목발을 짚고 휠체어를 짚는 것 자체는 힘들지 않을 것이다. 비장애인들이 일상적으로 걷는 것을 힘들어 하지 않는 것처럼.   이렇게 본다면 비장애인이 쉽게 접근하는 장애 체험들은 대중적으로는 사회적으로 정상임을 확인받고 그 정상적임과 건강함을 감사해 하는 상대적으로 능력 있고 건강하다고 느끼는 비장애인들의 집단적인 여유로움로만 다가올 수 있다.  궁극적으로 장애인 차별을 없애는 것이라면 오히려 장애인에게 ‘비장애’ 체험(무장애3) 체험)을 시켜 주는 것이 보다 설득력 있지 않는가? 그토록 ‘장애’가 힘들고 고통스런 것이라면 말이다. 장애인 차별의 본질에 접근하지 못하는 장애 체험은 장애인 차별을 합리화 하는 한 과정일 뿐이다.  "얻을 수 없는 목적들의 '희망목록(wish list)이나 일련의 '모성애적(motherhood)언급'은 백해무익하다.  하나의 전략은 그것이 어떠한 영향력이라도 가지려면 실용적이고 성취가능하며 적절성을 가져야 한다" - 어느 공장 노동자로부터-  영화 피터팬에 나오는 후크 선장은 시각 장애인, 절단 장애인이다. 그러나 문자와 미디어를 통해 그는 장애인으로 잘 인식되지 않는다. 헬렌 켈러는 인간승리의 표상으로 우리나라 어린이에게도 그 전기가 널리 익히지만 그녀의 대학 이후의 행적을, 사회주의자로서의 그녀를 알고 있는 지식인은 드물다. 한국 사람이 제일 존경하는 세종대왕이 실은 심각한 시각 장애로 인해 스스로 왕의 자리에서 물러나려 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이 사람들이 장애인으로 인식되거나 장애인 문제로 이해되지 않는 것, 또는 헬렌 켈러4) 처럼 장애인이란 것 외 것에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은 우리가 이 사람들을 동정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헬렌 켈러 역시 사회주의 사회운동가로 인식하지 않는 것은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그녀가 동정과 박애를 거부해 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장애인과 관련된 일을 전공하려고 할 때나 직업을 가지려고 할 때 남이 그런 일을 선택할 때에는 아주 훌륭하고 그지없이 착한 일이 되지만 내 딸이나 누이가 내 아들이 내 동생이 그런 일을 하려고 하면 ‘미친 짓’이라면 말리는 일이 비일비재한 것도 이러한 이데올로기적인 박애주의의 이중성이다.5) 한국에서 장애인에 대한 이러한 박애주의는 이 영역에서 종사하는 사람들의 동기유발 요인을 강한 종교성으로 무장하고 편향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것이 정부의 장애인 정책의 기저에 현실적으로 깔려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 사회 누구든지 장애인으로 전락할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상태에서 국가는 국민들에게 장애인이 되시면 시설로 가시거나 집에만 있으십시오라고 하는 것과 같다. 그것 외에는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는 얘기다. 결국 장애인 문제는 국가와 사회 공동체가 정책과 행정을 입안하고 집행 하는 한 고정된 한 집단을 향한 문제가 아니라 개인 하나하나에게 그 가능성으로 총구를 겨누고 있는 중요한 문제이다. 장애아동 한사람을 올곧게 교육시킬 수 없는 국가라면 모든 국민 개개인을 올곧게 교육시키지 못할 개연성은 이미 충분하다.  한국사회에서 장애인이란 사람들이 문제가 없고 차별받지 않는다고 논리적으로 주장하는 사람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장애인 차별의 해소를 따질 때, 인격적인 동등성보다는 단순히 동물원적인 편안함이나 안락함을 제공해 주는 것이 최고가 되어버린 것도 이와 같은 논리이다. 이것이 장애인 차별에 대한 사회화 과정이며 내면화 동일시의 절차이다. 이 절차는 장애인에 대한 낙인(stigma)과 그에 따른 온정(pity)에 뒤이은 장애인들의 온정에 대한 고마움,  그런 순환 과정을 거친 장애인 차별에 대한 저항의 무력화를 더욱 강화시키는 사회적인 시스템이다.  각종 인간시대와 같은 휴머니즘으로 지갑을 터는 프로그램에서 가장 놀라운 효과를 발휘하며 칭찬과 미덕의 최고의 상징기제가 장애인이라는 의미는 너무나도 분명하다. 그러면서도, 희망과 사랑을 표상하는 가장 뛰어난 존재임에도, 지하철에서 추락하여 죽고, 낳아준 부모에게 죽임을 당해야만 하는 한국의 장애인이란 존재는 과연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에 대한 사회적 책임의 회피와 가벼운 처벌과 같은 면죄부 부여 행위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장애인의 자살 또는 장애 아동의 존속 살인, 또는 방치에 따른 행위에 대해 사회적 약자에게 법과 국가가 보호해 주어야 할 의무가 더 많음은 모두가 인정하고 알고 있으며 주장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장애인들은 알게 모르게 ‘오죽했으면’ ‘병신자식이 효자(빨리 죽음으로써)’라는 정서적 동정론으로 법적 보호까지 받지 못하고 오히려 죽음에 내몰리고 있는 실정이다  장애인의 문제를 개개인의 이해나 인식 개선에만 국한시켜버린다면 장애인 문제를 과학적으로 사회적으로 규명하기 보다는 상호 개인 간의 정서적인 문제로 국가의 온정적인 문제로 전락시킬 위험이 있다. 인식의 개선은 제도의 개선을 가져온다.  그러나 인식 개선만을 요구한 채 그 인식 개선을 선도할 정책을 만들지 않는 정부라면 인식 개선을 핑계로 현재의 차별과 모순을 방치한다는 비난을 면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따라서 정부는 허구적인 인식개선을 외치지 말고 인식을 개선할 제도와 법을 적극적으로 만들어야 한다. 앞서 언급한 대학에서의 장애 체험 프로그램들 역시 대학가에서 많이 이루어지는 타자(他者)에 대한 체험과 이해를 위한 활동은 무엇 무엇 '현장'이라 이름 짓는다.  그들이 타자에 대한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일은 드물기 때문에 그들이 처해 있는 현장을 체험하고 인식을 새롭게 하려 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장애 체험 역시 장애인이란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오히려 그 장애 상태를 적극적으로 해결시켜야 한다면 장애인 생활 현장 활동이나 장애인차별체험으로 이름을 새로이 해야 한다. 요컨대, 사회 전체적으로 장애인 정책을 차별을 단순히 보상하고 차감하는 미시적이고 소극적인 관점에서 벗어나 보다 거시적이며 적극적인 사회 공동의 운명과 이슈로 가져갈 필요가 있다. 차별의 결과로써의 장애인을 바라볼 것이 아니라 차별의 예방과 방지 그리고 온전한 권리의 구제를 위한 행정체계로써의 장애인을 새로이 규정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6) 장애인이라고 한 소수 집단을 규정하고 정의하는 것 자체가 차별을 생산하고 지속하는 시작이며 이러한 차별의 과정들이 차별의 결과들보다 더 큰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장애인의 차별과 그것으로 인한 문제는 ‘그들’의 문제가 아니다. 인간의 문제이기 때문에 ‘우리’의 문제이며 우리의 문제이기 때문에 우리 모두가 장애인 문제의 주체다. 그것을 인식하는 것이 장애인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중요한 대안이 될 것이다. 1) 조세희, (1976) 「뫼비우스의 띠」-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2) 장애인 차별에 대한 대략적인 이해는 「노동시장의 장애인 차별 영향 분석」 2000, 2 서울대학교 대학원 사회복지학과 유동철 석사 학위논문 10p~15p를 참조 3) 무장애(無障碍)는 무장애 공간(Barrier Free Zone)을 만들기 위한 운동적 개념인데, 무장애 공간이란 장애물이 없는 공간을 의미하지 않는다. 무장애 공간이란 우리가 사는 공간 안에서 장애인이라고 하더라도 장애를 느끼지 않고, 활동과 참여에 제약을 받지 않는 공간을 의미한다. 건축 환경, 교통환경이 장애를 가진 사람을 “장애만 가진 사람”으로 만들어 가고 있는 우리의 도시환경, 교육환경, 근무환경, 주거환경 속에서 비록 장애를 가진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자유롭고, 안전하며, 편리하게 활동하고 참여할 수 있는 환경과 공간을 만들자는 개념으로부터 나온 것이 무장애 개념이다.  4) 보다 자세한 것은 「헬렌 켈러 - A Life」도로시 허먼, 미디어 북스를 참조 5) 장애인을 보다 직접적으로 만나고 많은 책임을 지는 특수교육과 재활관련학과 진학의 경우 학부모들이 학생들에게 장애인과 결혼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조건으로 진학을 허용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6) 부산일보, 1994년7월 「장애인 새 이름 후보작품 4선 <재활인> <정동인> <되살미> <새롬이>- 부산장애인 연합회 공모마감...보사부에 채택 건의」 
2019-01-23 | hrights | 조회: 2407 | 추천: 8
손상훈/ 교단자정센터 원장, 종교투명성센터 운영위원  새해 소망한다. 직업종교인 모두가 반성하길. 특히 재벌승려들은 공개반성하고 자신의 개인재산을 사회에 기부해야 한다. 위대한 종교 가르침이 문자로 이어진 성경이나 불경을 꺼내들지 않아도 안다. 부패하고 뻔뻔한 극소수 직업종교인들만 빼고 모든 시민들은 다 안다. 평신도인 재가신자들은 더 잘 안다. 그럼에도 변할 싹이 보이지 않는다. 더 썩어 부패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니 마음이 어지럽고 아프다. 한국종교계의 새로운 질병, 바로 외면이다. 직업종교인의 생태계가 붕괴직전에 있지만 나 몰라라 하고 있다. 평신도가 변하지 않고, 어찌 교회가 변할 것이며, 재가불자가 정의를 외면하는데, 절 도량, 사찰이 변할까. 기원하고 바래본다. 말과 글로 회개할 수 있다면 가장 좋다. 그래도 변화하지 않는다면 시민들이 다시 회초리를 들어야 한다. 특히 한국불교계에서 가장 세금을 많이 지원받고 있는 조계종이 공개 반성해야 한다.  매년 수백억 원의 세금을 직간접적으로 지원받고 집행하는 조계종 총무원은 아직 재정을 투명하게 공개하지 않고 있다. 이명박, 박근혜 정부에서 말 잘 듣던 재벌승려들은 너무 조용하다. 채울 만큼 채웠으니 더 배불릴 잇속이 없어서가 아니다. 또 다른 먹잇감을 찾아 헤매는 짐승처럼 누군가의 굶주림을 핑계 삼아 국고보조금을 더 타내려 하고 있다. 그 징조가 국립공원 ‘문화재입장료’이다. 문화재관람료라는 표현을 입장료로 바꿔 시민저항을 피하기 위한 ‘변경 마케팅’의 한 사례이다. 그동안 조계종 재벌승려들은 벤처기업처럼 발 빠르게 움직여왔다. 유력 국회의원에게 매달 수백만 원의 정치 후원금을 내는 것은 기본이고, 정통 관료사회에도 종교인연을 지렛대 삼아 로비를 해 왔다. 동국대 신정아 사건이나 최근 황제골프 접대가 상징하는 의미는 매우 크다. 자승 전 총무원장이 전직 검찰총장과 만나 ‘사찰 방재 시스템 세금 사기’ 수사를 무마해 달라는 청탁을 했을 것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더하고 있다. 불교계 인터넷 언론에 따르면, 경남지역 경찰에서 이첩되어 서울 검찰에 이첩된 지 1년여 되지만 주요한 재벌승려를 제대로 조사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부디 소망한다. 검찰은 회개하지 않는 승려들에게 공개조사 등 시민의 눈높이에서 직분에 충실해 주길 바란다. 종교투명성센터 등 시민단체들이 행정안전부 장관을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했다. 사찰들이 국립공원 입구에서 문화재관람료를 징수해 국민의 통행자유권을 침해하는데도 경찰을 관할하는 행안부 장관이 수수방관했다는 이유에서다. 사진 출처 - 필자  동국대 한 학생이 40여 일간 조명탑에서 동대총장 퇴진과 총장직선제를 주장하며 농성을 했다. 다시는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기 위해 법과 제도가 고쳐져야 한다. 대학 이사회가 정상적인 이사진으로 구성되었다면 글 도둑질한 이가 동국대 총장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사립학교법이 개정되어 극단적이고 위험한 농성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기를 소망한다. 조계종이 반걸음 나아지려면, 또 다른 자승 총무원장이 나오지 않으려면 사회가 변해야 한다. 특히 재벌급직업종교인에 관대한 시민인식이 크게 바뀌고, 사정당국의 관대한 자세가 변해야 한다. 대한체육회장이자 조계종중앙신도회장이 김영란법 위반임을 언론에서 보도했지만, 사정당국은 스스로 조사하지 않는다. 종교계가 바로 서길 소망하는 시민은 직업종교권력자가 저지른 범죄행위를 공정하게 조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설정 총무원장이 조계종 최초로 탄핵된 원장이 된 것도 시민의 요구 때문이다. 부패한 재벌급 직업종교인 봐주기는 이제 그만이다. 최근 대법원이 이웃한 유명한 교회 대표목사의 학위문제도 엄정하게 판단했다. 평신도들은 환영한다. 이제 종교재산문제에 있어 직업종교인이 주인이라는 판례도 바뀐다면 종교계 자정에 새로운 전기가 마련될 것이다. 그러나 갈 길은 멀다. 그래도 한 걸음 나가야 할 사례가 있다. 동국대 고공농성 사진 출처 - 필자  시민단체 참여연대가 20여 년간 주장해 대법원 판례가 2차례나 난 ‘사찰문화재관람료 부당징수 구례 천은사 사례’이다. 사찰문화재입장료(옛 관람료) 위법 징수에 대해 1만 여명의 시민들이 ‘공익소송’이라는 회초리를 들어야 한다. 대법원 판례에 따라 현재 18만원의 위자료를 받을 수 있다. 공익소송에서 이기려면 자동차 내비 같은 동영상과 사진으로 국립공원을 입장하고, 사찰 문화재를 보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하는 자료, 매표소에서 사찰직원에게 나는 문화재를 볼 의사가 없고 국립공원을 가려고 한다는 의사표시 녹음파일, 그리고 공익소송 신청양식을 작성하면 된다. 실제 해 보면 그리 복잡하지 않고, 근거자료만 갖추면 대부분 승소할 것이라 확신한다. 단지 귀찮고 엄두가 나지 않을 뿐이다. 수천 년 동안 변하지 않는 부패한 직업종교인에게 내릴 ‘은혜로운 회초리’ 공익소송 참여이다. 재벌승려들은 재가신자들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러니, 말과 글로 안 된다면 법과 제도 개선, 사정당국의 엄정함, 끝으로 시민들의 회초리로 뼈아픈 ‘교훈’을 선물하고 싶다. 그리고 2019년 봄, 여름, 가을에 1만 명의 시민이 회초리를 든다면 늦가을 지리산에서 ‘음악회’를 열고, 승소를 자축하는 소박한 잔치를 벌이고 싶다.  
2019-01-09 | hrights | 조회: 953 | 추천: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