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에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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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에가시’는 현장을 살아가는 활동가들의 목소리를 담기 위한 칼럼 공간입니다.

‘목에가시’는 김형수(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 총장), 신종환(공무원), 윤요왕(재)춘천시마을자치지원센터장), 이동화(아디 활동가), 이승은(경찰관), 이원영(용산시민연대 공동대표), 정한별(사회복지사) 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이회림/ 00경찰서  여행의 영어 표현인 travel의 어원을 아시나요? Travail, 고통, 고난을 뜻한다고 합니다. 익숙하고 안락한 나의 공간에서 떠나 평소보다 긴장된 상태에서 매일 새로운 것들을 만난다는 것. 이 자체가 흥분이 되고 즐겁기도 하지만 정말 피곤하고 힘든 것 또한 여행입니다. 그래서 늘 여행이 끝나면 돌아갈 집과 고향 그리고 무엇보다 엄마가 있다는 생각에 안도를 하곤 하지요.  그런데 이제는 더 이상 저의 여행이야기를 들려 줄 엄마가 곁에 없습니다. 약 2개월 전에 엄마가 먼저 하늘로 가셨기 때문입니다.  엄마는 거실 창가에 비스듬히 누워서 일본에서 오는 큰 언니를 기다리다가 숨을 거두셨습니다. 마치 낮잠에 스르르 빠지는 사람처럼 조용히 평온한 표정으로 사라지셨습니다. 저는 쳐다만 보고 있을 수는 없어서 직장에서 배운 대로 심폐소생술도 해 보았습니다. 땀과 눈물로 얼굴이 범벅이 되는 동안 119 구급대원들이 왔습니다. 엄마의 심장이 완전히 멎은 것을 확인해 주었습니다. 큰 딸은 비행기를 타고 일본에서 오고 있었고 나머지 딸 셋, 아들 하나, 그리고 아빠가 보는 가운데 하늘로 가셨습니다. 사진 출처 - 필자  저는 엄마의 장례식이 끝나자마자 스웨덴으로 떠났습니다. 현실을 받아들일 용기와 시간이 필요했거든요. 그래서 스웨덴의 여름에게 저를 부탁했습니다. 일주일에 세 번, 스톡홀름의 남쪽에 있는 공원묘지에 혼자 갔습니다.   “skogskyrkogården” 스웨덴 말로 직역하면 “숲 묘지”이지만 시민들이 공원처럼 드나들어서 인지 “공원묘지”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저는 정말이지 제가 이 곳에 세 번이나 가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첫 날은 맑았고 두 번째 날은 흐렸고 세 번째로 방문했을 때는 마치 꿈 속에서나 봄 직한 풍경을 마주했습니다. 그날의 풍경은 마치 엄마의 하늘나라 일상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푸른하늘에, 싱그러운 초록빛들과 아이들의 순수한 몸짓들. 엄마가 이런 곳, 아니 이 보다 더 아름다운 곳에 평안히 계신다는 생각을 하니 슬프면서도 안도감이 들었습니다. 저는 내내 엄마가 옆에 같이 있다고 상상을 하며 엄마에게 여행 가이드처럼 설명을 해 주었습니다. 마음속으로 말이지요. 어쩔 수 없이 매일 눈물 바람이었고 항상 젖은 손수건을 가슴에 달고 있는 기분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계속 “엄마,, 엄마” 를 입 속에 되뇌는 것을 멈출수가 없었습니다.  살면서 가장 힘들었던 순간은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느낄 때, 그리고 내가 나름의 정의와 진실을 위해 어떠한 행동을 최선을 다 했음에도 그것이 오해받을 때 정말로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런 힘듦은 엄마를 먼저 하늘로 보낸 상실감과 그리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엄마가 돌아가신 직후에, 제가 심폐소생술을 제대로 못해서 골든타임 안에서도 엄마를 살리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사로잡혔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하늘로 갔으니 나도 따라가야겠다는 생각이 당연하다는 듯이 저를 엄습했습니다. 그랬다가 엄마가 살아 온 인생을 되돌아보면서 마음을 고쳐먹곤 했습니다. 그리고 엄마 몫까지 열심히 세상 구경을 다니며 돌아다니기로 결심했습니다. 이번 여행은 엄마가 세상에 없지만 사실상 엄마와 함께한 여행이었습니다. 아마 저는 앞으로 어디를 가든 늘 엄마를 수호천사처럼 생각하면서 다니게 될 것 같습니다.  이 글의 첫 머리에, 여행의 어원이 ‘고통’ 이라는 뜻의 travail에서 나왔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고통의 시기는 역설적이게도 항상 제가 더 나은 사람으로 성장하는 데 도움을 주었던 것 같습니다. 그때야말로 진정한 나와 만나는 시간이거든요. 그래서 저는 제안합니다. 전혀 꾸며지지 않은 나를 만나고 싶을 때는 저처럼 훌쩍 혼자 여행을 떠나보라구요. 특히 결혼 안 하신 미혼 여성인 분들이 용기내서 혼자 여행을 많이 떠나셨으면 좋겠습니다.  예상치 않은 기분 좋은 만남, 우정, 사랑, 고통, 후회...결국은 가장 친하게 지내야 할 친구인 나 자신과 고요히 조우하게 되는 순간, 이런 소중한 나날들을 음미해보시길 바랍니다. 혼자 떠나는 여행은 다소 외롭지만 그 외로움마저 친구로 만들 수 있는 소중한 시간들이고, 그것은 정말이지 하늘에서 특별히 주어지는 선물이니까요.
2019-09-19 | hrights | 조회: 1220 | 추천: 4
주윤아/ 교사  미국 조지아주(Georgia)에 사는 친구 집에 다녀왔다. 그곳에서 지역의 박물관과 명소를 둘러보는 동안 아주 인상적인 부분이 있었다. 큐레이터가 여성 운동이나 위인에 대한 소개를 해 주거나 관련 내용이 대체로 전시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애틀랜타 히스토리 센터에는 그 지역 출신의 여성 활동가나 여성 참정권 운동에 대한 역사가 소개되어 있었는데 그 중 애틀랜타(Atlanta) 출신인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작가 마거릿 미첼(Margaret Mitchell)에 대한 새로운 정보를 알게 되었다. 그녀는 이 소설에서 역사학자인 할아버지에게 수없이 들었던 남북 전쟁과 노예 이야기를 자신의 고향인 남부의 시선으로 풀어내었다. 그리고 소설의 여주인공인 스칼렛 오하라는 당시 여성들의 진출이 드물었던 직업에 도전했던 작가 자신의 성향과 닮은 면이 있어 보였다. 하루하루의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대공황 시절임에도 불구하고 초대형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그녀는 출간 이후인 제2차 세계대전 기간에는 작가로서가 아닌 여성 운동가로서 활동했다. 진학이 어려운 흑인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제정하고 남부의 형편이 어려운 흑인들을 돕기 위해 열심히 구호와 기부 활동을 했다. 그녀의 이러한 숨은 활동은 교통사고로 사망한 이후에야 점차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사람들은 단 하나의 대작만을 남긴 채 요절한 그녀를 베스트셀러 작가로만 알고 있지만, 여성 운동가로서의 그녀의 후반기 생애도 재조명받기를 바란다. 만약 그녀가 북부에서 태어났더라면 어떠한 삶을 살았을지, 혹은 어떤 내용의 작품을 썼을까 하는 상상도 잠시 해 보았다.  그리고 또 한 명, Space Museum에서 알게 된 ‘MERCURY 13’ 중의 1인인 제리 코브(Jerrie Cobb)의 이야기는 더 인상적이었다. 그녀는 최초의 예비 여성 우주비행사이자 평생 우주 비행을 염원했던 파일럿이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경비행기를 타 본 이후 비행의 자유와 해방감을 잊지 못해 파일럿의 꿈을 갖게 되고 우여곡절 끝에 운송 파일럿으로 취업한다. 이후 여성 우주비행사 육성 프로그램인 ‘Mercury project’에서 'FLAT(First Lady Astronaut Trainees)'라는 시험을 통해 선발된 13인(일명 ‘MERCURY 13’) 중 1인이 되었다. 그러나 세상은 그녀의 비행경력과 실력보다 외모를 부각하여 소개하는 등 대부분의 예비 여성 우주인들을 가십거리로 소비하였다. 그렇지만 이 시험으로 여성이 남성보다 우주여행에 적합한 신체 조건을 가지고 있으며, 스트레스에 대한 저항성도 높다는 새로운 연구 성과를 얻었다.  하지만 이 여성들에 대한 테스트는 NASA의 달 탐사(아폴로 계획)에 밀려 최종 단계 직전에 중단됐다. 여성 승무원들이 갑자기 사망할 경우 우주 비행 계획이 중대한 차질을 빚을 수 있다는 게 비공식적인 이유였다. 코브는 시험 과정 결과를 근거로 여성도 우주 비행사 육성 프로그램에 선발해 달라고 2년 동안 미국 의회에 청원 운동을 벌였으나 정부와 NASA의 성차별로 인해 끝내 우주비행사가 되지 못했다. 그녀는 1963년부터 우주 비행 대신에 자신의 경비행기를 타고 아마존 지역에 의료 생필품 등 인도 물자를 전달하며 항공 선교사로서 자원봉사하며 남은 생을 보냈다. 제리 코브(Jerrie Cobb) 사진 출처 - AP 연합뉴스  2012년 미 우주항공 명예의 전당(NAHF)에 이름을 올릴 당시 “나는 개척자가 아니다. 단지 마음껏 날지 못한 한 여성일 뿐이다”라는 그녀의 탄식에 가슴이 먹먹하다. NASA에 따르면 여성 우주인의 우주유영은 1984년 옛 소련의 스베틀라나 사비츠카야가 처음 개척한 이래로 35년간 계속됐지만, 현재까지 500여 명이 넘는 전체 우주인 중 여성이 차지하는 비율은 11%에 그치는 것으로 알려졌고, 달에 착륙한 아폴로 11호부터 17호까지 6대의 우주선에 여성 우주인은 단 한 명도 포함되어 있지 않다고 한다.  최근 NASA는 아르테미스(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아폴로의 쌍둥이 남매) 프로그램을 발표하여 2024년까지 달에 다음 미국인이자 최초의 여성을 착륙시키는 것이 목표라고 했다. 그러나 아폴로 11호가 최초로 달 표면에 착륙한 이후 50여 년 동안 세계 각국이 우주 탐사를 위한 노력을 지속해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주복, 우주선의 좌석 등 우주에서 사용하는 도구들이 평균 남성의 크기에 맞춰져 있다는 사실 등을 볼 때 우주 탐사의 성평등 철학에 대한 진정성에 의구심이 든다. 실제로 올해 초 NASA는 여성 우주비행사들이 국제우주정거장(ISS)에서 입을 우주복이 모자란다는 이유로 '여성 팀'의 우주유영 계획을 부분적으로 수정하기로 했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진심으로 인류 역사상 달을 밟는 최초의 여성 우주인의 탄생을 바란다면 지금이라도 인권과 젠더의 렌즈로 아르테미스 프로젝트의 기본부터 전 과정을 철저히 재검토해야 할 것이다.  내가 이번에 둘러본 곳은 관광 명소보다는 시골 마을들인데, 이곳의 주민들은 비교적 아동과 여성을 존중하는 분위기가 정착되어 있었다. 또 양육과 가정을 우선시하므로 가족 구성원들은 각자의 능력과 여건에 따라 가사와 돌봄 노동을 합리적으로 분담하고 있었고, 여성 중심의 커뮤니티에 남성들도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있었다. 또 의류나 액세서리 일반 매장에서 성소수자 인권을 상징하는 디자인의 제품들이 구비되어 있는 것도 기억에 남는다. 물론 20여 일의 아주 짧은 체험으로 속단할 수 없고 그것이 미국 전체의 모습이라고 착각하지도 않는다. 게다가 미국은 여전히 인종 갈등이 심각하고 통계적인 성평등 지수 순위도 그다지 높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족과 마을, 사회 곳곳에서 성차별을 줄여가기 위해 노력하는 그들의 자세를 눈으로 확인한 시간이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차별과 혐오를 넘어서는 그 길은 반드시 가야 하는 길이다. 그래서 더디고 미숙하고 불편하지만 포기할 수 없다. 더구나 내가 깨우쳐 내 일상부터 하나둘 바꿔가기 시작하는 것 외에 달리 대단한 해법도 없다. 예컨대 가사와 돌봄 노동은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내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 바로 그런 마음이 출발이 되는 것이다. 왜냐면 국가나 정부에서 이와 관련한 다양한 법과 제도를 완벽히 마련한다 해도 내 마음이 온전히 수용하지 않는다면 성평등 민주주의가 완성되는 그 날은 절대 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참고자료 : 1. Margaret Mitchell House & Museum 2. 하버드-C.H.베크 세계사 1945 이후: 서로 의존하는 세계, 入江昭 엮음(2018) 3. 우주 시대를 개척한 우주비행사, Sonia Gueldenpfennig(2009) 4. 한국일보 [가만한 당신], 최윤필 기자(2019.06.17) “난 마음껏 날지 못한 한 여성일 뿐” 젠더 벽에 막힌 첫 여성 우주비행사 후보 제리 코브
2019-08-20 | hrights | 조회: 1049 | 추천: 13
김형수/ 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 총장 Pride! Disability·Enjoy! Disability·Power! Disability “아무리 우리 사회의 장애인에 대한 인식이 달라진다고 해도 물리적 장벽이 제거되고 거리에 저상버스가 넘쳐나도, 장애인을 신기하게 쳐다보는 사람들의 시선과 장애인을 보고 수군거리는 아이들의 소리가 남아있다면, 우리 사회에서 장애인을 낯선 존재로 바라보는 이상, 장에인에게 우리 사회 역시 낯선 존재일 수밖에 없다.” (「자유공간 2007년 11월 12월호 2-3p」(장애인편의시설촉진시민연대, 배융호총장)) 나는 ‘장애’인으로 이 도시에서 살아가고 싶지 않다.  나는 걷는데 목발을 이용하는 40대의 평범한 서울 시민이다. 보다 먼 거리를 이용하는데 단지 전동 스쿠터를 이용하는 조용한 도시의 소시민이다, 그러나 내가 이 서울에서 이동하고 생활하고 사람을 만나면, 대부분 나를 보는 사람들을 나를 이 서울이란 도시에서 힘들게 차별받고 고통 받는 ‘장애’인으로 기억하고 고민하고 배려한다. 이 도시를 이루는 여러 가지 것들은 나를 끊임없이 ‘장애’인으로 일깨우고 단지 걷는데 목발을 사용하고 몸을 지탱하는 것에 약간의 지지대가 필요한 김형수란 개인을 단지 사람들에게 ‘장애’인으로 아로 새긴다.  나와 인연을 만들고 관계를 맺는 모든 사람들도 관계의 ‘장애’인으로 느끼게 만들고 차별받게 하며 그들을 동등한 친구나 선후배, 공적이며 객관적인 사회관계가 아니라 도움을 주는 애틋한 도우미나 봉사자로 만든다. 단순한 건축물의 장벽과 구조가 그럴 수도 있고, 입구에만 승강기가 있고 환승역에는 승강기가 없다고 알려주지 조차 않는 일종의 도시 구조가 나와 사람들의 관계를 일그러뜨린다. 지하철역무원에게는 손님이 아니라 리프트를 타고 한번쯤 목숨을 걸어도 되는 존재가 되며, 항상 시설이 없어 늦었다고 변명해야 하는 불쌍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 # 장면 1. 관계의 장애인  얼마 전, 휠체어를 이용하는 후배와 함께 여의도 국회 앞 빌딩, 지하 식당으로 저녁을 먹으러 간적이 있었다. 한창 퇴근시간이었고 사람들이 붐비는 많은 식당 중에서 30분 넘게 헤맨 끝에 겨우 휠체어 출입이 가능한 조그마한 분식집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런데 식당 아줌마가 휠체어를 타고 들어오는 후배를 보자, “휠체어는 여기서 식사할 수 없는데......” 라며 말끝을 흐렸다. 우리 일행이 들어갈 수 있는 충분한 자리가 있었건만 식당에서 일하시는 분은 우리가 그 말에 나가 주었으면 하셨다.  물론 식당에서 일하시는 분이 장애인이 정말 싫거나 혐오해서 거부한 것은 아닐 것이다. 손님이 몰리는 저녁 시간에 좁은 분식집에 덩치 큰 수동휠체어가 많은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곤란하셨거나 식당에 장애인이 있는 것을 보고 식당을 오려던 사람들이 발걸음을 돌리는 일이 발생할까봐 염려하시는 눈치이셨다. 그렇게 우리는 식탁에서 의자만 빼면 된다고 해서 겨우 식사를 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여의도에서 휠체어를 이용하는 장애인이란 이유로, 그런 장애인과 일행이란 이유로 식당이용을 거부당하는 경험을 해야만 했다. # 장면 2. 시간과 거리에 관한 장애인의 상대성 이론  전동스쿠터를 타고 7호선 맨 끝 온수역에서 강의를 마치고 집이 있는 2호선 홍대 입구 역으로 오기 위해서 대림역에서 환승하려고 했더니 환승 구간에 승강기가 설치되어 있지 않아 7호선 대림역 지상으로 올라와 후배들과 10분을 걸어 2호선 대림역에 도착, 개찰구로 갔더니 승강기는 없고 휠체어 리프트만 설치되어 있어서 위험하겠기에 역무원에게 다음 역에 가서 타겠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한 역무원이 그냥 리프트타고 가라고 해서 리프트에 살짝 실었더니 고장, 괜히 역무원에게 핀잔만 받고 다음 역까지 갔다. 지하철이 끊길 것 같아, 같이 가겠다는 후배들을 억지로 보내고 구로디지털역까지 달려 아슬아슬하게 막차를 타고 집에 오니 새벽 1시. 일반적으로 한 시간 걸리는 거리를 두 시간 반 만에 도착하였다. # 장면 3. 보이지 않는 무인도.  우리 동네에는 서대문구청에서 운영하는 장애인무료버스와 서울시 공영버스로 운영하는 장애인도 함께 이용할 수 있는 저상버스와 굴절버스가 모두 지나간다. 그런데 난 이 두 종류의 버스를 아직 단 한 번도 이용해 본적이 없다. 장애인무료버스에 달린 리프트에 대롱대롱 매달리는 아찔한 경험이 싫기 때문이기도 하고, 이 바쁜 서울을 살아가는 사회인 중에서 30분 넘게 버스를 기다리며 출퇴근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도시에서 직장 생활하는 사람이 절대 아닐 것이다. 아주 가끔 전동휠체어를 이용하여 출근시간에 지하철을 타려고 하면 아직도 간간히 들을 수 있는 어디에선가 들려오는 한마디가 있다. “이렇게 혼잡한데 편하게 집에 있지... 왜 나왔어?”라며 나를 걱정해 주는 여러 시선들이 그것이다.  그렇지만 난 이 도시에서 치열하게 일하고 경쟁하여 살아남고만 싶은 삼십대 일뿐이다. 나도 가끔은 출퇴근 시간에 정전이 되어 지하철에 갇혀있었던 찜찜한 기분에 공감하며 직장 동료들의 얘깃거리에 동참하고 싶을 뿐이다. 편하지만 외롭고 삭막한 양로원보다는 불편하지만 언제나 왁자지껄한 마을 노인정이 좋다는 어르신들의 마음에 100% 공감한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우리 도시에서 장애인들은 보이지 않는 무인도에서 살아간다.  도시 외곽이나 그린벨트의 장애인 생활시설이라는 무인도에 살고, 도시 변두리에 임대아파트란 블록으로 만든 무인도에 살고, 우리들끼리 교육하면 편하고 좋다는 이유로 특수학교라는 이름의 무인도에 산다.  일천 만 명이 넘게 사는 이 도시에서 ‘장애’인이란 내 존재에 늘 각성되어야 하는 나는 그래서, 서울특별시의 서대문구 연남동의 로빈슨 크루소이다. 도시는 사람들을 모으고 사람들이 요구하고 필요한 것을 충족시켜 주기 위해 기능한다는 의미에서 나는 더욱 외롭다. 이 도시는 나에게 ‘장애’를 만들고 느끼게 하고 장애인 카드를 만들게 한다. 장애인으로 살아가게 하는 ‘장애’ 도시이다. 사진 출처 - 구글 # 느낌 1. 국회의사당의 둥근 지붕에 절망을 느낀다.  사람들이 이 도시가 만들어준 나의 장애를 보면서 그 불편함과 불가능함에 내가 고통을 받고 차별을 받을 것이라 생각하는 듯하다. 그렇지만 내가 느끼는 큰 차별은 다른 곳에 있다. 도시를 계획하고 투자하는 것에 있어 나와 같은 사람이 항상 지원하고 투자 대상이 아니라 도시 예산에 부담을 주고 다른 일류시민에게 무엇인가 지장을 주고 ‘장애’를 초래하는 사람으로 느낄 때, 그렇게 2류 시민으로 취급받을 때 난 비참하고 또 비참하다.  장애인들이 지하철을 탈 수 있도록 승강기를 만들어 달라고 서울시를 상대로 싸울 때, 저상버스를 운영하라고 요구할 때 서울의 도시가 정치적 권위의 상징 기능밖에 없는 여의도 국회의 둥근 청동 지붕의 장식과 그 장식의 청소를 더 우선시 할 때, 이미 ‘장애’를 부여받은 시민과 나는 서울특별시에서 밀려나 있다. 우리가 장애인에 대한 도시의 기능과 역할을 강조할 때 관료들은 늘 예산 부족을 말한다. 그런데 모든 도시민의 욕구를 채워줄 수 예산은 항상 부족하다. 문제는 예산의 규모가 아니라 예산의 ‘우선순위’인 것이다. # 느낌 2. 상암동 하늘 공원에 가면 가끔 서울 시민이 될 수 있다.  여자 친구와 함께 가끔 하늘 공원을 간다. 한강 둑을 따라 스쿠터를 타고 애인과 강바람을 맞으며 손을 잡고 데이트를 즐긴다. 물론 우리를 보는 많은 사람들은 시설에서 나들이 나온 장애인과 도우미로 생각하고 애틋한 눈빛을 보낸다. 그렇지만 우리의 관계는 앞에 가는 저 팔짱끼고 가는 연인들처럼 닭살스럽다.  한강에서 하늘공원까지는 나에게 ‘장애’를 부여하는 장애물이 별로 없다. 다른 서울 시민들처럼 강바람에 몸을 맡기며 갈대밭 사이로 그녀의 얼굴을 마주보며 데이트를 즐기게 하는 나무 경사로와 장애인도 이용할 수 있는 화장실도 있다. 물론 하늘공원 서비스센타에서 전동 스쿠터를 충전하게 해달라고 요청하면 종종 거부하시기는 하지만.  생태 공원으로 만들어진 청계천 양 끝에 멋진 경사로가 있어 청계천에서 나는 서울 시민이 될 수 있지만, 중간에도 내려올 수는 경사로가 하나만 더 있었더라면 여자 친구를 먼저 내려 보내고 혼자 멀리 에둘러 보내는 일도 없었을 것이고 물가 앞까지 안전하게 내려 갈 수 있는 돌담길이 있다면 여자 친구 혼자 물장구치는 것을 등 뒤에서 물끄러미 바라만 봐야 하는 애잔함을 경험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휠체어를 이용하는 사람과 시․청각 장애인을 비롯한 모든 사람을 위한 도시계획과 건축물들이 도시의 상징이 되고 기호가 되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일까? 복잡한 출근길에 시달리고 동네 슈퍼에서 전동휠체어를 타고 물건을 사고 지역의 은행과 우체국을 드나드는 것. 가까운 지역의 수영장에 갈 수 있고, 걷고만 싶은 거리가 아니라 전동 휠체어도 접근 가능한 거리에서 동네 주민들과 나란히 걸으면서 담소를 나눌 수 있는 도시를 만드는 일,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닐 진대, 안타까운 일이다. Pride! Disability·Enjoy! Disability·Power! Disability  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에서 2007년 무장애일터만들기 NGO 기관 순례 사업을 시작하면서 사용한 모토이자 캠페인. 그 중에서 Pride! Disability는 장애인으로서의 자부심을 뜻하는 Disability Pride의 변용이다. Disability Pride는 장애학의 근간을 이루는 사상이기도 하다. ‘장애와 자부심(Disabled and Proud)'이란 모임에서는 이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Disability Pride는 우리의 신체적, 정신적, 인지적인 부분에서의 다름이 잘못 된 것이 아니라는 것에서 인간으로서의 위엄과 자부심을 갖는 것이다 우리의 장애가 다양한 사람의 모습 중에 일부로서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우리의 믿음을 공표하는 것이고 장애에 낙인을 두는 사회구조에 대한 도전이며, 오랫동안 장애억압적인 사회가 규정한 장애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와 믿음과 느낌으로부터 우리 자신들을 자유케 하려는 시도인 것이다. -Sarah Triano 2004- " 「장캐 2007 vol 27 11p」
2019-08-07 | hrights | 조회: 1314 | 추천: 8
서동기/ 인권연대 간사 위플래쉬(Whiplash)라는 영화가 있다. 채찍질이라는 뜻의 제목이다. 최고의 드럼 연주자를 꿈꾸는 음대 신입생 앤드류, 그리고 그를 극한으로 몰아가는 교수 플래쳐의 이야기다. 플래쳐는 완벽한 연주를 위해서 수단을 가리지 않고 학생들을 극한으로 몰아넣는다.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의 폭언은 기본이고 자신에게 필요치 않다고 생각하면 가차 없이 모든 이들이 보는 앞에서 면박을 주고 쫓아내기도 한다.  영화에 대한 감상 가운데 한국 사람들에게서 유독 도드라지는 해석이 있다. 완벽한 연주를 위해 그 정도의 고통은 감내해야 한다는 것이다. 고통 없이 이룰 수 있는 것이 어디 있으며 완벽한 연주, 천재적인 연주자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라면 그것이 아무리 납득하기 어려운 고통이더라도 마땅히 견뎌내야 한다는 것이다. 정도를 넘은 플래쳐의 행위와 광기를 비판하면, 무엇을 위해서 노력은 해보고 투덜대는 것이냐며 비판한다. 사진출처 - 영화 <위플래쉬>  며칠 전 대안학교에서 만났던 학생에게 전화가 왔다. 자퇴 후 꽤 오래 방황을 했던 친구다. 마음을 다잡고 검정고시를 치렀고 대학에도 입학했다. 자기와 같은 청소년들을 도와주는 일을 하고 싶다며 사회복지학과에 입학했다. 한 달 전쯤 드디어 실습기관 면접에 합격해 현장으로 나가게 되어 긴장되고 설렌다며 연락을 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전화를 걸더니 일주일 만에 그만 두었다는 것이다.  컴퓨터 문서 작업 경험이 없는 그는 매일 실습일지 작성이 고통이었다. 문서에 표를 그리고 편집하는 것조차 익숙하지 않았는데 매일 쏟아지는 일지 작성과 다른 실습생들과의 비교 속에서 무기력했고 도망치듯 실습을 그만두었다고 했다. 바쁜 일과 속에서 한글 문서 편집 따위를 알려주고 이해해주는 사람이나 조직은 없었다. 다만 다그치고 그것도 못하냐는 닦달뿐이었다. 사람이 귀하지 않은 세상이기에 을은 언제든 다른 누군가로 대체될 수 있다.  위대한 연주를 만들어내기 위한 광기에 관한 영화와 사회복지사 실습현장에서 좌절을 겪었다는 평범한 이야기의 공통점은 성장을 뒷받침할 시스템의 부재다. 알아서 능력을 키우라는 다그침 앞에 을들은 끊임없이 자기를 착취하면서 불필요한 무기력과 고통을 겪는다. 갑은 답답하고 을은 지친다. 꿈을 갖고 무엇을 해보려던 을들은 밀려나거나 떠난다. 갑은 겨우 그 정도 성장통도 겪어내지 못하는 이들을 탓하며 능력을 갖춘 이가 등장하기를 기다린다. 그리고 악순환은 끊임없이 이어진다.  한계를 만나고 돌파해내는 것은 소중한 경험이다. 무언가를 이뤄내기 위해서는 마땅히 어려운 것들에 부딪히고 그것을 넘어서기 위한 성찰과 노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것이 단지 각자도생 식으로 개인들에게 책임이 미뤄졌을 때 비극은 시작된다. 적절한 가이드를 제공하고 꿈꾸는 이들이 성장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만드는 것은 먼저 그 과정을 겪은 이들의 책임이다.  예술가나 스포츠 선수들을 길러내는 한국 사회의 시스템을 보자. 최근에 나오는 그들 세계에서의 착취와 폭력에 대한 이야기들은 모두 그들의 성취를 돕는다는 명목 하에 기존의 성취자들에 의해 이뤄지고 눈감아져왔던 것들이다. 예술계나 스포츠계 뿐만 아니라 학교에서 직장에 이르기까지 무언가 뜻을 갖고 해보려는 많은 이들에게 한국 사회는 그들이 성장할 수 있는 시스템을 제공해주고 있는가. 더 나은 성취를 위해 꿈꿀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성장할 시스템을 만들어야 할 책임을 너무 쉽게 떠넘기고 있는 것은 아닌가.
2019-07-17 | hrights | 조회: 1238 | 추천: 15
이동화/ 사단법인 아디 활동가  소규모시민단체에서 일하는 활동가에게 단체를 정부에 등록하는 것은 상당히 번거롭고 까다로운 일이다. 제출해야 하는 서류가 많고 대부분 단체 외부에 계신 대표와 임원들의 신분증과 인감도장이 필요한 경우도 많다. 긴 시간을 들여 필요서류를 다 챙겨 등록관청에 제출해도 이런저런 이유로 트집 잡히거나 수정요청을 받는 경우도 다반사이다. 그래서 단체들은 한번 등록절차를 마무리하면 웬만해서는 단체변경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아디는 2016년 임의단체로 시작하여 2017년 비영리민간단체, 2018년 기부금대상민간단체, 그리고 최근 2019년 비영리사단법인 등록까지 거의 모든 법률상 비영리단체의 유형을 다 거치게 되었다. 그 사연의 핵심은 기부자들을 위한 기부금영수증 발급 때문이었다. 아디의 비영리사단법인 허가증 사진 출처 - 필자  2016년 활동을 시작한 아디는 단체의 외형을 갖추기 위해 ‘법인으로 보는 단체’이지만 법인격이 없는 ‘고유번호증’이 있는 단체로 등록하였다. 법률적으로는 임의단체인 것이다. 사실 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고유번호증’을 발부 받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관할 세무서에 제출할 신청서와 정관, 사무실, 총회회의록, 대표자 신분증과 직인만 있으면 가능하다. 일단 고유번호증이 발부되면 회원과 후원자들에게 정기적이고 자동으로 후원금을 받을 수 있는 CMS를 개설할 수 있다.  CMS를 개설하고 활동을 시작하면서 조금씩 기부자와 회원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물론 제대로 활동하고 홍보를 해야 후원자가 늘지만 그래도 가족, 친척, 지인 중심으로 회원들이 모였고 슬슬 “좋은 일 하네. 근데 기부금영수증 발급 안 돼? 나중에 가입할게”하는 소리를 점점 듣게 됐다.  그렇다. 기부금영수증을 발급할 수 있는 단체가 되어야 할 때이다. 그 즈음 아디는 ‘비영리민간단체’로 등록할 지 ‘비영리법인’으로 등록할 지 고민을 하였다. 둘다 기부금 영수증 발행이 가능했지만 상대적으로 등록절차가 간소한 ‘비영리민간단체’를 목표로 각종 서류작업에 돌입했고 임원분들을 졸라 도장과 인감증명서를 받아냈다. 그리고 2017년 서울시 ‘비영리민간단체’로 등록됐다.  ‘비영리민간단체’로 등록되었다고 바로 기부금영수증을 발행할 수는 없다. 기부금영수증 발행이 가능하려면 ‘기부금대상민간단체’로 등록이 되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1년 이상의 공익활동이 증명되어야 했다. 아디의 활동이야 단체구성원들에게 수익을 분배하지 않기에 로힝야,  미얀마, 팔레스타인에서 열심히 활동한 내용을 중심으로 ‘기부금대상민간단체’로 신청했고, 긴 서류작업을 통해 마침내 2018년 ‘기부금대상민간단체’로 기획재정부에 등록되었다. 이제 회원들에게 기부금 영수증을 매년 발부만 하면 될 줄 알았다.  그런데 ‘비영리민간단체’로 등록된 ‘기부금대상민간단체’는 개인 기부자에 한해서만 기부금영수증 발행이 가능하고, 무엇보다 개인의 후원과 기부가 전체 수입의 50%를 상회해야 하는 필요조건이 있었다. 하지만 아디는 아시아분쟁지역에서 현장사업을 많이 진행하고 이 재원을 회원의 기부와 후원만으로는 충분치 않아 코이카와 민간재단을 통해 충당했는데 2018년 재정 결산을 진행하다보니 아디 전체 수입중 개인의 기부와 후원이 50%가 되지 않는다는 걸 확인하게 됐다. 이럴 경우 ‘기부금대상민간단체’의 자격이 박탈될 수도 있기에 아디 사무처는 긴급하게 대책논의를 했다. 무엇보다 약 450명 이상의 개인 후원회원에게 기부금영수증을 발급하지 못하게 되면 너무도 큰일이기에 여러 대안을 놓고 대책을 논의했다. 그 결과 개인의 후원 비율의 제한이 없는 ‘비영리사단법인’으로 전환을 결정하였고 2019년 2월 총회를 통해 ‘비영리사단법인’으로 전환작업을 시작하였다.  ‘비영리사단법인’ 신청을 위한 다시 지난한 서류작업이 진행됐다. ‘법인’이기에 설립등기를 해야 했고, 필요 서류 중에 일부는 공증을 받아야 하는데 이 중 정회원 100명중 2/3인 68명의 위임장과 중요개인정보 문서가 필요하다는 걸 알았을 때 솔직히 앞이 깜깜했다. 가뜩이나 현지사업으로 정신없는 와중에, ㅠㅠ 별다른 대안이 없다는 걸 안 아디 상근자들은 회원들 80명이상에게 직접 전화 돌리고 방문하고 만나서 부탁하고 어찌어찌해서 거의 2달간에 걸쳐 필요한 위임장을 모두 수령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아디는 최근 6월에 ‘비영리사단법인’으로 등록이 되었고, 현재는 ‘지정기부금단체’로 등록 신청 중이다.   솔직히 이 과정을 사전에 알았다면 처음부터 비영리법인으로 신청했을 것이다. ‘비영리민간단체지원법’에 근거하여 ‘비영리민간단체’라는 제도가 생겼지만 다양한 후원모델(개인, 단체, 민간재단, 법인, 기업 등)을 가진 단체에 적합하지 않을 뿐더러 기부금영수증 발부도 제한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다. 그래도 이 과정을 통해 정말 많은 후원자분들이 아디의 번거로운 부탁에 선뜻 응해주시고 또한 응원해 주셔서 활동가로서 보람을 느끼기도 했다. 이제 또 열심히 아시아분쟁지역과 한국에서 활동하여 더 많은 분들이 아디를 후원해주시길 기대하면서 더 이상의 단체변경이 없기를 진심으로 바래본다.
2019-07-10 | hrights | 조회: 4723 | 추천: 13
손상훈/ 교단자정센터 원장  자승 전 총무원장의 기소 여부가 코앞이다. 검찰의 2013년 상습도박 의혹 수사처럼 면죄부 주는 수사가 아니길 바란다. 8년 동안 조계종 총무원장으로 재직하며 상습도박장 개설 등 갖가지 사회법 위반 의혹이 있었지만 검찰은 제대로 조사를 하지 않았다. 지난 2013년 불국사 장주승려가 자수서를 내며 폭로한 ‘은정재단 등 상습도박장 개설과 상습 도박’ 의혹 수사는 검찰이 면죄부를 준 바 있다.  전국민주연합노동조합 대한불교조계종 지부(지부장 심원섭, 이하 조계종 노조)는 지난 4월 4일 자승 전 원장을 서울중앙지검에 고발했다. 검찰은 이 사건을 서초경찰서에 배당했다. 노조는 자승 전 원장이 총무원장 재임 당시인 2011년 조계종과 하이트진로음료가 '감로수'라는 상표의 생수 사업을 시작하면서, 2018년까지 수수료 약 5억7천만 원을 제삼자인 ㈜정에 지급하도록 지시해 승려노후복지 사업 등 종단에 손해를 끼쳤다며 자승 전 원장을 고발했다.  서초경찰서에서 생수비리 수사로 6월초 조사 받은 자승 전 원장은 어떤 심정일까. 1994년 조계종 개혁 총무원이 들어선 이래 가장 실세 총무원장이었고 퇴임한지 2년이 지난 지금도 ‘강남 총무원장’이라는 지적을 받는 실력자라고 한다. 조계종 승려사이 관계, 조계종 권력관계를 잘 파악할 수 없어도 파격인사로 실체가 드러난다. 동국대학교 등 고위직 인사에 8년간 재가불자 종책특보를 지낸 박 모씨를 정규직원으로 채용했다. 동국대에 32년간 근무한 한 인사는 관례에 없는 특혜 채용이라고 지적했다. 박 모씨는 김진태 전 검찰총장과 자승 전 원장의 황제골프 회동에 자승 전 원장 대신 이름을 올려 언론에 알려지기도 했다. 생수비리는 사건 자체가 우연한 계기로 직원의 실수로 알려졌다. 노조가 자승 전 원장을 고발한 직후 ㈜정의 실체를 둘러싼 의혹이 이어졌다. 노조는 ㈜정이 페이퍼컴퍼니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실제 ㈜정의 사업장 소재지에는 성형외과 병원이 있었고, ㈜정의 감사인 김 모 씨는 이 병원의 원장이었다. 여기에 자승 전 총무원장의 친동생으로 알려진 이호식(대한체육회 부촌장) 씨가 ㈜정의 사내이사로 재직했었고, ㈜정의 감사 김 모씨는 자승 전 총무원장이 이사장을 맡고 있는 은정불교문화진흥원의 이사였다는 사실이 확인되면서 자승 전 원장과 김 모씨가 특수관계에 있다는 의혹이 확산됐다. 이에 불교계시민사회단체는 수 차례 기자회견을 열고 관련성이 높은 관계인들에 대한 계좌조사나 압수수색을 주장하고, 검찰의 자승 전 원장 공개 소환조사를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진로하이트음료(주)는 "2010년 6월께 ㈜정이 조계종에 생수를 납품할 수 있는 아이디어를 우리 회사에 제공했고 납품 계약이 성공함에 따라 ㈜정에 마케팅, 홍보 수수료를 지급해온 것"이며 "이는 일반적인 유통 영업 형태"라며 수수료 지급에 문제가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한국종교계는 지난 백년간 조계종 전 총무원장 등 직업종교인이 고발당해 수사 받는 일에 공정수사, 엄정기소 여부로 시비가 일어나지 않고 민주법정에 세워질지 기대한다. 지난 5일 서울 서초경찰서 앞에서 자승 전 총무원장 공개소환 조사를 요구하는 불교시민단체 관계자들. 사진 출처 - 불교닷컴  우연히, 어쩌다 억울하게 당하지 않고 사법피해자가 되지 않게 자승 전 원장의 기본권을 최대한 보장하고 예우를 갖춰 대해 줄 것이라 믿는다. 민주노총 위원장의 경찰출석만큼 자승 전 총무원장의 경찰조사도 언론이 알고 취재할 수 있는 ‘적절한 예우’를 기대한다. 현실에 걸맞지 않는 주장이라도 사회적 관습, 예절과 예우도 바뀌는 것이다. 지난 김영삼정부 때부터 의전위상을 국무총리급으로 맞춰 시작된 조계종 총무원장의 예우라고 알려져 있다. 청와대에서 갖는 행사나 국가 행사때만 예우받고 경찰과 검찰에 피고발인 자격으로 조사받으러 나올때는 비공개로 온갖 편의를 봐주고, 설마 전직 총무원장을 기소하겠냐, 현행범이나 하명수사가 아니라면 어렵다는 편견을 깨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이번 검찰총장 후보 국회 청문회에서 자승 전 원장과 황교안씨의 관계에 대해서도 질문하는 국회의원을 보고 싶다. 온갖 현안이 많고 검찰총장 후보자 청문회와 맞지 않는다는 지적도 있다. 그러나 직업종교인의 혁신을 꿈꾸는 종교계시민사회는 검찰총장 후보자의 개인의지를 확인하고 싶다. 직업종교인 가운데 국민의 세금을 가장 많이 사용하는 조계종, 그리고 전직 총무원장에 대한 공개수사와 기소가 공개 소환조사 일정으로 포토라인에 설지 궁금하다. 망신주기가 아니라 공인으로 대접받고 살아온 혜택의 의무이고 검찰 변화의 잣대 가운데 하나라고 믿는다. 검찰은 재벌승려, 부자목사님들에게 잘해 준 관행을 극복하고 방탄소년단(BTS)같은 선구자처럼 백년 묵은 종교 부패 악폐를 청산할 귀인이 될지 기대한다. 번쩍하고 드는 생각은 유럽의 르네상스처럼 한국종교시민사회에 새 바람이 불겠다는 느낌이다. 한편의 영화처럼 자승 전 총무원장이 정의의 법정에 서는 모습을 그려본다. 지리산 한 사찰의 산적 같은 사찰관람료 완전폐지를 기념하며 서울 우정총국 시민마당과 지리산 계곡에서 소박한 잔치와 공연을 또 꿈꾼다.
2019-06-26 | hrights | 조회: 974 | 추천: 16
이회림/ 00경찰서  여름이 다가오니 슬슬 클럽으로 향하는 사람들이 늘어날 것 같습니다. 그런데 클럽 안도 범죄가 자주 일어나는 장소 중의 하나입니다. 클럽 내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절도가 발생합니다. 춤을 추는 사람들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몰래 빼가거나, 테이블에 잠시 내려놓은 지갑을 그냥 가져가기 일쑤입니다. 크고 작은 시비와 폭행도 빠지지 않습니다. 담뱃재를 아무렇지 않게 떨다 옆 남성의 얼굴에 화상을 입힌 대학생도 있었고, 몸을 부딪쳤다고 서로 뺨을 때려가며 몸싸움을 해 경찰 조사를 받게 된 20대 초반 여성도 있었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은 남자 두 명이 여자 한 명을 클럽 안에서 성폭행한 사건입니다. 가해자들을 편의상 2인조 강간범 A, B라고 하겠습니다. 40대 초반 A와 30대 초반 B는 클럽에서 우연히 만나 ‘형, 동생’ 하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A는 아들 둘을 둔 가장이었고, B는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작은 식당을 운영하는 자영업자였습니다. A와 B는 일주일에 두 번 정도 클럽에서 놀았다고 합니다. 그들은 단순히 춤추기를 좋아해서 클럽을 다닌 것이 아니라 어린 여성들과의 소위 ‘원나잇 스탠드’를 즐기기 위해 주기적으로 클럽을 찾은 것이었습니다. 클럽에 온 여성들에게 다가가, 새벽이 되면 대중교통이 끊기니 자신의 차로 안전하게 집으로 데려다주겠다는 말로 환심을 산 후 차에 태워 성범죄를 일삼았습니다.  20대 초반의 여성 피해자 C는 외국에서 오래 살다 귀국한 지 얼마 안 된 사회 초년생으로 오랜만에 만난 소꿉친구들과 함께 생일파티를 겸해서 클럽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C가 혼자 화장실을 가는 모습이 가해자들의 눈에 포착되었습니다. 가해자들은 피해자를 뒤따라 가 손목을 끌고 에어컨 앞으로 데리고 가서는 번갈아 가면서 몹쓸 짓을 하였습니다. 가해자들은 서로의 몸을 이용해 가려주는 식으로 망을 봐 주었고 어두운 조명과 소음도 그들의 범행을 용이하게 하는 요소가 되었습니다. 다행히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이를 목격하고 경찰에 신고를 했습니다. 신속히 출동한 경찰관들에 의해 A는 현장에서 체포되었지만 B는 어수선한 틈을 타 인파속으로 경찰을 피해 도망가 버렸습니다. A는 재판정에서 뻔뻔하게 끝까지 범행을 부인하고 공범의 존재를 밝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경찰의 끈질긴 수사과정을 통해 또 다른 강간 피해자들이 밝혀지자 결국 징역형을 선고 받게 되었습니다.  클럽 안에서 성범죄가 일어나면 어둡고 시끄러운 환경 때문에 피해자의 목소리가 소음에 묻혀서 제때에 도움을 받기가 힘듭니다. 피해자가 계속 비명을 질렀으나 주변 사람들이 그것을 알아차린 것은 그런 목소리를 들어서가 아니라 가해자들의 비정상적인 몸놀림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소음과 어둠이 가득한 클럽은 가해자들이 범죄를 저지르기에 좋은 최적의 환경입니다. 피해자가 있는 힘껏 소리를 질러도 클럽 안의 음악소리에 묻혀 잘 들리지 않습니다. 사진 출처 - 게티이미지  만약 클럽 안에서 모르는 남자가 자신을 따라오는 것 같고 불안함을 느꼈다면 순간적으로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시길 바랍니다. 그리고나서 쫓아 온 남자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당당하게 말씀하시길 바랍니다.  “저기요! 지금 저 따라오시는 건가요?”  그들이 범행 의도를 품고 있던 자들이라면 여러분의 이런 대찬 말 한마디가 분명 효과가 있습니다. 가해자들이 허를 찔린 기분을 느끼는 순간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경고를 했어도 남자가 과도하게 치근덕거려서 불안하다면 클럽보안요원에게 도움을 요청하시길 바랍니다. 만약 보안요원이 없다면 지체 없이 112로 신고해서 상황을 차분히 설명하고 “저 남자의 이런 이런 언행 때문에 위협을 느낀다”고 경찰에 도움을 청하는 것이 좋습니다.  만약 가해자에게 몸이 붙잡힌 상황에 처하게 된다면 발로 가해자의 발을 순간적으로 내리찍듯이 밟아서 타격을 가해보시길 권합니다. 하이힐을 신고 있다면 하이힐을 벗어 가해자를 향해 무기처럼 사용하면 도망칠 기회를 더 효과적으로 포착할 수 있습니다. 덧붙여 낭심차기 기술까지 활용한다면 가해자가 바닥을 구르며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낭심차기는 가장 효과적인 호신술 중 하나입니다. 남성의 고환에 타격을 주면 극심한 고통이 아랫배 쪽으로 전이되고 골반근육이 급작스럽게 수축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한동안 몸을 움직이기 힘들어집니다. 상대의 가랑이 전면부를 차야 하기 때문에 가급적 자세를 높이고 무릎을 높이 들어 다리가 펴지기 전에 차야 합니다. 발등으로 상대의 고환을 노리고, 무릎을 드는 동작과 차는 동작이 분리되지 않도록, 무릎을 들어 올리면서 동시에 무릎의 스냅을 이용해 차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이때 한 번에 확실한 타격을 주는 것이 좋습니다. 만약 실패하면 상대도 방어 자세를 취할 것이고 더 어려운 상황에 처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경찰청 통계에서도 알 수 있듯이 클럽이나 나이트클럽 같은 대형 유흥접객업소의 안전 실태에 대해서는 과거부터 지속적으로 문제가 지적됐으나 여전히 무방비 상태나 다름없습니다. 신나는 음악소리에 몸을 맡기고 춤을 출 줄 안다는 것은 인생을 즐기는 간단한 방법 중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춤을 추기 위한 장소인 ‘클럽’에 범죄는 전혀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위기 파악 못한 채 어슬렁대는 못난 가해자들이 보인다면, 용기 내서 경고를 할 수 있길 바랍니다.  만약 위의 사례처럼 심각한 범죄 상황에 처하게 된다면, 어떻게 해서든 이 상황을 뚫고 나가고 만다는 의지만큼은 버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어떠한 상황이 닥쳐도 내 스스로 나를 보호하고야 말겠다는 마음, 즉 용기를 버리지 않는 것이 호신술의 가장 기본이자 완성이기 때문입니다.
2019-06-19 | hrights | 조회: 1169 | 추천: 8
이상재/ 대전충남인권연대 사무국장  지난 주말 둘째 아이가 다니고 있는 초등학교에서 하는 ‘아빠랑 캠프’에 참가하고 왔다. 캠프라고 해서 어디 특별한 곳을 가는 것은 아니고 집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는 학교 체육관에서 1박 2일 동안 아이와 함께 놀이하고 같이 하룻밤 자면서 지내다 오는 행사였다. 어떻게 보면 평범했던 이 행사가 나에게는 조금 특별했던 것이 어쩌다 아빠랑 캠프 준비위원을 맡아서 하게 된 것이다.  시작은 캠프 준비를 도와줄 아빠가 필요하다는 아이 친구 엄마의 부탁이었다. 큰아이 때부터 학교 행사는 잠깐씩 가서 구경하는 것 빼고는 거의 참가한 적이 없었던 대한민국 평균 아빠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던 터라 이번에도 처음에는 당연히 준비위원은커녕 캠프도 참가할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큰아이와 아홉 살 터울이 나는 이른바 ‘늦둥이’인 둘째에 대해서 큰아이만큼 신경을 못 써주고 있다는 미안함 때문이었을까? 아님 그까짓 1박 2일 행사 도와주는 것이 뭐 어렵겠나 싶은 무모한 판단 때문이었을까? 뒤늦게 캠프 준비모임에 참여하겠다고 놀란 표정의 아내에게 말한 그 순간이 사실 아직 나도 이해가 되질 않는다.  아무튼 1박 2일 아빠랑 캠프를 위한 첫 준비모임이 있었는데 모든 것이 준비되었고 캠프에 가서 허드렛일만 도와주면 될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캠프에 대해 정해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단지 멍한 표정의 나처럼 참석한 몇 분의 아빠들도 아내에게 등 떠밀려서 나왔다는 말을 이구동성으로 반복하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함께 참석한 학부모회 회장님이 ‘아버지회’가 활성화되어 있는 이웃 초등학교의 현직 교사인지라 그 학교의 사례를 잘 말씀해 주었고 캠프의 기본 준비사항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알려주었다. 서로의 직업, 나이 등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에서 어색하게 시작된 준비모임은 추가로 두 명의 아빠가 들어오고 학교에서는 교무부장 선생님까지 참가하면서 캠프에 대한 내용과 틀이 잡혀가기 시작했다. 다들 직장과 집안일로 바쁜 가운데서도 아빠들은 1박 2일 캠프를 위한 홍보와 모집, 연락, 프로그램 기획, 식사와 간식 준비, 후원업체 섭외까지 서로 맡은 일을 척척 진행하는 ‘오병이어’급의 기적을 약 한 달이라는 준비 기간 만에 보여주었다.  드디어 아빠랑 캠프가 열린 지난 6월 1일, 토요일 오후 3시가 다가오자 캠프참가를 신청한 아빠와 아이 200여명이 체육관에 모이기 시작했다. 예상대로 아이들은 정신없이 뛰어다녔고 아빠들은 약간은 어색해하고 또 조금은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학교시설과 아이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후의 1박 2일 캠프는 시종일관 아이들 얼굴에 웃음이 떠나지 않았던 것으로 봐선 일단 성공적으로 치러졌던 것 같다. 아이와 아빠들은 1박 2일 동안 함께 문제를 풀고, 춤추고, 뛰어다니고, 같이 영화를 보고, 잠자리에 들었다. 특히 좁지는 않을까 걱정했던 잠자리는 간이텐트와 돗자리로 이루어진 수십 개의 잠자리가 서로의 배려 속에 자리를 잡은 모습을 보며 체육관 정문에 붙은 “이 시설은 유사시 대피 시설로 이용됩니다.”라는 문구를 실감하게 했다. 솔직히 아빠들 입장에서야 불편하고 피난시설 같은 체육관에서의 하룻밤이 뭐 그리 좋았겠냐마는 아빠와 함께 다른 곳도 아닌 학교에서의 하룻밤은 아이들에게 매우 특별했을 것이다. 사진 출처 - 필자  이번 행사를 준비하면서 새삼 느낀 건데 학교는 아이들에게 매우 재미있는 공간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내 세대가 자랄 때와 달리 집 주변에 공터가 거의 없는 요즘 아이들에게 운동장은 운동과 놀이 공간으로 여전히 안성맞춤이다. 내가 사는 세종시는 신도시라 지은 지 몇 년 되지 않은 신축학교가 많은데 이번 행사를 한 것처럼 체육관도 갖추고 있어서 다양한 실내 활동과 스포츠를 즐길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운동장이 넓고 체육관시설이 좋아도 대학 입시를 위한 경쟁체제의 현재 우리나라의 교육 상황에서 초·중·고 12년의 학교생활은 아이들에게 고생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지금 당장 교육 현실이 바뀌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라면 비교적 입시 부담이 적은 초등학교라도 아이들에게 ‘재미있는 학교’와 ‘즐거운 학교’로 변화하는 건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이번에 행사를 준비한 아버지들은 학부모회와 함께 다음 달에는 운동장에 물놀이장을 설치해서 아이들을 맘껏 놀게 하고, 가을에는 멀지 않은 시골 학교 운동장을 빌려 별 보기 캠프도 준비할 예정이다. 훨씬 먼저 ‘아버지회’를 만들어서 활발하게 활동한 덕분에 EBS에 방송까지 탄 이웃 초등학교 아버지회는 아이들과 함께하는 행사를 위해 자체적으로 세종시에 공모사업까지 신청해서 올해 500만원을 지원받기까지 했다고 한다.  수업과 잡무로 바쁜 교사에게 이번과 같은 행사를 준비해 달라고 하는 것은 무리이며 현장 체험과 수학여행과 같은 교과 일정상의 행사 이외에 다른 행사를 학교 차원에서 준비하기에는 안전상의 이유도 있고 해서 부담일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학교를 보다 재미있게 만드는 일에 학부모는 실질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 예전에는 학부모가 학교 일에 참여하는 것을 자신의 아이를 위한 봉사 정도로 여기거나 ‘치맛바람’과 같은 부정적인 이미지가 강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내 아이만이 아닌 우리 아이들의 즐거운 학교생활을 위해 학부모는 위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생각보다 많은 일을 할 수 있다. 더구나 아이들만의 행사가 아닌 아빠 혹은 엄마와 같이 참여하는 행사는 학교 당국에서 걱정하는 안전상의 위험도 덜어줄 수 있다.  학교의 구성원을 3주체라고 하면서 학생과 교사, 그리고 학부모를 얘기한다. 학교의 교칙을 비롯해 많은 결정을 학생과 교사의 의견에 더해 학부모의 의사도 묻고 있다. 일선 학교 행정에 학부모의 의견을 더하는 것은 예전과 비교하면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 된 것이다. 하지만 학부모란 존재는 학교와 교사에게 마냥 긍정적인 존재는 아닌 것 같다. 얼마 전 스승의 날을 맞아 언론에서 보도한 교권침해 대상 1위는 바로 학부모였다. 학교와 교사에 대한 학부모의 태도가 어떤 부분에서는 교권을 침해하는 것으로 이해되는 측면이 많은 것이다.  이번 아빠랑 캠프를 준비하고 또 끝난 뒤 평가 모임을 하면서 개인적으로 얻은 가장 큰 수확은 교사와 아버지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학교 현장을 보다 더 이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언론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간혹 학교공동체를 불편하게 하는 학부모와 교사들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학교 현장에서 일어나는 문제는 어디다 신고를 하고 사건화 시키지 않아도 공정하고 조금 편안하게 교사와 학부모 상대방의 얘기를 교환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된다면 쉽게 풀릴 수 있는 문제들이 대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그 역할을 학부모회나 아버지회가 할 수 있지 않을까 상상해본다.   이번 1박2일 아빠랑 캠프 중에 운동회가 저녁시간에 있었다. 여러 종목 중에 큰 공 굴리기가 있었는데 참가한 아이와 아빠가 함께 공을 굴려서 반환점을 돌아오는 경기였다. 나는 출발선과 떨어진 곳에 서서 반환점 역할을 하며 열심히 공을 굴려서 뛰어오는 100여 팀의 아이와 아빠를 지켜 볼 수 있었다. 다들 공을 굴려서 오는 스타일은 달랐지만 한 가지는 똑 같았다. 그것은 아이들의 표정이었는데 정말 아이들의 표정이 하나같이 해맑게 웃으면서 달려오고 있었다. 나는 반환점에 우두커니 서서 학교에서 아이들을 웃게 하는 일에 아빠와 엄마가 나서는 시간이 다가 오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2019-06-05 | hrights | 조회: 886 | 추천: 3
장애인 혐오의 역사 1 김형수/ 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 총장 「우리는 언어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대로 현실을 인식한다.」  (훔볼트)  말은 그것을 표현하는 대상에 대해 일정의 가치와 판단을 담고 있고 그것은 언어생활을 통해 전달되고 알려져서 그 말에 담긴 인식을 사람들에게 심어 주게 된다. 특히 그 말이 특정 계층이나 일부 집단 전체를 지칭하는 것일 경우 그 낱말은 사회적인 규범과 힘을 갖게 된다. 특히 어떤 단어가 사회적 소수나 약자에게 부려지는 것일수록 그 말이 갖는 의미와 가치는 중요해진다. 왜냐하면 그 말 자체가 그 사람을 사회적 소수나 약자로 만들어 버리는 힘과 파괴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요즘 ‘장애인’을 지칭하는 용어들이 잦아들 여지도 없이 뜨거운 논란을 빚는 것도 이와 같은 이유 때문이다. 그러나 무슨 용어를 쓰든, 현재 ‘장애인’이란 용어가 모두가 인정하는 법적인 용어이지만 ‘장애(障碍)’라는 단어 자체가 부정적 가치와 그 의미를 가지는 것이 중요한 문제이다. 이렇게 ‘장애’라는 용어가 가지는 사회적 의식과 가치 및 규범을 잘 드러낸 사건이 바로 것이 2013년 4월에 SNS와 언론을 한창 뜨겁게 했던 이른바 대학생들의 J.M 미팅 사건이다.  대학생 미팅을 나온 남학생들의 무리가 장애인 교육을 전공하는 학생들에게 ‘장애인’버전으로 군대식 자기소개를 하자(사실 남학생들이 상대방에게 제안을 했는지, 본인들이 먼저 하면서 당신들도 한번 해 봐라는 것이었는지, 자기들끼리만 그렇게 했는지 분명하지 않다)는 식으로 행사를 진행하면서 불거진 이번 사건은 그 남학생들의 상식 밖의 저급한 행동이었다는 1차원적인 분석 이외에도 몇 가지 중요한 장애와 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관계를 보여준다. 그 행위 자체에 대한 해석과 의견들 속에서 ‘장애’라는 말이 가지고 있는 진실과 본질을 은폐하는 강한 권력 자체가 더 큰 문제이다.  자행한 불특정 장애인 다수에 대한 모욕과 장애인 관련자에 대한 간접 차별이라는 범죄 사실도 중요하거니와, 장애(障碍)라는 말이 독자적으로 지금도 우리 언어생활에서 폭넓게 쓰이고 있기 때문에 장애(障碍)라는 단어 자체가 그 의미가 변화하든지, 장애인이란 단어 자체가 장애(障碍)라는 단어에서 완전히 독립하여 쓰이지 않는 한, 장애인에 대한 부정적인 낙인 효과는 계속 될 수 있음을 잘 보여준 사건이었다.  우리 사회에서 장애인이 자신의 인격으로만 인정받고 존중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장애(障碍)’만이 부각되고 설명되는 용어라면 그 뒤에 어떤 낱말이 붙든 그것은 차별과 소외를 위한 낙인(烙印) 일 수 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장애인 당사자의 의견과 관계없이 함부로 누구를 장애인으로 지칭하거나 규정하는 것은 늘 신중해야 한다. 또한 장애(障碍)란 용어가 불명확한 이유는 장애의 반대의 개념-상투적으로 정상(正常)-인 비장애(非障碍)를 명확하게 정의내릴 수 없고 바로 절대적인 기준을 세울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용어 자체는 ‘장애인’을 차별하고 소외시키고 있는 현실을 만들어 갈뿐 아니라, 장애인으로 하여금 그 차별과 소외의 책임이 자신의 ‘장애’에 있다고 장애인은 끊임없이 교육받고 사회화된다. 장애인은 그의 장애라는 ‘차이’로 그 개별성(individuality)을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장애를 극복해야한다는 당요 아닌 강요를 사회로부터, 타인으로부터 끊임없이 받는다. 장애인이 자신의 장애를 차이로 ‘인정’ 받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장애가 늘 극복해야 하는 큰 장애물(障碍物)이고 극복하지 못하면 패배자가 되는 논리와 이념이 녹아있다. 우리의 장애인이란 장애(障碍)라는 단어에는.  따라서 그 낱말을 쓰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 모두에게 장애인에 대한 부정적인 낙인(stigma)을 심어줄 정치적, 문화적 위험이 있다. 특히 이런 단어들은 순환 혐오를 생성하는데 대표적인 것이 ‘장애인을 차별하는 것이 바로 ‘장애’입니다.’ 이런 표현 등이다. 문맥 적으로, 발언상으로는 의도는 충분히 존중할 만하지만 언어 철학과 논리로는 ‘장애’를 가진 사람에 대한 부정적이고 혐오적인 발화는 무한 반복되고 있는 꼴이다. “경솔하고 천박한 말이 입에서 튀어나오려고 하면 재빨리 마음을 짓눌러, 그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일단 입 밖으로 내뱉고 나면 다른 사람들에게 모욕을 당하고 해로움이 따르게 될 텐데 어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조선 후기 이덕무 수양서 <사소절(士小節)> 중에서 누구인가? 가 문제가 아니라 ‘언제인가’ 가 문제이다.   장애인 자조모임에서 김포 특수학급에 재학 중인 어느 지적 장애인 고등학생이 적어준 학교생활에서 상처받은 말들. 주로 중학교 재학 시절 받은 ‘언어폭력’들이었다. 이것을 적어준 학생은 지적 장애인 중에서도 그 능력이 상위 0.01%에 분포하는 학생이었고 겉으로 장애가 거의 드러나지 않는 학생이었다. 학생이 다니던 중학교나 고등학교가 그나마 장애인에 대한 인식이 상당히 나쁘지 않는 학교임에도 불구하고 자조모임에 참여하기 전까지는 당사자 스스로를 장애인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중학교 진학 후 받은 언어폭력으로 상처가 깊었고 혼란스러워 했다. 사진 출처 - 필자  모든 인간의 삶에 출발점은 자기의 의지에 따른 선택이 아니다.  그건 마치 수없이 많이 포장된 같은 초콜릿 속에서 그냥 하나 집어 들어 포장을 벗겨 먹듯이1) 우리의 삶은 처음에는 자신의 의지에 관계없이 처음의 운명에 따른다. 그 벗겨 먹을 포장은 여성일 수도 남성일 수도, 백인일 수도, 흑인일 수도 있고 부자 일수도 가난할 사람도, 뇌병변 장애인일 수도, 지적·자폐성 장애인일 수도 있다. 동성애자일수도 있다. 그 누구도 그래서 당사자에게는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 따라서 그러한 무의지로 선택받은 삶에 대해 우리는 어떠한 불평등이나 부정적 차별, 즉 불리(Handicap 2) )를 가할 자격은 없다. 신체적 정신적 ‘장애’ 역시 의지적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그리고 어떤 구체적인 질병이나 증후군들을 ‘장애’라고 구별하는 것은 환자라는 신분에서 벗어나 더 이상 병원에서 머무르지 않을 때이다.  어떤 사람을 ‘언제’ 우리는 장애를 가진 사람이라고 즉 장애인이라 부르는가? 누구의 자녀를 항상 장애인 아들, 누구의 애인(愛人)을 늘 장애인이라 칭하지 않는다. 법리적으로 이론적으로는 어떤 사람이 사회적인 존재로서 사회적인 활동을 할 때 사회적인 지원을 한정된 자원으로 해야 ‘할 때’ 예를 들어 장애인 화장실을 이용해야 할 때, 장애인 주차장을 사용해야 할 때, 학교의 특수학급의 지원이 필요할 때이다. 즉 제한적인 자원을 효율적으로 배치하고 공급하기 위해서, 그렇게 어떤 개인에게 국가적인 사회적인 지원이 필요할 때 장애인이라 부르기로 약속했다. 모두가 그 약속에 투철했다면 애초에 그 약속자체에는 혐오와 차별이 없었을 것이다.3)  그러나 사회학자 Meyerson은 “장애란 한 개인에게 객관적인 사실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가치판단에 의해 필요에 따라 규정되어 지는 것”이라고 하면서 장애4)란 다른 사람이 그 사람과 사실에 대하여 충분한 이유가 있건 없건 간에 사회적으로 그런 사람에게 불리한 제재를 가하게 되는 조건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한정적인 자원을 효과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분류하고 지원하기 위해 또는 그 사람을 좀 더 잘 이해하기 위해 그렇게 부르기로 한 과학적인 진단 대상의 사람이 또는 관찰의 대상이 어느 때 어떤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하면 오히려 한정적인 지원을 빼앗아 가는 사람으로 공격받기 시작한다. 우리나라 언어에서 역사상 병신(病身)이라는 단어를 처음 사용할 때는 사실 그대로 어떤 사람 몸에 병이 들어있는 사실 자체나 그런 육체를 지칭하는 의학 용어였으나 어느 순간부터 그런 사실이 없는데도 그렇게 부름으로서 그 용어를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공포와 모멸감 수치심을 주는 power를 갖는 도구가 되었다. 이것이 존재하는 실체를 의식적으로 인지하는 자의적인 연결 고리였던 언어가 사람들 간의 관계를 결정하는 힘을 갖는 이유인 것이며 사람을 통제하는 강제적이고 부정적인 힘을 갖는 순간 언어와 낱말은 폭력이 되는 것이다. 그 말을 듣는 사람이 폭력의 위협을 느끼고 폭행당한 것처럼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받으며 심리적인 수치심과 모멸감을 느낀다면 그것은 언어폭력이다. 언어가 말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폭력’이 얻고자 하는 효과와 의도를 제공해 준다면 그게 언어폭력이다.5) 6·70년대는 병신(病身)이란 단어가 8·90년대는 장애자(障碍者)라는 단어가 2000년대 초반에는 장애인(障礙人)이란 단어였으며 이제는 상태나 현상을 나타내는 장애(障礙)라는 단어가 ‘인격’이나 사람 자체를 지칭하는 것으로 확장되었는데, 2013년부터 인터넷으로 중심으로 사용되다가 공영 방송에 공식적으로 등장하는 ‘결정 장애’라는 단어가 대표적이다. 병신(病身)이나 장애인이란 대상을 이르는 단어가 병신같다. 병신 같은 놈이란 것으로 ‘너 장애인이냐’ ‘애자스럽다’라는 식으로 확장되면서 그런 사람들의 공간자체를 비하하거나 공격하거나 존재 자체를 거부하는 방향으로까지 확대되어 가고 있다. 6) 다시 말해 장애인이란 낱말과 개념이 ‘차별’과 ‘소외’라는 언어들과 동일시 될 만큼 그들의 문제는 구체적으로 현존하며 역사성을 띄면서 일정한 방향으로 계속 진행하고 있다. 1) 영화 ‘포레스트 검프’ 중에 나오는 대사 인용. 이것은 영화 ‘제 8요일’에서 유효적절하게 패러디 되었다. 2) 가장 먼저 장애인을 지칭하는 용어로 자리 잡았다. 이 용어에 대한 기원은 여러 가지가 있다. 원래 이 용어는 경마할 때 사용한 용어로서, 어떤 말의 기량이 뛰어나서 계속 우승한다면 내기가 안 된다. 모든 사람이 그 말에게만 베팅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말에게 납덩이를 달아준다. 그 납덩어리 무게만큼 그 말에게는 악조건이 된다. 그래서 경기는 비등하게 되고, 그 말이 우승하게 되면 납덩어리 무게를 조금씩 늘려 간다. 그 납덩어리를 핸디캡이라고 부른다. 이 말이 장애인에게 사용되기 시작한 근원은 정확하지 않지만, 장애인이 가지고 있는 장애를 납덩어리와 같다고 본 게 아닐까 싶다. 이 말이 장애인에게 사용될 때는 handicapped people이나 handicapped person으로 사용된다. 이 말은 영어권 뿐 아니라 프랑스어권에서도 널리 사용되며, 프랑스에서는 지금도 옹디까페(handicapped)라고 부른다. 이 용어는 장애인의 장애를 불합리한 것으로 바라보는 시각 때문에 요즘엔 거의 사용되지 않으며, 1981년부터 WHO에서 ICHID-1을 정하면서 handicapped는 개인의 장애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장벽을 지칭하는 것으로 정리되고 있다. 「The Barrier Free University Recademy Binder Book」(2002, 장애인편의시설촉진시민연대, 배융호) 3) 그리스 신화의 오이디푸스 왕은 스스로 자신의 눈을 찔러 시각 장애인이 되었다. 이 사건에 대해서 오이디푸스가 사회적 가치판단에 따라 장애인을 선택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장애의 의지적 선택이 아니다. 여기서 사회적 가치판단이라 함은 ‘장애’가 사회적, 개인적 분리를 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유리(advantage)를 가져다주는 경우를 말하는 것으로 우리나라에서 병역을 회피하기 위하여 무릎 수술을 하는 경우 이에 해당한다 하지만 이것은 사회적으로 범죄에 해당하는 것이므로 이 또한 장애의 의지적 선택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4) 원형과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비정상이나 미완성이란 주장이 정당화될 수 없으며 일반적으로 병리학적인 비정상은 주어진 환경에 의해서만 병적이란 사실과 어떤 생명체라도 살아가는 환경과 더불어 진화한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분석된 징후들 이것을 비정상이라 규정하는 것이라 한다면 최종적인 것이라 단정 지을 수 없다. 장애는 특성이 아니고 현재의 상태로 보아야 하며 장애는 특정 조건하에서의 기능상의 제한을 의미한다. (「지식인의 종말 I.F. suite et fin」레지 드브레, 강주헌 역, 예문 2001) 5) 이를 발화효과행위 perlocutionary act라고 할 수 있다. 6) 이런 표현들이 표현의 자유라거나 문학적 허용이라고 주장하는 이가 있는데 “병신”이라는 말이 장애인 비하인지 아닌지 판정할 언어적 권리가 왜 비장애인한테 있는가. 이는 오스틴을 따라, 그리고 랭턴의 논의를 따라 “병신”이 혐오발언인지 아닌지 판정하는 말 그 자체가 권력을 가진 사람이 발화하는 ‘판정발화 verdictive’인 것이다.
2019-05-30 | hrights | 조회: 2124 | 추천: 6
서동기/ 인권연대 간사  최근 두 친구가 사표를 냈다. 둘은 각자 첫 직장에 취직한 90년대 생이다. 불과 몇 달 전, 취업을 축하하며 새로운 출발의 기쁨을 나눴는데 둘은 이대로 버티다가는 정말 미쳐버릴 것 같다며 회사를 나왔다. 출근 시작 두 달 즈음 A는 아침에 눈을 뜨는 동시에 허공에 욕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방에 누워 하염없이 울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을 때 사표를 던지기로 했다. B는 수습을 통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좋아하지도 않던 술을 홀로 마시기 시작했다. 취하지 않으면 잠을 잘 수 없었다. 우울함이 극에 달해 약물치료가 필요한 지경에 이르렀을 때 회사를 나왔다.  A와 B는 퇴사를 말하면 대부분의 주변 사람들이 조금 더 생각해보라고, 금방 지나가니 견뎌보라고 하는 회사에 다녔다. 하지만 그들은 그곳에서 너무나 아팠고, 간절히 들어가고 싶어 했던 그곳을 빠르게 떠났다. 이런 이들을 요즘 밀레니얼 세대라고 부른다고 한다. 그들은 ‘모두가 그 정도는 견뎌왔다고, 그 정도도 견디지 못하느냐’고 말하던 생활을 거절한다. 그러니 기성세대들은 당황한다. 도대체 이들을 어떻게 대해야할지 몰라 대학로에 나가 연극과 거리공연을 보기도 하고 그들에 대해 공부도 하는 중이다.  <90년생이 온다>는 책이 인기다. 언론에서 밀레니얼들을 분석한 기사도 자주 눈에 띈다. ‘응답하라1994, 1998’의 주인공 세대들은 그래도 사회에 잘 적응해나가는 것 같은데, 90년대 생들은 사회에 도전하는 것도, 적응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도피하다가 9급 공무원을 준비한다. 또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90년생이 온다>는 어쩌다 그들이 응시자의 2%도 합격하지 못하는 9급 공무원에 열중하게 됐는지 분석한다. 90년대 생들은 ‘9급 공무원 세대’도 아니고 ‘9급 공무원이 되려는 세대’다.  주어진 환경에서 잘 달려가면 뭔가가 있다고 90년대 생들은 믿었다.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열심히 외우고 온갖 시험을 봤다. 서른을 향해가는 삶에서 절반 이상 배운 것은 시키는 것에, 주어진 것들에 성실하면 잘 살 수 있을 거라는 가르침과 믿음이었다. 그런 면에서 90년대 생들은 한국 사회를 믿었다. 하지만 그들이 믿었던 것들이 이전 세대들도 어찌할 바 몰라 방치해둔 것인지 몰랐다. 90년대 생들의 가장 큰 잘못은 너무 늦게 깨달아버린 것이다. 믿음과 성실의 대가가 그 어떤 미래도 보장되지 않는 각자도생의 세상일 뿐이란 것을 몰랐다. 사진 출처 - 90년생이 온다  본격적으로 사회에 진출하지 않은 97년, 98년생 이후의 세대를 ‘세월호 세대’라고 부르기도 한단다. 세월호 세대는 그래도 다행일까. 세상이 시키는 대로 하면 죽음뿐이라는 것을 생생하게 보았으니. 각자도생으로 살아남아야만 한다는 사실을 그나마 일찍 깨달아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그 앞의 밀레니얼들은 그것도 모르고 달려오다 지금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마지막 남은 9급 공무원을 준비하거나 한국 사회를 떠나는 중이다.  9급 공무원을 준비하는 90년대 생들은 죽어라 외우는 것들이 삶에서 전혀 중요치 않음을 가장 잘 알면서도 수험서를 펼친다. 적어도 공무원시험은 배신당하지 않는 마지막 영역이라 믿기 때문이다. 직장과 한국 사회를 거절하고 떠나는 이들의 선택도 그렇다. 그들은 살아남기 위해, 더 이상 기만당하지 않기 위해 떠난다. 그런 면에서 90년대 생의 선택과 행동들은 합리적이다. 그것은 도피도 아니고, 노력이 부족해서도 아니다. 9급 공무원을 준비하거나 직장을 거절하기 위해서는 부단한 자기 직면과 삶의 많은 것을 포기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90년대 생이 온다는데. 그들은 어딘가에 도달할 수 있을까. 그들이 정말 세상에 나올 수 있을까. 그들은 거대한 세상의 소모품으로, 무엇의 꼭두각시로 살다가 사라지고 싶지 않다. 삶을 스스로 책임져야 하는 시기의 그들은 그래서 자꾸 떠난다. 직장을 거절하고 한국을 떠난다. 90년대 생들은 이곳을 지옥이라고, 헬조선이라 말하고 그것에 편입되길 거절하는 방법을 택했다. 한 사회의 가장 활발해야 할 세대. 미래의 무엇을 상상해야하는 세대의 책임도 있을 텐데 그런 상상은 90년대 생들에게 너무나 아득하다. 한국 사회로 90년대 생은 오지 않는다.
2019-05-15 | hrights | 조회: 1650 | 추천: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