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에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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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에가시’는 현장을 살아가는 활동가들의 목소리를 담기 위한 칼럼 공간입니다.

‘목에가시’는 김형수(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 총장), 신종환(공무원), 윤요왕(재)춘천시마을자치지원센터장), 이동화(아디 활동가), 이승은(경찰관), 이원영(용산시민연대 공동대표), 정한별(사회복지사) 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주윤아/ 교사  ‘블랙독’이라는 드라마가 방영 중인가 보다. 시청하지 않아 정확히 모르겠지만 방송사의 드라마 소개란을 보니 ‘기간제 교사가 된 사회 초년생 주인공이 우리 삶의 축소판인 학교에서 꿈을 지키며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야기’라고 되어있다. 교사들 사이에도 꽤 리얼하다는 소문이 돌아 관심 있는 일부 내용만 찾아보았는데, 내가 근무했던 여러 학교에서 실제 일어났던 사건들과 내가 기억하는 누군가를 떠올리게 하는 캐릭터들이 제법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어 재밌다기보다는 ‘웃프다’는 감상이 더 맞을 거 같다. 얼핏 보면 비정규 교사의 성장기 같아 보이지만 세심히 들여다보면 ‘학교 판 미생’이라고 불릴 만큼 촘촘한 갑을관계들이 얽히고설켜 있다. 타 직종보다 구성원들이 비교적 평등한 관계를 맺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학교도 예외 없이 착취와 억압의 구조가 일상적으로 작동하고 있다. 크게 교사와 교육을 지원하는 행정 노동자로만 구분되어 보이지만 사실 학교는 비정규직 백화점이라고 불릴 정도로 수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근무하고 있다. 학교 내 비정규직은 교육공무원직, 방과후 강사, 파견·용역, 기간제 교사 등으로 고용방식도 초단기 계약직부터 정년이 보장되는 무기계약직까지 천차만별이다. 또 교육 당국이 단기성 정책으로 비정규직을 늘리고 없애고를 반복하다 보니 현재 1) 학교 비정규직 직종은 공식적으로는 크게 15종이나 노조 측에서는 세부 직종으로 나누면 100여 종에 달한다고 주장한다. 국가는 이들 중 1/3 정도를 무기계약직으로 전환하기도 하였지만, 인건비, 각종 수당, 복지 등 정규직과 차별받고 있는 것은 엄연한 현실이다. 그중 기간제 교사의 정규직화는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의제 중에서도 뜨거운 감자로 갈등과 찬반논쟁도 거세어 해법도 요원한 데다 (무기계약직이 아니므로) 계약의 불안정성으로 드라마보다 실제는 백배 더 고단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학교 내 정규직들은 같은 업무(혹은 기피하거나 더 강도 높은)를 하는 비정규직의 차별을 인지하거나 혹은 자신이 직접 차별한 적은 없을까? 아마 차별 개선을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한 적은 없어도 차별하는 당사자는 아니라고 착각하고 있을 수 있다. 내가 교육청이나 관리자에게 을이겠지만, 비정규직 노동자에게 갑으로 군림하고 있을 수 있고, 또 비정규직 노동자들 사이에도 계약 형태나 처우 등에 따라 보이지 않는 서열 피라미드가 존재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 또한, 학교 내에서 정규직의 목소리(사실 비정규직이 목소리를 내기 어렵다)를 먼저 듣고, 정규직의 안건(역시 비정규직의 안건도 거의 상정되지 않는다)을 주요하게 생각했던 사고와 태도가 몸에 배어 있음을 고백한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최근 몇 년간 나는 정규직과 비정규직 차별만이 아니라 교사와 학생 간 권력 관계와 나아가 개인이 가진 정체성의 교차성에 대해 고민이 깊어졌는데, 그 시작은 내가 가진 특권을 인식하면서부터였다. 교사로서의 나는 주로 국가나 자본, 교육청, 관리자의 권력으로부터 받는 억압에 집중하였는데, 나 역시 학교 내 비정규직, 학생, 보호자들에게는 권력을 행사하는 주체일 수 있음을 성찰하게 된 것이다. 내가 부당하다고 여기고 비판하는 것들은 주로 지식으로 무장한 권리이거나 내가 더 가지지 못한 권리들을 향해있었고, 내가 남보다 더 누리는 권리나 특권에 대해서는 당연시하거나 불감했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것을 인지도 성찰도 하지 않는 경우는 물론, 의식적인 노력을 한다 해도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권력이 함축된 언어적 폭력으로 차별하고 있다. 그래서 작년은 나의 사고와 언행이 ‘꼰대’라서 그런 건 아닐까? 라는 자문을 수없이 되새긴 한 해였다.  학교 밖에서도 그렇겠지만, 학교 내에서도 자주 하는 말들이 있다. ‘원래 그래’, ‘좋은 게 좋은 거야’, ‘어쩔 수 없어’, ‘적당히(작작 좀) 해라’ 등등 ~ 이 말들은 얼핏 상대의 입장에 공감하며 평화로운 너와 나의 일상을 유지하자는 삶의 지혜가 담긴 조언 같기도 하지만 이 말이 사용되는 상황과 맥락을 살펴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  ‘원래 그래’ : 인류의 시작과 동시에 원래 그런 것은 별로 없었을 텐데 그렇다면 그 옛날 언젠가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져 무탈?하고 유구하게 내려져 오고 있다는 말일 것이다. 1월 중순쯤 방영된 모 프로그램에서 페루의 돌고래학살이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약 700여 년간 자행되어 오고 있음을 목격하였다. 이를 문제 제기하는 사람들에게 주민들은 아마도 우리 동네에서는 ‘원래 그래요’라고 말했을 것이다. 학살 행위를 금지하고 다양한 대안을 마련할 수 있는 현재에도 그 마을에서는 전통이라는 허울 좋은 이름으로 무고한 동물들만 희생되고 있다. 인간의 이기심과 폭력성을 부정할 수 없는 순간이었다.(남자는, 여자는 ‘원래 그래’ 라는 말은 왜 지양해야 하는지는 익히 알고 계실 테니 여기서 또 서술하지는 않기로 한다.)  ‘좋은 게 좋은 거야’ : 부정이나 청탁이 오가는 상황에서 은밀한 어조로 자주 사용되는 이 말은 과연 누구에게 좋은 것이냐? 라고 묻는다면 발화자는 아마도 우리 모두에게, 즉 윈윈전략이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자신의 의견을 발화할 수 있는 경우는 대개 강자이거나 주류에 속하는 다수일 테니 결국 ‘좋은 것’이란 이들의 관점에서다. 내 취향도, 나에게 이득도 가져오지 않는 그 ‘좋은 것’은 소수자나 사회적 약자인 나에게는 결코 좋은 것이 아니란 말이다. 외모 칭찬도 결국 ‘내가 칭찬해 주니 너는 기뻐해야만 한다’라는 발화자의 고정관념에 근거한 오판일 뿐 외모 품평의 범주에서 벗어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날이면 날마다 “예쁘다고 말해주는데 도대체 뭐가 불만인 거냐?”라는 질책만 되돌아올 뿐이다. 쉼이 있는 저녁과 칼퇴근을 원하는 직장인들에게 상사가 시혜처럼 지정해 주는 회식 날짜와 방식에 직원들은 고맙기는커녕 왜 자기 가족과 지인과 시간을 보내지 않고 자신들에게 놀아달라고 조르는지 의아할 뿐이다. ‘가족 같은 직장’을 사훈으로 하는 사용자들은 직장(공적)을 사적 영역으로도 활용하는 상황이 본인도 모르게 발생할 수밖에 없다. 격려와 감사를 ‘밥’ 한 끼로 꼭 전하고 싶다면 먼저 의견을 묻고 정하는 게 순서다.  ‘어쩔 수 없어’ : 이 또한 시공을 가리지 않고 참으로 많이 듣는 말이다. 비합리적이고 부당하고 아무튼, 아닌 것은 알겠지만 나는 그것에 대해 의견을 말하거나 개선할 수 있는 능력(아니 사실 용기와 의로움)이 없다고 자기 자신을 변명하거나 혹은 을들의 처지를 묵인할 때 자주 하는 말이다. 불공정한 것은 알겠지만 부당한 대우나 차별을 받아도 나도 어쩔(도울) 수 없고 너도 어쩔(피해) 수 없다는 논리다. 그다음에 이어서 하는 더 짜증스러운 말은 ‘억울하면 출세해라, 준비해서 공채 봐라’ 등등이 있겠다.  ‘적당히 해라’ : 최근 지인 중에 채식주의자들이 늘어나고 있다. 그들과 식사를 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외식의 경우 식당과 메뉴 선택이 쉽지 않다. 인원이 다수면 대체로 채식주의자들이 양보(사실 체념임)하거나 본인의 기호에 상관없이 채소로만 이루어진 메뉴를 비자발적으로 먹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고깃집이라도 갈 작정을 한 날에는 ‘적당히 좀 하고 살 것이지~ 저렇게 해서 어떻게 사회생활을 하냐’ 라는 뒷담들이 등 뒤에서 오가곤 한다. ‘적당’하다는 것은 어느 선까지를 말하는 것이며 그 기준을 정하는 것의 주체는 누구이며, 설사 대중의 기준이 있다 치더라도 왜 적당이라고 명명하는 그 지점에서 다수에 의해 내 취향과 선택을 강제 종료해야 하는가?  드라마 ‘블랙독’에서 교원평가를 소재로 하는 방영분만 또 찾아보았다. 거기서 편법을 쓰는 교감(관리자)에 맞서 목소리를 내기 어려운 평교사들을 대변하려는 부장 교사에게 나름 절친 교사가 ‘(결국, 너보다 을인 너희 부원들에게도 불이익이 돌아가니) 적당히 해라’라는 진심?(그 순간만큼은 진심 같아 보였음) 어린 조언을 한다. 현실이다. 학교는 공공기관(공무원)이라는 한계가 있기도 하고, 또 늘 ‘적당히’ 타협하는 경우가 많아 그 어느 조직보다도 변화와 진보가 더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적잖은 학교의 구성원들이 그 느린 변화의 속도에도 좌절하지 않고 ‘프로불편러’ 낙인도 감수하며 포기하지 않고 ‘적당’ 이상을 이야기하고 있다.  사람은 동시에 여러 가지의 권리와 책임, 정체성 등을 가지고 산다. 언제나 특권을 누리지도 언제나 차별만 받는 것도 아닐 것이다. 내가 차별을 받을 때도 명확히 인지하고 대응해야겠지만, 내가 가진 특권으로 상대를 차별하는 경우는 인지하기가 더 어렵기 때문에 해가 갈수록(한국 사회에서 나이가 권력이 되는 경우가 많다) 더욱 성찰해야 한다. 특히 교사는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힘든 학생과의 권력 관계에 대한 성찰이 절실하다.(이 부분은 다음 기회에 써 보려고 한다) 요즘 차별이 줄어 정말 평등한 세상이 되었다고 생각한다면 내가 가진 권력이 점점 많아져 오히려 인권 감수성은 떨어지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2) 권김현영이 <다시는 그전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에서 이렇게 적었다. ‘모든 운동과 이념이 특권을 성찰하지 않는 순간 억압의 일부가 된다 ……’ 1) 학교비정규직 파업 '역대 최대 규모'…"매년 되풀이 막아야"(연합뉴스 2019.7.5) 2) 다시는 그전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권김현영, 휴머니스트, 2019.10)
2020-01-22 | hrights | 조회: 937 | 추천: 30
김형수/ 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 총장 '인권교육'이란 무엇인가요? : 교육하는 사람은 늘 인권 감수성을 점검, 성찰하고 개발하여 이를 인권교육을 설계하는데 반영해야 합니다. ■ 인권교육은 그 과정이 인권입니다.: 인권 교육의 질과 양, 실력은 교육하는 사람의 인권 감수성과 관점의 한계를 넘어서 교육 받는 사람을 설득하거나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교육하는 사람이 편견과 선입견 차별의식을 가지면서 교육생에게 이를 타파하라고 설득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인권 교육은 의뢰와 진행, 결론 및 사후 관계에서 그 과정이 인권 기준에 맞아야 하며, 그래서 주입 교육 보다, 참여 및 민주적 교육이 되어야 하며, 감수성을 일깨우고 개발하는 방식이 되어야 합니다. 교육하는 사람이나 교육받는 사람이나 스스로 자신의 인권 감수성을 깨우치고 향상시킬 수 있는 교육 방식이 매우 중요합니다. Lister의 분류에 따르면, 인권교육은 인권에 대한 교육(Education about human rights)에 그쳐서는 안되고 동시에 인권을 위한 교육(Education for human rights), 인권을 통한 교육(Education through human rights)이 되어야 하며, 머리(인지영역), 가슴(정의영역), 손(행동영역)을 동시에 총동원하는 교육이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1) ‘인권을 위한 교육’은 실제로 인권을 위한 노력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교육이며, 이를 위해 타인의 인권을 보호하려고 할 뿐만 아니라 학습자 스스로 자신의 의지로 인권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일상생활에서 인권의 관점을 적용할 수 있도록 지식과 기술을 가질 수 있게 교육하는 것을 말합니다. 마지막으로 ‘인권을 통한 교육’은 인권을 알고 누리도록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인권에 관한 학습이 일어나는 곳에서 충분히 누리도록 설계되어야 합니다. 폭력과 억압, 강제적인 행위가 일어나거나 성차별 또는 인권에 역행하는 방식으로는 인권교육을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인권교육이 이루어지는 현장이 가장 인권적이어야 합니다.2) 각 개인에게 어렵게 각성되고 키워진 인권감수성이 인권의 태도나 행동으로 이어지는 것은 더욱 어렵습니다. 그래서 인권은 암기 과목이 아니라 가치지향의 예체능 과목과도 같으며, 그래서 그동안 인권교육은 끊임없는 훈련을 통해 일상 생활의 습관이 되어야 완성할 수 있습니다. Tip) 인권강의 인권적으로 기획하고 설계하기: 강의 자료의 표현과 내용을 사전 점검하여 구성하는 것이 중요. 교육의 인권 당사자 참여·동의·평가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 강의 요청서로 참여자의 접근성(편의시설/시청각 장애인, 지적 자폐성 장애인의 정보 접근 – 수어 및 문자통역,화면해설 제공)을 확인함과 장신 장애인과 건강 장애인과 관련한 휴식과 안정 시간 확보등, 아울러 그들의 초상권/개인정보보호/위계를 방지하면서 교육의 기준을 제시하고 설명하여 인식시키고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강의 촉진, 흥미 유발을 위한 표현의 자유를 허용하더라도 참여자의 인권문제와 위치성, 소수성, 감수성 등을 파악하여 강의 언어 사용에 신중해야 합니다. ex) 이성애 중심적인 언어 사용(여자 친구가......→ 애인이나 파트너가) ■ 주관식 서술식 강의 평가서로 교육생의 평가와 변화 등을 소통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인권교육으로서의 ‘장애인 인권 교육’은 무엇인가요? 시민 모두 서로 연결되고 이어져 있음을 일깨워 모두의 편견을 제거하고 차별을 철폐하여 장애인의 권리를 보장하고 권한을 강화하는 것입니다. ‘나의 자유와 권리는 헌법에 열거하지 아니한 이유로 경시되지 않는다.’ 「우리나라 헌법 제37조 1항」 사진 출처 - 함께걸음 ■ 장애인 인식 개선 교육?! 장애인 이해 교육?! 장애인 인권 교육!! 장애 이해 교육3)과 장애 인식 개선 교육이 가지는 언어와 인식의 한계를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어느 인권 교육 영역도 이해와 인식 개선만을 목적으로 삼지 않습니다. 이해와 인식 개선이 인권을 위해 필요할 수 있지만, 실천이 없는 이해와 인식 개선은 오히려 차별과 편견, 분리를 강화시킬 정보만 주는 위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여성 인권을 논할 때 ‘여성 인권교육’이나 ‘성차별 방지교육’이라고 일컫지, 여성 이해 교육라든가 여성 인식 개선 교육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교육하는 사람은 이 표현의 의도보다 이 표현의 ‘효과’에 민감해져야 합니다. 그러나 인권교육 영역에서 유독 장애인에 있어서는 주체성과 당사자성 개념이 혼란스럽습니다. 개념이 혼란스러운 만큼 장애인 인권교육 역시 같은 인권교육 영역에 있다고 여기면서도 감수성의 간극은 아주 큽니다. 처음에는 장애인에 대한 인권교육 영역은, 장애인 인식 개선 교육이었다가 장애인 이해 교육이라고 대대적으로 변화했고, 지금은 그 영역에 성교육과 장애인차별금지법 교육, 장애인 등 특수교육법에 의거한 각종 교육이 들어와서 각각의 교육 실적으로 보고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여러 사건으로 촉발된 교육 과정과 장애인들의 권리로서의 ‘성’의 관점이 논의되면서 때문에 ‘성 인권’ 단어로 관점을 정립하며 성교육을 시행하기도 합니다. 소수자 중에서도 장애인만큼 ‘교육’에 있어 대상화되는, 권력관계에 취약한 소수자도 드물 것입니다. 또한 인식 개선이란 말부림은 원래 장애인에 대한 인식은 나쁜 것이며 장애인은 사람들의 인식 개선을 통해서만 문제를 풀 수 있다는 개인 간의 관계 문제로만 만들어 버려서 사회와 환경과 구조의 문제를 외면하게 만들 위험도 있습니다. 인권의 문제는 누군가가 이해해서 해결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장애인이 누군가 ‘이해받아야 할 존재’, 비주체로 대상화될 위험이 있고 낙인찍기의 위험도 있습니다. 요즘 학교 현장에서 자주 쓰이는 장애 공감 교육도 감수성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이지만 여전히 이러한 위험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장애인에 대한 예절, 에티켓 교육이 장애인 인권교육의 일부 내용으로 필요할 수는 있지만 이 자체를 장애인 인권교육으로 볼 수 없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장애인 인권 문제를 모두 배려나 사랑으로 풀어내는 것도 오히려 인권 문제를 약화시킬 수 있습니다. 장애인을 싫어하거나 배려하지 않아도 차별하거나 인권 침해를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인권교육이란 이름을 달고 장애인을 강제로 아웃팅시키거나 개인정보를 남용하거나 자기 결정권과 주체성을 심각히 훼손하고 박탈하는 경우를 조심해야 합니다. 장애인은 ‘인권교육’의 이중성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4) 더구나 장애우라는 말은 장애인을 대상화 한다고 비판하면서 대상화5)하는 행위를 지칭하는 이해나 인식 개선을 인권교육을 대신 지칭하는 말로 공공기관이나 일부 공적 단체들이 쓰는 것은 피해야 합니다. 모든 인권교육 자체가 장애인 인권을 증진시킬 수 있어야 하며 장애인 인권 교육 역시 다른 사람들의 인권 비장애인의 인권까지 영향을 주고 교류를 해야 합니다. 장애인 인권 문제는 인종 차별 문제에 그 뿌리가 있고 생물학적 결정론에 근거한 차별의 문제에서 페미니즘과 깊은 관계가 있으며 독일이나 일본의 우생학의 가장 큰 피해자가 장애인이란 점에서 ‘난민’6)문제와 다문화 문제와도 그 결을 함께 합니다.(2009년도 다문화가족실태조사에서 다문화가족의 등록장애인 비율은 17.3%) Tip) 1) 『민간단체활동가를 위한 인권교육워크샵(인권운동사랑방1회) 자료집』(2000년,인권운동 사랑방) 20쪽 2) 『국가인권위원회 연구보고서인권교육의 의미』 (2004, 구정화) 요약 3) 그리고 아쉽게도 아직 많은 교육 관료들과 공무원들은 이러한 사회적 약자에 대한 인권 교육을 ‘인성교육’이나 ‘도덕교육’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학교교육에서 학생들의 인성과 도덕이 높아진다고 해서 장애인학생들의 교육권이 인격적으로 그 질이 높아질지는 의심스럽다. 국가와 교육가, 활동가, 그리고 당사자, 그리고 당사자 가족과 다양한 관점에서 인권교육이 존재하고 진행할 때, 어떻게 해야 그것이 성과이든, 실적이든 ‘인권’ 자체를 증진시킬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4) 장애인에게 인권교육 하겠다면서 그들의 성적 행동을 교정하는 교육을 해달라고 하거나 기본 예절 교육을 요구하는 경우도 그러하고 비장애인에게 장애인인권교육을 하면서 장애인에 대한 헌신과 희생을 요구하는 경우도 그러하다. 5) 【기사】인권위 “교과서 속 장애인, 배려나 보호 대상으로만 묘사 안돼”( 웰체어뉴스,정두리 기자, 2019.02.27. 10:05) 6) 참조 「11살 파키스탄 소년, 국내 첫 난민 장애인 등록」 세계일보 2018-07-10 7) 「“교육현장서 ‘다문화’란 말 쓰지 말자”」 (경향신문, 2019.02.21.) ‘다문화가족’이라는 용어를 교육현장에서 쓰지 말자는 제안이 나왔다.전남도의회 교육위원회 최명수 의원(민주당·나주)은 21일 “전남도교육청 업무보고에 다문화가족 학생들에 대한 지원사업 개선이 필요하다”며 이같이 주장했다. 최 의원은 “ ‘다문화가족’이라는 말은 ‘국제결혼’ 또는 ‘혼혈’이라는 차별적이고 부정적인 인식이 들어 있다”면서 “ ‘다문화가족’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말자”고 했다.최 의원은 또 “다문화가족 학생은 필요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취약계층으로 분류돼 지원사업에 참여하게 되면서 해당 학생들의 거부감이 있고, ‘다문화’란 명칭이 학생의 호칭과 별명으로 변질되는 등 문제점이 많다”고 개선을 요구했다.
2019-12-18 | hrights | 조회: 3724 | 추천: 8
이동화/ 사단법인 아디 활동가  6개월째 이어진 홍콩 시위에 대한 홍콩경찰의 모습은 심각함을 넘어서 공포스럽다. 시위참여자인 학생에게 지근거리에서 실탄을 발사하는 홍콩경찰의 모습이나, 대학교에 고립된 시위대의 출구를 봉쇄하고 최루탄과 실탄을 발포하며 강제진압작전을 펼친 그들의 모습은 우리의 역사에서도 그랬듯이 인권과 민주주의를 탄압하는 독재국가의 폭력 그 자체다. 최근 홍콩 구의원 선거에서 범민주진영이 압승을 거두면서 시위진압의 폭력성이 누그러지길 바라지만 쉽게 변할것 같지는 않다.  이번 홍콩시위를 지켜보면서 몇 가지 사례들을 통해 데자뷰처럼 기억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기억들은 현재의 홍콩사태와 맞물려 사람들의 기본적 권리와 민주주의를 탄압하는 것이 더 이상 국가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2008년 3월 티베트에서는 중국으로부터 독립하려는 독립운동이 일어났고 이에 대한 중국정부의 탄압이 극심해졌다. 이에 당시 내가 활동했던 단체와 국내시민단체들은 베이징올림픽 성화 국내 봉송시기에 맞춰 중국의 무력진압에 항의하는 시위를 서울 광화문 인근에서 준비하였다. 그런데 막상 시위를 시작하려 하자 인근에 모인 수백 명의 국내거주 중국인들과 유학생들의 분노섞인 항의와 공격을 받았고 수 명의 활동가와 이를 취재하는 기자 여럿이 부상당하는 불상사가 발생하였다. 사전에 전혀 예상치 못한 사건이었다. 사진 출처 - 동아시아국제연대  또한 10여 년 전 미얀마 군부독재 시기 미얀마의 민주주의와 아웅산 수치여사의 가택연금 해제를 위한 시위를 국내에 체류중인 미얀마 활동가와 주한미얀마대사관앞에서 몇 개월 동안 지속하였고 시간이 흘러 미얀마는 군부독재체제에서 민간정부체제로 변하였다. 그리고 그 기쁨을 미얀마활동가들과 함께 나누었다. 하지만 2016년과 2017년 미얀마 정부에 의한 로힝야 학살사건이 발생하였고 이에 항의하는 행동을 하기 위해국내 미얀마 활동가들과 미팅하는 시간을 마련했다. 하지만 미팅에 참석한 국내의 미얀마 활동가와 주민은 “로힝야 사람들은 미얀마사람이 아니고 그들의 테러가 문제다.”라고 강변하며 한국의 활동가가 로힝야를 모른다고 주장했다.  유사한 사례는 팔레스타인 평화활동시에도 반복됐다. 2008년 가자지구 폭격이 한창일 때 이스라엘 대사관앞에서 항의시위를 하던 한국 활동가에게 이스라엘 관광객은 하마스의 테러가 문제라며 이스라엘의 공격은 정당하다고 한국 활동가들을 쏘아붙였다.  이번 홍콩사태에서 국내외 소수의 셀럽들이 홍콩경찰의 폭력에 항의하고 시위대의 주장에 동조하는 발연을 하자 일부 중국 네티즌들은 격한 항의와 비판을 하였다. 국내 대학가에서 홍콩시위를 지지하는 대자보를 일부 중국유학생이 훼손하고 홍콩지지 시위를 폄하하는 모습이 언론에 보도되기도 했다. 국가의 폭력을 옹호하고 인권과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를 폭력시위로 간주하는 모양새다. 물론 그들이 중국 전체를 대변한다고 볼 순 없지만 그들의 영향력은 크고 연대의 움직임을 위축시키는 것은 사실이다.  여전히 아시아의 많은 국가들이 인권과 민주주의를 수호하기보다는 소수의 권력과 독재를 지키기위해 인권과 민주주의를 탄압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국가폭력에 항의하기 위해 다수의 민중은 저항하고 해외의 지지세력은 연대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공식은 여러 현장에서 어긋나고 있다. 국가 폭력은 그대로이지만 어떤 종교를 믿고, 어느 민족이며, 어떤 출신 성분이냐는 사람들이 연대함에 있어 제약조건이 되고, 심지어 차별의 이유가 된다. 우리사회 안에서도 이러한 현상은 비정규직, 이주노동자, 난민 등과 같이, 주제는 다르지만 비슷한 모습으로 벌어지고 있다.  권력에 맞서는 약자와 소수자의 가장 큰 무기는 연대다. 그리고 그 연대를 구성하기 위해 고려하고 경계해야 할 대상은 늘고 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연대에 참여하는 것이다. 홍콩의 사태가 어디로 흘러갈지는 모르겠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그들과 함께 하는 것이고 홍콩에서도 한국의 연대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2019-11-27 | hrights | 조회: 809 | 추천: 9
최유라/ 지구의 방랑자  거리에는 나를 유혹하는 손이 많다. 보이지 않지만 이끌림을 뿌리칠 수 없는 치명적인 손짓. 그 손짓에 나도 모르게 이끌려 정신을 차리고 보면 이미 음식점 테이블에 앉아있다.  오늘의 손짓왕은 순댓국이다. 뽀얀 국물 속으로 병천 순대를 비롯해 돼지고기의 여러 부위가 그득 들어있다.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는 이 뚝배기를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진다. 접시 가득 담긴 부추를 몽땅 넣고 공깃밥을 모조리 만다. 혀끝을 맴도는 달콤하고 구수한 맛. 국물을 음미한다. 여기에 김치가 빠질 수 없다. 국물을 머금고 있는 밥알과 고기로 숟가락 위에 산을 만든다. 그 위에 젓갈이 듬뿍 들어가 시원한 김치를 얹는다. 입을 크게 벌려 욱여넣는다. 입 안 가득 퍼지는 행복의 맛. 그래, 이 맛이지.  고개를 뚝배기에 묻을 기세로 열심히 뚝배기를 비워나가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엄마다! 순간 마음 한구석이 갑갑해져 왔다. 입안의 고깃덩어리를 다급히 씹어 삼키고 목소리를 가다듬는다. “딸, 저녁 먹었어?” “지금 먹고 있어. …… 샐러드.” “잘하고 있네! 그래, 살은 좀 빠졌지?” “어, 그게, 그냥 뱃살은 좀 빠진 거 같아…….”  시선은 식어가는 국물에 고정한 채 이미 짜인 대본에 따라 입만 움직인다. 엄마는 이 연극을 끝낼 생각이 없어 보였다. 하기야 엄마에게는 연극이 아닐 테니까. 엄마는 오늘도 어김없이 수화기 너머로 당뇨니 고혈압이니 고지혈증이니 크론병 같은 무시무시한 병명들을 나열해댔다. 처음이야 무서웠지만, 너무 자주 듣다 보니 남의 일인 것 같다.  물론 전혀 무섭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소화력이 떨어지는지 속이 더부룩한 날이 많다. 하지만 찾아올지 안 올지 모르는 이 병들보다는 더 강력한 병이 있으니 문제다. 이름하여 상상력병. 음식의 향과 맛을 상상하면 잔소리에 따가워진 귀의 감각은 무뎌지고 코의 감각은 강렬히 살아나며 입안에는 침이 고인다는 그 전설적인 병. 난 그 병을 앓고 있다.  식사 중이라는 핑계로 그나마 전화를 빨리 끊을 수 있었다. 다시 숟가락을 들려고 했지만, 이 좋아하는 순댓국조차 거짓말을 해가며 먹어야 하는 상황에 짜증이 왈칵 솟구쳐 왔다. 엄마도 나도 각자의 각본에 따라 ‘다이어트’를 앵무새처럼 말한다. ‘한국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을 명사 하나로 요약하라면 바로 그놈의 ‘다이어트’가 아닐까. 무슨 구전동화도 아니건만 여성의 몸은 어딜 가도 입방아에 오르내린다. 텔레비전 예능 프로그램에서, 회사에서, 명절의 친척집에서. 심지어 친구들과 만난 자리에서도 그렇다. 연애, 결혼, 출산 같은 화제도 꼭 다이어트로 귀결되고 만다. “요즘 살찐 여자 좋아하는 사람 없어”, “좋은 남자 만나서 결혼하려면 살은 빼야지”, “나중에 임신하면 진짜 힘들어. 지금 빼둬야 해” 등등. 하도 이런 말들을 듣다 보니 어느 순간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스스로를 깨달을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고 또 슬프다. 그렇게 오늘도 고문 같은 타자들의 시선과 언어에 둘러싸여 ‘다이어트’를 말하고 듣는다. 사진 출처 - 한겨레  이런 세상에 화가 나지만 싸울 용기는 크지 않은 것 같다. 순댓국을 먹고 있다는 것을 거짓말로 넘기기에 급급한 나를 발견할 때마다 그렇다. 과연 내가 이런 세상에 적응할 수 있을까? 이런 전화를 받고서도 눈앞에서 김을 피워 올리고 있는 순댓국에 입맛이 당기는 내가? 모르겠다. 일단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뚝배기를 비스듬히 기울여 받침에 걸쳐 두고 남아있는 밥과 국물을 먹는 것뿐이다. 아니, 뚝배기를 들어 국물까지 싹싹 마셔 버리는 것까지도, 충분히 할 수 있다. 에라 모르겠다. 먹고 보자!
2019-11-20 | hrights | 조회: 717 | 추천: 10
손상훈/ 교단자정센터 원장  가까운 날, 교황님이 오시면 직접 만나 뵙고 건의하고 싶다. 먼저 대법원 양형위원회 종교시설 기준을 엄하게 정해야 한다고 말씀드리고 싶다. 대한민국에는 평신도가 교회에 헌금하고, 사찰에 기부하면 최종 결정이 해당 교회 담임목사, 해당 사찰 주지에게 모든 권리가 인정되도록 한 대법원의 판례가 있다. 이는 지난 100여 년간 직업종교인의 부정부패를 비호하는 매우 못된 판례이다. 지난 1919년 3.1운동과 4.19혁명의 정신을 이어받고 1987년 6월 민주화운동의 시민행동을 실천해 온 평신도들의 기도를 저버리는 판례이다. 이제 대법원과 대법원 양형위원회는 교회, 사찰 부정부패 사건으로 각종 송사와 분규가 발생할 경우 새롭고 지혜로운 판례와 양형기준을 만들어야 한다.  조계종 종정 모 승려와 제자가 평신도(불교계에서는 재가불자라고 부른다)의 가족 건강과 집안이 망한다고 협박하여 기부(시주)받은 후원금이 정당할 수 없다. 심리적으로 불안해 상담한 평신도를 겁주고 사기 쳐서 뜯어낸 '고의성'이 강한 위법 행위일수 있다. 종교계 시민단체는 비영리 민간단체의 고유한 업무로 '합리적인 의심이 강한 사회문제'에 대해 창의적으로 비판하고 건의하는 것이 본연의 활동내용이다.  두 번째로 대한민국 검찰과 경찰을 방문해 용기 주시길 건의하고 싶다. 조계종 생수비리 의혹 사건에 대해 경찰과 검찰은 황당한 결정을 했다. 김진태 전 검찰총장과 골프를 친 자승 전 총무원장을 계좌 조사도 하지 않고 봐주기식 결론을 냈다. 의혹을 덮어버린 경찰과 검찰에게 고해성사를 받아주시길 기도해 본다.  정의평화불대 상임대표 이도흠(한양대 교수)을 비롯한 불교계시민사회단체는 국고보조금 7천여만 원을 횡령한 의혹이 있다며 자승 전 총무원장을 고발했다. 이제 지켜봐야 한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대한민국 사회에서 종교계는 많은 국고보조금(시민 세금)을 지원받는다. 받는 만큼 투명한 집행과 결산을 해 시민들에게 신뢰받는 종교단체가 되어야 한다. 불교 조계종의 경우 직·간접적으로 연간 수백 억 원을 세금으로 지원받는다. 전통사찰 유지보수, 템플스테이 심지어 10.27법난 특별법으로 천 억대 예산편성도 받았다. 그럼에도 수년간 제대로 집행하지 못하다가 이제 봉은사에 500억을 10.27법난 기념관과 동국대에 치유센터 건립 명목으로 500억을 편성하려고 추진하고 있다고 한다. 대한민국 건국이래 천 억대 예산을 조계종 마음대로 집행하려하는 모양새를 그냥 놔두는 현 정부가 정의로운지 묻고 싶다. 종교계를 관리 감독하는 문화관광부나 감사원은 감사 지적을 하고도 시민들에게 제대로 결과를 안내하지 못하고 있다.  또, 봉은사를 방문해 주셨으면 한다. 맑고 향기롭게 법정스님이 머물렀고 종교간 대화를 위해 노력하신 서울 강남 봉은사, 추사가 말년에 혼신을 다해 쓴 멋진 글이 있는 봉은사에 교황님이 오신다면 청렴한 세계시민이 함께 나눌 수 있지 않을까해서다.  자승 전 총무원장이 중심이 되어 벌이는 위례신도시 종교부지의 이른바 ‘안거놀이’, ‘결사놀이’를 들으면서 이제는 불교의 마지막 보루인 수행조차도 오염된 듯 하여 슬프다. 왜 ‘천막법당’일까? 예전 한나라당의 천막당사가 생각나는 것은 지나친 일일까? 박근혜는 대선과정에서 차떼기 정치자금을 받은 것이 드러나 국민의 손가락질을 받자 기존 당사엔 단 한 발짝도 들여놓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당이 부패 정당, 기득권 정당이란 오명에서 완전히 새롭게 출발한다”며 여의도에 천막을 쳤다. 천막당사로 한나라당은 위기에서 탈출했다. 그러나 한국불교의 위기를 ‘천막법당’으로 돌파해야 할까? 백번 양보해 지금 천막에 들어가 안거를 해야 할 만큼 선수행처가 잘못된 점이 있는가? 9명 승려가 수행할 처소가 없을 만큼 선방이 부족한가? 절대로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은 천막법당에서 안거를 하겠다는 9명이 가장 잘 알 것이다. 사진 출처 - 필자  오히려 한국불교를 위기에 빠뜨리고 있는 것은, 도박, 폭행, 돈봉투선거도 모자라 생수비리와 국고보조금 횡령 의혹을 받고 있는 등 온갖 불의의 몸통이며 종단을 사유화한 ‘강남원장’이 여전한 실세로 군림하고 있는, 자정이 불가능한 종단의 현실이 진정한 위기의 근원이다. 교황님이 위례 신도시에서 천막쇼를 하는 자승 전 총무원장 등 조계종 승려에게 '평신도의 소수의견'을 전달해 주시길 기도해 본다.  봉은사 평신도(재가불자)들은 이제 500억 원을 모아 위례신도시에 건물을 지어 죽을 때까지 자승 전 원장이 머물도록 기부해야 할 처지가 되었다. 내 생각이 기우이길 바랄뿐이다. 지금까지 언급한 내용에 잘못과 오해가 있다면 공개반성하고 싶다. 아니, 교황님에게 고해성사를 하고 싶다. 한국에서 잘 살고 있는 업종교인인 재벌승려, 재벌목사님들에게 교황님이 들려주실 소중한 강론과 지침을 듣고 싶다.  1만3천여 명의 조계종 승려가 침묵하는 현실에서 교황님에게 건의하는 평신도의 바람이, 아니 기도가 응답받길 기대해 본다.
2019-11-13 | hrights | 조회: 1305 | 추천: 11
이회림/ 00경찰서 「성폭력 범죄 경찰에게 성폭력을 신고하라는 것인가? 경찰은 재발방지 대책을 마련하라」 제하의 2019년 11월 7일 한국여성단체연합의 논평에 공감하며..  경찰청이 11월 5일 국회에 제출한 ‘경찰공무원 성비위 및 징계 현황’자료에 따르면 2014~2019년 6월까지 292명의 경찰이 성비위에 연루돼 징계를 받았다고 합니다.  전체 발생 건수 중 경찰 내부에서 벌어진 성 비위는 179건으로 61.3%를 차지하고 유형별로는 성희롱이 74.3%, 성범죄가 25.7%이며, 가해자 계급별로는 경위가 81명으로 전체의 45.3%, 경감 37명(20.7%), 경사25명(14.0%) 순 입니다. 대한민국 경찰관 11만8,000여 명 가운데 여경은 1만3,000여 명으로 현재 약 10%를 차지합니다.  약 10%의 여경 중 남경으로부터 성희롱성 언행을 단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는 여경이 있을 수 있습니다만 대부분의 여경들은 남경들의 부적절한 언행에 힘들어합니다. 그저 남성 중심의 조직 문화가 지배적이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려니 하고 스스로 마음을 챙겨가다가도, 여러 번 반복해서 듣게 되면 어쩔 수 없이 피해의식이 생기게 됩니다. 그런 일을 경험할 때마다 미리 예상하고 녹음을 할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피해를 입고도 드러내놓고 이야기 할 수 있는 믿을 만한 창구가 없으니 친한 여경끼리만 속 얘기를 하고 피해 공유 정도에 그칩니다. 운이 좋아 좋은 주변인을 만나면 혼자 '여자'임을 크게 의식하지 않고 별 문제 없이 안전하게 근무를 하게 되지만, 그렇게 '젠더 감수성'이 풍부한 남경들과 일하게 되는 행운은 자주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여경은 가해 남경을 피해 타도, 타서로 도망치듯이 옮겨 갔고, 또 어떤 여경은 당당하게 문제제기를 했다가, '튀는 여경'으로 '찍힘'을 당해 인사철에 불이익을 겪기도 합니다. 이런 현상들은 제 주변에서만 일어나는 극소수의 사례가 아니고 그동안 쉬쉬해 온 불편한 진실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사진 출처 - 국민일보  여경 대상 성범죄는 경찰 조직 내 대표적인 '암수범죄'입니다.  여러 범죄 중에서도 성범죄 피해자들은 수사기관에 직접 신고 할 용기를 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성범죄는 실제로 드러나는 수치보다 숨은 범죄의 수가 훨씬 더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휴직기간을 빼면 제가 여성경찰로 살아 온 지 얼추 13년이 되는데, 그 기간 동안 직접 겪은 조직 내 성비위의 기억을 당장 떠올려보니 범죄 인지가 가능한 것만 3건이 넘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들이 비단 저 혼자만 당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 큰 문제입니다.  대화 속에서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성희롱성 발언에서부터 허락을 구하지 않은 부적절한 신체 접촉, 강제추행, 준강간, 강간에 이르기까지 남경에 의한 여경 대상 성범죄는 일반인들 사이에 일어나는 것만큼이나 다양한 얼굴을 갖고 있습니다. 동료 여경, 선•후배 여경과의 대화 속에서 인지되는 성비위를 모두 수치화한다면 국민들 앞에서 차마 밝히기 어려운 부끄러운 통계가 되어버릴 것입니다.  직장 상사로부터 추행을 당한 어느 20대 여성이 피해자 진술 조서를 받고 있던 저에게 고맙다며,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저처럼 여경이 되어 당당하게 살고 싶다고 말하던 모습이 떠오릅니다.  “여경이 되면 경찰이니까 사내 성범죄나 성희롱 같은 건 당연히 없지 않냐”고 말하던 그 여성에게 차마 그렇지 않다는 말은 못하였습니다.  계속되는 남경들의 성비위 행태, 그 중에서도 여경 대상 성범죄 행위를 근절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접근방식으로 예방을 도모해야합니다. 특히 야근 후 적절한 휴식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의 반강제적인 교육 참여 종용, 남경• 여경 모두에게 공감 받지 못하는 집체 교육, 형식적인 교육의 극치라고 말할 수 있는 사이버 교육은 모두 지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덧붙여, 이런 일이 언론에 보도될 때마다 ‘소수의 개인적 일탈이고 어느 직종이든 일어나는 현상이다.’ ‘소수의 비위 사실로 전체 경찰을 일반화시켜 비난하지 말아 달라’ ‘경찰조직보다 다른 조직이 더 하더라’ 등, 이런 낯 부끄러운 항변은 경찰 제복 입은 자들이 스스로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2019-11-12 | hrights | 조회: 678 | 추천: 7
김아현/ 인권연대 간사  최공돌 할머니가 사시는 곳은 구룡리다. 구룡마을이라고도 불리는 구룡리는 충남 홍성에 있는데, 홍성은 바다가 가깝고 논이 넓다. 최공돌 할머니는 얼마 전부터 마을회관에서 동네 할머니들과 함께 한글을 배우고 있다. 80세가 가까워서야 공부를 시작해 이제 이름 석 자를 쓸 수 있게 되었다. 몇 해 전 먼저 세상을 떠난 남편은 생전에 할머니가 제 이름 석자를 쓰지 못하는 것을 두고 종종 타박했다. 할머니는 습자지에 이름 석 자를 쓰고서 가장 먼저 남편을 떠올렸다.  나는 홍성에 가 본적이 없다. 최공돌 할머니를 만난 적도 없다. 앞서 언급한 정보들은 모두 티비 프로그램을 통해 얻은 것들이다. [한국인의 밥상]이라는 프로그램에서였다. 그날 프로그램의 주제는 할머니들의 늦은 배움이 아니었다. 국물을 좋아하는 한국인의 식성에 관한 것이었다. 그래서 할머니들이 연필로 적어 내려간 의젓한 생김새의 글자들보다, 공부를 마치고 끓여 드시는 소꼬리탕과 해물탕이 더욱 무게있게 다뤄졌다.  그날 소꼬리 전골과 신선한 해물은 눈에 들어오지 않고 다만 그녀들의 글씨가 마음에 남았다. ‘홍성은 바다가 가깝고 논이 넓다’는 대목에서, 할머니들 고생이 많았겠구나, 짐작을 시작해서였다. 젊은 시절의 할머니들은 아마 바다가 주는 일, 논과 들이 주는 일들을 두루 감내해야 했을 것이다. 아마 지금도 부지런히 그 일들을 하고 계실지 모른다. 고향의 할머니들을 떠올렸다. 이른 새벽 밭일을 하고, 해가 뜨면 바다에 나가 물질을 하고, 돌아와 아이 젖을 물리고, 다시 밭으로 나가 종일 돌을 골라내어야 했던 젊은 시절의 ‘삼춘’들을 구룡마을에서도 보는 듯했다.  방송을 보다 말고 메모지를 꺼내 최공돌 할머니와 구룡리의 이름을 적어둔 것은, 마침 그날 <82년생 김지영>을 보고 왔기 때문이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울었기 때문에 눈이 벌겋게 부어있었다. 내가 특별히 눈물이 많아서는 아니었고, 극장을 나서는 다른 관객들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영화의 원작을 읽었을 때도 그랬지만, 나는 내 세대로 묘사된 김지영씨의 고난에 아주 전적으로 공감하지는 못했다. 서울이 아닌 곳에서 나고 자랐다는 데부터 그녀와 나의 형편은 출발점이 다르다고 생각했다. 소설과 영화가 묘사한, 그녀가 성장과정에서 겪은 성폭력의 기억에 대해서도 그랬다. 직간접적으로 겪은 끔찍한 기억은 ‘버스 안 성추행과 가족에 의한 2차 가해’ 정도를 훨씬 넘어섰다. 김지영씨가 경제적으로 곤란한 처지에 놓였다는 묘사가 없었다는 점에서도 그랬다. 원작 소설이 발표되어 인기를 얻을 때도 이런 목소리들이 많았다. ‘내가 더 불행했고, 내 친구는 더 아팠는데, 고작 이 정도로?’하는 말들을 자주 들었고 그런 불만족에 어느 정도는 공감했다.  하지만 그런 불만족에 공감하면서도 마음 한 켠은 불편했다. 더 힘들게 살아왔다는 것이 덜 힘들게 사는 이의 아픔을 낮춰볼 이유가 되어도 좋은가 수도 없이 생각했다. 아주 평균적이고 보편적인 이 시대 한국사회 여성인 김지영에 공감하며 원작을 눈물로 읽어냈다는 후기들도 외면할 생각이 없었다. 약간의 의무감을 가지고 원작을 읽었고, 또 약간의 의무감을 가지고 극장에 앉았다.  영화를 보러갈 때 들고 갔던 의무감은 극장 바닥에 시원하게 내려놓고 나왔다. 공감하지 않았다면 울지도 못했을 테니 어쩌면 당연했다. 가장 크게 눈물샘이 터진 지점은 김지영씨와 그의 엄마, 그 엄마의 엄마가 동시에 이어지는 장면에서였다(스포일러가 될 것 같아 두루뭉술하게 표현하기로 한다). 원작에는 없는 장면이라 무방비상태에서 당하고 말았다. 지금의 나보다 젊었던 시절의 엄마를 떠올렸고, 엄마가 되기 전 한 여자의 삶을 상상했다. 한 사람이, 누군가의 아내와 엄마가 되기 위해 포기해야 했을 것들을 짐작해보았다. 감독의 의도대로 기꺼이 ‘우리 엄마’를 떠올렸을 많은 사람들이 함께 울고 있었다.  벌게진 눈으로 고향의 부모님께 안부 전화를 드렸는데 엄마 목소리가 가라앉아있었다. 마침 그날 엄마도 <82년생 김지영>을 보고 왔다고 했고, 울었다고 했다. 그리고 울음이 터진 지점이 같았다. 엄마도 자기 엄마를 떠올리며 울었다고 했다. 자신이 포기한 것을 두고 터진 회한이 아니라, 엄마의 엄마 삶을 떠올리며 더 아팠다는 말에서 명치가 저렸다. 사는 지역과 세대가 달라 자연스레 삶의 무게가 달라졌어도, 어쩌면 우리 모두는 이어져 있는지 모른다. 사진출처 - 영화 <82년생 김지영> 스틸 이미지  82년생 김지영은 새삼스러운 이야기가 아니다. 대단한 발견도 아니다. 그저, 여기 이렇게 살아온 사람들이 있었다고, 말을 건네고 있을 뿐이다. 최공돌 할머니는 원래 최공돌 할머니였으나 스스로 써내려간 글자를 통해 자신을 끄집어내셨을 것이다. 원래 있는 것을 꺼내는 일은 그 자체로 의미 있다. 새삼스럽지 않은 이야기를 꺼낼 땐, 굳이 그런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를 들여다 볼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소소하고 보편적인 이야기를 한 번쯤 들어주는 것, 내 가족과 이웃이 어떤 마음으로 살고 있는지 이해해보려는 시도를 한 번쯤 해 본다고 손해 보는 일은 없을 것이다. 설령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아 그 시도가 손해라고 느껴도, 기껏 영화 한 편 관람료만큼의 손해다(조조할인 또는 심야할인, 각종 카드할인 혜택을 받으면 그 손해는 더욱 줄어든다). <82년생 김지영>이 더 이상 성과 세대와 불행의 크기, 어떤 차이들을 대결하는 소재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2019-10-30 | hrights | 조회: 1326 | 추천: 34
김형수/ 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 총장 “경솔하고 천박한 말이 입에서 튀어나오려고 하면 재빨리 마음을 짓눌러, 그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일단 입 밖으로 내뱉고 나면 다른 사람들에게 모욕을 당하고 해로움이 따르게 될 텐데 어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조선 후기 이덕무 수양서 <사소절(士小節)> 중에서) 인권 ‘감수성’이란 말은 무슨 뜻인가요?  인권교육은 기본적으로 공공언어로 하는 교육입니다. 그래서 인권 교육은 언제나 인권 감수성이 높은 언어를 사용해야 합니다. 감수성은 항상 상황과 맥락에 따라 개별적으로 변화하기 때문에 교육하는 사람은 언제나 역동적으로 인권의 감수성을 일깨워 개발해야 합니다. 그래서 교육하는 사람의 역량 강화와 자기 계발, 전문성 강화는 매우 중요합니다. 인권은 몸과 머리에 익숙해서 자연스럽게 실천하도록 반복 연습하고 훈련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장애인 전용 주차 구역은 보행이 어렵거나 휠체어를 이용하는 사람들을 위해 반드시 비워두어야 한다는 것을 암기하고 아는 것뿐만 아니라, 당사자에게 자동차 등이 대안이 별로 없는 필수인 것과 휠체어가 보행 방식이자 신체의 일부이기에 그것을 디딜 공간이 충분히 제공되어야 할 권리임을 깨달아, 비장애인들이 적극적으로 법을 준수하고 이를 실천해야 합니다. 인권은 그래야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인권은 실천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요컨대, 인권의 이론과 이해는 인권 교육의 필요조건이며 감수성 교육과 개발은 인권교육의 기본이며 충분조건입니다. 그래서 단순한 이해와 인식 개선을 넘어 인권의 문제들이 공감이 되어 실천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감수성’을 키울 수 있는 교육을 해야 합니다. 이에 인권교육은 단기 일회성 교육이 아니라 끊임없이 연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래야 언제 어디든 일관되게 인권이 지켜지고 실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인권 감수성은 사람들의 일상적인 실천, 바로 ‘말과 글’· ‘행동과 일상생활’로 드러나고 만들어지며 미디어를 통해 대량으로 나타나고 공유되고 소통됩니다. 그래서 인권교육에서 강의하는 사람이 쓰는 말과 행동, 이야기는 아주 중요합니다. 교육을 받는 사람에게 알게 모르게 그 인식과 사상과 언어 행동을 전파하기 때문입니다.  ■ 장애 감수성 : 장애에 대해 생물학·사회문화적으로 학습된 공포와 인식을 넘어 장애를 마주보고 이를 수용하여 차별과 편견 혐오를 발견하여 대응해서 이를 철폐시키는 것.  ■ 인권 감수성 : 일상생활의 다양한 자극, 사건, 작은 것에서도 인권의 요소를 발견하고 적용하면서 이를 최우선으로 하여 옹호하고 실천하여 인권 문제로 변화시키는 과정.  ■ 성인지 감수성(gender sensitivity) : 사회 여러 문제에서 성차별의 요소를 찾아내는 민감성. 성별의 차이로 생기는 이해와 반응, 결과의 차이를 인정하며 사회, 문화, 관습, 통념의 변화에 달라짐.  ■ 미디어 디지털 리터러시란 무엇인가요?  Literacy라고 하면 옛날에는 글을 읽고 쓰고 해석하는 능력을 뜻했으나 지금은 글을 포함해 사진, 동영상, 영화, 광고, 스마트폰의 사용 등 정보를 다루고 표현하는 모든 영역을 뜻합니다. 미디어(정보)를 만들고, 미디어(정보)로 표현하고, 미디어(정보)를 선택하고, 미디어(정보)를 해석하고 비판하는 능력이나 행위를 말합니다. 여기서 미디어는 글과 그림, 사진과 동영상, 연극 영화, 음악, 만화(웹툰) 사회적 연결망(S.N.S) 모두를 칭합니다.  장애인에 대해 미디어(정보)를 어떻게 인권적으로 창작·생산하고 어떻게 인권적으로 수용하고 어떻게 인권적으로 비평할 것인가를 살펴야 합니다. 장애인 인권과 관련한 여러 매체에 대하여 기관들이 모니터링을 하고 의견을 발표하는 것도 리터러시 활동 중 하나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비판과 재해석을 기반으로 다시 인권의 시각에서, 미디어를 창작하고 생산하는 작업을 해보는 것입니다. 장애인 당사자가 그 관점에서 직접 미디어를 만들고 장애인 당사자가 직접 미디어 주인공으로 나오고 장애인 당사자가 직접 비평해보는 작업이 중요합니다. 특히 우리가 사용하는 말에 대하여 살펴보려고 합니다. 사진 출처 - freepik 장애 관련 용어, 언어는 왜 중요한가요? 사람들은 언어로 서로 이어지고 만나고 소통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언어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대로 현실을 인식한다” 1) ■ 언어에 담긴 인권 : 장애인 차별어 및 혐오표현에 대항하여 인권적인 표현 찾기(Counter Speech!)  말은 표현하는 대상에게 일정 가치와 판단을 담아서 소통과 교류의 도구로서 다른 이에게 전달되고 알려서 그 인식을 퍼뜨립니다. 특히 특정 계층이나 일부 집단 전체 또는 어떤 요소를 지칭하는 것일 경우 그 낱말은 사회적인 규범과 힘을 가집니다.2) 특히나 ‘차별’과 ‘혐오’, ‘비하’의 의도를 품은 경우 말하는 사람의 의도보다 그것을 듣는 사람의 의미 수용과 해석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수신자가 어떤 표현에 대하여 긍정적으로 받아들여도 그 표현이 공적이거나 사회적인 표현일 때는 시대에 따라 상황에 따라 편파적이거나 편견적이며 반인권적 언어 표현이 될 수도 있습니다. 물론 단순히 언어만을 바꾼다고 차별어가 없어진다고 할 수 없기 때문에 언어를 바꾸는 데에 앞서 장애인 차별적 표현인지 아닌지, 과연 바뀐 언어가 장애인들의 차별적 의식을 완화하는 데에 기여하는지 고려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3) ■ 차별과 혐오의 원인과 구조를 제거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차별과 혐오 표현, 언어 사용의 근본 원인들은 사람들의 대립과 갈등과 의사소통의 어려움이지만 일단 만들어진 말들은 다시 그 사회 갈등과 대립을 생산하고 증폭시키며 행동으로 이어지며 생활에서 습관이 되어 굳어지고 사람들의 가치관으로 굳어집니다. 요즘 ‘장애인’을 지칭하는 용어들이 잦아들 여지도 없이 뜨거운 논란을 빚는 것도 이와 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그러나 무슨 용어를 쓰든, 현재 ‘장애인’이란 용어는 모두가 인정하는 법적인 용어이지만 ‘장애(障碍)’라는 단어 자체가 가지고 있는 부정적 의미와 인식을 고민해보고, 대안을 찾는 인권 교육은 매우 중요합니다.  차별어의 사용과 혐오 발언들은 결국 구체적인 차별 행위와 모욕으로 드러나고, 더 나아가 혐오 범죄 또는 증오 범죄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언어생활은 개인적이고 자의적이며 표현의 자유와 사상의 자유와도 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회적인 언어 부림의 인권 민감성은 인권 강의에서 중요합니다. 그리고 이런 감수성은 한 개인에게, 한 기관에게 구체적인 행동으로 연속되어야 합니다. 댓글을 달거나 누군가에게 말을 한다는 것도 ‘행동’이고 일상생활이기 때문입니다. 그 언어들은 사회적으로 전염성이 있으며 그 전염성은 사람들을 행동하게 만듭니다. 일차적으로 교육하는 사람들과 공적인 영역의 사람들은 교육을 통해 언어의 전염성을 차단하고 사람들이 그런 행동들을 스스로 단속하고 바꿀 수 있는 힘을 길러주어야 합니다. ■ 듣는 사람들이 많은 공공 영역의 사람들의 언어 부림은 특히 중요합니다. 특히 순환 혐오 표현이나 혐오를 은폐하고 있는 표현들이 문제입니다.  사회적으로 듣는 사람이 많고, 들어야 하는 사람들이, 많은 정치인이나 종교지도자 및 공무원들의 공공영역에서 장애인을 생각한다고 하는 말들이 당사자들을 더욱 공분하게 만드는 이유는 사회의 소수자에 대한 차별이나 모욕을 감성적인 것으로, 개인의 문제로 은폐하면서 그런 의식을 오히려 널리 퍼뜨리고 사회적으로 교육시키기 때문입니다. 차별어와 혐오 표현을 없애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표현의 효과를 아예 없애거나 그 표현을 전혀 안쓰는 것입니다. 말을 죽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치인이, 종교인이, 권력자가 자꾸 이 말을 쓰고 또한 언론이 이를 비판한다는 이유로 그 표현 그대로를 자꾸 대중들에게 노출시키면 오히려 그 혐오와 차별의 말에게 생명과 힘을 주는 악순환이 반복됩니다.  특히 문제가 되는 건 순환 혐오이자 이중 혐오입니다.  혐오가 혐오를 낳고, 전파하고 심지어 그 비판까지도 다시 혐오로 전염시키기 때문입니다.  “장애가 장애가 되지 않는 포용사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장애인을 차별하는 사람이야 말로 진짜 장애인입니다.”  “장애인을 비하하는 행위는 일종의 정신 장애다 ”  “장애를 극복하는 피나는 노력을 '특권'으로 장애인을 비하하지 말라“ ”장애인을 괴롭히면 ‘특수학급’으로 보내버린다.“ 1) W.v.Humvolt : Gesammelte Schriften, Akademieausgabe, 7. Bd. S. 60. 2) 이러한 관점에서 언어 현상을 연구하는 학문과 이론을 사회언어학 [sociolinguistics, 社會言語學]이라 부른다.  3) 『사회적 의사소통 연구; 장애인 차별 언어의 양태에 관한 연구』 7쪽(임영철, 2008, 국립국어원) 
2019-10-16 | hrights | 조회: 1168 | 추천: 3
이상재/ 대전충남인권연대 사무국장  예전에 지역에서 꽤 큰 시민단체에서 실무책임자로 일했던 선배가 있었다. 그 선배가 후원 행사를 열거나 후원회원 가입을 요청하는 메일을 보낼 때마다 잊지 않고 매번 하는 말이 있었다. 그건 “정부 지원을 일절 받지 않고 회원의 회비로만 운영되는 저희 단체를 후원해 주세요” 라는 문구였다. 한번 두 번 받을 때는 그러려니 했는데 몇 년간 계속 받다 보니 후원해 달라는 이유가 정부 지원을 받지 않는 것밖에 없나? 오히려 단체가 지역을 위해 이런저런 일을 하고 있으니 후원해 달라고 하는 적극적인 문구가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역에 인권단체를 만들고 몇 년이 흐른 지금은 그 선배처럼 나도 비슷한 문구를 반복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우리 단체가 격주에 한번 회원과 시민 1,500여 명에게 보내는 뉴스레터의 마지막은 항상 “대전충남인권연대는 정부와 기업의 지원을 사양하고 시민의 참여와 후원으로만 운영되고 있습니다.”라는 문구로 후원회원 가입을 요청하고 있다. 국가와 기업의 지원 없이 독립적인 인권운동을 펼쳐나가기 위해서이긴 하지만 시민들에게 후원회원 가입을 요청하는 문구에 정부 지원을 일절 받지 않는다는 것이 주된 이유라는 건 어딘지 모르게 궁색해 보인다.  몇 년 사이 지역사회에 나타난 변화 중의 하나는 이른바 중간지원조직이 많이 생겼고 그런 기관에 가서 일하는 시민사회 출신들도 많아졌다는 것이다. 시민사회의 확장이라는 측면과 정부조직이 원활하게 할 수 없는 사업 형태를 담당한다는 측면에서 다양한 중간조직이 만들어진다는 것은 분명 긍정적인 변화일 것이다.  지역에서도 이제 기존 시민단체는 중간지원조직과의 후원이나 협업을 빼놓고 얘기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업을 함께 하고 있다. 우리 단체도 대전시가 전국 최초 민간위탁으로 설립한 대전시인권센터와 올해 처음 공동주최형식으로 진행한 인권학교는 60명이 넘게 수강하면서 시민들의 많은 호응을 받았다.  이렇게 우리 단체뿐만 아니라 지역의 많은 단체가 중간지원조직과 협업을 하고 때로는 후원을 받아 사업을 진행한다. 하지만 이런 연대사업들이 기존 시민단체들에 마냥 좋기만 할 것인지는 판단이 정확히 서질 않는다. 위에서 말한 긍정적인 측면이 있지만, 단체들의 독립적인 활동과 성장을 더디게 하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들기도 한다.  당장 우리 단체의 경우 내년에도 다시 인권센터와 공동으로 인권학교를 할지에 대해서는 유보적인 상황이다. 대전시의 재정지원을 받는 인권센터와 같이하는 사업이라 올해는 수강료가 무료였는데 계속 이런 방식으로 하다 보면 우리 단체 독자적인 사업의 경우 유료 강의를 하기가 어려울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서울 같으면 모르겠지만 강좌도 많지 않고 상대적으로 좁은 바닥인 대전에서 어떤 강좌는 무료이고 어떤 강좌는 유료라면 시민들은 당연히 무료강의를 찾지 않겠는가 말이다.  이제 지역의 시민단체들이 지방자치단체나 중간지원조직의 지원을 받지 않고 하는 사업들을 만나기가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열악한 단체 형편을 고려하면 그게 지적받을 일인지 반문할 수 있겠지만 문제는 단체의 열악한 상황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지역 시민단체는 몇 개 단체를 제외하고는 두 명의 상근자도 두기 힘들 정도로 열악한 상황이 꽤 오래 지속되고 있는 상황이다. 심각한 것은 이를 타개할 변화의 움직임도 거의 없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후원하고 있는 지역 시민단체들이 보내주는 뉴스레터에 신입회원이 몇 명 들어왔다는 소식은 정말 드문 일이 되어 가고 있다. (사실 뉴스레터나 소식지를 보내주는 단체는 몇 군데 없다.)  이런 상황에서 중간지원조직에 기대는 사업만 하다 보면 단체의 재정적, 사업적인 독립은 점점 힘들어지고 시민단체 본래의 정체성이라고 할 수 있는 비판기능마저 무뎌지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다. 사진 출처 - 국민일보  지방자치단체, 중간지원조직과의 거버넌스는 아주 중요한 시민단체의 활동영역이다. 하지만 개별 시민단체의 독립적인 활동과 성장의 토대가 약한 가운데 전개되는 협력, 특히 재정적 지원은 그 자체로 시민단체 성장의 위협적인 요인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다시 처음의 문제의식으로 돌아가자면 ‘정부 지원을 받지 않고 회원의 회비로만 운영되는 단체’는 여전히 대한민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시민단체들이 지향해야 할 운영방식이라고 생각한다. 정부와 중간지원조직과의 거버넌스와 연대는 물론 중요하지만 원활한 단체 운영을 위한 최소한의 재정과 활동성은 독립적으로 유지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니 건강한 시민사회를 위해서 시민단체의 독립적인 활동과 비판기능을 위해서 시민단체의 후원회원이 되는 것은 민주사회에서는 무엇보다도 중요할 것이다.  “정부 지원을 일절 받지 않고 회원의 회비로만 운영되는 우리 단체를 후원해 주세요”라는 말은 어색함이나 진부함의 홍보문구가 아니라 이 땅에서 시민단체가 활동하고 성장하는데 근간이 되는 당당한 요청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이 요청을 접하는 시민들이 외면하지 말고 보다 많은 지지와 후원을 해 주셨으면 좋겠다.
2019-10-10 | hrights | 조회: 717 | 추천: 3
이동화/ 사단법인 아디 활동가  며칠전 오랜만에 나간 기자회견에서 예전 활동했던 단체에서 친했던 지인들을 만났다. 반가운 마음에 안부도 묻고 근황도 묻다가 최근 아디가 추진한 ‘팔레스타인평화여행’을 이야기했더니 그 분이 놀라며 ‘거기는 목숨걸고 가야하는 곳 아니야?’라고 한다. 흠칫!! 워낙 주변에서 많이 들어 무덤덤해질만도 한데, 씨익 웃으며 “목숨걸지 않았고 잘 다녀왔어요”라고 했다.  팔레스타인을 다루는 언론과 단체의 이야기는 한결같다. 누가 얼마나 다치고 얼마나 죽었는지? 아시아 분쟁지역의 인권과 평화를 다루는 우리 단체 역시 마찬가지일때가 많다. 이런 상황속에서 일반인 뿐만 아니라 활동가들 역시 팔레스타인을 ‘목숨걸고 가야하는 곳’으로 생각하는 건 당연하다.  대안학교선생님, 기자, 일반 참가자들 5명을 모시고 약 열흘 간의 ‘팔레스타인 평화여행’을 다녀왔다. 뜨거운 퇴약볕아래 에어컨 안되는 차를 타며 팔레스타인 서안지구 전역을 돌아다닌 여행이었지만 참가자들 그 누구도 불평하지 않았고 그 곳에서 만난 ‘사람’들에 감탄하며 여행은 무사히 마무리되었다. 여행 마지막즈음 소감을 묻는 질문에 참가자들은 한결같이 “그동안 예상했던 팔레스타인과는 너무도 다른 모습에 놀랐다‘라고 하신다. 작년의 여행에도 마찬가지였다.  아마도 참가자뿐만 아니라 일반인에게 팔레스타인은 굉장히 복잡한 입국절차와 철옹성과 같은 국경을 넘어야 하고 방탄조끼와 헬멧이 필요한 곳이지 않을까 했겠지만 예루살렘에서 버스타고 30분이면 도착했던 그 곳이 팔레스타인 마을이었고, 시끄러운 듯 외국인에게 환영한다라고 요란한 인사를 하는 이들이 팔레스타인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을때 그들은 자신들의 예상이 틀렸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2년에 걸쳐 진행된 팔레스타인 평화여행의 목적은 현지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참가자에게 전달함에 있다. 테러와 전쟁이라는 프레임에서 일상을 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드러내고 높은 장벽속에 감춰진 ‘사람’들의 지난한 저항의 목소리를 듣게 한다. 비록 매우 짧은 시간이지만 그 곳 ‘사람’들의 희노애락을 통해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고 우리역시 이 상황이라면 마찬가지로 ‘저항’할 수도 있겠다는 공감대 형성이 주요한 이유이다. 그리고 여행이 끝나고 모인 자리에서 참석자들은 점령지인 팔레스타인(Occupied Palestinian Territories, 팔레스타인 공식명칭)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과 저항을 보았음을 이야기했다. 사진 출처 - 필자  여행기간 내내 모든 참석자들은 현지로부터 ‘당신들이 보고 들은 것을 당신들 나라에 그대로 전달해 달라’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리고 아디와 참석자들은 이 숙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행에서 보고 들은 것을 알리는 ‘평화여행 보고회’ 행사를 10월 하순에 가질 예정이다. 여행을 통해 가본 도시와 마을, 사람들의 모습, 활동하는 이들의 이야기들을 영상과 기록을 통해 전해보려 한다. 또한 국내에 많이 알려지진 않았지만 현지 여행을 통해 그 심각성을 절감한 팔레스타인 주민들의 ‘물 문제’, 이를 수개월동안 연구조사한 팀의 인권보고서도 발표할 계획이다.  현실적으로 대부분 사람들에게 팔레스타인 이슈는 관심갖기 어려운 주제이다. 솔직히 국내 이슈도 차고 넘친다. 하지만 혹시 팔레스타인 문제에 관심있고 식민점령의 부당함에 분노하며 한번이라도 고민하신 적이 있는 사람이 계시다면 이 행사에 꼭 오셨으면 좋겠다. 소수라도 팔레스타인 주민들의 일상을 이해하고 점령의 어려움을 공감하는 사람들이 함께 한다면 팔레스타인과의 연대는 힘차게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2019-10-02 | hrights | 조회: 830 | 추천: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