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에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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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에가시’는 현장을 살아가는 활동가들의 목소리를 담기 위한 칼럼 공간입니다.

‘목에가시’는 김형수(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 총장), 신종환(공무원), 윤요왕(재)춘천시마을자치지원센터장), 이동화(아디 활동가), 이승은(경찰관), 이원영(용산시민연대 공동대표), 정한별(사회복지사) 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김아현/ 인권연대 전임간사  지금은 온 국민이 그 수용번호를 다 아는 전직 대통령이 현직이던 시절의 일이다. 경제활성화법, 노동개혁법, 테러방지법 등의 입법을 촉구하는 서명운동이 대대적으로 벌어졌었다. 경제계와 청와대는 당시 이것을 ‘민생구하기 입법’이라고 불렀다. 경제계와 청와대는, 천 만 명의 서명을 받아 위 법안들의 국회통과를 촉구하고 경제를 살리는 한편 테러를 방지해 민생을 살리겠다고 했다.  삼성은 물론이고 대한상공회의소를 비롯한 수십여개 경제단체들이 적극적으로 팔을 걷고 나섰다. 보통 서명운동이니 집회니 하는 것들은 주로 ‘빨갱이’들이나 하는 일이었다. 노동조합도 못 만들게 하던 삼성이 사옥에 서명 부스까지 설치하며 팔을 걷고 나설 정도로 우리나라 경제가 백척간두에 서 있나 아무리 둘러봐도, 고급호텔은 늘 예약이 꽉 차 있고 공항엔 출국을 앞둔 이용객들이 가득했다.  재계의 투쟁은 외롭지 않았다. 대통령, 국무총리, 각 부처 장관 등 고관대작들의 서명 참여 인증샷이 이어지는데 전국의 작은 지자체와 산하기관들이 가만있을 도리가 없었다. 21세기형 관제 운동이라는 비판이 일부 진보언론을 중심으로 제기되었다. 그로부터 5년여가 지난 지금, 테러방지법을 제외한 해당 법안들의 처리 과정과 결과가 어땠는지 그닥 기억나지 않는 것을 보면 한국사회의 집단지성이 절망할 만한 수준은 아니었나 보다. 사진 출처 -정책주간지 공감  집회 및 결사의 자유가 보장된 사회에서 빨갱이든 삼성의 총수든 그 누구든, 데모도 할 수 있고 서명운동이라면 더욱 못 할 일이 없다. 대통령도 예외가 아니다. 그런데 나는 대통령이 거리에서 서명운동에 동참하는 사진이 실린 기사를 읽으며 꽤나 크게 분노했다. 아주 상스러운 욕을 하고 싶었는데 남들 다 할 줄 아는 욕 말고 더 심한 수위의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분노보다는 모욕감이 더 컸다. 람보르기니 우라칸을 타고 나타난 이들에게 느닷없이 발가벗겨지는 것도 모자라, 손에 쥔 마지막 푼돈을 빼앗긴 느낌이라고 하면 엇비슷하겠다.  서명운동은 누가 하는가. 땡볕과 매연과 칼바람을 막아줄 문명의 이기 하나 없이 길바닥 위에 서서, 일면식은 물론이고 내 말 들어줄 시간도 관심도 없는 이들을 붙잡아 말을 건네고 허리를 굽히는 그런 일은, 과연 누가 하는가.  절실함 말고는 가진 게 없는 이들이다. 마이크, 호화 변호인단, 법개정이나 예산반영을 관철시킬 유무형의 네트워크, 또는 사람들의 관심 가운데 단 하나도 갖지 못한 이들이 주로 거리로 나선다. 그들은, 언론 보도의 논조를 조율할 수 있고 법과 예산도 주무를 수 있으며 정치와 행정을 통해 세상을 움직일 힘이 있는 사람들에게, 거리마저 빼앗겼다. 관제 여론몰이 정치쇼가 서명‘운동’의 옷을 입었을 때 누군가는 모든 것을 잃었다. 누군가는 그 행위를 들어 서명‘운동’이 아니라고, 그런 것은 운동일 수 없다고 지적했어야 했다. 고관대작들이 할 일은 서명이 아니라 다른 것이라고 말했어야 했다.  ‘젊은 보수도 젊은 진보도 발렌시아가를 입는다’며, 국민의힘 이준석 신임 대표를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추켜올린 어느 진보언론의 기사를 읽고 이 글을 쓴다. 부연하자면 그 기사에 대한 분노와 절망, 비아냥거리고 싶은 마음을 표현하려는 목적이다. 하이엔드(고급) 패션의 혁신을 K-정치에 빗대어 자칭 진보의 각성을 촉구하고자 하는 그 마음 모르는 바 아니지만, 108만 원짜리 후드티, 474만 원짜리 털재킷, 130만 원짜리 스커트, 127만 원짜리 스니커즈, 64만 원 넘는 수영복을 입을 수 있는 ‘젊은’ ‘진보’는 어디에 있는가. 돈 많이 벌고 옷 잘 입는 진보도 있어야 하고 간혹 그 기사를 쓴 기자 주변에 많을지 모르지만, 그 몇몇은 통계적으로도 계급을 대변할 수 없다. 교과서만 파서 입시에 성공한 사람은 있을 수 있지만 그게 보편적일 수 없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이준석이 창조하고 이준석이 변화시킨 정치 지형이 뭐가 있는지 알고 싶다. 이준석의 성과에 그의 성별과 나이, 학력 말고 대체 어떤 것이 기여했는지 정말 궁금하다. 그가 대변할 수 있는 계급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 다만 생물학적 젊음에만 빗대어 크레이티브 디렉터라느니 사상 초유의 30대 당대표라느니 하는 ‘진보’ 언론의 말들은 낯 뜨겁다. 그보다 젊은 나이에 당대표를 역임한 작은 정당, 다른 성별의 대표들이 숱하게 스친다. 기성세대의 출혈경쟁에 미래를 강탈당해, 발렌시아가를 입기는커녕 지․옥․고를 벗어나지 못하는 청춘들의 절망을 ‘코인 같은 도박에나 베팅하는 철없음’으로 조롱하는 말들도 스친다. 속이 부대낀다.  그가 ‘국회의사당역’에서 ‘국회 본청’까지의 그 짧은 거리를 공유자전거로 출근하는 구태의연한 정치쇼를 벌일 때도 언론은 혁신이라고 추켜세우기 바빴다. 말은 누가 오염시키는가. 오염된 말은 누가 유통시키는가. 오염된 말이 유통되어 프레임이 변화할 때 그 때문에 고통받는 이들을 지켜보는 건 누구인가. 적어도 ‘발렌시아가를 입는’ 기자가 그들 곁에 있을 거라는 상상을 하지 못하는 편협함만이 아주 조금 미안할 뿐이다.
2021-06-16 | hrights | 조회: 792 | 추천: 25
주윤아/ 교사  지난 한 달간 중·고등학생과 군인 등 성폭력 피해자들의 안타까운 죽음이 연이어 세상에 알려졌다. 특히 이들은 성폭력 피해를 용기 내어 신고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법 정의 실현은커녕 성폭력 피해자로서 기본적인 보호나 지원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는 점과 피해자들이 고인이 된 뒤에야 본격적으로 수사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공군 내 성폭력 피해 발생 석 달 뒤인 바로 피해 당사자가 고인이 된 뒤, 그것도 언론 보도 직후 여론의 집중 질타를 받은 뒤 가해자에 대한 영장실질심사가 단 3시간도 걸리지 않고 구속이 이루어졌는데, 이는 다른 사건의 경우도 유사하다. 청주에서도 중학생 피해 학생 2명의 극단적 선택이 세상에 알려지고 엄중 수사 및 처벌에 대한 국민청원이 등장하고 나서야 성폭력 혐의를 받고 있던 피의자에 대한 체포영장과 구속영장을 앞서 세 차례나 기각했던 검찰이 피의자를 구속했다. 이처럼 피해자들이 성폭력 피해를 신고한 후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경과가 언론을 통해 조금씩 실체를 드러내면서 우리 사회가 결국 이들을 죽음으로 내몬 것이라는 비판과 성찰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청주 중학생들의 죽음은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가장 최소한의 보호 조처가 이루어지지 않은 안타까움이 큰 사건이다. 피해자 측의 고소에도 불구하고 가해자와 피해자의 분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피의자에 대한 체포영장과 구속영장이 번번이 반려되면서 의붓아버지이고, 그리고 친구의 가족인 가해자를 피하기 어려웠던 두 학생의 고충과 공포를 가히 상상조차 하기 어렵다. 1)전국교직원노동조합 충북지부는 24일 성명서를 통해 "오창 중학생 두 명의 죽음은 성폭력 피해 대응체계 부재가 부른 참사"라고 규정하며 특히 "아동학대, 성폭력의 경우 가해자와 피해자가 즉각 분리될 수 있도록 피해자 보호 체계를 보강할 것과 수사기관, 아동 성폭력 전담기관, 교육 당국이 공조해 피해 청소년을 실질적으로 보호할 수 있는 대응체계를 마련할 것"을 요구했다.  성추행 피해 공군 부사관 사망 사건은 미투 운동 이후 우리 사회가 근본적으로 크게 변화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성폭력 피해 사실 인지 후 조직의 대응 과정에서 끝도 없이 나오고 있는 군 조직 전체의 총체적 난국은 일일이 열거하기도 어려울 정도다. 현재까지의 수사 결과로는 여성 변호사 우선 배정 매뉴얼도 어긴 데다 피해자와 국선변호사의 직접 면담은 단 한 차례도 없었으며 사건을 넘겨받은 군검찰도 피해자가 숨진 채 발견될 때까지 두 달 가까이 피해자, 가해자 조사를 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2)피해자가 최초 신고 이후에도 20번이나 성폭력 피해를 호소했지만, 공군은 한 달이 지나서야 국방부에 ‘월간현황보고’에 수치만 반영해 넣는 단순 보고로 처리했다고 한다. 가장 기본적인 가해자와 피해자 즉각적인 분리 조치를 하기는커녕 ‘신고해봐’라며 조롱하고, ‘없던 일로 해 달라, 살면서 겪을 수 있는 일이다’ 등 사건을 은폐하기에 급급하거나 ‘상부나 외부에 알리지 말라, 가해자가 명예로운 퇴임을 하게 해달라’ 등 성폭력 피해 이후에도 가해자와 부대의 조직적인 회유와 n차 가해에 시달렸고 설상가상 부대를 망치는 관심병사로 따돌려 낙인을 찍으며 공식 신고 접수도, 후속 조치도 없이 피해자를 죽음으로 몰고 갔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부대관리훈령>에 명시된 성폭력 피해자 보호와 비밀 유지, 가해자와 피해자 우선 분리, 신고를 포함한 피해자의 제반 권리행사를 방해하는 행위 금지 등 성폭력 피해자를 보호하는 매뉴얼 중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가장 안타까운 사실은 성폭력 피해 사실을 신고한 피해자가 석달 동안 방치되는 동안 피해자를 보호하고 피해자 편에서 지원한 사람이 현재까지는 특별히 확인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올해는 스쿨미투 운동 3주년이 되는 해이다. 스쿨미투 운동 이후 학교의 변화를 정확히 파악하긴 어렵지만 분명 이전과 같지는 않을 것이다. 여성 청소년들이 학교 안에서 겪고 있는 성차별과 성폭력 등을 용기 내어 말하며 공론화 활동이 시작되었고 동시에 비민주적이고 불평등한 학교의 민낯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이후 교육부는 사립학교 교원에 대해 국공립 교원과 같은 징계기준 적용 등 개선안을 담은 교육 분야 성희롱·성폭력 근절 대책과 ‘학교 내 성희롱·성폭력 대응 매뉴얼’ 등을 발표했고, 서울시교육청은 ‘성평등 교육환경 조성 및 활성화 조례’를 제정을 하는 등 관련 법적·제도적 장치들을 마련했다. 그러나 학교구성원들의 인식이 근본적으로 개선되지 않고, 성인지 감수성이 낮은 조직의 구조와 문화가 학교 대지에 깊이 뿌리박혀 잔뿌리조차 뽑힐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면 법과 제도가 완비되어 있다 한들 실효성이 없는 전시성 조치로 전락할 것이 뻔하다. 스쿨미투 운동 3년이 된 지금, 스쿨미투가 발생했던 학교에서 다시 스쿨미투가 일어나는 사례가 있고, 스쿨미투 가해 교사들이 솜방망이 처벌을 받고 다시 교단에 복귀하는 등 학교는 크게 변하지 않았고 스쿨미투도 끝나지 않았다. 또 스쿨미투를 드러내놓고 반대하는 구성원들은 줄었지만, ‘하고 싶은 말이나 농담을 자유롭게 할 수 없어 수업이 지루할 수밖에 없다’라는 등의 펜스룰이나 ‘요즘 선생 노릇하기 어렵다’는 등 ‘교권’침해를 운운하며 학생인권(조례)과 대립시키는 왜곡된 프레임으로써 스쿨미투를 폄하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사진 출처 -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여성위원회  이런 학교가 위의 군대 문화와 다르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학생들은 일상 속에서 자유롭게 의견을 개진하기 어렵고, 성폭력 피해 사실을 용기 내어 말하는 학생에게 ‘어떻게 선생님한테 그럴 수가 있냐’며 말문을 막으며 입단속부터 시키고, 피해 학생보다 가해 교사를 옹호하며 회유와 협박의 2차 가해를 하던 학교 조직과 구성원은 스쿨미투 이후 얼마나 달라졌는가 말이다. 폐쇄적 조직 문화, 낮은 인권 감수성, 금지와 지시 일색인 비민주적 규율과 규정 등 유서 깊은 전근대적 구조와 문화를 과연 얼마나 개혁했는지 객관적 진단이 시급하다.  인권적이고 평등한 학교는 누가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 전국의 모든 교육청에서 학생(학교구성원)인권조례가 입법되는 과정 자체가 교육 과정의 일부가 된다면 인권과 민주시민 교육의 효과까지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교사들은 교실 내 자신의 권력과 위계를 끊임없이 성찰하고 약자와 소수자, 피해자의 입장에 서서 모두가 안전한 학교 환경을 만들기 위해 행동해야 한다. 1) 2021.05.24. 충북일보 "성폭력피해 대응체계 부재가 부른 참사" 2) 2021.06.07. 시사저널 “20번이나 피해 호소했지만..'성추행 감추기'에 일치단결했던 공군”
2021-06-09 | hrights | 조회: 791 | 추천: 10
이동화/ 사단법인 아디 활동가  지난 5월 21일, 언론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하마스 측이 11일 동안의 무력충돌을 끝내고 휴전에 합의했다고 전했습니다. 이번 충돌로 인하여 팔레스타인 측 248명, 이스라엘 측 12명의 사망자가 발생했고 총 2,200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습니다. 특히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의 경우에는 여성과 아동의 사망자가 99명에 이르고 수백 채의 건물이 파괴되었으며, 학교, 병원, 방송국, 전기 수도시설, 전력시설과 같은 일반생활시설과 기간시설들이 폭격당했습니다. 이번 사태로 인해 희생당한 모든 분의 명복을 빌고 유가족분들께 위로를 전합니다.  이번 충돌의 해결을 위해 국내에서도 아디를 포함한 160개 시민단체가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침공을 규탄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기자회견을 개최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많은 분이 현지의 사정을 오해하거나 제대로 알고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먼저 이번 충돌의 성격입니다. 많은 분이 이번 사태를 이스라엘 국가와 팔레스타인 국가 간의 충돌이라고 생각하지만, 팔레스타인은 정식 국가가 아닙니다. 유엔의 표현에 따르면 팔레스타인은 the Occupied Palestinian Territories 즉 이스라엘의 점령지입니다. 이스라엘은 1948년 건국 이후 ‘역사적 팔레스타인 영토’의 78%의 땅 위에 건국되었습니다. 그리고 1967년 3차 중동전쟁 이후 남은 22%의 땅, 즉 동예루살렘을 포함한 서안지구와 가자지구를 군사 점령하였고, 우리가 이야기하는 팔레스타인 지역은 이 지역을 뜻합니다. 이스라엘 가자지구 침공 규탄 기자회견 사진 출처 - 필자  그리고 이번 충돌의 원인입니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정당 ‘하마스’가 로켓을 발사했기 때문에 가자지구를 폭격하였다고 밝혔으나 그 시작은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거주지인 동예루살렘 ‘세이크자라’ 마을로 자국의 유대인 정착민을 이주시키기 위해 팔레스타인 주민을 강제퇴거 시키려 했고 이에 저항하는 주민들을 잔인하게 진압했습니다. 이 소식을 접한 팔레스타인 시민사회가 공분하여 시위가 전역으로 확산되자 이스라엘은 이슬람의 성지인 알 아크사 사원 안까지 침입하여 시위대와 예배중인 신자들에게 섬광탄과 최루탄 등을 발사했습니다. 하마스는 이스라엘 측에 알 아크사 사원에서의 철수를 요구하며 통첩을 보냈지만 이스라엘은 전쟁준비를 서두를 뿐이었고, 최후통접 시간이 지나 하마스가 로켓을 발포하자 이를 구실로 가자지구에 무차별적 공습을 진행한 것입니다. 사실 이번 공습 이전에도 이스라엘은 하마스를 공격하기 위해 가자지구에 공습을 지속적으로 이어왔습니다.  또한 이번 공습의 대상지역인 가자지구의 상황도 많은 분들이 잘 모르는 지점입니다. 가자지구는 2007년 이후 이스라엘에 의해 땅, 바다, 하늘길이 모두 막힌 봉쇄지역입니다. 국제사회는 이 곳을 세계에서 가장 큰 감옥이라 부릅니다. 한국의 세종시 만한 크기에 인구는 200만명, 전세계적으로 가장 인구밀도가 높은 지역입니다. 이번 공습 이전에도 이스라엘은 2008년, 2012년, 2014년 대규모 공습을 진행한바 있습니다. 전체 실업율은 50%에 이르고 주민 95%가 지하수를 활용하지 못하며 빈곤율은 39%입니다. 세계은행은 유엔 등의 구호단체 활동이 없으면 최악의 인도주의적 재앙이 발생할 거라 했습니다. 올해 국제형사재판소가 2014년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공습에 대한 전쟁범죄 조사를 개시하였지만, 이스라엘은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이곳에 무차별 공습을 가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왜 이러한 충돌이 지속적으로 발생하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번 충돌의 빌미가 되었던 ‘세이크자라’의 팔레스타인 주민들의 강제퇴거에서 알 수 있듯이, 이스라엘은 점령지인 동예루살렘과 서안지구에 유대인 정착촌을 만들어 자국민을 이주시키고 군대를 보내고 있습니다. 국제법상 팔레스타인 지역에 유대인 정착촌을 건설하는 것은 불법으로 규정되어 있지만, 이스라엘은 전혀 개의치 않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정착촌은 인근에 살고 있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내쫓고 그들의 경작지를 몰수하며 시간이 갈수록 확장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유대인 정착촌 사람들이 주변의 팔레스타인 마을을 공격하는 경우도 빈번해지고 있습니다. 갈등이 깊어질수록 충돌은 늘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이번 휴전 소식을 통해 많은 사람이 평화로운 일상을 기대하겠지만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공습 이전과 크게 달라진 게 없다고 합니다. 휴전 소식을 접하고 팔레스타인 지인에게 현지상황을 묻자 그는 가자지구에서의 로켓 발사와 공습은 멈췄지만, 이스라엘은 서안지구와 동예루살렘에서 시위에 참여한 팔레스타인 주민들을 색출하여 체포, 구금하고 있다고 전했습니다. 그가 한 말에 따르면, 지금도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싸우는 중입니다.  11일간의 충돌은 끝났지만, 여전히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을 점령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유대인 정착촌을 건설하고 있습니다. 점령과 봉쇄가 끝나지 않는 이상 이와 같은 충돌은 계속 이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언제든 다시 폭격을 재개할 것입니다. 우리 역시 이스라엘의 아이언돔 성능을 찬양할 것이 아니라 이번 충돌로 피해를 받은 사람들 한명 한명의 비극을 이야기하며 이스라엘의 점령중단을 외쳐야 할 것입니다.
2021-05-26 | hrights | 조회: 889 | 추천: 12
이회림/ 00경찰서  "담배 한 대 하러 가자~"  같은 사무실에서 일하는 21년차 경찰 선배가 말씀하십니다. 비흡연자인 저에게 백해무익한 담배를 강권하는 50대 아재일까요? 알고 보면 답답한 사무실보다는 하늘도 보이는 곳에서 허심탄회하게 대화 좀 하자는 그런 시그널이지요.  왼손엔 달달한 믹스커피, 오른손엔 전자담배 아니고 진짜 담배, 건강에 해로울 수밖에 없는 두 가지를 양손에 야무지게 챙겨 들고는 씽긋 미소 짓는 선배를 따라 오늘도 야외 흡연실로 따라갑니다.  "이 경사, 니 요새 안 디나(안 피곤해)? 살살해라 살살~ 그렇게까지 안 해도 된데이~~"  선배와 저 그리고 저의 후배, 우리 셋은 지난 11월에 신설한 경찰서에 학교전담경찰관으로 발령을 받아 51개 초중고등학교를 17개씩을 맡고 있습니다. 일주일에 1회 이상 방문해야 하는 A등급 학교, 한 달에 2회 이상 방문이 요구되는 B등급 그리고 한 달에 1회 이상 방문하게 되어있는 C등급 학교로 나누어져 있지요. 이렇게 A, B, C로 등급을 나누는 기준은 이전 해까지 집계된 각 학교의 학교폭력 범죄 발생 현황과 상관관계에 있습니다.  A등급 학교인 H고에서 최근에 일어났던 일입니다. H고 1학년 여학생 지민(가명)이는 평소 교내에서 일진이라고 불리는 아이들 무리가 12명 있는 것이 늘 불편하게 느껴졌습니다. 특히 12명 중의 우두머리인 해룡이(가명)가 “ㅋㅋㅇ 단체톡방”에서 특수반 장애학생 남준(가명)에게 욕설을 하며 놀리는 모습을 보면서 더욱 그러했다고 합니다.  그날 밤 지민이는 단체톡방 안에서 남준이를 도와주지 못한 미안함에 잠을 이루지 못했고 고민 끝에 담임 선생님을 찾아가 모든 일을 알렸다고 합니다. 담임 선생님은 해룡이를 불러 주의를 주고, 문제의 그 단체톡방을 해체하도록 조치했습니다. 그런데 그 후에도 해룡이를 비롯한 12명의 일진은 활개 치고 다녔고, 선생님들의 시선을 피해 여전히 아이들을 괴롭혔다고 합니다. 사진 출처 - gettyimage  일진들의 비행이 점점 교묘해져 선생님들이 관리할 수 있는 영역 밖으로 치닫고 있다고 느낀 지민이는, 어느 토요일 오후, 용기를 내 동네 지구대로 찾아갑니다. 지민이의 호소를 들은 순찰 요원분들은 스쿨폴리스인 저에게 이 사실을 전달해주었고, 저는 지민이에게 전화를 걸어 간단히 1차 전화 면담을 진행하였습니다. 월요일 방과 후, 지민이를 만나 그간의 자세한 이야기를 들었고 화요일에는 H고로 찾아갔습니다. H고 교감 선생님은 늘 저에게 “정말 열심이시네요, 열정이 대단하시네요~” 하시면서 격려를 아끼지 않던 분이라 마음 편히 신고 사실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교감 선생님은 12명 일진의 존재에 대해 매우 놀라워하시며 전혀 존재를 모르고 있었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한 달 정도 열심히 파고든 노력 끝에 피해 학생 4명과 목격한 학생 2명을 찾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들로부터 놀랄만한 말을 듣게 됩니다.  교감 선생님이 전교생들을 다 모아놓고 “애들아~ 앞으로 학교폭력 등 문제가 생기면 스쿨폴리스에게는 말하지 말고 선생님한테 먼저 말하도록 하자~ 학교 위신 깍이니까”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교감 선생님의 말씀이 너무 이해가 안 된다며 저에게 알린 것이었지요. 저는 이 말을 듣고 나서부터 생각이 많아졌습니다. 그래서 이날 이후로부터 교감 선생님 등 학교 측에는 제가 수집한 정보를 전부 다 알리지 않고 일부만 선별해서 알렸습니다. 학교 측이 가해 학생들의 편에 서 있는 것은 결코 아니겠으나 교감 선생님의 “위신 깎인다”라는 그 한마디에 저와 피해 학생들은 학교에 대한 신뢰를 잃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뒤로 H고를 방문해 교감 선생님을 뵐 때마다 ‘열정적이라 보기 좋습니다’ 와 ‘위신 깎이니까 스쿨폴리스에게 말하지 말아라’ 두 마디가 교감 선생님의 얼굴 좌, 우 말풍선 안에 들어있는 듯했습니다.  이후, H고 12명 일진사건 뿐만 아니라 B, C등급 학교에서도 ㅋㅋㅇ톡 개정 갈취 사건 등 연이어 심각한 수준의 학교폭력이 발생하였습니다.  "안 디나? 살살해래이~~"  담배도 안 피우는 저를 굳이 하늘이 보이는 야외 흡연 공간으로 불러 내 이렇게 격려의 말씀을 해주시던 선배님께 이렇게 대답합니다.  “선배님~ 저 이제 7개월 차 스쿨폴리스이지만 확실히 알게 된 거 하나 있어요. 어디에서나 어른들이 제일 문제라는 거네요~ 그 교감선생님처럼요”  “그래 맞데이~ 학교폭력도 가해 학생들 가정환경 보면 답 나온다 아이가~~ 가해 학생들도 어찌 보면 다 피해자다, 피해자!”  허허로운 담배 연기를 허공에 확 뿜으시며 이렇게 한마디 하시는 선배가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교감 선생님 같은 사람도 있고 이런 선배도 있고 뭐 그런 건가요?
2021-05-26 | hrights | 조회: 581 | 추천: 5
홍세화/ 대학생  어느덧 대학교 4학년, 사회에 나갈 준비를 하며 느낀 점들이 있다. 확실히 부모님 세대에 비해 지금의 나는 어른이 되지 못했다. 어렸을 땐 하루빨리 나이를 먹어 어른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막상 성인이 된 이후에는 아니었다. 그 이유로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첫째로는, 어른으로서 지녀야 하는 책임과 의무에 대한 부담감이다. 어린 시절에는 내가 성인만 되면 나를 속박하던 제재들은 사라지고 자유만이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성인이 되어 나를 반긴 것은 자유보다는 이에 따른 책임과 의무이다. 나를 속박하는 것으로 여겼던 제재들은 나를 보호하기 위한 수단이었고, 나를 보호해줄 울타리 밖으로 나온 지금은 개인적인 일들이나 금전적인 부분에서 온전히 나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져야 할 일들이 늘어나고 있단 사실에 부담이 생겼다. 때문에 이런 일들이 앞으로 더욱 많이 일어날 텐데 내가 잘 헤쳐 나갈 수 있을지 미래에 대한 불안과 걱정들은 늘어만 갔다. 이러한 고민과 함께 그 옛날 지금의 나보다 두 살 밖에 많지 않던 스물여섯의 엄마는 어떻게 그 나이에 결혼을 하고 언니까지 낳으실 수 있었을까 놀라운 마음과 존경심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책임과 의무를 회피하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된, 아직 어른이 되기 싫은 ‘어른’과 ‘어린이’의 중간인 ‘어른이’인 상태이다. 사진 출처 - 구글  두 번째 이유는 요즘 들어 더 이상 나이 들고 싶지 않은 가장 큰 이유인데, 내가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나 혼자만 나이 먹는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연의 섭리에 따라 모든 인간은 시간이 흐를수록 나이를 먹고 늙어가며 노화가 찾아오는 것이 당연하다. 올해 스물 네 살인 나도 이제는 육체의 성장이 한계에 이르렀고, (나보다도 어른이신 분들이 들으신다면 기가 찰 말이겠지만) 점차 노화가 찾아와 체력이 점점 떨어져 가는 게 느껴진다.  하지만 나의 노화가 시작되었다는 것보다 더 괴로운 것은 앞서 말했던 어린 시절의 나를 지켜주고, 사랑해주셨던, 그리고 여기까지 이와 같은 것들을 베풀어주시는, 나에게 진정 ‘어른’들이라고 생각되는 분들의 노화가 가속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얼마 전 한 인터넷 기사에서 스탠포드 대학의 연구 결과 하나를 보았는데, 인간의 노화는 각각 34세, 60세, 78세를 기점으로 단계별 노화가 가속된다고 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후 요즘 들어 부쩍 부모님과, 나를 돌봐주셨던 가족들께서 연로해지시고 많이 쇠약해지고 계시다는 것을 느끼게 되어 마음이 아팠다.  ‘피터팬’을 보면 부모를 잃은 아이들이 네버랜드에 가게 된다. 나는 부모님과 같은 소중한 가족들이 있기 때문에 나이를 먹지 않을 수 있는 환상의 나라가 있다면 그곳으로 다 같이 떠나고 싶은 마음이다. 이러한 몽상과 더불어 첫 번째 내용과는 모순되지만, 내 성장 과정 속 많은 어른의 베풂에 보답하기 위해 어서 안정적인 직장에 자리를 잡고 책임과 의무를 다하며 이분들을 부양하고 싶은 마음도 생겨나고 있다.  최근 내가 쓴 ‘칼럼’이라 칭하기엔 민망한 글들을 찬찬히 읽어보았다. 대부분 이 시대에서 살아가는 청년들의 아픔과 설움 등을 주제로 다뤘지만 사실상 그 글을 쓰는 나는 제대로 노력도 해보지 않았고, 그저 징징대는 글들에 가까워 보였다. 이제 와서 읽어보니 일종의 도피성 글인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현실을 마주하고 ‘어른이’가 아닌 ‘어른’이 되어야 할 때인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바로 어른으로서 성장하긴 어렵겠지만, 이제는 적어도 내가 받은 것을 돌려줄 수 있는, 성숙한 사회구성원으로서 성장할 것을 다짐할 줄 아는 어른이로 나아갈 것이다.
2021-05-06 | hrights | 조회: 724 | 추천: 7
김형수/ 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 총장  부산에서 나보다 3년 먼저 대학 신입생이었던 친형은 사흘이고 나흘이고 집에 들어오지 않은 날이 잦았다. 어느 날은 지리산에서 전화가 오고 어떤 날은 서울의 대학 학생회관에서 생존만을 확인시켜 주는 전화를 가끔 할 뿐이었다.  유스호스텔 (youth hostel) 동아리 활동이었다. 정신없이 대학에서 첫 중간고사를 끝내고 국제학사로 돌아오는 청송대 긴 의자에서 결심했다. OX 문제로 전공시험을 내는 자괴감 가득한 문과대학을 탈출하자 혼자 결의했다. 돌아올 체력이 부족할까 대학 정문까지는 내려가지는 못하더라도 다른 학과 학생들을 만나는 동아리들이 있는 학생회관까지 진출해 보자 결정했다. 나도 여행동아리에서 태백산맥 전국을 다니리라 했다.  입학한 대학에는 매주 필수로 들어야 했던 예배 수업이 있었다. 그 대강당 2층 맨 끝에 그 동아리가 있었다. 그런데 대강당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따로 손잡이가 없이 넓은 돌난간만 있었다. 손으로 잡기에 너무 미끄럽고 넓어서 올라가기가 너무 어려웠다. 몇 번이나 미끄러져서 정강이에 피멍이 들었다. 길고 긴 백두대간의 여행보다 그 돌계단이 나의 최초 동아리 가입을 가로막았다. 국제학사 지하 1층에서 우연히 만난 얼굴이 하얀 유스호스텔 선배가 다시 학생회관 3층의 한 동아리를 소개했다.  이제는 강제로 폐지된 총여학생회가 있는 학생회관 3층에는 왼손잡이를 위한 손잡이는 없었다. 대신에 따뜻하고 얇은 나무 손잡이가 4층까지 이어졌다. 승강기가 없어서 힘들었지만, 발을 단단히 못 디뎌 다치는 일은 별로 없었다.  12년 전쯤, 1980년대에는 서울 보라매 공원 안에 있었던 이름있는 학교, 7살짜리 나를 업고 부산에서 올라와 기숙사 앞에서 하염없이 고민했던 어머니께서 차마 맡기지 못하고 발길을 돌렸던 그 학교에, 어쩌면 나의 모교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바로 그 학교에 주말마다 학습지도 봉사활동을 가는 동아리였다.  설레임을 안고 들어갔다. 입학은 안 했지만 친한 후배들을 만나는 것만 같았다. 동아리 무리 사람들은 말로는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매주 갈 것처럼 했지만 실제로 매주 봉사를 가는 사람들은 드물었다. 나도 딱 한 번 그곳으로 봉사활동을 갔다. 나처럼 걷고 나처럼 손짓하고 나처럼 말하는 많은 아이들을 만났다. 이름있는 학교의 대학생이라니 그곳 후배들은 나를 선망의 눈빛으로 바라보아 주었지만 나는 설명할 수 없는 슬픔을 삼켰다. 주말마다 경기도 광주 그 학교로 봉사 가겠다던 동아리 친구들은 신촌로터리에 돌아오면 마을버스조차도 잘 오지 않은 경기도 광주의 그 아이들에 대해서 안줏거리로라도 말하는 법은 없었다.  왜 그 학생들은 버스조차 잘 이용할 수 없어 외출조차 못 하는지 분노하는 대학생은 거의 없었다. 아니 내 동기 중에는 딱 한 명 있었다. 학술부에서 활동하면서 ‘시대의 어둠을 넘어 실천하는 인간사랑’ 동아리의 목표 규칙 학기마다 표지로 실었지만, 그 딱 한 명의 동기가 지면을 빌어 에둘러 대학생들의 맥주잔을 깨자고 비판을 했지만, 그들은 또 술에 취해 주말에 늦잠을 잤다.  여전히 대강당에 내가 잡을 만한 손잡이는 생기지 않았고 4층짜리 학생회관에 승강기는 만들지 않았다. 광주에 그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이 여기 대학교에 와서도 안전하고 독립적으로 자유롭게 멋지게 동아리방들을 돌아다닐 수는 없을 것 같았다.  학생회관 3층 총여학생회 맞은편에 자리 잡았던 동아리는 다른 곳보다 훨씬 넓었다. 낡고 오래된 갈색 소파에서 여름방학을 보냈다. 새내기 학부생은 국제학사에 방학기간 동안 더 이상 머무를 수 없었다. 외국인 유학생을 위한 국제학사에 들어 가는 것을 도와주었던 91학번 선배와 함께 처음으로 학교 정문 밖에서 함께 하숙집에 들어가고 싶었으나, 가파른 철제 계단 옆 싼 가격의 집들은 모두 나의 부상을 걱정하게 했다고 선배는 귀띔해 주었다. 그렇게 나는 1학년 여름방학을 한 달 넘게 동아리방을 자취방 삼아 먹고 잤다. 학생회관 화장실에서의 샤워는 정말 차가웠지만, 창문도 없는 동아리방의 여름밤은 정말 꾸덕꾸덕 진저리나게 더웠다.  더위를 정 참기 어려우면 학생회관에서 세브란스 병원 넘어가는 길에 걸려 있는 큰 종 밑의 화강석에 누워서 잤다. 화강석은 해가 떨어지면 열기가 주변보다 빨리 식기 시작해서 새벽에는 한기가 들 만큼 차가웠다. 병원에 인턴 의사들이 출근하기 시작하면 일어났다. 더위를 피할 수 있다면 수십 마리의 모기라도 내버려 둘만 했다.  동아리 방에서 처음으로 농활도 출발했고 농촌 아이들의 울음을 뒤로하고 일주일 뒤에 다시 동아리 방으로 돌아왔다. 열흘 넘게 몸을 씻지 못하면 강남에 사는 선배가 집에서 욕실을 사용하게도 해주었다. 1990년 MBC 드라마 ‘우리들의 천국’ 한 장면을 구현해 버렸다. 그러나 농촌 현실을 체험하면서 우루과이라운드를 반대하는 나의 대학의 친구들은 나와 함께 대학에 들어온 21명의 특수교육대상자의 학교생활은 체험해 주지 않았다. 백 년이 넘었다고 기념 우표도 발행하고 당시에 우리나라 최초의 지체 장애인 특수학교를 열었던 대학에서 휠체어가 접근 가능한 화장실은 정문과 학생회관 사이에 있는 백주년 기념관에 딱 하나 있었다. 친구들은 당연하게 오줌통을 들고 다녔다.  신촌에서 대학 정문까지 휘젓고 올라오면 축축한 잔디밭 말고는 마땅히 쉴 곳이 없었다. 그래도 어떻게든 백주년 기념관 앞까지 오면 백양로 길가까지 삐죽이 나온 하얀 계단석에 편히 앉을 수 있었다. 그래도 우리 학교의 유일한 장애인 화장실은 뒤풀이가 끝난 동아리 가는 길에는 사용할 수 없었다. 기념관 운영 시간에 따라 늘 문이 잠겼기 때문이다. 학생들을 위한 건물 투자에 필요한 기성회비를 다 내었지만, 우리가 들어갈 수 있는 도서관도, 강의실도, 연구실도 거의 없었다. 등록금을 낼 것을 다 내고 입학했지만, 우리가 읽고 쓰고 싸는 것에 쓰이지 않았다. 누구는 우리를 보고 소수를 위한 과잉 투자라고 비아냥거렸지만, 그 누구는 우리들의 기성회비와 등록금으로 ‘무임승차’ 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일어나는 차별과 어려움의 고달픔보다 입학을 ‘허가’해 주었으니 마냥 고마워하라는 것이 더 서글펐다.  어느 날 사회학과 대학원생 서동진 씨가 연세대 학보인 ‘연세춘추’에 ‘게이ㆍ레즈비언 회원을 모집한다’는 글과 함께 자신의 삐삐번호를 공개했다. 한 달도 안 되어서 대학 최초의 성소수자 모임 ‘컴투게더’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중앙도서관 앞에 천막 동아리방이 열렸다. 대학 오기 전까지 동성애가 무엇인지 성소수자가 누구인지 몰랐고 게이나 레즈비언이란 단어도 처음 들었지만 솔직히 부러웠다. 그 분들을 향한 욕설과 혐오조차 부러웠다. 하루가 멀다하고 그들을 향한 기사들이 학교 안팎에서 쏟아졌다. 하루는 그 천막에 가서 여쭤보았다.  “저희도 우리의 인권과 문제를 알리기 위해 농성하고 싶어요. 어찌하면 좋을까요?” 우리가 천막에 다다르기도 전에 우리 앞에 무리지어 앉았던 그들은 대답했다. “우리가 곧 철수하는데 다 남겨주고 가겠다. 천막 간판만 ‘동성애’에서 ‘장애인’으로 바꿔 달아주겠다.” 얼마되지 않아 그분들이 남겨 준 책상과 서명판을 가지고 학생회관 앞에서 서명 운동을 시작했다. 전동 휠체어를 탄 동기가 고무 타는 냄새가 날 정도로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붙잡고 다녔으나 바삐 가는 사람들을 쉬이 잡을 수는 없었다. 우리는 그렇게 사람 많은 중도까지 다 들리도록 소리만 빽빽 지르고 있었다. 갑자기 수십 명의 여성이 책상 앞으로 몰려들었다. 양쪽 손 가득히 김밥과 생수를 안겨주고는 서명지와 요구안을 들고 갔다. 한 두 시간 뒤에는 더 많은 여성이 몰려 왔는데 온몸에 요구안을 손으로 적은 긴 플랭 카드를 잔뜩 들고 와 우리 앞뒤 가로수에 잔뜩 걸어 주고는 서명지도 잔뜩 복사해서 서명을 받기 시작했다. 그 플랭 카드 아래에는 온통 총여학생회라고 적혀 있었다.  해가 지고 나서는 총여학생회에서 짐을 두고 정리하라고 초대받아 올라갔다. 어안이 벙벙해서 물어봤었다. “우리를 왜......?” 그중에 한 분이 조용히 이야기했다.  “너의 문제는 나의 문제, 너의 차별은 나의 차별, 우리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사진 출처 - 게르니카 페이스북  장애인 인권운동 동아리 ‘게르니카’는 그렇게 탄생했다.
2021-05-06 | hrights | 조회: 733 | 추천: 3
최유라/ 지구의 방랑자  목욕 후에 잔뜩 불어있는 손끝처럼 생긴 밥알이, 영롱한 아이보리 빛깔의 물 안에서 수중 여행 중이다. 그냥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침샘만 더욱 자극된다. 아는 맛이 무서운 법. 참다못해 한입에 털어 넣는다. “캬아~ 이 맛이지!” 차오르는 기쁨도 잠시, 언제 먹었냐는 듯 또 침샘이 작동한다. 고장 난 걸까?  자기소개만큼 괴로운 게 없다. 딱히 소개할 것도 없건만.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생각하다 그만 머리가 하얘진다. 나는 누구? 여긴 어디? 헤매고 있는 사이, 옆에서 이름, 나이, 사는 곳, 순서대로 나열하듯 돌아 돌아 이어진다.  ‘딱히 그대들의 나이도 사는 곳도 알고 싶지도 않은데 마치 그것이 공식인 양 저렇게 읊을까?’ 공식을 부수고 싶은 이상한 욕망이 피어올랐다가 주목받고 싶지 않아 나도 그들과 같은 공식 아래 동행을 결정한다.  “안녕하세요. 저는 최유라고 나이는…. 사는 곳은…….”  언제부터인가 자기소개가 부담스러워서 새로운 공간을 가지 않게 되기 시작했다. 자기소개하는 동안, 그 안에서 흐르는 공기를 견디기 힘들어서다. 어색하기도 어색한데 마치 AI들이 모여 자신의 신상을 이야기하는 느낌이랄까.  “입력된 명령 값을 아주 잘 수행하고 있군.”이라고 개발자가 흡족해할 것만 같은 상상을 해본다.  호주에서 5개월 정도 살면서 그곳에서 현지인들에게 비슷한 질문을 받은 경험이 있다.  “왜 한국인들은 처음 만날 때 나이, 사는 곳, 혈액형, 연애 여부, 결혼 여부 등등의 개인정보를 말해?”  이 질문들에 답을 하지는 못했다. 모르기 때문에.  관습 때문에? 교육 영향 때문에? 나를 설명할 때 외부 요인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러다 웃음이 터졌다. 마치 나는 그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처럼 거리를 두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게 하나의 관습으로 굳어진 것이라고 한다면 바꿀 수 있지 않을까? 사진 출처 - gettyImagesbank  고민 이후 나는 자기소개를 요청받을 때마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위주로 나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식혜의 매력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대게 회사에 커피 머신이 있잖아요. 저의 아주 작은 바람 중 하나는 식혜 머신이 회사에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할 정도인데요. 저에게는 그것이 최고의 복지인 거죠. 다들 식혜하면 떠올리는 이미지가 두 가지 정도 있을 텐데요. 비락식혜 혹은 찜질방 식혜. 식혜라고 모든 식혜를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저 나름의 기준이 있죠. 바로 생강 맛이 나지 않는 식혜. 비락식혜는 생강 맛이 진하게 나잖아요. 제 기준에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죠. 또 다른 기준은 바로 오동 통통한 밥알입니다. 식혜를 모조리 마시고 남은 달달한 밥알은 마치 월급 다 쓴 후 보너스를 챙겨 받는 느낌이랄까요. 이런 이유로 저는 비락식혜와 연이 없습니다. 그러면 찜질방 식혜라고 바로 생각하실 수 있는데요. 맞기도 하고 아니기도 합니다. 땀을 빼고 목이 타들어 갈 때야 식혜가 담긴 용기에 관심이 없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플라스틱 통에 담긴 식혜는 눈에도 들어오지 않습니다. 모름지기 식혜는 도자기 그릇에 담아 마셔야 그 맛이 삽니다. 이것은 저만의 과학으로 실제 과학과는 거리가 있을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이렇게 한잔, 두 잔 마시다 보면 끝도 없을 때가 있는데요. 그러다 이렇게 하루에 설탕을 많이 섭취해도 될까 하는 고민이 들죠. 식혜를 포기할 수 없었던 저는 바로 호박 식혜로 갈아탔습니다. 다들 호박즙이 부기 빼는 데 좋다는 건 아실 겁니다. 그 효능을 바로 연결해…. 쿨럭……. 물론 턱도 없음을 알지만 포기하지 못하는 그런 저랍니다. 감사합니다.”  이제 당신 차례입니다.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요?
2021-04-14 | hrights | 조회: 691 | 추천: 5
이동화/ 사단법인 아디 활동가  미얀마 ‘군(軍)의 날’이기도 한 지난 3월 27일, 미얀마 전역에서는 군부의 쿠데타를 반대하는 미얀마 사람들의 집회가 열렸고, 아디의 ‘미얀마평화도서관’이 위치한 메이크틸라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오전 7시 메이크틸라 시내 중심가에 모이기 시작한 주민들은 8시가 되자 약 600명까지 늘었고 사람들은 4그룹으로 나뉘어져 시위를 시작했다. 시위대는 “시민혁명은 승리하리라, 우리의 요구는 민주주의이다. 군부독재는 반드시 실패한다.”는 구호를 외치며 메이크틸라 시내를 누볐다.  비슷한 시간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군인들도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고 시위대로부터 약 300미터 떨어진 후미에서 시위대를 따라 움직였다. 오전 9시, 군인들은 첫 번째 그룹에 최루탄을 발사하며 진압을 시작했다. 진압에 쫓긴 첫 번째 그룹은 다른 그룹과 합류하여 군인들의 공격에 저항하였다. 그리고 10시경 미얀마 군인들은 시위대의 퇴로를 막은 채 최루탄과 실탄, 고무총탄을 발사하였다. 미얀마군의 발포로 인하여 시위대 중 일부는 부상을 당한 채 도로에 쓰러져 있었고 시위대는 그들을 챙기기 위해 돌을 던지며 격렬히 저항했다. 이미 사망한 듯 보이는 시신도 발견됐다. 시위에 참가한 현지 활동가는 그 모습을 보며 ‘지옥과 같았다’라고 이야기했다. 3월 27일 메이크틸라 시위 사진 사진 출처 - What's Happening in Meikhtila 페이스북  미얀마군의 살인진압이 있던 현장 도로 옆에 살고 있는 판이피유(Pan Ei Phyu)는 군인들이 도로에 몰려나오는 소리를 듣고 집안의 문을 닫으려는 순간 갑자기 쓰러졌다. 군인들이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적으로 쏜 총알이 대나무로 얼기설기로 엮은 집 담벼락을 뚫고 그녀의 가슴을 관통한 것이다. 가슴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로 물든 그녀를 부여잡고 어머니는 절규했다. 그녀의 나이는 14살이었다.  미얀마 군인들의 시위진압은 여러 뉴스를 통해 알려진 것과 같이 학살 그 자체였다. 시위해산 명령도 진압예고도 없다. 군인들은 시위대뿐만 아니라 주변의 민가도 개의치 않고 실탄과 고무총탄을 발포했다. 당일 메이크틸라에서 벌어진 시위진압으로 판이피유를 포함한 4명의 주민이 사망했고 6명의 시위대가 심각한 부상을 당했다. 주변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진압현장에서 빠져나온 부상자들은 치료를 위해 한시바삐 병원에 가야 했지만, 당시 부상자들이 갈 수 있는 병원은 없었다. 이미 군인들이 메이크틸라 주요병원을 점거하며 시위에 참가한 부상자를 색출하고 구금시켰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상자들이 향한 곳은 메이크틸라내 사원이었다. 스님들은 사원을 개방하여 부상자를 치료할 장소를 제공하였고, 의사들은 무료로 부상자들을 치료했다. 또한, 주민들이 십시일반 기부하여 음식과 치료 물품을 마련했다. 우리가 기억하는 5.18의 모습과 똑같다.  미얀마 군부의 쿠데타가 발생한지도 2달이 넘었다. 여전히 미얀마 최대도시인 양곤과 2번째 도시인 만달레이에서는 시위가 이어지고 있다. 3월 27일 이후 메이크틸라에서도 여전히 수십명의 사람들이 그룹을 지어 매일 시위를 이어가고 있다. 이전과 달라진 것은 군인의 진압을 피하기 위해 오토바이를 타며 빠르게 이동하며 시위한다는 점이다. 시위를 중단시키기 위해 군부 쿠데타 세력은 시위참가자들에게 “머리와 등에 총을 맞을 위험에 처할 수도 있다”고 국영방송을 통해 협박하고 있다.  상황이 이러한데도 미얀마 사람들은 절망하지 않는다. 아디의 메이크틸라 현지 활동가들은 “우리는 민주주의에서 살거나 이를 위해서 죽을 각오를 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가 경험했던 이 고통스러운 현실을 우리 아이들에게 넘겨주지 않겠다”라고 이야기했다. 그러면서 “한국 사람들이 보여준 지지에 정말 감사한 마음이다. 한국 사람들이 미얀마 연방의회 대표위원회(CRPH)를 지지하면 좋겠다”라고 전했다. 그들은 쿠데타 발생 이후 은행 업무 중단으로 2달 넘게 급여를 받지 못하고 있지만, 여전히 활기차게 ‘미얀마평화도서관’문을 열며 책을 읽으러 오는 아이들에게 평화교육을 준비하고 있다.
2021-04-07 | hrights | 조회: 613 | 추천: 7
이회림/ 00경찰서  여러분은 ‘학교폭력’ 하면 무엇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가요?  저는 제일 먼저 어느 엘리베이터 안이 떠오릅니다. 한 남자아이가 주저앉아 눈물을 훔치고 있는 모습이 보이네요. 아이의 막막한 뒷모습은 엘리베이터의 스테인리스 표면에도 흐릿하게 비칩니다. 문득 떠올리면 곧바로 눈물이 왈칵 차오르는 그런 슬픈 이미지들이 몇 개 있는데요, 이 아이의 마지막 모습도 그중의 하나입니다. 예전 기사를 검색해서 찾아보다가 아이가 가족들에게 남긴 유서를 읽으면서 가슴이 턱 막혀 왔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부탁인데 저희 집 도어키 번호 좀 바꿔주세요. 몇몇 애들이 알고 있어서 제가 없을 때도 문 열고 들어올지도 몰라요. 죄송해요, 엄마 사랑해요. 먼저 가서 100년이든 1000년이든 기다리고 있을게요. “  2011년 12월, ‘대구 중학생 자살 사건’으로 불리게 된 이 아이의 마지막 모습은 국민적 공분을 불러일으켰습니다. 2011년 12월 대전 여고생, 같은 달 대구 중학생, 2012년 1월 광주 중학생 그리고 대전 여고생의 같은 반 친구 등 비슷한 시기에 4명의 아이가 학교폭력으로 인해 가족의 곁을 떠나버렸습니다. 이로 인해 범정부 차원에서 학교폭력 TF가 꾸려졌고 2012년 2월에는 학교폭력예방법이 개정되었습니다. 이후 학교폭력이 발생하면 학교폭력위원회를 열어 가해자를 처벌하게 되었고 각 학교를 담당하는 학교전담 경찰관이 배치되었습니다. 사진 출처 - adobe stock  미디어도 힘을 보탰습니다. SBS는 제작 기간만 10개월이 소요된 ‘학교의 눈물’이라는 3부작 다큐멘터리를 방영함으로써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며 전국민적 관심과 공감을 이끌어내었고 고교를 졸업한 지 얼마 안 되었거나 아직은 고등학생이던 그룹 방탄소년단은 동명의 노래(‘학교의 눈물’ 2013. 1. 20. ‘BTS 믹스테이프)를 조용히 발표하기도 하였습니다.  다큐멘터리 ‘학교의 눈물’ 은 이렇게 흘러갑니다.  1부 ‘일진과 빵셔틀’은 잔인한 폭력이 게임처럼 펼쳐지고 있는 병든 교실로 시청자를 안내하면서 우리 어른들이 아이들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살펴보고 그 해결책으로 ‘소나기 학교’를 제시해 줍니다.  2부 ‘소나기학교’ 에서는 학교폭력의 힘든 경험이 비옥한 땅을 만드는 소나기처럼 그저 지나가는 일로 남을 수 있도록 돕겠다는 의미로 만든 8박 9일 임시 학교를 보여줍니다. 소백산 자락의 폐교를 리모델링한 이 ‘소나기학교’에서 학교폭력 가해, 피해 경험을 용감하게 고백한 14명의 아이들을 대상으로 상담과 치료가 이루어집니다.  마지막 3부 ‘질풍노도를 넘어’ 에서는 학교폭력이 모든 사회 구성원이 힘을 모아 해결해야 하는 문제임을 시사하면서 전문가 인터뷰와 해외의 학교폭력 사례들 그리고 학교폭력 가해율이 가장 낮은 나라 ‘스웨덴’을 소개합니다.  다큐에 나온 스웨덴의 다양한 노력 중에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무엇보다 ‘학교법을’ 개정하고 ‘학생권리보호위원회’를 신설한 것이었습니다. <스웨덴 학교법 제6장 학교폭력에 관한 조치 제9조 ~ 12조> 제9조 “책임 당국 또는 직원은 학생을 굴욕적인 대우에 노출시켜선 안된다” 제10조 “피해자가(학생) 수치심만 느껴도 학교폭력 조사가 시작되고 그것을 입증할 책임은 학교에 있다” 제12조 “피해가 입증될 경우 폭력의 가해자보다 그것을 막지 못한 학교가 더 무거운 책임을 지게 된다”  이 제도가 2006년 스웨덴 사회에 도입됨으로써 학생권리보호위원회 위원장은 피해자를 대신하여 학교에 손해배상청구(최소 80만~최고 3500만 원까지 배상)를 진행할 수 있게 되었고 이로 인해 실질적인 학교폭력 문제 개선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학교법을 엄격하게 제정해 놓고 학교에 학교폭력에 대한 의무를 지워 놓으니 학교가 파산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학교폭력 예방에 온 힘을 쏟아야 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해 보입니다.  가해 학생들은 아이들을 괴롭힐 때 말할 수 없는 희열을 느꼈다고 말하고 또 어떤 학생은 폭력을 당하지 않기 위해 시키는 대로 나약한 장애아동을 괴롭혔다고 합니다. 반면에 피해 학생들은 학교를 가리켜 오로지 ‘눈물’이었다고 고백했습니다.  2012년 ‘학교의 눈물’로부터 10여 년이 흐르고 있는 지금, 아이들의 눈물은 얼마나 줄었을까요? 아마도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2012년과 2020년 학교폭력실태 조사 결과를 통해 어림짐작할 수 있을 듯합니다.  먼저 2012년, 2020년 학교폭력실태 조사 개요를 살펴보겠습니다.  ■2012년 제1차 학교폭력실태 조사 결과 / 2012년 4월 20일 교과부(장관 이주호) 발표■  -조사 기간 : 2012. 1. 18 ~ 2. 20  -조사 대상 : 558만 명(초등학교 4학년~고등학교 3학년 전체 학생)  -조사 방법 : 우편을 통한 설문지의 발송·회송  -조사 참여율 : 139만 명(558만 명 중 25% 참여율)  ■2020년 학교폭력실태조사 결과 / 2020년 1월 20일 교육부(장관 유은혜) 발표■  -조사 기간 : 2020. 9. 14.~10 .23.(6주)  -조사 대상 : 초4~고2 재학생 전체(약 357만 명)  -조사 방법 : 온라인 조사(코로나19 상황에서 학생들의 자발적 참여를 원칙으로 조사 진행)  -조사 참여율 : 295만 명(357만 명 중 82.6% 참여율)  ‘12년 제1차 학교폭력실태 조사 결과는, 학교폭력 피해 응답률 12.3%로, 전체 응답자 139만 명 중 17만 명의 학생이 피해 경험에 대해 응답하였고 초등학교(15.2%) 중학교(13.4%) 고등학교(5.7%) 순으로 나타났습니다. 피해 유형별로는 협박이나 욕설, 언어폭력(51.2%), 집단 따돌림(13.3%)이 전체 응답 유형 가운데 64.5%를 차지하였습니다.  ’20년에는 ’19년 1차 조사 대비 학생 1,000명당 피해 응답률 0.9%로 감소세를 보였고 피해 유형별로는 언어폭력(33.6%), 집단따돌림(26.0%), 사이버폭력(12.3%) 순으로 나타났습니다. 2019년 1차 조사와 비교하여 다른 피해 유형의 비중이 감소한 것과 달리 사이버폭력(3.4%), 집단 따돌림(2.8%)의 비중은 증가하였고, 집단따돌림은 초> 중> 고 순으로, 언어폭력은 초등학교에서, 사이버폭력은 중학교에서 비중이 가장 높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20년 2월 이후부터 우리나라에 코로나19 확진자 수가 급격히 늘어나면서 비대면 수업으로 전환 되는 등 교육환경에 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아이들이 학교에 가지 않으니 학교폭력만큼은 크게 감소하는 장점이 있을 것이라는 어른들의 예측이 있었습니다만, 학교폭력 지표상으로는, ‘19년 대비 소폭 증가하였다고 합니다.(*언어폭력 33.6%, 집단따돌림 26%, 사이버폭력 12.3% 순) 특히 피해 학생의 메신저 계정을 빼앗아 도박 사이트에 팔아넘기거나, 나체 영상에 피해 학생의 얼굴을 합성한 딥페이크 영상을 만들어 SNS에 유포한다고 협박하는 등 사이버 폭력의 비율이 12.3%로 집계되어 ‘18년 8.7%, ‘19년 8.9%에 비해 현저한 증가세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2012년 이후 10여 년 그리고 2020년 코로나19 사태를 겪으면서 여전히 학교폭력이 증가 추세에 있다는 것은 변하지 않았고, 변화한 것은 학교폭력의 양상이 ‘사이버폭력’으로 확대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변화에 맞추어 경찰청은 ‘21년 학교폭력 근절 및 위기청소년 보호 종합 대책(2021년 3월)’을 수립하였고 맞춤형 범죄예방교육의 활성화, 온라인 신고 채널 적극 활용, 청소년 참여 정책자문단 확대 실시 등 학생 참여 중심 학교폭력 예방 활동 등을 대책으로 내놓았습니다.  그런데 학교 현장에서 학생들을 만나 면담을 해 보면 일진으로 불리는 집단이나, 단체 톡방 등 메신저상에서 욕설과 협박을 일삼는 아이들 그리고 장애인 학생을 겨냥한 이유 없는 폭언 등이 끊이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통계에서도 드러나듯이 카톡 계정, 페북 계정 등을 갈취해 어른들에게 팔거나 돈을 뜯어내기 위한 목적으로 딥페이크 영상을 만들어 협박하는 식으로 신종 사이버 범죄 피해 또한 학생들 사이에서는 더 이상 새로운 일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연이은 아이들의 희생으로 인해 학교폭력예방법개정, 학교전담경찰관 창설, 117학교폭력 신고상담전화 통합 등 2012년에는 어른들이 아이들을 눈물을 닦아주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지만, 그 후 10년, 그리고 코로나19 상황에서는 우리 학생들에 대한 관심이 점점 줄어들었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런 현실 속에서 피해 학생들이 학교를 자퇴하고 ‘학교 밖 청소년’의 길로 가는 사례가 늘고 있는 것을 보면 결국 아이들의 눈물을 줄이는 데에는 성공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용돈벌이 하느라 카톡 계정을 팔아버려 카톡이 없다는 아이들이 주변에 심심찮게 보입니다. 아이들의 계정을 사서 도박, 마약 거래 등의 범죄에 악용하는 이들은 모두 어른들이고 이를 막지 못하고 있는 것도 어른들입니다.  2011년 슬픈 그날들처럼 아이들이 연이어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 전에 우리 어른들이, 사회가 다시 총력을 기울였으면 좋겠습니다. 예상치 못한 새로운 범죄가 생겨나서 아이들의 영혼을 어지럽히고 더 위험한 상황에 던져 놓기 전에 말입니다.
2021-03-31 | hrights | 조회: 739 | 추천: 8
김아현/ 인권연대 간사  버스가 출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차 안의 조명이 꺼졌다. 동이 트려면 두어 시간 남은 새벽이었다. 설핏 든 잠을 깨운 것은 뒷자리에서 들려오는 기계음성이었다.  “박**님, 시월. **일, 잔액은 삼천. 이백. 팔십. 원. 입니다.”  자리에 앉기 전 보아둔 덕에, 뒷자리에 누가 앉았는지 알고 있었다. 집에서 준비해온 작업용 앞치마를 두르고 머리를 단단히 동여 묶은, 오십 대 중후반 정도로 보이는 아주머니였다. 물건을 포장하는 손이 무척 잽싸고 일이 능숙해 보였기 때문에 그를 기억하고 있었다. 아마 모바일 뱅킹을 다루는 일이 익숙지 않아 폰뱅킹을 하는 것 같았다. 적당한 소음, 흔들리는 어둠과 피곤 속에 거의 모두가 곯아떨어졌을 무렵, 그 기계음은 이상하리만치 선명했고 나는 그 이후 다시는 쿠팡 셔틀버스를 타지 않았다.  몇 해 전 그 무렵 나는 어떤 분야의 창작을 하고 싶었는데, 집회 및 시위, 잡다한 사무, 여행 같은 것 말고 삶의 경험이 많지 않다는 사실은 큰 걸림돌이었다. 선생님은 고군분투와 갈등 같은 상황을 만들어보거나, 독특한 소재가 없으면 묘사를 잘 해볼 것, 사물과 사건을 바라보는 시선을 달리해 볼 것을 주문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집회나 시위, 잡다한 사무, 여행 같은 내 경험치 안에서는 매력적인 이야기가 나올 것 같지 않았다. 쿠팡 물류센터 알바는 그래서 시도해본 여러 가지 일 중에 한가지였다.  쿠팡 물류센터에 ‘문자로’ 지원을 하고, ‘문자로’ 합격(?)통지를 받고, 출근 셔틀버스 탑승지 안내를 받았다. 나는 야간조에 지원했는데, 오후 6시부터 일을 시작하려면 4시에 출발하는 셔틀버스에 올라야 했다. 대부분의 물류센터가 경기도 외곽에 있기 때문이었다. 출근 셔틀버스를 타기 위해 오후 3시쯤 집을 나섰다. 버스가 도착하기도 전에 미리 와서 줄을 서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휴대폰을 들여다보는 척 하며 곁눈으로 줄 선 사람들을 살폈다. 나이키 트레이닝복 세트를 갖춰입은 젊은 커플부터 왠지 표정이 어두워 보이는 아저씨, 느즈막히 나타나 줄 선 사람들 일부와 인사를 나누는 아주머니, 그야말로 남녀노소가 거기에 다 있었다.  내가 하게 된 일은 개인별로 지급된 PDA를 보며 화면에 뜨는 선반의 위치를 찾아 물건을 카트에 싣고 포장대 앞으로 옮기는 일이었다. 어렵지 않아 초보자도 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팔다리의 근력을 쓰는 일에 특히 무능한 자에게 진짜 장벽은 따로 있었다. 비인간적으로 광활한 물류센터의 규모나, 물건이 담긴 박스의 무게 같은 것은 실재하는 장벽이었다. 일이 끝나는 새벽 4시까지 쉴새없이 움직여야 했고 일을 시작하고 세 시간이 지나기도 전에 종아리와 발바닥, 어깨가 조용히 울기 시작했다. 사람의 키가 닿지 않는 높이의 선반에서 물건을 픽업하는 지게차들이 온전히 걸음에 의존해 물건을 나르는 사람들 사이를 분주히 오가고, 사람과 지게차가 부딪히지 않도록 여기저기서 경고음이 울려대는 혼돈 속에서 그날의 목표는 오직 새벽 4시까지 버티는 것 뿐이었다.  한 시간의 식사시간이 주어졌다. 하지만 작업장이 있는 층에서 식당까지 오가는 데 식사시간의 대부분이 소요됐다. 물류센터는 층고가 높아 한 개 층이 일반적인 건물 2~3층 높이에 달했다. 3층에 있는 식당에 가려면 엘리베이터를 이용하거나 계단을 올라야 했는데 아무리 봐도 스무 명을 채 감당하지 못하는 엘리베이터에 올라타기란 로또 당첨과 다름없었고, 계단을 꾸역꾸역 오르고 나면 이번에는 허벅지 근육이 오열하고 있었다. 십 분이 안 되는 시간 안에 밥을 우겨넣고 급히 내려와야 자판기 커피라도 한 잔 마실 여유가 생겼다. 같이 일하는 사람들을 관찰하거나 대화를 나누려던 애초의 계획은 잊어버린지 오래였다. 출퇴근용 셔틀버스를 타지 않으면 도중에 집으로 돌아갈 수도 없었으니 그야말로 광활한 노역장 같았다.  그곳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눈 사람들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주말을 이용해 세 번 정도 그곳에 갔고, 창작의 소재로 쓰려면 쓸 수도 있을 것 같은 다양한 상황에 놓인 사람들과 잠시 친해져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지게차를 운전하는 한 청년은 한눈에 보기에 흑인이었는데 주로 신라의 후손들이 많이 사는 지역 사투리가 유창해 나의 편견을 돌아보게도 만들었고, 피팅모델을 겸하며 옷가게를 하다 가게를 접고 잠깐씩 나온다는 젊은 여성은 중간중간 몰래 쉬는 팁을 알려주기도 했다. 택배일을 하다 왔다는 한 무리의 남성들은 택배사별 노동환경이나 처우의 차이 같은 것들에 대해 썰을 풀어놓기도, 이 일을 하며 얻은 것과 잃은 것에 대해 읊기도 했다.  뒷자리 아주머니의 박한 은행잔고를 기계음으로 들은 것은 쿠팡 물류센터에 세 번째 출근했던 일요일 새벽이었다. 서울에 도착하기까지 좀처럼 깊은 잠을 잘 수 없었다. 집에 도착하니 이미 동이 튼 지 오래였다. 겨우 몸을 씻고 자리에 누워서도 잠이 오지 않았다. 밤낮이 바뀌었기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다.  식사시간 한 시간을 제외하고 여덟 시간을 일하기 위해 들여야 하는 시간, 그러니까 서울과 경기를 오가는 시간이라든가 셔틀버스가 기다리는 곳까지 오가는 데 드는 시간을 고려하면 온전히 하루를 통으로 바친 셈인데도, 돌아오는 노동의 대가는 정확하게 여덟 시간 어치의 법정 최저임금뿐이었다. 체력적으로도 수월한 일은 결코 아니었다. 그럼에도 남녀노소가 그곳으로 모여드는 이유는 간단했다. 임금이 다음날 또는 당일에 바로 입금되기 때문이었다. 친구나 애인과 재미 삼아 함께 오는 경우도 있었지만, 당장 돈이 급한 사람들, 차별과 편견 혹은 경쟁이라는 장벽이 엄연히 존재하는 노동시장에서 잠시 밀려났거나 진입을 거부한 사람들의 절박한 형편들이 거기에 존재했다.  더 이상 그곳에 가지 않기로 한 것은, 누군가의 삶을 알량한 창작의 소재로 삼아보겠다는 구상을 몹시 부끄러워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매일같이 고된 일을 하면서도 어느 시점의 잔고가 삼천 이백 팔십 원인 분의 삶을 훔쳐다 쓸 생각은 처음부터 감히 하지도 말았어야 했다. 사진 출처 - 고용노동부  유난히 자주 거론되는 그곳의 산재사고 소식을 들을 때마다, 사방에서 울려대던 지게차 경고음을 떠올렸다. 법의 지도를 아슬하게 피해갈 정도의 임금만 받으며, 에어팟 케이스나 고양이 화장실, 차량용 방향제 같은 물건의 새벽배송을 책임지기 위해 분주히 움직일 사람들과 지게차들이 그려졌다. 숫자로만 호명되던 이들 속에 행여나 나와 눈을 맞추고 짧은 대화를 나누고 자판기 커피를 뽑아주었던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되기 시작하면 몇 분 정도는 일에 집중을 하기 어려웠다.  쿠팡이 뉴욕증시에 상장되고 시가총액이 단숨에 삼성전자와 SK 하이닉스의 뒤를 이었다던 날, ‘축포를 쏘아올렸다’는 대동소이한 기사들을 눈으로 훑으며 다시 한 사람을 떠올렸다. 한국 유니콘 기업의 전망을 두고 설렘과 우려가 떠들썩하게 오가는 와중에 다만 한 사람만을 떠올렸다. 업계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적자와 출혈을 감수하고 파이를 키워 끝내 대기업의 반열에 올라타는 쿠팡에서, 회계상 적자 말고 진짜 피를 흘리거나 목숨을 잃어간 사람들도 떠올렸다. 일을 마치고 돌아가는 버스 안의 무겁고 소란한 정적 안에서도 귓가를 때렸던 그때의 고단한 삶은 지금 어디쯤 놓여있을까 몹시 궁금하다. 광활한 물류센터 안을 분주히 오가는 사람들 지게차들 사이로, 작지만 환한 축포 한 번이 터질지 궁금하다.
2021-03-17 | hrights | 조회: 895 | 추천: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