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에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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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에가시’는 현장을 살아가는 활동가들의 목소리를 담기 위한 칼럼 공간입니다.

‘목에가시’는 김성은(서울신문 기자), 김태형(프리랜서 방송작가), 김형수(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 총장), 박용석(출판업), 신종환(공무원), 윤요왕(춘천별빛사회적협동조합 이사장), 이동화(아디 사무국장), 이승은(경찰관), 이원영(용산시민연대 공동대표), 정한별(사회복지사)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이동화/ 사단법인 아디 활동가  팔레스타인 나블루스 부린마을에 거주하는 수하(가명)는 자신의 첫 번째 아이가 자폐성 장애를 지녔음을 알았을 때부터 슬퍼하고만 있을 순 없었다. 그녀는 그동안 마을에서 자폐성 아이의 존재를 쉬쉬하고 외부에 드러내지 않았던 관행을 거부했다. 자신의 아이도 다른 비장애 아이들처럼 교육을 받길 원했기에 아이의 입학을 위해 더욱 뛰어 다녔다. 어렵게 입학의 기회를 얻어 아이를 초등학교에 보냈지만 아이는 등교 1주일 만에 학교에서 내쳐졌다. 수하는 분노하고 절망했다. 하지만 이내 자신의 사연을 온라인에 알리고 마을 내 장애아동의 부모들을 모아 작은 조직을 만들면서 여성 활동가가 되었다.  100년의 역사를 지닌 명문 ‘안 나자’ 대학에서 영어를 전공하며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마리엠(가명) 역시 졸업과 동시에 엄혹한 현실을 마주하게 됐다. 일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너무도 적었고 남편 역시 마리엠이 외부에서 일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남편의 폭언과 폭행으로 이혼하였지만, 2살짜리 딸과 노모를 책임져야 했던 그녀는 제리코에 위치한 작은 공장에서 간신히 일자리를 구했다. 하지만 도시마다 설치된 이스라엘의 검문소와 일상적 통제정책으로 매일 새벽 4시에 집을 나섰고 밤 10시가 되어서야 돌아왔다. 이스라엘의 봉쇄정책으로 공장마저 문을 닫자 지금은 난민캠프에서 아이들의 사연을 번역해 외국에 알리는 업무를 하며 캠프내 작은 조직에서 자원봉사를 하고 있다.  수년 동안 팔레스타인 현지를 방문하며 지역에 필요한 연대활동을 조사한 아디는 2019년 본격적으로 팔레스타인 나블루스와 라말라의 여성단체와 여성 활동가들을 만나며 현지수요조사를 수행했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수하와 마리엠의 사연들과 같은 다양한 이야기를 접할 수 있었다. 조사과정을 통해 아디는 그들의 ‘피해자성’을 확인하기보다는 ‘저항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감히 이야기하건데 그들은 금전적으로 도움을 요청하기보다는 본인들 스스로가 외부의 지원을 주도적으로 활용할 수 있기를 바랐다. 가부장적 문화가 주는 여성폭력적 억압과 이스라엘 식민 점령정책이라는 이중고 속에서도, 그들 스스로의 자립과 팔레스타인의 독립을 향한 희망과 의지를 계속 피력했다. 2019.9.2. 명예살인으로 희생된 팔레스타인 여성 이스라 가라에브를 추모하며 여성보호법률을 요구하면 시위하는 팔레스타인 여성들 사진 출처 - AP Photo/Nasser Nasser  한국사회뿐만 아니라 국제사회에서 팔레스타인 여성의 존재는 제대로 알려지지 않거나 종교적 이미지가 강하게 투영된 하나의 집단화된 존재로 인식된다. 한 번도 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진 않았지만 누구나 이슬람여성의 억압을 이야기하곤 한다. 그녀들은 이스라엘의 점령정책때문에 병원에 가지도 못한 채 앰블란스에서 아이를 사산하는 일상을 겪으면서도 가족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미명하에 온갖 폭력에 노출된 중층의 억압적 구조 속에 놓여 있다. 무엇보다 그 상황을 뚫고 나오는 여성들의 목소리조차 지리적 거리와 사회문화적 편견 때문에 오롯이 전달되지 못하고 있다.  아디는 1년 동안의 현지조사를 통해 그녀들의 목소리에 주목했다. 그리고 2020년부터 바보의나눔이라는 민간재단의 지원을 받아 팔레스타인에 여성지원센터 사업을 시작한다. 이 사업은 팔레스타인 여성이 겪는 점령 폭력(ORV, Occupation related violence)과 젠더 폭력(GBV, Gender based violence)에 대항하고 피해생존자를 지원하는 현지자원을 개발함을 목적으로 한다, 또한 앞서 언급한 수많은 수하와 마리엠과 같은 여성 활동가들에게 자립을 가능케 하는 다양한 교육과 실습프로그램을 제공하고자 한다. 나아가 여성 활동가들의 성장을 통해 그 지역사회가 직면한 다양한 문제를 해결하는 토대를 만드는 것이 사업의 목표이다.  현지 활동가들과 사업을 논의하면서 한 현지 여성 활동가가 갑자기 나에게 질문을 했다. “왜 팔레스타인이에요?” 순간 머릿속 여러 생각들이 스치며 어리버리 대답했지만 여전히 많은 분들이 아디에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다. 아마도 이 사업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될지 더 많은 질문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될지는 아직 장담할 순 없다.
2020-02-19 | hrights | 조회: 1022 | 추천: 5
김아현/ 인권연대 간사  고등학교 이학년의 봄을 기억하는 것은 수학여행 때문이었다. 3박 4일, 아니 어쩌면 4박 5일이었을 그 여행의 다른 기억은 왠지 모조리 지워졌다. 단체로 찍은 기념사진을 보아야만 저런 곳에 갔었구나 하고 가물가물한 기억을 붙들 지경이다. 다만, 한 대학교를 찾아갔던 일만은 비교적 또렷하다. 정확하게는, 그 학교 교문을 나서면서부터 꽤 오랫동안 매달려있던 어느 궁금증 때문이었다.  그 학교는 누군가가 ‘2호선 대학’이라고 이름 지은 학교들 가운데 하나인 명문 여자대학교였다. 한 반에 사십 몇 명씩 모두 여덟 개 반이던 우리는 근사한 건물의 꽤 넓은 강당으로 안내되었다. 학생회 간부들 몇이 무대로 나와 학교를 소개했다. 주로 마이크를 잡았던 사람이 어느 단과대 회장이었는지 총학생회장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지금 생각하면, 일면식도 없고 사는 지역도 다른 고등학생들의 수학여행에까지 일부러 시간을 내어주는 대학생이라니 요즘도 그런 따순 광경이 남아있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멀리, 한반도 ‘부속도서’에서 찾아온 ‘여고’생이라는 특수한 계급이 만들어 준 비상한 관대함인지도 몰랐다. 전교에서 1등을 하고 모의고사에서 전국 상위권에 들어도 ‘딸이기 때문에’ 섬에 남아 학비가 저렴한 지방국립대나 교대를 가야하는 경우가 왕왕 있던 시절이었다. 어쨌거나 우리를 환대해 준 그 언니들은 여러분이 후배가 되면 좋겠다며, 여대에 진학해야 할 이유를 몇 가지 꼽았다.  내가 꽤 오랜 시간동안 답을 찾기 위해 몰두했던 궁금증은, 그때 마이크를 잡고 있던 언니의 말에서 시작됐다.  “여대에 오세요. 여기선 여자가 과대표도 할 수 있고 단과대 회장도, 총학생회장도 할 수 있어요.”  한참동안이나 붙들고 있다가, 얼추,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불러도 되지 않을까 조심스레 생각하게 될 즈음-그날로부터 이십여 년이 흐른 몇 년 전에야- 왜 저 말에 ‘버튼이 눌렸는지’, 그리고 저 말이 얼마나 적절했는지 알았다. 너무 맞아서 외려 슬픈 말이었다. 하지만 당시 나는, 부끄럽게도, 명예남성에 가까웠다. ‘여대에 오면 과대표며 회장이며 여자가 하는 게 당연하지, 당연한 이야기를 왜 저렇게 당당하고 진지하게 하지’ 따위의 생각을 했다. 우리나라 최고 명문 여대라는 곳의 수준을 의심했다. 아무 생각이 없으면 오만해지기 쉬운데 멀리서 그 예를 찾을 것도 없었다.  여러 이유로 그 언니들의 후배가 되지는 못했지만, 거기에 갈 일은 종종 생겼다. 주로 맛있는 커피를 마시고 싶어서, 예쁘고 저렴한 옷을 사기 위해서, 또는 약속이 있어서, 하는 이유들이었다. 어느 날, 그 학교에 다니는 친구를 기다리며 학내에 들어갔다가 다시 한 번 고개를 갸웃거릴 일이 생겼다. 교내 곳곳에 붙어있던 반전 포스터와 대자보들 앞에서였다.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벌어진 미군의 폭격을 비난하거나, 유고슬라비아와 콩고, 체첸 같은 나라들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전쟁들에 반대하는 내용이었다. 대자보 너머의 그들은 전시에 발생하는 여성에 대한 모든 종류의 폭력에 반대하면서,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성이 가장 큰 피해자가 되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피해자들의 끔찍한 모습을 아무런 안전장치 없이 드러내는 사진들 앞에서 꽤 오래 얼어붙었다. 그리고 ‘저런 당연한 소리를 진지하게 하다니’와는 비교할 수 없는 복잡하고 무거운 궁금증에 다시 붙들리기 시작했다. 우선은 먼 나라의 일에까지 관심을 두고 투쟁하듯 목소리를 내는 언니들의 지적수준이 부러웠고, 한편으론 저 포스터를 만든 사람은 아주 여러 번 끔찍한 사진을 보아야 했을 텐데 지금쯤 맨정신일까를 걱정했다. 그런데 전쟁이 벌어지는 곳에서 죽어나가는 어린 아이와 노인과 남자 청년과 여자는 목숨의 무게가 다를까, 왜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이유로 여자만이 등장하지, 하는 데 생각이 미쳤다. 그리고 그 운동, 페미니즘을 오해하기 시작했다.  이후 오랫동안 그때 그 언니들이 이야기해온 것들을 겪어내면서, 종종 그날들을 떠올렸다. 그들은 틀리지 않았다. 정확한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여대에 오면 과대표도, 단과대 회장도, 총학생회장도 할 수 있다는 말을 고깝게 붙들고 이십여 년을 지내보니, 자기 능력을 증명할 기회 얻기가 좀처럼 어려울 미래에 대한 경고가 읽혔다. 앞으로 살아갈 현실은 그럴테지만 그래도 함께 극복해보자는 행간도 읽혔다.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되는 오조 오억 가지 이유 가운데, 힘센 남자가 주도하는 세상은 절대 큰 소리로 말하지 않는 중요한 이유들에 집중하자는 전략도 읽혔다. 미 제국주의가 어쩌고 종교전쟁이 어쩌고 경제수탈이 어쩌고는 강자들이 많이 이야기하니,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는 현실에 주목해달라는 간절함일 수 있었다. 무엇보다, 내가 도통 이해할 수 없어 갸웃거리던 모든 순간에도 언니들의 목소리는 다정했고 정의로웠다. 강자와 폭력에 대한 분노 그 옆에, 약자에 대한 연민이 읽혔다. 그건 아무 생각이 없는 나 같은 자라도 그냥 알아지는, 뜨거운 마음이었다. 한동안 오해했으나 그 운동, 페미니즘은 그런 뜨거움과 냉철함 사이에 곧게 선 마음이었다. 사진 출처 - Flickr  여성으로 살고 싶었고 마침내 성별을 정정한 어떤 젊은이가 여대에 합격하고도 결국 등록을 포기했다는 소식을 듣고, 며칠간 아팠다. 좀처럼 화가 가라앉지 않았고 깊이 슬펐다. 걸음을 돌리고도 담담한 글로 앞날의 희망을 표현한 그이에게 미안했고, 미안하다고 말해주고도 싶었다. 이 사태와 관련 없어 보이는 오래전 기억을 주절거린 것은, 뜨거운 마음을 갖지 못한 이들에게 말을 건네고 싶어서다. 정확히는 따지고 싶어서다.  오래 괴로웠고 열심히 노력한 끝에 성별을 정정한 이를 여성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며 쫓아내고 환호하는 이들에게 묻고 싶다. 합당하지 않은 공포를 핑계로 약자를 몰아내고, 타자의 상처 앞에서 환호하고, 그에 대한 다른 유언비어(이미 명문대에 재학 중이라거나 여대에 대한 논란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전략적으로 입학을 시도했다는 등의)를 퍼뜨리고, 사건을 바라보며 함께 상처받고 미안해하는 다른 여성들을 향해 입에 담기도 어려운 언어로 모독하는 것이, 어째서, 옳다고 우기는가. 왜 당신들은, 혐오와 차별과 폭력에 감히, 페미니즘의 이름을 갖다 붙이는가.  질문은 더 이어진다. 여자대학이 존재해야 하는 이유를 뭐라고 생각하는가, 여성이란 무엇인가, 자궁을 떼어내거나 유방이 없거나 질을 절개한 여성은 여성인가 아닌가, 세상에 생물학적 성별이 여성과 남성밖에 없다는 건 과학이라고 자신할 수 있는가, 고작 생물학적 성별 따위가 만든 부조리에는 그토록 분개하면서 당신들은 왜 똑같은 짓을 하고 있는가, 약자의 상처와 눈물 위에서 나아지는 세상은 대체 어디에 있는가.  쉽게 조롱하고 당당하게 혐오하는 이들에게는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몇 가지 바라고 원하는 바가 있다면, 그런 ‘짓’에 제발, 운동과 이즘(ism)의 이름을 붙이지 않는 것이다. 이 분위기에 편승해 페미니즘은 이래서 안 된다는 몰이해와 또 다른 혐오가 퍼지지 않는 것이다. 이번 사태의 주인공이 너무 깊이 상처받지 않고 앞으로 뚜벅뚜벅 나아가는 것이다. 보이지 않고 닿지 않는 응원들, 아파하고 미안해하는 마음들을, 간간히 떠올리는 것이다.
2020-02-12 | hrights | 조회: 963 | 추천: 20
최유라/ 지구의 방랑자  비명이 귓전을 때린다. 눈앞에서 일어나는 살인사건에 경직된 몸으로 침만 거듭 삼킬 수밖에 없다. 살인을 미리 계획한 듯 바닥에는 큰 비닐이 깔려있다. 깔린 비닐 위로 붉은 피가 흥건하다. 아직은 숨이 붙어있는지 눈을 깜빡이고 있다. 이내 그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이 피와 섞여 붉게 물든다. 그의 시선이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 같다. 도움을 요청하는 듯 한 슬픈 눈. 몸에 흐르는 혈관 속 피가 뜨거워지는 느낌을 받는다. 그 순간 눈을 감는다. 실눈을 떠서 확인하니 그는 이미 죽고 말았다. 서서히 긴장이 풀려가는 것을 깨닫는다. 손은 팝콘과 콜라를 향한다. 카라멜의 기분 좋은 단맛이 혀끝에 감돈다. 입안 가득 팝콘을 넣고 먹으니 씹는 소리에 비명이 멀어져가고 그 잠깐 공포를 잊는다.  스트레스가 쌓이면 공포영화로 푼다. 공포영화를 보고 있는 순간에는 온종일 골머리를 앓았던 걱정거리가 ‘걱정 따위’가 되어 생각조차 나지 않기 때문이다. 스트레스를 공포영화로 푸는 것을 신기해하는 분들도 있다. 나도 공포영화를 끔찍이 싫어하던 때가 있었다. 나에게도 공포영화를 보는 사람을 ‘대체 왜 보지?’라는 의문 가득한 눈으로 보던 때가 있었다. 어쩌면 화면 속에서 벌어지는 살인은 감독의 ‘컷’ 소리와 함께 죽은 연기를 한 배우가 깨어날 것을 알아서가 아닐까. ‘이건 영화일 뿐이야.’라는 생각으로 ‘공포영화’에 접근해서, 무서워도 즐기게 된 게 아닐까 짐작해본다. 짐작일 뿐 명확하지는 않다. 직접적인 계기가 무엇이었을까 생각하며 공포영화가 무서워서 보지 못했던 과거의 기억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그러다 ‘전설의 고향’이 먼저 떠올랐다. 그래! 전설의 고향이었어!  동네에서 6살 동갑내기 친구들이 저마다 한 손에 포댓자루 하나씩 들고 와 뒷산 언덕에 모였다. 언덕 아래 들판은 잘 관리한 듯 한 잔디가 깔려있었고 들판 중간중간에 볼록볼록 튀어나와 있는 풀 덮인 흙더미가 썰매 타기를 더욱 재밌게 만들어주었다. 그곳은 우리의 놀이터였다. TV를 틀다 우연히 “전설의 고향”을 보게 되었다. 무덤에서 머리가 길고 하얀 옷을 입은 귀신이 나와 무덤을 지나가는 사람을 죽이는 장면을 본 이후 무덤 근처는 가지 못하기도 했었다. 놀이터가 무덤이라는 자각을 이때 한 것이다. 그 뒤로 무덤에서 귀신이 나와 나를 쫓아오는 꿈을 반복해서 꾸기도 했다. 공포는 공포 그 자체였기에 쳐다보지도 못하게 되었다. 공포영화를 지금처럼 보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몰랐다.  아무리 생각해도 전설의 고향을 무서워하던 아이가 지금처럼 공포물을 좋아하게 된 이유를 설명하기란 부족하다. 더 무언가가 없을까 생각해봤다. 이번엔 ‘장례식장’에서 느꼈던 ‘이질감’이 떠올랐다. 그래! 장례식장이었어!  “호사유피 인사유명[虎死留皮 人死留名]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어릴 때부터 자주 들었던 말이었다. 그러나 장례식장에서 나는 이 말이 거짓임을 알게 되었다.  조문객으로 갈 때와 상주로 있을 때 따라 장례식장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에 조금 차이가 난다. 차이가 나지만 신기하게도 불편한 ‘이질감’을 느끼는 점에서는 두 경우 모두 결론이 같다. 먼저 손님으로 가는 경우다. 검은 옷과 양말을 찾으려고 옷장을 헤집는다. 겨우 찾은 검은 옷을 입고 장례식장을 찾아간다. 입구에서 흰 봉투를 집어 이름을 적고 ATM기에서 찾은 돈을 넣는다. 호실을 확인하고 들어간다. 상복 입은 상주가 “아이고”를 외치며 곡을 한다. 절을 하고 부조금 함에 이름이 적힌 흰 봉투를 넣는다. 그리고 밥을 먹는다. 상 위에 올라오는 육개장(가격이 비싸서 시래기 된장국을 주는 곳이 더 많다), 수육, 동그랑땡, 애호박전, 색색의 떡. 그리고 화룡점정 플라스틱. 음식을 다 먹고는 깨닫는다. 그릇이며 숟가락 모두 플라스틱이라는 것을. 플라스틱은 그대로 쓰레기통으로 향한다.  이번엔 상주로 있을 때다. 대충 옷을 주워 입고 장례식장을 향한다. 눈물 바람이 된 상태로 절을 하고 가족을 부둥켜안고 꺼이꺼이 운다(물론 슬프지 않은 때도 있다. 그저 가족의 눈물에 동할 뿐). 찾아오는 손님에 정신이 없다. 누군가는 부조금을 받고 누군가는 손님에게 음식을 드린다.(음식을 나르는 일은 여성의 몫이다) “손님은 왕이다.”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이 말은 장례식장에서도 통한다. 슬픔을 나누러 온 건지 술을 마시러 온 건지 모를 어떤 사람들은 술이라는 단어가 입에 붙었다.(여기 술~!) 준비물이 안 보인다며 등교하기 전 엄마를 부르면 엄마는 “여기 있잖아. 찾아보지도 않고”라는 말과 함께 등짝 스매싱을 날리곤 했는데 술 달라 하는 저들에게 ‘넌 손이 없냐. 발이 없냐’는 말과 함께 등짝 스매싱을 선사하고픈 욕구가 뜨겁게 올라오지만, 몸은 이미 냉장고 문을 열고 있다. 그렇다. 부조금을 낸 손님. “손님은 왕이다.”  손님들이 먹고 나간 후 상을 정리하면서 생각한다. ‘이 많은 플라스틱 쓰레기는 어떻게 되는 걸까?’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기는 게 아니라 플라스틱을 남기는 것이 분명하다. 태어나서 죽는 그 순간까지 플라스틱을 소비하다 죽어서조차 플라스틱을 사용하는 것이다. 장례식장에서 발생한 플라스틱은 결국 산 자의 몫이 될 텐데 말이다. 죽음이 끔찍하다는 생각마저 든다. 사진 출처 - freepik  역시나 사람이 제일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후위기 시대 지구는 뜨거워져 간다. 우리만큼의 플라스틱을 사용해본 적도 없는 투발루는 해수면 상승으로 삶의 터전인 섬이 점점 가라앉고 있다. 플라스틱으로 인한 해양오염으로 바다에는 산호초가 사라져가며 바닷속 다양한 생물들은 플라스틱을 먹이로 착각해 죽음을 맞고 있다. 플라스틱 사용으로 인한 피해를, 사용하지도 않은 존재들이 고스란히 받고 있다.  공포영화를 보는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 살아 숨 쉬는 인간 세상이 더 무섭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부터가 맞을 듯하다. 영화는 가상이라 되돌릴 수도 있고 누구도 ‘진짜’로 죽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지구에서의 공포는 영화에 비할 수 없다. 혐오와 차별로 수많은 목숨이 사라져가는 오늘, 존재하지도 않는 귀신이 사람을 해하려는 것이 ‘진짜’ 죽음의 공포에 비하랴. 전쟁터에 신무기를 판매하는 누군가로 지옥이 된 분쟁지역에서 이유도 모른 채 죽어가는 아이들도 있다. 영화 장면 속 살인사건이 그에 비하랴.  역시 인간이 제일 무섭다는 생각에 잠기며 공포영화와 팝콘에 신경을 집중한다. 플라스틱에 담긴 콜라를 마시며.
2020-02-11 | hrights | 조회: 929 | 추천: 5
이회림/ 00경찰서  지하철 치한(癡漢)은 지하철 안에서 여성을 상대로 동의 없이 특정 신체부위를 접촉하는 행위를 하는 자를 말합니다. 기본적으로 모든 성추행, 성폭행 범죄자에게 쓸 수 있는 표현입니다. 지하철, 버스 등 대중교통 안이나 공공장소에서도 치한들을 마주칠 수 있습니다. 특히 출퇴근 시간대 ‘콩나물시루’ 같은 만원 지하철은 그들의 주무대이지요.  성기를 여성의 신체에 갖다 대거나 한술 더 떠서 비비적거리기, 치마 입은 다리 안으로 손을 넣어 만지기, 바지 허리춤에 손 넣었다 빼기, 주먹으로 엉덩이나 허벅지 건드리기, 지하철 하차 시점에 엉덩이를 꼬집고서 자연스럽게 도망가기 등 그 수법이 매우 치사하고 다양합니다. 처벌조항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제11조(공중 밀집 장소에서의 추행) 대중교통수단, 공연·집회 장소, 그 밖에 공중(公衆) 이 밀집하는 장소에서 사람을 추행한 사람은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3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공중밀집장소에서의 추행이 아닌 경우  움직이다가 여성과 우연히 부딪치거나 가까운 거리에 있는 상황에서 스마트폰 등을 보려고 팔을 위로 뻗었는데 신체에 닿았거나, 지하철이 급정거하는 바람에 타인에게 떠밀려 신체 접촉을 했을 경우 등은 불가피한 상황으로 인정되어 성추행에 해당되지 않음.  저 또한 수년 전, 서울의 지하철 2호선 안에서 엉덩이를 세게 꼬집히는 추행을 당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 지하철 안에 사람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누가 저를 꼬집었는지 전혀 알 수 없었습니다. 한순간 이상한 느낌에 ‘어~?’ 하면서 뒤를 돌아봤지만, 지하철 문이 열리고 수십 명이 우르르 내리는 모습을 지켜봐야 할 뿐이었습니다. 제 눈앞에서 사라지는 수많은 사람들 중에 어떤 못난 인간이 그런 짓을 했는지 도저히 찾을 수 없었습니다.  출근시간의 1호선도 정말 힘든 공간인 것 같습니다. 일주일에 3일 연속으로 사건, 사고가 일어난 적도 있었습니다. 누가 쓰러지거나, 추행을 당하거나, 자리 문제 때문에 서로 욕설을 하며 싸우거나 하는 일이 심심찮게 일어납니다. 저의 바로 뒤에서 추행을 당한 20대 여성 승객이 112에 신고하는 것을 목격하기도 했습니다. 경찰에 신고하는 목소리를 듣자마자 제 휴대전화의 카메라를 켰습니다. 저라도 개입해서 그 여성을 도와줄 마음으로 조용히 촬영을 시작했습니다.  “경찰이죠? 지하철에서 추행을 당해서 신고하려고요. 여기 1호선 2345열차 안이고 5번째 칸이고요. 지금 용산역 지나가고 있어요. 경찰 좀 보내주세요.” 그 분은 차분히 현재 위치를 설명하면서 한 손으로는 상대방 남성의 옷깃을 꼭 붙잡고 놓지 않았습니다.  “지금 남자가 도망가려고 해서 제가 옷을 꼭 붙잡고 있거든요. 만원 지하철 안이라 역에 내리지 않으면 움직이기 힘들고요. 이 남자가 도망가지 못하게 승강장 바로 앞까지 와주세요. 꼭!”  전화를 끊지 않고 계속해서 자신의 상황을 112 신고 접수 요원에게 설명했습니다. 저는 그 여성의 바로 앞에 서 있었기 때문에 만약 그 남자가 도망을 치기 시작한다면 얼른 따라붙어야겠다고 생각하며 경찰신분증을 꺼내 들고 있었습니다. 이윽고 지하철이 서울역 승강장에 다다랐고, 차창 밖으로 순찰요원들이 보였습니다, 문이 열리자 그 여성은 남자의 옷깃을 휙 잡아끌며 재빠른 몸놀림으로 전철에서 내렸습니다. 그 여성분은 갑작스럽게 불쾌한 일을 당했지만, 전혀 위축되지 않고 침착하게 그리고 당차게 잘 대처하고 있었습니다.  비슷한 사례가 또 있었습니다. 저녁 7시경 지하철 1호선 안, 40대 남성 A씨가 안양에서 서울로 향하는 지하철 1호선에서 20대 여성 B씨를 추행했습니다. B씨는 등 뒤에 서 있던 A씨가 자신의 신체를 만지는 것을 느꼈으나 너무 당황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우연히 이를 곁에서 지켜본 한 40대 여성승객이 조용히 B씨를 잡아끌었습니다. 이렇게 B씨는 곧바로 자리를 이동했으나, A씨는 계속 B씨를 뒤 따르며 B씨의 다리에 자신의 다리를 문질렀습니다. B씨가 울먹이며 앞자리에 앉은 승객에게 “뒤에 있는 분이 자꾸 나를 만진다”며 도움을 청했지만, 오히려 A씨는 B씨에게 “저 때문에 우시는 거예요?”라고 물었다고 합니다.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본 40대 여성은 성추행범인 B씨의 멱살을 잡고 “이런 짓 그만해”라고 소리치며 제지했습니다. 같은 칸에 타고 있던 한 시민은 재빨리 역무원에게 전화를 걸었고, 곧 출동한 역무원과 40대 여성이 함께 성추행범을 지하철에서 끌어내렸습니다. 사진 출처 - 다음 뉴스  자, 어떻습니까? 여러분! 피해자도 아닌 목격자였던 40대 여성이 성추행범 B씨의 멱살을 잡고 ‘이런 짓 그만하라’고 하시면서 적극적으로 범죄 상황에 뛰어 들었습니다. 너무 멋지지 않나요? 피해자가 고통 받고 있는 것을 보고도 가만히 구경만 하던 사람들과는 너무나 다른 모습입니다. 그 여성의 정의감에 경의를 표하고 싶습니다. 저는 이 사례를 보면서 범죄를 근본적으로 줄이려면 경찰이 최대한 빨리 신고 현장에 출동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범죄 앞에서 우리 모두가 경찰이라는 공동체 의식을 먼저 가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위의 40대 여성분의 사례처럼, 경찰이 도착하기 전에 현장의 목격자들께서 도움주실 수 있는 부분이 분명히 있기 때문입니다.  위의 두 사례는 오늘도 지하철을 타고 어딘가로 향하는 여러분에게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만약 피해자가 되는 상황이라면 20대 여성처럼 용기를 내시어 침착하게 신고를 하시고, 목격자 중의 하나가 되는 상황이라면 40대 여성처럼 곤경에 처한 피해자를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2020년에는 지하철 범죄가 급감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피해자의 처지에 공감하는 마음으로부터 생겨난 용기 있는 행동들이 우리 사회에 유행처럼 번지기를 바랍니다.
2020-01-31 | hrights | 조회: 2007 | 추천: 4
주윤아/ 교사  ‘블랙독’이라는 드라마가 방영 중인가 보다. 시청하지 않아 정확히 모르겠지만 방송사의 드라마 소개란을 보니 ‘기간제 교사가 된 사회 초년생 주인공이 우리 삶의 축소판인 학교에서 꿈을 지키며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야기’라고 되어있다. 교사들 사이에도 꽤 리얼하다는 소문이 돌아 관심 있는 일부 내용만 찾아보았는데, 내가 근무했던 여러 학교에서 실제 일어났던 사건들과 내가 기억하는 누군가를 떠올리게 하는 캐릭터들이 제법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어 재밌다기보다는 ‘웃프다’는 감상이 더 맞을 거 같다. 얼핏 보면 비정규 교사의 성장기 같아 보이지만 세심히 들여다보면 ‘학교 판 미생’이라고 불릴 만큼 촘촘한 갑을관계들이 얽히고설켜 있다. 타 직종보다 구성원들이 비교적 평등한 관계를 맺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학교도 예외 없이 착취와 억압의 구조가 일상적으로 작동하고 있다. 크게 교사와 교육을 지원하는 행정 노동자로만 구분되어 보이지만 사실 학교는 비정규직 백화점이라고 불릴 정도로 수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근무하고 있다. 학교 내 비정규직은 교육공무원직, 방과후 강사, 파견·용역, 기간제 교사 등으로 고용방식도 초단기 계약직부터 정년이 보장되는 무기계약직까지 천차만별이다. 또 교육 당국이 단기성 정책으로 비정규직을 늘리고 없애고를 반복하다 보니 현재 1) 학교 비정규직 직종은 공식적으로는 크게 15종이나 노조 측에서는 세부 직종으로 나누면 100여 종에 달한다고 주장한다. 국가는 이들 중 1/3 정도를 무기계약직으로 전환하기도 하였지만, 인건비, 각종 수당, 복지 등 정규직과 차별받고 있는 것은 엄연한 현실이다. 그중 기간제 교사의 정규직화는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의제 중에서도 뜨거운 감자로 갈등과 찬반논쟁도 거세어 해법도 요원한 데다 (무기계약직이 아니므로) 계약의 불안정성으로 드라마보다 실제는 백배 더 고단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학교 내 정규직들은 같은 업무(혹은 기피하거나 더 강도 높은)를 하는 비정규직의 차별을 인지하거나 혹은 자신이 직접 차별한 적은 없을까? 아마 차별 개선을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한 적은 없어도 차별하는 당사자는 아니라고 착각하고 있을 수 있다. 내가 교육청이나 관리자에게 을이겠지만, 비정규직 노동자에게 갑으로 군림하고 있을 수 있고, 또 비정규직 노동자들 사이에도 계약 형태나 처우 등에 따라 보이지 않는 서열 피라미드가 존재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 또한, 학교 내에서 정규직의 목소리(사실 비정규직이 목소리를 내기 어렵다)를 먼저 듣고, 정규직의 안건(역시 비정규직의 안건도 거의 상정되지 않는다)을 주요하게 생각했던 사고와 태도가 몸에 배어 있음을 고백한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최근 몇 년간 나는 정규직과 비정규직 차별만이 아니라 교사와 학생 간 권력 관계와 나아가 개인이 가진 정체성의 교차성에 대해 고민이 깊어졌는데, 그 시작은 내가 가진 특권을 인식하면서부터였다. 교사로서의 나는 주로 국가나 자본, 교육청, 관리자의 권력으로부터 받는 억압에 집중하였는데, 나 역시 학교 내 비정규직, 학생, 보호자들에게는 권력을 행사하는 주체일 수 있음을 성찰하게 된 것이다. 내가 부당하다고 여기고 비판하는 것들은 주로 지식으로 무장한 권리이거나 내가 더 가지지 못한 권리들을 향해있었고, 내가 남보다 더 누리는 권리나 특권에 대해서는 당연시하거나 불감했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것을 인지도 성찰도 하지 않는 경우는 물론, 의식적인 노력을 한다 해도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권력이 함축된 언어적 폭력으로 차별하고 있다. 그래서 작년은 나의 사고와 언행이 ‘꼰대’라서 그런 건 아닐까? 라는 자문을 수없이 되새긴 한 해였다.  학교 밖에서도 그렇겠지만, 학교 내에서도 자주 하는 말들이 있다. ‘원래 그래’, ‘좋은 게 좋은 거야’, ‘어쩔 수 없어’, ‘적당히(작작 좀) 해라’ 등등 ~ 이 말들은 얼핏 상대의 입장에 공감하며 평화로운 너와 나의 일상을 유지하자는 삶의 지혜가 담긴 조언 같기도 하지만 이 말이 사용되는 상황과 맥락을 살펴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  ‘원래 그래’ : 인류의 시작과 동시에 원래 그런 것은 별로 없었을 텐데 그렇다면 그 옛날 언젠가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져 무탈?하고 유구하게 내려져 오고 있다는 말일 것이다. 1월 중순쯤 방영된 모 프로그램에서 페루의 돌고래학살이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약 700여 년간 자행되어 오고 있음을 목격하였다. 이를 문제 제기하는 사람들에게 주민들은 아마도 우리 동네에서는 ‘원래 그래요’라고 말했을 것이다. 학살 행위를 금지하고 다양한 대안을 마련할 수 있는 현재에도 그 마을에서는 전통이라는 허울 좋은 이름으로 무고한 동물들만 희생되고 있다. 인간의 이기심과 폭력성을 부정할 수 없는 순간이었다.(남자는, 여자는 ‘원래 그래’ 라는 말은 왜 지양해야 하는지는 익히 알고 계실 테니 여기서 또 서술하지는 않기로 한다.)  ‘좋은 게 좋은 거야’ : 부정이나 청탁이 오가는 상황에서 은밀한 어조로 자주 사용되는 이 말은 과연 누구에게 좋은 것이냐? 라고 묻는다면 발화자는 아마도 우리 모두에게, 즉 윈윈전략이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자신의 의견을 발화할 수 있는 경우는 대개 강자이거나 주류에 속하는 다수일 테니 결국 ‘좋은 것’이란 이들의 관점에서다. 내 취향도, 나에게 이득도 가져오지 않는 그 ‘좋은 것’은 소수자나 사회적 약자인 나에게는 결코 좋은 것이 아니란 말이다. 외모 칭찬도 결국 ‘내가 칭찬해 주니 너는 기뻐해야만 한다’라는 발화자의 고정관념에 근거한 오판일 뿐 외모 품평의 범주에서 벗어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날이면 날마다 “예쁘다고 말해주는데 도대체 뭐가 불만인 거냐?”라는 질책만 되돌아올 뿐이다. 쉼이 있는 저녁과 칼퇴근을 원하는 직장인들에게 상사가 시혜처럼 지정해 주는 회식 날짜와 방식에 직원들은 고맙기는커녕 왜 자기 가족과 지인과 시간을 보내지 않고 자신들에게 놀아달라고 조르는지 의아할 뿐이다. ‘가족 같은 직장’을 사훈으로 하는 사용자들은 직장(공적)을 사적 영역으로도 활용하는 상황이 본인도 모르게 발생할 수밖에 없다. 격려와 감사를 ‘밥’ 한 끼로 꼭 전하고 싶다면 먼저 의견을 묻고 정하는 게 순서다.  ‘어쩔 수 없어’ : 이 또한 시공을 가리지 않고 참으로 많이 듣는 말이다. 비합리적이고 부당하고 아무튼, 아닌 것은 알겠지만 나는 그것에 대해 의견을 말하거나 개선할 수 있는 능력(아니 사실 용기와 의로움)이 없다고 자기 자신을 변명하거나 혹은 을들의 처지를 묵인할 때 자주 하는 말이다. 불공정한 것은 알겠지만 부당한 대우나 차별을 받아도 나도 어쩔(도울) 수 없고 너도 어쩔(피해) 수 없다는 논리다. 그다음에 이어서 하는 더 짜증스러운 말은 ‘억울하면 출세해라, 준비해서 공채 봐라’ 등등이 있겠다.  ‘적당히 해라’ : 최근 지인 중에 채식주의자들이 늘어나고 있다. 그들과 식사를 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외식의 경우 식당과 메뉴 선택이 쉽지 않다. 인원이 다수면 대체로 채식주의자들이 양보(사실 체념임)하거나 본인의 기호에 상관없이 채소로만 이루어진 메뉴를 비자발적으로 먹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고깃집이라도 갈 작정을 한 날에는 ‘적당히 좀 하고 살 것이지~ 저렇게 해서 어떻게 사회생활을 하냐’ 라는 뒷담들이 등 뒤에서 오가곤 한다. ‘적당’하다는 것은 어느 선까지를 말하는 것이며 그 기준을 정하는 것의 주체는 누구이며, 설사 대중의 기준이 있다 치더라도 왜 적당이라고 명명하는 그 지점에서 다수에 의해 내 취향과 선택을 강제 종료해야 하는가?  드라마 ‘블랙독’에서 교원평가를 소재로 하는 방영분만 또 찾아보았다. 거기서 편법을 쓰는 교감(관리자)에 맞서 목소리를 내기 어려운 평교사들을 대변하려는 부장 교사에게 나름 절친 교사가 ‘(결국, 너보다 을인 너희 부원들에게도 불이익이 돌아가니) 적당히 해라’라는 진심?(그 순간만큼은 진심 같아 보였음) 어린 조언을 한다. 현실이다. 학교는 공공기관(공무원)이라는 한계가 있기도 하고, 또 늘 ‘적당히’ 타협하는 경우가 많아 그 어느 조직보다도 변화와 진보가 더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적잖은 학교의 구성원들이 그 느린 변화의 속도에도 좌절하지 않고 ‘프로불편러’ 낙인도 감수하며 포기하지 않고 ‘적당’ 이상을 이야기하고 있다.  사람은 동시에 여러 가지의 권리와 책임, 정체성 등을 가지고 산다. 언제나 특권을 누리지도 언제나 차별만 받는 것도 아닐 것이다. 내가 차별을 받을 때도 명확히 인지하고 대응해야겠지만, 내가 가진 특권으로 상대를 차별하는 경우는 인지하기가 더 어렵기 때문에 해가 갈수록(한국 사회에서 나이가 권력이 되는 경우가 많다) 더욱 성찰해야 한다. 특히 교사는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힘든 학생과의 권력 관계에 대한 성찰이 절실하다.(이 부분은 다음 기회에 써 보려고 한다) 요즘 차별이 줄어 정말 평등한 세상이 되었다고 생각한다면 내가 가진 권력이 점점 많아져 오히려 인권 감수성은 떨어지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2) 권김현영이 <다시는 그전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에서 이렇게 적었다. ‘모든 운동과 이념이 특권을 성찰하지 않는 순간 억압의 일부가 된다 ……’ 1) 학교비정규직 파업 '역대 최대 규모'…"매년 되풀이 막아야"(연합뉴스 2019.7.5) 2) 다시는 그전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권김현영, 휴머니스트, 2019.10)
2020-01-22 | hrights | 조회: 1152 | 추천: 30
김형수/ 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 총장 '인권교육'이란 무엇인가요? : 교육하는 사람은 늘 인권 감수성을 점검, 성찰하고 개발하여 이를 인권교육을 설계하는데 반영해야 합니다. ■ 인권교육은 그 과정이 인권입니다.: 인권 교육의 질과 양, 실력은 교육하는 사람의 인권 감수성과 관점의 한계를 넘어서 교육 받는 사람을 설득하거나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교육하는 사람이 편견과 선입견 차별의식을 가지면서 교육생에게 이를 타파하라고 설득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인권 교육은 의뢰와 진행, 결론 및 사후 관계에서 그 과정이 인권 기준에 맞아야 하며, 그래서 주입 교육 보다, 참여 및 민주적 교육이 되어야 하며, 감수성을 일깨우고 개발하는 방식이 되어야 합니다. 교육하는 사람이나 교육받는 사람이나 스스로 자신의 인권 감수성을 깨우치고 향상시킬 수 있는 교육 방식이 매우 중요합니다. Lister의 분류에 따르면, 인권교육은 인권에 대한 교육(Education about human rights)에 그쳐서는 안되고 동시에 인권을 위한 교육(Education for human rights), 인권을 통한 교육(Education through human rights)이 되어야 하며, 머리(인지영역), 가슴(정의영역), 손(행동영역)을 동시에 총동원하는 교육이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1) ‘인권을 위한 교육’은 실제로 인권을 위한 노력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교육이며, 이를 위해 타인의 인권을 보호하려고 할 뿐만 아니라 학습자 스스로 자신의 의지로 인권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일상생활에서 인권의 관점을 적용할 수 있도록 지식과 기술을 가질 수 있게 교육하는 것을 말합니다. 마지막으로 ‘인권을 통한 교육’은 인권을 알고 누리도록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인권에 관한 학습이 일어나는 곳에서 충분히 누리도록 설계되어야 합니다. 폭력과 억압, 강제적인 행위가 일어나거나 성차별 또는 인권에 역행하는 방식으로는 인권교육을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인권교육이 이루어지는 현장이 가장 인권적이어야 합니다.2) 각 개인에게 어렵게 각성되고 키워진 인권감수성이 인권의 태도나 행동으로 이어지는 것은 더욱 어렵습니다. 그래서 인권은 암기 과목이 아니라 가치지향의 예체능 과목과도 같으며, 그래서 그동안 인권교육은 끊임없는 훈련을 통해 일상 생활의 습관이 되어야 완성할 수 있습니다. Tip) 인권강의 인권적으로 기획하고 설계하기: 강의 자료의 표현과 내용을 사전 점검하여 구성하는 것이 중요. 교육의 인권 당사자 참여·동의·평가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 강의 요청서로 참여자의 접근성(편의시설/시청각 장애인, 지적 자폐성 장애인의 정보 접근 – 수어 및 문자통역,화면해설 제공)을 확인함과 장신 장애인과 건강 장애인과 관련한 휴식과 안정 시간 확보등, 아울러 그들의 초상권/개인정보보호/위계를 방지하면서 교육의 기준을 제시하고 설명하여 인식시키고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강의 촉진, 흥미 유발을 위한 표현의 자유를 허용하더라도 참여자의 인권문제와 위치성, 소수성, 감수성 등을 파악하여 강의 언어 사용에 신중해야 합니다. ex) 이성애 중심적인 언어 사용(여자 친구가......→ 애인이나 파트너가) ■ 주관식 서술식 강의 평가서로 교육생의 평가와 변화 등을 소통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인권교육으로서의 ‘장애인 인권 교육’은 무엇인가요? 시민 모두 서로 연결되고 이어져 있음을 일깨워 모두의 편견을 제거하고 차별을 철폐하여 장애인의 권리를 보장하고 권한을 강화하는 것입니다. ‘나의 자유와 권리는 헌법에 열거하지 아니한 이유로 경시되지 않는다.’ 「우리나라 헌법 제37조 1항」 사진 출처 - 함께걸음 ■ 장애인 인식 개선 교육?! 장애인 이해 교육?! 장애인 인권 교육!! 장애 이해 교육3)과 장애 인식 개선 교육이 가지는 언어와 인식의 한계를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어느 인권 교육 영역도 이해와 인식 개선만을 목적으로 삼지 않습니다. 이해와 인식 개선이 인권을 위해 필요할 수 있지만, 실천이 없는 이해와 인식 개선은 오히려 차별과 편견, 분리를 강화시킬 정보만 주는 위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여성 인권을 논할 때 ‘여성 인권교육’이나 ‘성차별 방지교육’이라고 일컫지, 여성 이해 교육라든가 여성 인식 개선 교육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교육하는 사람은 이 표현의 의도보다 이 표현의 ‘효과’에 민감해져야 합니다. 그러나 인권교육 영역에서 유독 장애인에 있어서는 주체성과 당사자성 개념이 혼란스럽습니다. 개념이 혼란스러운 만큼 장애인 인권교육 역시 같은 인권교육 영역에 있다고 여기면서도 감수성의 간극은 아주 큽니다. 처음에는 장애인에 대한 인권교육 영역은, 장애인 인식 개선 교육이었다가 장애인 이해 교육이라고 대대적으로 변화했고, 지금은 그 영역에 성교육과 장애인차별금지법 교육, 장애인 등 특수교육법에 의거한 각종 교육이 들어와서 각각의 교육 실적으로 보고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여러 사건으로 촉발된 교육 과정과 장애인들의 권리로서의 ‘성’의 관점이 논의되면서 때문에 ‘성 인권’ 단어로 관점을 정립하며 성교육을 시행하기도 합니다. 소수자 중에서도 장애인만큼 ‘교육’에 있어 대상화되는, 권력관계에 취약한 소수자도 드물 것입니다. 또한 인식 개선이란 말부림은 원래 장애인에 대한 인식은 나쁜 것이며 장애인은 사람들의 인식 개선을 통해서만 문제를 풀 수 있다는 개인 간의 관계 문제로만 만들어 버려서 사회와 환경과 구조의 문제를 외면하게 만들 위험도 있습니다. 인권의 문제는 누군가가 이해해서 해결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장애인이 누군가 ‘이해받아야 할 존재’, 비주체로 대상화될 위험이 있고 낙인찍기의 위험도 있습니다. 요즘 학교 현장에서 자주 쓰이는 장애 공감 교육도 감수성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이지만 여전히 이러한 위험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장애인에 대한 예절, 에티켓 교육이 장애인 인권교육의 일부 내용으로 필요할 수는 있지만 이 자체를 장애인 인권교육으로 볼 수 없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장애인 인권 문제를 모두 배려나 사랑으로 풀어내는 것도 오히려 인권 문제를 약화시킬 수 있습니다. 장애인을 싫어하거나 배려하지 않아도 차별하거나 인권 침해를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인권교육이란 이름을 달고 장애인을 강제로 아웃팅시키거나 개인정보를 남용하거나 자기 결정권과 주체성을 심각히 훼손하고 박탈하는 경우를 조심해야 합니다. 장애인은 ‘인권교육’의 이중성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4) 더구나 장애우라는 말은 장애인을 대상화 한다고 비판하면서 대상화5)하는 행위를 지칭하는 이해나 인식 개선을 인권교육을 대신 지칭하는 말로 공공기관이나 일부 공적 단체들이 쓰는 것은 피해야 합니다. 모든 인권교육 자체가 장애인 인권을 증진시킬 수 있어야 하며 장애인 인권 교육 역시 다른 사람들의 인권 비장애인의 인권까지 영향을 주고 교류를 해야 합니다. 장애인 인권 문제는 인종 차별 문제에 그 뿌리가 있고 생물학적 결정론에 근거한 차별의 문제에서 페미니즘과 깊은 관계가 있으며 독일이나 일본의 우생학의 가장 큰 피해자가 장애인이란 점에서 ‘난민’6)문제와 다문화 문제와도 그 결을 함께 합니다.(2009년도 다문화가족실태조사에서 다문화가족의 등록장애인 비율은 17.3%) Tip) 1) 『민간단체활동가를 위한 인권교육워크샵(인권운동사랑방1회) 자료집』(2000년,인권운동 사랑방) 20쪽 2) 『국가인권위원회 연구보고서인권교육의 의미』 (2004, 구정화) 요약 3) 그리고 아쉽게도 아직 많은 교육 관료들과 공무원들은 이러한 사회적 약자에 대한 인권 교육을 ‘인성교육’이나 ‘도덕교육’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학교교육에서 학생들의 인성과 도덕이 높아진다고 해서 장애인학생들의 교육권이 인격적으로 그 질이 높아질지는 의심스럽다. 국가와 교육가, 활동가, 그리고 당사자, 그리고 당사자 가족과 다양한 관점에서 인권교육이 존재하고 진행할 때, 어떻게 해야 그것이 성과이든, 실적이든 ‘인권’ 자체를 증진시킬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4) 장애인에게 인권교육 하겠다면서 그들의 성적 행동을 교정하는 교육을 해달라고 하거나 기본 예절 교육을 요구하는 경우도 그러하고 비장애인에게 장애인인권교육을 하면서 장애인에 대한 헌신과 희생을 요구하는 경우도 그러하다. 5) 【기사】인권위 “교과서 속 장애인, 배려나 보호 대상으로만 묘사 안돼”( 웰체어뉴스,정두리 기자, 2019.02.27. 10:05) 6) 참조 「11살 파키스탄 소년, 국내 첫 난민 장애인 등록」 세계일보 2018-07-10 7) 「“교육현장서 ‘다문화’란 말 쓰지 말자”」 (경향신문, 2019.02.21.) ‘다문화가족’이라는 용어를 교육현장에서 쓰지 말자는 제안이 나왔다.전남도의회 교육위원회 최명수 의원(민주당·나주)은 21일 “전남도교육청 업무보고에 다문화가족 학생들에 대한 지원사업 개선이 필요하다”며 이같이 주장했다. 최 의원은 “ ‘다문화가족’이라는 말은 ‘국제결혼’ 또는 ‘혼혈’이라는 차별적이고 부정적인 인식이 들어 있다”면서 “ ‘다문화가족’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말자”고 했다.최 의원은 또 “다문화가족 학생은 필요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취약계층으로 분류돼 지원사업에 참여하게 되면서 해당 학생들의 거부감이 있고, ‘다문화’란 명칭이 학생의 호칭과 별명으로 변질되는 등 문제점이 많다”고 개선을 요구했다.
2019-12-18 | hrights | 조회: 4096 | 추천: 8
이동화/ 사단법인 아디 활동가  6개월째 이어진 홍콩 시위에 대한 홍콩경찰의 모습은 심각함을 넘어서 공포스럽다. 시위참여자인 학생에게 지근거리에서 실탄을 발사하는 홍콩경찰의 모습이나, 대학교에 고립된 시위대의 출구를 봉쇄하고 최루탄과 실탄을 발포하며 강제진압작전을 펼친 그들의 모습은 우리의 역사에서도 그랬듯이 인권과 민주주의를 탄압하는 독재국가의 폭력 그 자체다. 최근 홍콩 구의원 선거에서 범민주진영이 압승을 거두면서 시위진압의 폭력성이 누그러지길 바라지만 쉽게 변할것 같지는 않다.  이번 홍콩시위를 지켜보면서 몇 가지 사례들을 통해 데자뷰처럼 기억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기억들은 현재의 홍콩사태와 맞물려 사람들의 기본적 권리와 민주주의를 탄압하는 것이 더 이상 국가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2008년 3월 티베트에서는 중국으로부터 독립하려는 독립운동이 일어났고 이에 대한 중국정부의 탄압이 극심해졌다. 이에 당시 내가 활동했던 단체와 국내시민단체들은 베이징올림픽 성화 국내 봉송시기에 맞춰 중국의 무력진압에 항의하는 시위를 서울 광화문 인근에서 준비하였다. 그런데 막상 시위를 시작하려 하자 인근에 모인 수백 명의 국내거주 중국인들과 유학생들의 분노섞인 항의와 공격을 받았고 수 명의 활동가와 이를 취재하는 기자 여럿이 부상당하는 불상사가 발생하였다. 사전에 전혀 예상치 못한 사건이었다. 사진 출처 - 동아시아국제연대  또한 10여 년 전 미얀마 군부독재 시기 미얀마의 민주주의와 아웅산 수치여사의 가택연금 해제를 위한 시위를 국내에 체류중인 미얀마 활동가와 주한미얀마대사관앞에서 몇 개월 동안 지속하였고 시간이 흘러 미얀마는 군부독재체제에서 민간정부체제로 변하였다. 그리고 그 기쁨을 미얀마활동가들과 함께 나누었다. 하지만 2016년과 2017년 미얀마 정부에 의한 로힝야 학살사건이 발생하였고 이에 항의하는 행동을 하기 위해국내 미얀마 활동가들과 미팅하는 시간을 마련했다. 하지만 미팅에 참석한 국내의 미얀마 활동가와 주민은 “로힝야 사람들은 미얀마사람이 아니고 그들의 테러가 문제다.”라고 강변하며 한국의 활동가가 로힝야를 모른다고 주장했다.  유사한 사례는 팔레스타인 평화활동시에도 반복됐다. 2008년 가자지구 폭격이 한창일 때 이스라엘 대사관앞에서 항의시위를 하던 한국 활동가에게 이스라엘 관광객은 하마스의 테러가 문제라며 이스라엘의 공격은 정당하다고 한국 활동가들을 쏘아붙였다.  이번 홍콩사태에서 국내외 소수의 셀럽들이 홍콩경찰의 폭력에 항의하고 시위대의 주장에 동조하는 발연을 하자 일부 중국 네티즌들은 격한 항의와 비판을 하였다. 국내 대학가에서 홍콩시위를 지지하는 대자보를 일부 중국유학생이 훼손하고 홍콩지지 시위를 폄하하는 모습이 언론에 보도되기도 했다. 국가의 폭력을 옹호하고 인권과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를 폭력시위로 간주하는 모양새다. 물론 그들이 중국 전체를 대변한다고 볼 순 없지만 그들의 영향력은 크고 연대의 움직임을 위축시키는 것은 사실이다.  여전히 아시아의 많은 국가들이 인권과 민주주의를 수호하기보다는 소수의 권력과 독재를 지키기위해 인권과 민주주의를 탄압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국가폭력에 항의하기 위해 다수의 민중은 저항하고 해외의 지지세력은 연대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공식은 여러 현장에서 어긋나고 있다. 국가 폭력은 그대로이지만 어떤 종교를 믿고, 어느 민족이며, 어떤 출신 성분이냐는 사람들이 연대함에 있어 제약조건이 되고, 심지어 차별의 이유가 된다. 우리사회 안에서도 이러한 현상은 비정규직, 이주노동자, 난민 등과 같이, 주제는 다르지만 비슷한 모습으로 벌어지고 있다.  권력에 맞서는 약자와 소수자의 가장 큰 무기는 연대다. 그리고 그 연대를 구성하기 위해 고려하고 경계해야 할 대상은 늘고 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연대에 참여하는 것이다. 홍콩의 사태가 어디로 흘러갈지는 모르겠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그들과 함께 하는 것이고 홍콩에서도 한국의 연대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2019-11-27 | hrights | 조회: 1012 | 추천: 9
최유라/ 지구의 방랑자  거리에는 나를 유혹하는 손이 많다. 보이지 않지만 이끌림을 뿌리칠 수 없는 치명적인 손짓. 그 손짓에 나도 모르게 이끌려 정신을 차리고 보면 이미 음식점 테이블에 앉아있다.  오늘의 손짓왕은 순댓국이다. 뽀얀 국물 속으로 병천 순대를 비롯해 돼지고기의 여러 부위가 그득 들어있다.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는 이 뚝배기를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진다. 접시 가득 담긴 부추를 몽땅 넣고 공깃밥을 모조리 만다. 혀끝을 맴도는 달콤하고 구수한 맛. 국물을 음미한다. 여기에 김치가 빠질 수 없다. 국물을 머금고 있는 밥알과 고기로 숟가락 위에 산을 만든다. 그 위에 젓갈이 듬뿍 들어가 시원한 김치를 얹는다. 입을 크게 벌려 욱여넣는다. 입 안 가득 퍼지는 행복의 맛. 그래, 이 맛이지.  고개를 뚝배기에 묻을 기세로 열심히 뚝배기를 비워나가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엄마다! 순간 마음 한구석이 갑갑해져 왔다. 입안의 고깃덩어리를 다급히 씹어 삼키고 목소리를 가다듬는다. “딸, 저녁 먹었어?” “지금 먹고 있어. …… 샐러드.” “잘하고 있네! 그래, 살은 좀 빠졌지?” “어, 그게, 그냥 뱃살은 좀 빠진 거 같아…….”  시선은 식어가는 국물에 고정한 채 이미 짜인 대본에 따라 입만 움직인다. 엄마는 이 연극을 끝낼 생각이 없어 보였다. 하기야 엄마에게는 연극이 아닐 테니까. 엄마는 오늘도 어김없이 수화기 너머로 당뇨니 고혈압이니 고지혈증이니 크론병 같은 무시무시한 병명들을 나열해댔다. 처음이야 무서웠지만, 너무 자주 듣다 보니 남의 일인 것 같다.  물론 전혀 무섭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소화력이 떨어지는지 속이 더부룩한 날이 많다. 하지만 찾아올지 안 올지 모르는 이 병들보다는 더 강력한 병이 있으니 문제다. 이름하여 상상력병. 음식의 향과 맛을 상상하면 잔소리에 따가워진 귀의 감각은 무뎌지고 코의 감각은 강렬히 살아나며 입안에는 침이 고인다는 그 전설적인 병. 난 그 병을 앓고 있다.  식사 중이라는 핑계로 그나마 전화를 빨리 끊을 수 있었다. 다시 숟가락을 들려고 했지만, 이 좋아하는 순댓국조차 거짓말을 해가며 먹어야 하는 상황에 짜증이 왈칵 솟구쳐 왔다. 엄마도 나도 각자의 각본에 따라 ‘다이어트’를 앵무새처럼 말한다. ‘한국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을 명사 하나로 요약하라면 바로 그놈의 ‘다이어트’가 아닐까. 무슨 구전동화도 아니건만 여성의 몸은 어딜 가도 입방아에 오르내린다. 텔레비전 예능 프로그램에서, 회사에서, 명절의 친척집에서. 심지어 친구들과 만난 자리에서도 그렇다. 연애, 결혼, 출산 같은 화제도 꼭 다이어트로 귀결되고 만다. “요즘 살찐 여자 좋아하는 사람 없어”, “좋은 남자 만나서 결혼하려면 살은 빼야지”, “나중에 임신하면 진짜 힘들어. 지금 빼둬야 해” 등등. 하도 이런 말들을 듣다 보니 어느 순간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스스로를 깨달을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고 또 슬프다. 그렇게 오늘도 고문 같은 타자들의 시선과 언어에 둘러싸여 ‘다이어트’를 말하고 듣는다. 사진 출처 - 한겨레  이런 세상에 화가 나지만 싸울 용기는 크지 않은 것 같다. 순댓국을 먹고 있다는 것을 거짓말로 넘기기에 급급한 나를 발견할 때마다 그렇다. 과연 내가 이런 세상에 적응할 수 있을까? 이런 전화를 받고서도 눈앞에서 김을 피워 올리고 있는 순댓국에 입맛이 당기는 내가? 모르겠다. 일단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뚝배기를 비스듬히 기울여 받침에 걸쳐 두고 남아있는 밥과 국물을 먹는 것뿐이다. 아니, 뚝배기를 들어 국물까지 싹싹 마셔 버리는 것까지도, 충분히 할 수 있다. 에라 모르겠다. 먹고 보자!
2019-11-20 | hrights | 조회: 905 | 추천: 10
손상훈/ 교단자정센터 원장  가까운 날, 교황님이 오시면 직접 만나 뵙고 건의하고 싶다. 먼저 대법원 양형위원회 종교시설 기준을 엄하게 정해야 한다고 말씀드리고 싶다. 대한민국에는 평신도가 교회에 헌금하고, 사찰에 기부하면 최종 결정이 해당 교회 담임목사, 해당 사찰 주지에게 모든 권리가 인정되도록 한 대법원의 판례가 있다. 이는 지난 100여 년간 직업종교인의 부정부패를 비호하는 매우 못된 판례이다. 지난 1919년 3.1운동과 4.19혁명의 정신을 이어받고 1987년 6월 민주화운동의 시민행동을 실천해 온 평신도들의 기도를 저버리는 판례이다. 이제 대법원과 대법원 양형위원회는 교회, 사찰 부정부패 사건으로 각종 송사와 분규가 발생할 경우 새롭고 지혜로운 판례와 양형기준을 만들어야 한다.  조계종 종정 모 승려와 제자가 평신도(불교계에서는 재가불자라고 부른다)의 가족 건강과 집안이 망한다고 협박하여 기부(시주)받은 후원금이 정당할 수 없다. 심리적으로 불안해 상담한 평신도를 겁주고 사기 쳐서 뜯어낸 '고의성'이 강한 위법 행위일수 있다. 종교계 시민단체는 비영리 민간단체의 고유한 업무로 '합리적인 의심이 강한 사회문제'에 대해 창의적으로 비판하고 건의하는 것이 본연의 활동내용이다.  두 번째로 대한민국 검찰과 경찰을 방문해 용기 주시길 건의하고 싶다. 조계종 생수비리 의혹 사건에 대해 경찰과 검찰은 황당한 결정을 했다. 김진태 전 검찰총장과 골프를 친 자승 전 총무원장을 계좌 조사도 하지 않고 봐주기식 결론을 냈다. 의혹을 덮어버린 경찰과 검찰에게 고해성사를 받아주시길 기도해 본다.  정의평화불대 상임대표 이도흠(한양대 교수)을 비롯한 불교계시민사회단체는 국고보조금 7천여만 원을 횡령한 의혹이 있다며 자승 전 총무원장을 고발했다. 이제 지켜봐야 한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대한민국 사회에서 종교계는 많은 국고보조금(시민 세금)을 지원받는다. 받는 만큼 투명한 집행과 결산을 해 시민들에게 신뢰받는 종교단체가 되어야 한다. 불교 조계종의 경우 직·간접적으로 연간 수백 억 원을 세금으로 지원받는다. 전통사찰 유지보수, 템플스테이 심지어 10.27법난 특별법으로 천 억대 예산편성도 받았다. 그럼에도 수년간 제대로 집행하지 못하다가 이제 봉은사에 500억을 10.27법난 기념관과 동국대에 치유센터 건립 명목으로 500억을 편성하려고 추진하고 있다고 한다. 대한민국 건국이래 천 억대 예산을 조계종 마음대로 집행하려하는 모양새를 그냥 놔두는 현 정부가 정의로운지 묻고 싶다. 종교계를 관리 감독하는 문화관광부나 감사원은 감사 지적을 하고도 시민들에게 제대로 결과를 안내하지 못하고 있다.  또, 봉은사를 방문해 주셨으면 한다. 맑고 향기롭게 법정스님이 머물렀고 종교간 대화를 위해 노력하신 서울 강남 봉은사, 추사가 말년에 혼신을 다해 쓴 멋진 글이 있는 봉은사에 교황님이 오신다면 청렴한 세계시민이 함께 나눌 수 있지 않을까해서다.  자승 전 총무원장이 중심이 되어 벌이는 위례신도시 종교부지의 이른바 ‘안거놀이’, ‘결사놀이’를 들으면서 이제는 불교의 마지막 보루인 수행조차도 오염된 듯 하여 슬프다. 왜 ‘천막법당’일까? 예전 한나라당의 천막당사가 생각나는 것은 지나친 일일까? 박근혜는 대선과정에서 차떼기 정치자금을 받은 것이 드러나 국민의 손가락질을 받자 기존 당사엔 단 한 발짝도 들여놓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당이 부패 정당, 기득권 정당이란 오명에서 완전히 새롭게 출발한다”며 여의도에 천막을 쳤다. 천막당사로 한나라당은 위기에서 탈출했다. 그러나 한국불교의 위기를 ‘천막법당’으로 돌파해야 할까? 백번 양보해 지금 천막에 들어가 안거를 해야 할 만큼 선수행처가 잘못된 점이 있는가? 9명 승려가 수행할 처소가 없을 만큼 선방이 부족한가? 절대로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은 천막법당에서 안거를 하겠다는 9명이 가장 잘 알 것이다. 사진 출처 - 필자  오히려 한국불교를 위기에 빠뜨리고 있는 것은, 도박, 폭행, 돈봉투선거도 모자라 생수비리와 국고보조금 횡령 의혹을 받고 있는 등 온갖 불의의 몸통이며 종단을 사유화한 ‘강남원장’이 여전한 실세로 군림하고 있는, 자정이 불가능한 종단의 현실이 진정한 위기의 근원이다. 교황님이 위례 신도시에서 천막쇼를 하는 자승 전 총무원장 등 조계종 승려에게 '평신도의 소수의견'을 전달해 주시길 기도해 본다.  봉은사 평신도(재가불자)들은 이제 500억 원을 모아 위례신도시에 건물을 지어 죽을 때까지 자승 전 원장이 머물도록 기부해야 할 처지가 되었다. 내 생각이 기우이길 바랄뿐이다. 지금까지 언급한 내용에 잘못과 오해가 있다면 공개반성하고 싶다. 아니, 교황님에게 고해성사를 하고 싶다. 한국에서 잘 살고 있는 업종교인인 재벌승려, 재벌목사님들에게 교황님이 들려주실 소중한 강론과 지침을 듣고 싶다.  1만3천여 명의 조계종 승려가 침묵하는 현실에서 교황님에게 건의하는 평신도의 바람이, 아니 기도가 응답받길 기대해 본다.
2019-11-13 | hrights | 조회: 1525 | 추천: 11
이회림/ 00경찰서 「성폭력 범죄 경찰에게 성폭력을 신고하라는 것인가? 경찰은 재발방지 대책을 마련하라」 제하의 2019년 11월 7일 한국여성단체연합의 논평에 공감하며..  경찰청이 11월 5일 국회에 제출한 ‘경찰공무원 성비위 및 징계 현황’자료에 따르면 2014~2019년 6월까지 292명의 경찰이 성비위에 연루돼 징계를 받았다고 합니다.  전체 발생 건수 중 경찰 내부에서 벌어진 성 비위는 179건으로 61.3%를 차지하고 유형별로는 성희롱이 74.3%, 성범죄가 25.7%이며, 가해자 계급별로는 경위가 81명으로 전체의 45.3%, 경감 37명(20.7%), 경사25명(14.0%) 순 입니다. 대한민국 경찰관 11만8,000여 명 가운데 여경은 1만3,000여 명으로 현재 약 10%를 차지합니다.  약 10%의 여경 중 남경으로부터 성희롱성 언행을 단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는 여경이 있을 수 있습니다만 대부분의 여경들은 남경들의 부적절한 언행에 힘들어합니다. 그저 남성 중심의 조직 문화가 지배적이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려니 하고 스스로 마음을 챙겨가다가도, 여러 번 반복해서 듣게 되면 어쩔 수 없이 피해의식이 생기게 됩니다. 그런 일을 경험할 때마다 미리 예상하고 녹음을 할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피해를 입고도 드러내놓고 이야기 할 수 있는 믿을 만한 창구가 없으니 친한 여경끼리만 속 얘기를 하고 피해 공유 정도에 그칩니다. 운이 좋아 좋은 주변인을 만나면 혼자 '여자'임을 크게 의식하지 않고 별 문제 없이 안전하게 근무를 하게 되지만, 그렇게 '젠더 감수성'이 풍부한 남경들과 일하게 되는 행운은 자주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여경은 가해 남경을 피해 타도, 타서로 도망치듯이 옮겨 갔고, 또 어떤 여경은 당당하게 문제제기를 했다가, '튀는 여경'으로 '찍힘'을 당해 인사철에 불이익을 겪기도 합니다. 이런 현상들은 제 주변에서만 일어나는 극소수의 사례가 아니고 그동안 쉬쉬해 온 불편한 진실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사진 출처 - 국민일보  여경 대상 성범죄는 경찰 조직 내 대표적인 '암수범죄'입니다.  여러 범죄 중에서도 성범죄 피해자들은 수사기관에 직접 신고 할 용기를 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성범죄는 실제로 드러나는 수치보다 숨은 범죄의 수가 훨씬 더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휴직기간을 빼면 제가 여성경찰로 살아 온 지 얼추 13년이 되는데, 그 기간 동안 직접 겪은 조직 내 성비위의 기억을 당장 떠올려보니 범죄 인지가 가능한 것만 3건이 넘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들이 비단 저 혼자만 당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 큰 문제입니다.  대화 속에서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성희롱성 발언에서부터 허락을 구하지 않은 부적절한 신체 접촉, 강제추행, 준강간, 강간에 이르기까지 남경에 의한 여경 대상 성범죄는 일반인들 사이에 일어나는 것만큼이나 다양한 얼굴을 갖고 있습니다. 동료 여경, 선•후배 여경과의 대화 속에서 인지되는 성비위를 모두 수치화한다면 국민들 앞에서 차마 밝히기 어려운 부끄러운 통계가 되어버릴 것입니다.  직장 상사로부터 추행을 당한 어느 20대 여성이 피해자 진술 조서를 받고 있던 저에게 고맙다며,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저처럼 여경이 되어 당당하게 살고 싶다고 말하던 모습이 떠오릅니다.  “여경이 되면 경찰이니까 사내 성범죄나 성희롱 같은 건 당연히 없지 않냐”고 말하던 그 여성에게 차마 그렇지 않다는 말은 못하였습니다.  계속되는 남경들의 성비위 행태, 그 중에서도 여경 대상 성범죄 행위를 근절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접근방식으로 예방을 도모해야합니다. 특히 야근 후 적절한 휴식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의 반강제적인 교육 참여 종용, 남경• 여경 모두에게 공감 받지 못하는 집체 교육, 형식적인 교육의 극치라고 말할 수 있는 사이버 교육은 모두 지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덧붙여, 이런 일이 언론에 보도될 때마다 ‘소수의 개인적 일탈이고 어느 직종이든 일어나는 현상이다.’ ‘소수의 비위 사실로 전체 경찰을 일반화시켜 비난하지 말아 달라’ ‘경찰조직보다 다른 조직이 더 하더라’ 등, 이런 낯 부끄러운 항변은 경찰 제복 입은 자들이 스스로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2019-11-12 | hrights | 조회: 886 | 추천: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