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에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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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에가시’는 현장을 살아가는 활동가들의 목소리를 담기 위한 칼럼 공간입니다.

‘목에가시’는 김성은(서울신문 기자), 김태형(프리랜서 방송작가), 김형수(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 총장), 박용석(출판업), 신종환(공무원), 윤요왕(춘천별빛사회적협동조합 이사장), 이동화(아디 사무국장), 이승은(경찰관), 이원영(용산시민연대 공동대표), 정한별(사회복지사)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 사람은 혐오받는 만큼 혐오하며 존중받는 만큼 존중한다. 김형수/ 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 총장  = 친밀한 관계(부모)와 실제적 권력 관계에서의(관리자, 교사) 혐오표현에 대하여 더욱 민감해져야 합니다. 그들의 혐오표현을 학대 및 폭력으로 규정하고 사회적으로 선언해야 합니다.  요즘 청소년의 혐오표현이 너무나도 심각한 문제라고 합니다.  그 표현이 언어 사용을 의미한다면 과연 청소년들은 그 언어들을 어디서 습득했을까요? 청소년들은 그 언어를 무슨 목적으로 사용하는 것일까요? 혐오와 차별을 연구하는 많은 전문가들은 '혐오표현의 문제는 청소년의 인성 문제가 아니다'라는 입장이 대부분입니다. 근래에 부쩍 청소년의 혐오표현이 늘어나는 것은 그것을 막거나 걸러줄 방어막이 아예 없거나 필터가 아주 미비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문제라고 보고 있습니다. 양과 질에서 혐오표현이 심각한 까닭은 이미 사회에서 다른 사람들이 많이 부리고 사용하고 대화하기 때문입니다. 혐오표현이 문제가 되는 것은 그것을 듣고 수용하는 대상이 있어 어떤 언어적인 목적을 가지고 소통하기 때문이며 그 소통이 구체적인 사회적 행동인 차별과 폭력으로 행사되기 때문입니다.  사실 청소년에 의한 혐오표현과 청소년에 대한 혐오표현은 서로 상관관계가 깊으며 서로 상승효과가 많습니다. 청소년들이 스스로 혐오표현의 피해자가 되거나 혐오표현에 노출되면 자연스럽게 혐오표현의 가해자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래서 지금의 혐오표현의 현상은 그 동안 쌓여온 우리 사회의 청소년에 대한 혐오가 당사자인 그들에게 내재화 동일화 되어 바이러스처럼 N차 감염을 시키고 있는 것이지요.  상황과 조건에 따라 다르지만 항상 혐오표현은 그 효과의 결과에 주목합니다. 혐오를 극대화하고 그 혐오의 감정을 서로 나눌 수 있으면 그만입니다. 혐오표현은 그래서 그 결과값에 따라 대상과 표현을 선택하고 그 선택은 어른과 사회가 고르는 약자의 순서를 주로 따릅니다.  심리적, 정치적, 경제적 약자로 만들고 그런 대상이 되는 것이 사회적 저주이자 개인적 불행이자, 느끼고 싶지 않은 슬픔이 될 때 그 표현들은 혐오표현이 됩니다. (그런 정의에 따라 일각의 주장대로 ‘한남’이란 표현은 아직 혐오표현으로써의 언어적 힘은 가지지 못했습니다, 혐오가 특정한 주제와 목적을 두고 주제와 대상을 고르는 것이 아닙니다. 항상 자기가 소속된 그룹이나 소속되고 싶은 그룹에서 집단적으로 약하거나 배제시키고 싶은 ‘약자’를 고를 뿐입니다.  청소년의 혐오표현이 심각한 것은, 언어 사회학적으로 또래문화의 소통의 도구로 혐오표현이 많이 사용되기 때문입니다. 많이 사용된다는 뜻은 혐오표현을 했을 때 그것을 수용하고 이해하고 동의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뜻이고 이것은 혐오를 재생산하고 증폭시키다 못해 결국 다시 자기혐오에 빠지는 악순환에 빠지게 만듭니다. 예) 초등학생들을 비하하는 인터넷 용어들  청소년들은 혐오표현을 하나의 어휘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에 각자의 감정을 배설하거나 현상을 풍자하는 욕이나 육두문자와는 다르게 사용합니다. 서로의 문화와 관점을 가장 강렬하게 전달하는 문학적 시적 표현으로 인식합니다. 아니 이미 우리 사회가 그것을 관용 표현으로 사용하고 있지요. 예) 일베 청소년 병신들, 지랄하는 청소년들.  그래서 청소년의 혐오표현의 증가는 이미 어른들과 (특히 정치인) 언론 사회가 엄청나게 혐오표현을 일삼아 온 것의 결과라고 보아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런 혐오표현을 제거하는 것에 있어서 청소년들에게 익명성 자체는 그렇게 큰 영향이 없습니다. 인터넷 실명제를 시행한다고 한들, 그들은 또다시 다른 캐릭터 형성이나 익명성 공간으로 이동할 것입니다.  오히려 청소년을 향한 과도한 실명제와 같은 규제는 그들의 언어표현과 존재를 더욱 은폐시키고 사회화하기 어렵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교복에 이름표를 다는 것과 같은 이치- 그것이 왜 인권문제가 되었겠는가?) 익명성을 보장하되 그 표현과 행위가 문제가 되었을 때만 실명 확인이 가능한 시스템이 더 필요하고 그렇게 처벌되는 것을 널리 홍보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익명보장에 책임과 의무를 부여하는 것이고 그 책임과 의무는 혐오표현이 의사소통으로 이어지거나 대상을 공격하거나 구체적인 차별이나 폭력으로 이어졌을 때 그것에 대한 처벌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혐오표현을 혼자 있을 때 개인 공간에서, 따로 듣거나 보는 사람이 없을 때 사용했다면 그것은 스트레스를 푸는 욕의 순기능입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이런 혐오표현은 IMF 사태 이후 폭발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하여 2000년 이후 초단핵화 가족이 늘면서 증가했습니다. 특히 혐오표현의 심각성과 강도와 수용성은 생활공간에서, 오프라인 공간에서 일어나는 어른들의 직접적인 표현이 더 큰 문제입니다. 그들의 언어 사용은 청소년의 자존감을 떨어뜨리고 공격성을 강화합니다. 이런 혐오를 당한 청소년들은 이러한 심리적 보상과 방어기제로 또 다른 공격 대상과 혐오 대상을 찾습니다.  ex) 대견하다. 어른들의 위계적, 도덕적, 사적, 강압적, 평가적 혐오표현 (자신보다 위거나 강자들에게는 이 표현을 쓰지 않기 때문입니다. 근본적으로 청소년들의 혐오표현이 문제다라고 단정적으로 표현하는 것 자체가 혐오를 잉태합니다. 그 혐오표현의 뿌리는 주로 청소년들이 만나는 교사와 부모가 대부분입니다.)  청소년들의 의사소통 방식이 고립된 또래문화 중심으로 이루어지면서 혐오표현은 하나의 문화 현상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이 표현 자체를 폭력과 차별로 보고 적극적으로 억제하지 않으면 혐오범죄나 집단적 증오범죄로 조직화할 위험이 있음을 다른 나라에서 이미 충분히 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이미 노인 계층이나 태극기 부대 등과 같은 문제에서 그 단초를 보고 있었고 그 어른 세대의 단초와 동기로 말미암아 N번방 같은 사태가 야기됐습니다. N번방 사태야 말로 혐오표현으로 만들어진 혐오문화가 어떻게 조직적인 혐오범죄로 가는지 잘 보여주고 있기도 합니다.  혐오는 그 생존 방식과 전파방식이 감염병 바이러스와 매우 비슷합니다. 숙주를 단박에 죽이거나 힘들게 하지는 않지만 서서히 약하게 만들고 면역이 약한 존재는 죽음에 이르기도 합니다. 보이지 않는 소리나 익명성 뒤에 문자로 조용히 전파되지만 어느 순간 폭발적으로 늘어나 있기도 합니다. 그리고 스스로 생존하기 어렵기 때문에 끊임없이 스피커를 찾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일간 베스트 사이트와 극우 단체들이라고 할 수 있지요. 사진 출처 - freepik  그것은 때때로 심각하고 장기적인 후유증을 남기기도 합니다. 우리가 학교 폭력의 피해자들이 충분히 사과하거나 보상하지 않은 가해자들을 몇 십 년이 지난 후에도 미디어에서 만났을 때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혐오표현 피해를 당한 후에 어떻게 대처해야할까요?  우리는 사회적으로 혐오표현을 범죄로 모두가 합의하고 선언해야 합니다. 이후에 모든 범죄의 기본을 따르면 됩니다. 즉 피해자는 피해를 복구하고 보상하고 치료하며 가해자에게는 응분의 책임과 처벌을 하면 됩니다. 그런데 혐오범죄가 죄질이 나쁜 이유는 성범죄와 마찬가지로 피해자가 가해의 책임의식을 가지고 죄책감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혐오의 책임이 피해자에게 있지 않음을 인식시키고 표현하는 것, 가해의 책임을 명확히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혐오에 대하여 피해자를 비난하거나 평가하거나 책임을 묻지 말아야 합니다. 가해자의 행위와 표현을 단순한 인성적인 해프닝으로 취급하지 말고 책임이 있는 실제적 폭력임을 명확히 할 것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혐오를 또 다른 혐오로 풀어내는 순환혐오나 자기혐오에 빠질 때가 많습니다. 특히 장애인 혐오를 들여다보면 그 원리를 잘 알 수가 있습니다. 장애인 혐오의 문제를 사랑이나 배려 따위의 개인의 감정이나 윤리 문제로 바꿔버리거나 실수라고 무마하거나 (이것은 결국 피해자에게 그 책임을 묻는 낙인일 뿐입니다.) 장애인을 혐오하는 것이 진짜 장애라는 표현, 장애인을 혐오하는 미친 짓, 결국 정신 장애인이 하는 일이라는, 또 다른 장애 혐오인 것이지요.  자폐가 있어서 군대를 가지 않은 21살의 청년을 두고 ‘신변처리 못하는 자폐아라서 슬프다’는 어느 국회의원의 표현이 오히려 어느 악성 댓글보다 청소년들에게는 영향이 클 수도 있다는 사실, 인권을 고민하고 자신의 말에 힘이 있다고 생각하는 모든 사람들은 고민해 보아야 합니다. 특히 부모님과 교사들이요. 그러기를 진정 바랍니다.  
2020-09-22 | hrights | 조회: 819 | 추천: 2
김아현/ 인권연대 간사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제주 강정마을의 구럼비 바닷가에는 붉은발 말똥게들이 살고 있었다. 다른 생물들도 많이 살았지만 유독 그 ‘게’가 주목받은 이유는 그들이 처해있던 위기 때문이었다. 붉은발 말똥게는 멸종위기 야생생물 2급으로, 가까운 장래에 멸종 위기에 처할 우려가 있는 207종의 동식물이 여기에 해당한다. 삵이나 맹꽁이처럼, 듣기로는 친근하지만 실제로는 오랫동안 목격된 적이 별로 없는 동물들도 2급의 멸종위기종이다.  멸종위기종의 지정과 연구는 국가와 국제기구 모두를 통들어 이뤄지는데 우리나라는 환경부가 소관부처고 국제적으로는 국제자연보전연맹(IUCN, International Union for Conservation of Nature)이라는 기구가 가장 강력한 공신력을 갖는다. 멸종위기종 지정은 당연히, 전문가 집단의 체계적인 연구와 논의를 거쳐 이뤄진다.  구럼비의 붉은발 말똥게는 국가(환경부)가 전문가의 식견을 빌어 지정한 멸종위기종이었지만, 결국 그들에 의해 강제이주를 당했다. 해군기지 공사를 하려면 구럼비 바위를 발파해야하는데 그 게의 희소가치가 걸림돌이었기 때문이었다. 갯가 바위 위에서 살아야 하는 게를 통발로 포획해, 서귀포시 시내에 있는 큰 절인 약천사 앞으로 이주시킨다는 것이, 국가의 용역을 받은 소위 전문가 집단이 내 놓은 대안이었다.  강제이주를 당하기도 전에, 한낮의 열기로 달궈진 바위 위 통발 안에서 빠져나오지 못해 말라 죽어있는 붉은발 말똥게들의 사체를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그 광경은 너무나 강렬하고 기이해서, 인간 세상에서 벌어지는 많은 일들을 떠올리게 하기도 했다. 통발 안에서 어렵게 살아남아 강제이주 당하는 데 성공한 붉은발 말똥게들은,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 사진 출처 - 한겨레  어떤 전문가들은 이처럼, 용역 발주자의 요구에 맞춰, 합리를 벗어난 황당한 결론을 내리기도 한다. 앞서 예로 든 경우에, 나와 동료들은 붉은발 말똥게의 강제 이주를 권고한 전문가들을 지식범죄자라고 여겼다. 강제이주 권고가 범죄는 아니지만 심정이 그랬다.  그런데 지금, 고쳐 생각하면, 그 전문가들이 도덕적으로 옳지 못한 결론을 도출하기 위해 사용한 재료가 과연 ‘지식’인가 싶은 것이다. 전문성을 올곧게 사용했다면 그런 결론이 나올 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이성이나 지성, 전문성이 아니라 다른 기제를 사용해 그런 결론을 도출했을 것이다(그것이 계산이나 일신에 관한 욕심, 굴종 같은 것이 아니길 바란다).  어쨌거나 그 전문가들은 지금도 존중받으며 잘 살고 있을 것이다. 전문가는 대체로 존중받는다. 자주 호명당하고, 존경을 받기도 한다. 황당한 주장도 마이크를 가진 전문가가 하면 사회에 유통될 자격을 얻는다.  그런데 전문성에도 계급이 있다. 어렸을 때 공부를 아주 잘 해야 얻을 가능성이 높은 어떤 분야, 이를테면 법률이나 의료 분야의 전문가가 지니는 힘은, 궁중복식이나 김치유산균을 오랫동안 연구해 온 전문가에 비할 바 없이 크고 강하다. 게다가 성공적인 입시를 통해 한 번 얻은 전문가 자격은 놀이공원 프리패스처럼 기능한다. 이를테면 정치평론으로 유명해진 변호사가 그의 전문이 아닌 다른 분야에도 진입장벽 없이 쉽게 진출하는 경우를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다. 전문의가 토크쇼나 관찰예능프로그램에 출연하는 이유를 당췌 이해할 수 없지만 모두 실제 일어나는 일들이다. 그리고 우리 사회는 여기에 근원적인 질문을 던질 기회가 없었다. ‘저 자격의 기원은 무엇인가’를 궁금해 했다면 많은 것들이 달라졌을지 모른다. 어려서 공부를 잘 했고, 성적이 좋았고, 상위권 대학의 좋은 과에 진학해서 얻기 시작한 호감과 명성과 자격이 대체 어디까지 힘을 발휘해도 좋은 것인지에 대해 지금부터라도 따져물어야 한다. 오래전 성적표가 평생 가는 상징자본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박근혜 정부 때까지는 필요했던 공공병원과 공공의료인력이 단지 정권만 바뀌었다고 엄청난 악(惡)이 되는 극적인 변질은, 근거가 없다.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교수진이라면 전문가 생태계 피라미드의 최상위를 차지하는 계층이다. 최고의 전문가집단이 스스로 자기 결론을 뒤집는 이 촌극에 많은 이들이 상처받았다. 평범한 이들의 말 바꾸기는 조롱과 멸시의 대상이 되고 어떤 경우에는 법으로도 처벌받지만,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이들의 말 바꾸기는 다른 대접을 받았다. 그 때문에 누군가 목숨을 잃고 고통 받을 때조차 어떤 책임도 지지 않았다. 문득 다시, 궁금해진다. 사실은 늘 궁금했다. 갯가 바위 아닌 곳으로 강제로 옮겨진 붉은발 말똥게들은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
2020-09-09 | hrights | 조회: 1152 | 추천: 28
이동화/ 사단법인 아디 활동가  팔레스타인 나블루스(Nablus)의 부린(Burin)마을은 이스라엘 불법점령촌에 의한 가장 피해가 심각한 마을중 하나이고 사단법인 아디가 2017년부터 인권피해조사와 같은 현지 활동을 수행할 때 꼭 방문했던 마을이다. 그리고 아디의 방문시마다 도움을 주었던 부린마을 출신의 활동가인 갓산 나자르(Ghassan Najjar)가 이스라엘 군에 의해 체포되어 두 달 반이 지난 지금까지도 구금 상태에서 풀려나지 못하고 있다.  이스라엘군은 지난 6월 25일 한밤중에 마을에서 가족들과 함께 지내던 갓산을 체포해 알-잘리메(Al-Jalimeh) 심문 센터로 끌고 갔다. 이스라엘 군사법원은 갓산의 구금을 일주일 단위로 계속 연장했고, 그는 7월 말부터 8월 초까지 이어진 이슬람교 명절인 이드 알 아드하(Eid al-Adha) 기간도 가족들과 함께 보낼 수 없었다. 8월 중순이 되자 갓산은 다른 팔레스타인인 수감자들과 함께 알-잘리메 심문 센터에서 메기도(Megiddo) 감옥으로 이감되었으며, 이때부터 3일 단위로 구금이 연장되기 시작했다. 8월 27일에는 다음 재판 날짜를 10월 11일로 연기한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갓산이 언제쯤 석방될 수 있을지는 더욱 예측하기 어려워졌다. 8월 8일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진행한 팔레스타인 양심수 석방 캠페인에서 갓산 나자르의 석방을 기원하는 포스터를 들고 있는 스페인 국제활동가. (사진출처: 페이스북 페이지 Free Ghassan Najjar)  갓산의 체포와 구금은 어떠한 기소나 재판 절차도 없이 이루어졌으며, 현재까지도 그의 체포 사유는 명시적으로 밝혀지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은 ‘행정 구금(administrative detention)’이라고 불리는 이스라엘의 독특한 제도 때문에 가능했다. 행정 구금은 이스라엘군이 별도의 사법 절차 없이도 체포 및 구금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이다. 팔레스타인 서안지구에서 행해지는 행정 구금은 ‘군사명령 1651’의 제285조에 근거하고 있는데, 이 조항에 따르면 이스라엘군은 해당 지역의 안보와 공공의 안보를 위해서는 구금이 필요하다고 추정할 합리적 근거가 있는 팔레스타인 민간인들을 사법 절차 없이 구금할 수 있다. 구금의 타당성은 이스라엘 군사법원이 체포 및 구금이 행해진 지 8일 이내에 비공개 심리를 진행한 후에 결정하는데, 군 지휘관이 요청한 기간대로 승인이 이루어지며, 피구금인의 항소 요청은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스라엘 인권단체인 B'TSELEM에 따르면 갓산처럼 행정 구금제도에 의해 이스라엘에 수감된 팔레스타인인은 2020년 6월 기준 357명에 이른다고 한다. 가장 최근의 이스라엘 군사법원의 결정이 이행되더라도 갓산의 유무죄를 다투는 재판은 10월 11일에 시작되고 최종판결은 언제 확정될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그동안 갓산은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도,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도, 소중한 가족과 접견할 권리도 박탈된 채 최소한의 인간적 존엄성을 지킬 처우가 존재하지 않는 이스라엘 감옥에서 갇혀 지내야 한다. 이것이 중동에서 유일한 민주주의 국가라 홍보하는 이스라엘의 민낯이고 팔레스타인을 수십 년간 무력점령한 이스라엘 군의 지배정책이다.
2020-09-09 | hrights | 조회: 724 | 추천: 9
이회림/ 00경찰서  응답하라 시리즈로 인기를 끈 신원호 PD가 슬기로운 의사생활로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세계 최대 온라인 스트리밍 서비스 업체인 넷플릭스에서도 시청률 1위를 달릴 정도로 화제의 드라마가 되었지요. ‘슬기로운 의사생활'의 전작 '슬기로운 감빵생활' 도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었다고 합니다. 여동생의 성폭력범을 응징하다가 체포 된 야구스타가 별난 재소자들 사이에서 고군분투하는 내용이라고 하던데 아직 한 회도 제대로 챙겨 보지는 못했습니다.  병원과 교도소는 경찰이라면 입직과 동시에 가장 많이 왕래하게 되는 장소 중의 하나이기에 매우 익숙한 공간이지만 드라마의 주요 배경으로서 보고 싶지는 않은 곳입니다. 익숙한 공간이긴 하나 결코 친숙하지는 않기 때문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슬기로운 시리즈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슬기로운' 으로 시작하는 이 드라마의 제목부터가 무한한 호감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입니다.  오랜만에 국어사전을 열어 글자 모양마저 남달라 보이는 곱디 고운 '슬기로운'을 한 번 찾아보았습니다. <슬기로운> 슬기롭다의 ㅂ 불규칙 형용사 '슬기롭다'의 활용형 슬기롭다 즉, 슬기가 있다 ‘슬기’ 사리를 바르게 판단하고 일을 잘 저리해 내는 재능 유의어는 기지, 재치, 현명  처음 '슬기'라는 단어를 배운 때가 아마 초등학교 1학년 때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바른 생활, 즐거운 생활, 슬기로운 생활" 예전에는 세상에 나온 지 겨우 7년에서 8년 된 어린이들을 학교라는 생소한 공간에 모아 놓고 등교 첫 날 위의 책 세 권을 줬습니다. 선생님들은 이 세 권의 가이드북을 길잡이 삼아 바르고 즐거우며 슬기롭게 다른 사람들과 잘 어울려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쳤습니다. 사람의 기본적인 인성과 자아 정체성은 가정이라는 기초적인 사회화 공간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되지만 사회생활을 위한 체계적 교육은 이렇듯 인위적 단체인 학교에서부터 책 세권과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사진 출처 - 서울책보고  초등학교 1학년 입학식 때의 기억을 되살려 봅니다.  학교는 유치원과 분위기부터 매우 달라서 다들 긴장한 표정이 역력합니다. 어떤 아이는 긴장해서 과도하게 떠들고 또 어떤 아이는 긴장해서 아예 말이 없는 등, 각자 천성에 어울리는 모습으로 반응합니다. 어수선한 교실 안, 처음 보는 또래 아이들 사이에서 역시 처음 보는 어른인 담임선생님으로부터 책 3권을 받았습니다. 책을 받아들고 제목을 보며 제일 먼저 든 생각은 ‘바른’과 ‘즐거운’은 알겠는데 ‘슬기로운’은 정확히 뭘 말하는 거지?였습니다. 바른 생활과 즐거운 생활은 어렵지 않게 감이 잡히는데 ‘슬기로운 생활’은 다소 차원이 다른 단어로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슬기로운 생활은 국어사전의 뜻풀이처럼 ‘사리를 바르게 판단하고 일을 잘 처리해 내는 재능’을 필요로 하는 고차원적인 생활입니다. 즐겁게, 바르게 사는 사람이 곧 슬기로운 사람을 의미하지는 않지만 슬기로운 사람은 즐겁고 바르게 삽니다. 모든 것을 순수하게 받아들이고 대처할 수 있는 유연함을 가진 어른이 되어가는 것은 참으로 힘든 과정이 예약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기에 어른이 되어서도 늘 초등학교 1학년 같은 맑은 마음으로, 슬기롭게 생활하는 방법을 계속해서 업데이트하고 배워나가야 되나봅니다.  혹시 신원호 PD의 “슬기로운”시리즈에 "초등학교 1학년 슬기로운 생활'에 바치는 오마쥬가 조금이라도 들어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해 봅니다. 어느 공간에서 어떤 일을 하게 되든 늘 ‘슬기롭게’ 사람들과 관계 맺음할 수 있도록 도움 주는 인생 첫 가이드북 “슬기로운 생활” 에 대한 언급이 한 번은 있지 않을까요? 아직 시리즈의 한 회도 보지 못한 시점에서 하는 말이라 드라마 내용과는 상관이 없을 수도 있지만요.  요즘 모 포털 사이트의 커뮤니티에서 “감빵생활” 과 “의사생활”을 잇는 다음 직업군은 “경찰생활”이나 “형사생활” 이 될 것 같다는 예측놀이가 한창입니다. 현재 스코어로는 경찰생활이 우세한데 소방관, 군인이 그 뒤를 바짝 쫓고 있더군요. 그나저나 슬기로운 시리즈의 세 번째 이야기가 나오기 전에 감빵생활ㆍ의사생활부터 챙겨봐야겠습니다.
2020-09-02 | hrights | 조회: 976 | 추천: 6
최유라/ 지구의 방랑자  “어디 사세요?”, “자취하세요?” 이와 같은 질문으로 시작해서 대부분의 대화는 ‘고향이 어디예요’까지 이어지곤 한다. 그러면 그 순간 나는 입을 다문다. 일부러 라기보다는 저절로 닫히고 만다. 남들이 그토록 가보고 싶어 하고 아름답다고 상찬하는 그 도시가 내게는 기억에서 도려내고 싶을 만큼의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고향에는 바다의 굴만큼이나 다방이 많았다. 다방은 청소년들의 일자리이기도 했다. 나이를 가늠하기 어렵게 하려고 짙은 화장을 하고 짧은 치마를 입은 소녀들의 한 손에는 다방 커피를 감싼 보자기가, 다른 한 손에는 오토바이를 모는 이의 허리가 붙들려 있었다. 오토바이를 모는 그도 청소년이었다. 하지만 도시는 이 모든 풍경을 못 본 체했다. 청소년의 흔한 비행일 뿐이라고 여겼다. 누구도 이 사실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그렇게 아이들은 도시에서 버려졌다. 단지 청소년이 해야 할 학업이라는 ‘본분’에 충실하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침묵을 선택한 도시는 때때로 혐오로 침묵을 깼다. 다방에서 일하는 여자아이에게 “더럽다”느니 “이미 버린 몸”이라느니 하며 여성혐오로만 소비했고, 그 아이들은 ‘여자가 공부해야 하는 이유’의 예시가 되었다. 부모가 다방이나 술집을 운영하는 집의 딸들은 뒷말에 시달려야 했다. 학교에서도 바깥에서도, 편견의 꼬리표는 끈덕지게 달라붙어 있었다.  고향에는 특정 광고의 현수막도 수없이 많이 내걸렸다. “베트남 처녀와 결혼하세요.”와 같은 문구의 매매혼 중개였다. 엄마의 지인 가족 중 한 명도 매매혼을 통해 결혼했다. 내 또래인 베트남 여성은 마흔 넘은 남성과 결혼을 하게 되었다. 나는 이 사실을 듣고 울분에 찼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고 엄마에게 화를 냈지만, 엄마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받아넘겼다. 그 후 그녀의 임신 소식을 들었고, 매니큐어를 하고 밭일하다 시어머니에게 혼났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나는 매일 억지로 학교에 갔지만, 그녀에게는 학교에 가는 일은 꿈도 꿀 수 없는 것이었다. 누군가에는 평범한 일상이 누군가에는 애초에 주어지지 못하는 선택지였다. 사진 출처 - pixabay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도망치듯 서울에 온 이후 고향에 거의 가지 않았다. 나 또한 방관자라는 사실로부터 도망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곳을 벗어나면, 이 모든 것들이 내 눈에 띄지만 않는다면 괜찮으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리석은 생각이었다. 대한민국 곳곳에서 숨 돌릴 틈도 없이 사건들은 터졌고, 그것들은 고향에서의 감정들을 고스란히 되살려냈다. 현실에서도 꿈속에서도 나는 고향이 아닌 곳에서 자꾸만 고향과 대면해야 했고, 더는 달아날 곳이 없어 괴로웠다. 살기 위해 방황하는 나를 마주하는 것도 괴로웠고 내가 이 문제를 바꿀 힘이 없다는 사실에도 힘들었다.  손정우가 재판 도중 매매혼을 했다는 것도 충분히 역겨운데, 그게 저 어처구니없는 판결에 영향을 주었다니 할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서울시장의 성추행 사건을 두고 가해자에 이입한 채 터져 나오는 언어들에도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밤은 매일 찾아왔고 헤아릴 수 없는 고통이 쌓인 채 밤을 맞이하면 현실과 꿈 사이에서 헤맨다. 오늘도 또. 벗어나지도 마주하지도 못하는 이곳, 대한민국은 나의 고향인 것이다.
2020-07-29 | hrights | 조회: 1014 | 추천: 6
홍세화/ 대학생  인간이 살아갈 때 ‘의(衣)·식(食)·주(住)’중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과거였다면 생명과 직결되는 ‘식(食)’이 가장 중요한 요소로 꼽혔겠지만, 요즘 같은 시대에는 제대로 된 거처를 마련하는 것이 먹을 것을 구하는 것보다 어렵기 때문에 아마도 ‘주(住)’가 삶을 영위하는데 가장 중요한 요소로 꼽히리라 생각된다. 어떤 고된 하루를 보내었다 하더라도 내 몸 하나 편히 뉘일 수 있는 공간, 돌아가서 쉴 수 있는 ‘집’이 있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사람들은 심리적으로 큰 위안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심리적 위안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사람이 대한민국에는 몇이나 될까? 사진 출처 - 1boon 카카오  대한민국의 주택보급률은 2018년 기준 104.2%이다. 주택 보급률이 100%가 넘어가는 기괴한 수치는 주택 소유의 양극화를 보여준다. 어떤 사람은 주택을 한 채도 갖고 있지 못한 반면, 어떤 사람은 수십 채, 수백 채의 집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몇몇 아파트에는 공실이 많아 문제라는데도 당장 잘 곳이 없어 길을 헤매는 홈리스들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이유다.  최근 정부에서 주택 공급 확대를 위해 서울의 그린벨트(개발제한구역) 해제를 검토한다는 입장을 밝힌 후 이에 대한 갑론을박이 이어졌다. 결과적으로는 그린벨트를 보존하는 것으로 일단락됐지만, 이러한 논란이 생겨난 배경에는 우리 사회에 만연한 ‘부동산 불패신화’가 한몫했다고 생각한다.  현재 발생하고 있는 주거난은 주택보급률 수치에서도 알 수 있듯이, 주택 공급 부족이 문제가 아닌, 불균형한 주택 소유율이다. 대한민국에서 집은 더 이상 살아가는 곳이 아닌 경제적 수단으로 여겨지고, 이에 따라 부동산은 투기의 장이 되어가고 있다.  주거난을 해결하기 위해서 정부에서는 청년 전세지원금 제도, 행복주택, 임대주택, 주거급여 등등 다양한 주거복지사업을 시행하고 있다, 그러나 얼마 전 주택공사의 한 간부가 임대주택 입주민 대표에게 “못 사는 게 집주인한테” 등의 망언을 남발한 것을 보면 주거 복지 수혜자들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저변에 어느 정도 깔려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때문에 주거난은 주거복지사업 선에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 근본적인 원인이 되는 부동산 투기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직 우리 대한민국에는 집 없이 살아가는 많은 ‘민달팽이’들이 있다. 우리나라가 진정한 선진국 반열에 오르기 위해서는 이들을 따스히 감싸줄 수 있는 확실한 방안을 찾아내야할 것이다.
2020-07-22 | hrights | 조회: 873 | 추천: 6
김형수/ 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 총장  최근 코로나 19 사태 속에서 3건의 발달장애인 존비속 살인이 있었다.  하나는 광주 성인발달장애인 질식사 후 부모 자살 사건, 또 하나는 제주도의 18세 장애학생의 죽음과 부모 자살 사건이며, 나머지 하나는 자폐성 발달장애 9세 딸 살해사건에 징역 4년을 선고한 사건이다. 광주의 경우에는 코로나로 인한 국가 개입의 부재가 부른 범죄가 분명해 보이고 제주도 사건은 양육부담 이외에도 다른 원인도 있으리라 여기지만 확실히 알 수는 없다. 마지막 울산 사건의 경우는 부모 한쪽도 자살을 시도 했지만 미수에 그쳐서 처벌을 받은 사건이다. 특히나 중증 장애인의 경우, 바이러스 사태 때문에 사회적 지원과 협력이 모두 중단된 나머지 장애인의 돌봄이 모조리 가족들에게 전가되어 모두가 최악의 상황에 몰려가는 중에 일어난 것이라 더욱 충격이 크다. 따라서 그 지역 부모님들이 ‘발달장애인 부모 일동’의 이름으로 참담한 사연들을 담아 국가적 지원과 사회적 관심을 촉구하는 청와대 청원까지 제기하셨다.  그리고 필자는 그 청와대 청원의 표현에 대하여 인권 감수성에 문제가 있다면서 공식적으로 SNS를 통해 반대했고 많은 장애인 부모로부터 비난과 질타를 받았다. “발달장애인 청년과 그 엄마의 죽음에 대해 대통령님 응답해주시기 바랍니다” 사진 출처 - 국민청원 게시판  중증 장애인의 지원과 조력, 그리고 돌봄에 있어 장애인 부모들의 극한의 어려움을 너무나 잘 알고 있고 분노하며 당신들의 요구에 대한 나의 입장은 분명히 동일하다. 그러나 이번의 죽음에 대하여 활동가들과 인권 단체들은 이제 불편하고 고통스런 토론과 논쟁을 시작할 때가 되었다. 장애인의 문제가 인권의 문제이며 소수자의 문제라면 이제 우리는 단순하고 감정적인 온정주의와, 무책임하고 무비판적인 연대와 침묵에 대한 성찰과 실천이 필요하다.  우리는 그동안 오랜 역사의 유교적인 가족주의에서 만들어진 법체계 내에서 자녀에 의한 부모의 살인 즉 존속 살인은 과중하게 처벌하고 – 우리나라는 ‘존속 살인’ 이란 개념 아래 이를 가중 처벌하는 법조문을 가진 몇 안 되는 나라 중 하나이다. - 그동안 경제 발전이란 미명 아래 부모에 의한 자녀의 살인은 오히려 감형해주는 기형적이며 가부장적인 제도를 운영하고 있었다.  감형의 근거는 과거 첫 번째가 ‘경제적인 이유’ 였고 두 번째가 ‘정신적인 이유’였다. 법원의 이런 온정주의는 90년대 후반부터 변하기 시작하여 사회적 여론도 점차 변하기 시작했으나 장애인 자녀의 죽음과 관련해서는 여전히 제자리다. 인권 활동가들과 인권 단체들은 이제 장애인 부모단체가, 일부 활동가들이 돌봄의 부담에 대해 국가적, 사회적 책임을 묻기 위하여 위의 청원처럼 자녀들의 죽음과 비자발적 안락사를 설득의 서사로 활용하는 것에 대하여 비판적 물음을 던져야 한다. 이것은 돌봄으로 야기된 어려움을 폭력과 반인권적으로 푸는 것을 합리화하거나 정당화시킬 수 있는 위험이 있으며 장애에 대한 자기혐오일 뿐 아니라 단체 이름으로 자행되는 집단 혐오이다. 그 언어들이 아무리 공감되고 설득된다 한들, 우리가 다른 소수자들에게 같은 언사로 사회적 메시지를 던지는가?  집단의 표현은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크게 준다. 당신들의 위치가, 발언 당사자들로서의 당신들의 힘이 문화적으로 그만큼 크기 때문이다. 대중들에게 설득하기 위해 풀어낸 감성적인 표현들이 보다 높은 인권 감수성으로 정제 되지 않으면 오히려 차별과 혐오를 스며들게 하는 반작용이 있다.  무엇보다 이 대목 “6월의 어느 날 새벽 발달장애청년과 그 엄마는 차안에서 연탄가스를 교통편 삼아......”로 이어지는 묘사 같은 것이 문제이다. 이런 표현들은 청원의 의도와는 달리, 발달 장애인의 존재부정의 메시지를 대중에게 보낸다. 개인이 아니라 인권 단체라면 먼저 이 부모의 일방적인 폭력과 살의에 사과하고 국가의 책임을 물어야 하지 않았을까?  이 사건은 명백한 부모 폭력이며 극단적 장애인 학대 사건이다. 정책적으로 국가가 방조 · 방기한 살인 사건이며 정부는 미필적 종범이다.  아무리 부모가 힘들고 고통스럽다 한들 단체 이름으로 그 살의와 살인을 표현하고 집행하는 것을 정서적으로라도 용인하면 안 된다. 상처와 이해라는 이름으로 상상하는 행위에 대한 비판과 반성을 멈추어서는 안 된다. 동기가 무엇이든 간에 부모라는 권력과 관계가 살인을 쉽게 도모할 수 있게 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비극과 안타까움의 이름으로 이 폭력과 범죄의 현실을 정당화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끊임없이 다른 방법, 다른 길이 있다고 외쳐야 한다.  장애인 비속 살인은 극단적 선택이 아니다. 상상으로라도 절대로 해서는 안 된다. 장애인을 개별 주체로 보지 않겠다는 자기혐오이자 순환 혐오일 뿐이다. 특히 광주와 같은 사건에서 장애인 당사자가 부모와 함께 자살하는 것에 동의 했는지, 부모가 장애인 당사자 살해 후 자살했는지 명확하지 않으나 – 명확하게 경찰이 사건 조사를 하지 않은 것도 분명히 문제 제기 해야 한다. - 장애인 당사자 살해 후 자살이라면 이건 분명 비속 살인으로 기록되어야 한다. 장애인 당사자가 억울한 피해자이기 때문이다. 장애인 당사자가 죽음을 자발적으로 선택하지 않았다면 극단적인 장애인 학대일 뿐이다. 단지 안타까운 사건으로만 말하는 언론의 태도가 바뀌지 않는다면, 온정주의적인 대중의 태도가 바뀌지 않는다면, 부모단체와 인권단체들이 보다 민감하게 다른 방법이 있음을 외치지 않는다면, 아무리 사회적 지원이 많아지고 풍부해지더라도 이런 사건은 반복될 것이다. 1990년대부터 그마나 늘어난 사회적 지원에도 지금까지 장애인 가족의 존비속 살인은 크게 줄지 않았다.  단체 청원이라고 하면, 인권단체라고 하면, 얼마든지 더 강한 표현으로 더욱 세고 다르게 청원할 수 있다. 장애인의 비속 살인을 멈추라. 가족들을 살인자로 만들지 마라. 이렇게 강하게 정부를 규탄할 수 있다. 장애인 부모 단체의 그 대표성이 개인화되지 않고 더 높은 인권감수성으로 더 많은 대중들에게 해결을 위한 강한 정치력과 연대를 끌어낼 수도 있다. 대중들이 발달 장애인에게 높은 인권감수성을 갖추기를 바란다면 부모 단체들과 인권단체들이 이를 이끌어 주면 좋지 않겠는가?  이런 사건과 청원을 접하는 대중들과 부모들이 장애와 장애인을 단지 ‘고통과 부담’으로만 받아들이지 않기를, 장애인 당사자들이 살인과 살해의 공포에 놓이지 않기를, 가족의 우울 앞에 당사자가 죄책감을 가지지 않기를, 부모들의 삶과 장애인 당사자의 삶이 온전히 정서적으로, 감정적으로, 법적으로 개별주체로 인식되어 지원되고 발달 장애란 존재 자체가 부정되지 않길 바란다. 장애인의 주체적 존중과 국가 책임제를 요구하는 마당에 이는 지극히 자기 모순적이며 자기혐오, 순환 혐오이다. 공적인 발언을 통해 그런 인식을 자꾸만 재생산하는 건 막아야 하지 않겠는가? 최소한 장애인 당사자를 죽음으로 이끈 부모가 같은 단체소속이고 같이 활동했다는 이유로, 돌봄의 책임을 죽음으로 다했다는 명예를 주는 것은 그만 목격하고 싶다. 최소한 함께 명복을 빌고 안타까워하더라도 가해자와 피해자가 같은 자리에서 죽음을 논하는 것은 전혀 인권적이지 않음을 다시 한 번 밝히고 싶다.
2020-07-08 | hrights | 조회: 1050 | 추천: 3
이동화/ 사단법인 아디 활동가  2019년에 다시 만난 팔레스타인 활동가 라쉬드는 많이 피곤해보였고 주름은 한층 깊어졌다. 그는 ‘요르단계곡’ 마을의 농부이면서 이스라엘의 부당한 인권침해 사실을 알리는 ‘요르단계곡연대(Jordan Valley Solidarity) 소속 활동가이기도 하다. 2018년에 이어 2019년에도 팔레스타인을 방문한 한국의 참가단에게 ‘요르단계곡’ 주민들이 겪는 부당한 현실에 대해 열성적으로 이야기하던 그가 저녁 즈음에 필자에게 짧게 하소연했다. “셀림(필자의 현지이름), 요즘 정말 힘들어. (한숨) 갈수록 어려워져.”  ‘요르단계곡(Jordan Valley)’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요르단 국경이 위치한 지역으로 예수님이 세례를 받은 요르단강과 지구에서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한 사해(Dead Sea)로 이어지는 지역을 일컫는다. 이 지역은 수천 년 동안 주변국가의 곡창지대(Food basket) 역할을 하며 팔레스타인 입장에서 보면 서안지구의 30%를 차지할 만큼 방대한 지역이고 6만 5천명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농업과 축산업에 종사하며 삶을 일구어 내는 터전이다. 하지만 1967년 3차 중동전쟁이후 이스라엘은 요르단 계곡을 포함한 팔레스타인 전 지역을 무력으로 점령하였다. 특히 이 지역은 대부분 군사지역으로 설정이 되어 사람들의 이동제한, 수자원 이용 제한, 토지 몰수 등 수십년동안 피해가 이어져 오는 지역이기도 하다. 이러한 ‘요르단계곡’이 또 한차례 심각한 위기에 직면해 있다.  2020년 1월, 이른바 ‘세기의 협상’이라는 미국 트럼프 행정부의 중동평화안이 공개되자 이스라엘은 환호했고 팔레스타인은 절망했다. 평화안의 주요골자는 ①서안지구 불법정착촌의 주권인정 ②예루살렘을 이스라엘 수도로 인정 ③요르단계곡을 이스라엘로 편입 ④팔레스타인에 500억 달러 금융제공 ⑤이스라엘 사막지역 팔레스타인 대체부지 제공 등이다. 완벽하게 이스라엘 우파쪽에서 수십 년 동안 추진하던 팔레스타인 합병계획을 뒷받침하는 평화안인 동시에 팔레스타인을 더욱 쪼개고 분리시키는 21세기판 아파르트헤이트(인종분리)정책이다. 요르단계곡 합병시위에 참여한 팔레스타인 여성들과 주민들 사진 출처 - 요르단계곡연대 JVS 홈페이지  이스라엘의 네타냐후 총리는 2019년부터 총선공약으로 팔레스타인 서안지구의 정착촌과 요르단 계곡 지역을 이스라엘에 합병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최근 기사에 따르면 2020년 7월부터 이 합병계획을 추진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국제사회는 미국 트럼프 행정부와 이스라엘 네타냐후 총리의 계획이 엄연히 국제법 위반이고 그동안 국제사회가 합의했던 원칙에 위배된다고 강조했다. 지난 6월 16일 유엔의 47명 인권전문가들은 “(이스라엘의 서안)합병은 전쟁과 경제 황폐화, 정치적 불안, 조직적 인권유린 등을 야기할 것이고 심각한 국제법 위반이다”라는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역시 강력한 반대의 의견을 수차례 발표하며, ‘합병이 진행될 경우 그동안 이스라엘과 맺은 모든 협상을 무효로 돌리겠다’고 선언하지만 현실적인 대응방법이 있는지는 미지수이다.  실제로 이스라엘의 합병계획에 맞서 싸우는 이들은 팔레스타인 풀뿌리 조직들과 그 지역에 거주하는 팔레스타인 주민들이다. 그들은 수십 년째 이스라엘 군대와 경찰에 저항하며 스스로의 인권과 평화를 위해 투쟁하고 있다. ‘요르단계곡연대’ 단체는 “We will fight to the end(우리는 끝까지 싸울 것이다)”라고 외치며 팔레스타인 내부에서 대대적인 시위를 조직하고 있다. 그리고 7월 1일 국제적인 캠페인 “The Day of Rage on 1st July(7월 1일 분노의 날)”을 준비하고 있다.  현지에서 긴박한 메일과 소식을 접하면서 다시 라쉬드의 한숨이 떠올랐다. 압도적인 무력 앞에서도 용기를 잃지 않았던 활동가가 순간 내비친 피곤함의 단면. 당시 그에게 힘이 되고 싶었지만 할 수 있는게 별로 없었다. 하지만 그는 다시 팔레스타인을 지지하는 해외의 활동가에게 연락하고 sns를 통해 시위를 조직하고 있다. 삶의 고단함속에서도 저항의 불씨는 아이러니하게 평화를 외치는 권력자들에 의해 계속 타오르고 있다. 미국과 이스라엘이 안보와 평화를 외치는 만큼 그 지역의 평화는 깨져나가고 사람들의 생존은 위협받는 현실이 계속 반복되고 있다.
2020-06-24 | hrights | 조회: 1200 | 추천: 7
김아현/ 인권연대 간사 아이  모자이크 너머로도 상처는 뚜렷했다. 온통 새까맣게 멍든 아이의 눈두덩은 언뜻 귀신처럼 보이기도 했다. 눈두덩뿐만 아니라 온몸에 격한 폭력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아이는 웬만한 성인도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결단을 했다고 했다. 학대하는 부모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창문을 넘어 4층 높이의 빌라 난간으로 맨발을 딛었다.  그런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것은 아이가 가지고 있던 어떤 기억 덕분일지 모른다고 했다. 그는 아홉 살 인생을 내내 지옥에서만 보내지 않았다. 2년 정도 위탁가정에서 지냈던 경험이 있다고 했다. 누가 때리지 않는 평온한 하루, 배를 곯지 않는 것이 당연한 일상을 살아본 아이는, 돌아온 제 집이 비정상이라는 것을 알아챘을 것이다. 살려면 여기를 나가야 한다는 것, 집 밖에는 도움을 줄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렇게 지옥을 나온 아이는, 아이의 맨발과 상처를 외면하지 않고 영문을 물어오는 어른을 만났다. 소녀  소녀의 어머니는 신병을 앓고 있었고 당뇨가 심각했다. 부모는 소녀가 초등학교 3학년 때 이혼했다. 어머니와 함께 살았지만 중학교 들어가던 해, 어머니가 당뇨 합병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와 살기 위해 서울로 돌아왔고 그때부터 지옥 같은 삶이 시작되었다.  한 달에 백만 원 남짓을 벌어오는 아버지는 심각한 알코올중독이었고, 술에 취하면 자기 엄마를 잡아먹은 년이라고 욕을 해댔다.  집 밖도 편하지 않았다. 어머니처럼 신병을 앓는 소녀는 어려서부터 집단 따돌림을 당했다. 소녀는 종종 집이 아닌 곳, 학교가 아닌 곳으로 나왔다. 술도 마시고 담배도 피웠는데 그러려면 돈이 많이 들었다. 그럴 때 소녀를 찾는 어른들이 있었다. 그 어른들은 소녀에게 돈을 주고 성을 샀다. 소녀는 열아홉 살에 임신을 했고, 이 일을 계기로 아버지의 폭언은 더욱 심해졌다. 낙태 후에도 소녀는 어른들에게 성을 팔다 발각되었고 분류심사를 거쳐 보호관찰 대상이 되었다. 사진 출처 - 영화 <범죄소년> 소년들  보호관찰 과정을 성실히 이행하지 못한 소년들이 많이 들어온다고 했다. 심각한 폭력의 가해자인 경우도, 어른 못지않은 사기행각을 벌인 경우도 있지만, 어쨌거나 보호관찰 과정에서 소년원으로 보내진 소년들도 많았다. 성인으로 치면 가석방에 해당하는 임시퇴원 과정에서 다시 들어온 소년들도 제법 있다. 우리는 성소수자나 빈자, 노인과 장애인, 여성, 아이들에게 대체로 가혹한데, ‘잘못을 저지른 소년’쯤 되면 어떨까. 좋은 밥을 먹을 수 없고, 책등이 떨어져나간 책을 읽어야하고, 눈앞에 있는 운동장에서 뛸 수 없어도, 죗값을 치르는 당연한 처우라고 말한다. 그런데, 그들이 소년원에 오기까지 살아온 ‘소년원 밖’의 세상과 어른들이 어땠는가를 들어보면, 부끄럽고 미안해지는 것이다. 어른의 조건  어른이란 무엇일까. 스무 해나 서른 해 넘게 살면, 결혼을 하면, 부모가 되면, 잘못을 저지르는 아이에게 잔소리를 하고 혼을 내는 게 어색하지 않은 나이가 되면, 우리는 어른이 되는 걸까. 어쨌거나 ‘생물학적인 어른’이 되는 일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최소한 만으로 20년은 사고나 병, 혹은 자살로 죽지 않고 살아있어야 하기 때문에 그렇다. 생각해보면 나쁜 어른이 되는 것도 쉬운 일만은 아니다. 돈을 주고 아이의 성을 사려면 감수해야 할 것들이 엄청나다. 아이를 때리고 굶기는 경우에도 그렇다. 자칫하다가는 남은 인생이 매우 곤란해질 것을 각오해야 한다.  그에 비하면 ‘좋은 어른’이 되는 것은 얼마나 쉬운 일인지 모르겠다. 사정이 있어 보이는 아이를 외면하지 않고 안부를 물어봐주거나, 배고파 보이는 아이에게 한 끼 밥을 먹일 짬을 내거나, 아이를 윽박지르고 때리는 부모를 신고하거나, 소년원 출신이라고 눈흘겨보지 않고 다정한 한 마디를 건네주거나 하는 아주 쉬운 일로도, 우리는 누군가의 삶에 손을 내미는 좋은 어른이 될 수 있다. 근사한 일이다.
2020-06-17 | hrights | 조회: 1263 | 추천: 39
주윤아/ 교사  스쿨미투의 시초였던 용화여고의 가해 교사가 한차례 무혐의 처분 끝에 지난 5월 불구속 기소되고 첫 공판을 앞두고 있다. 고발부터 재판에 이르는 2년 남짓의 과정에서 학생들과 시민의 힘이 크게 작용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용화여고 학생들이 2018년 4월 창문에 포스트잇을 붙여 학교 내 성폭력을 고발하며 시작된 스쿨미투는 1) 2년간 전국 100여 개의 학교로 번졌다. 용화여고의 가해 및 연루 교사 대부분은 가벼운 징계처분을 받은 후 다시 학교로 복귀했고, 파면된 교사 1명만이 유일하게 수사 대상에 올랐으나 같은 해 12월 증거불충분으로 불기소 처분되었다. 검찰과 교육청의 미온적 대응과 2차 가해까지 발생하며 학생들은 위축되고 지지 단체의 활동도 줄어들며 세간의 관심에서도 멀어지는 듯했다. 그러나 2019년 '노원 스쿨미투를 지지하는 시민모임'이 진정서를 접수하면서 추가 보완 수사가 이루어져 검찰이 지난해 12월 수사를 재기하자 다시 시민모임은 지난달 5월 검찰의 기소 여부를 앞두고 총 8,403명의 개인 및 단체 연명을 받아 탄원서를 제출하고, 검찰의 기소와 엄중한 처벌이 결정될 때까지 1인 시위를 이어갔다. 결국 피해 사실을 제기한 지 2년이 훌쩍 넘어 가해 교사가 재판을 받게 되었다.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는 신고를 하면 법이 해결해 줄 것이라 믿었던 학생들의 미투 이후 또 다른 지옥의 시간을 잊지 않아야 하고, 피해 학생들의 진술 의지가 가장 큰 역할을 했다는 점을 성찰해야 한다.  2019년 정치하는 엄마들은 스쿨미투 전국현황 데이터베이스(스쿨미투 전국지도)를 공개하며 학교별 사안처리에 대한 정보공개 청구 후 정보공개 판결을 받았지만, 서울시교육청이 항소하여 결국 깜깜이 징계가 되어 버렸다. 이처럼 스쿨미투 2년이 지나도록 학교가 평등하고 안전한 공간이 되기는커녕 최근 ‘속옷 빨래 숙제 낸 초등교사’, ‘애인이 필요하다’며 기간제 여교사에게 성희롱을 일삼은 초등 교감 사건에서 보여지듯, 다양하고 교묘한 방식의 학교 내 성폭력이 이어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학교가 오히려 각종 성범죄의 온상이 되고 있는 실정이다. 지난 3월 대한민국은 코로나19 신종바이러스의 습격 못지않은 텔레그램 집단 성착취 사건, 일명 ‘N번방’의 끔찍한 보도를 접하게 된다. 사실 우리 사회의 디지털 성착취 범죄 사건은 1997년 ‘빨간 마후라’ 사건이 세상에 알려진 이후 소라넷사이트, 연예인 단톡방 불법 촬영물 유포 사건 등 일일이 나열할 수 없을 만큼 많고 결코 그 역사가 짧지도 않다. 그러나 이를 단지 오락거리로 소비하거나 혹은 소수의 일탈로 치부하며 제대로 된 대책을 마련하지 않은 결과, 처벌받지 않은 소라넷 회원 100만 명이 보안이 강한 해외 사회관계망서비스(SNS)로 그대로 이동한 것으로 볼 수 밖에 없다.  특히 충격적인 것은 이번 텔레그램 N번방 사건에서 경찰이 확인한 피해자 중 아동청소년 피해자의 수가 16명에 달하며, 여기에는 초등학생까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디스코드 등을 이용한 디지털 성범죄에 가담한 10대 청소년이 전체의 70%에 달한다고 한다. 촌각을 다투며 발달하는 다양한 메신저는 10대 청소년 등 미성년 사용자가 많은 것이 당연하고 앞으로 더 가속화될 것이다. 피해자 단속을 강조하는 성폭력 예방교육과 여성 혐오가 일상의 유머로 통용되는 학교 문화, 오랜 억압과 차별이 구조화된 학교는 평등하고 안전한 공간은커녕 성폭력과 성착취 범죄의 토양이 되기 십상이다. 성인지 감수성의 변화 없이는 겉으론 스쿨미투는 지지한다고 말해도 뒤에서는 그릇되고 왜곡된 성의식으로 또 다른 성범죄를 주도하거나 가담하는 결과만 낳을 뿐이다. 사진출처 - 정치하는 엄마들(https://www.politicalmamas.kr/school_me_too)  스쿨미투 2년을 돌아보면 학내 성폭력의 오랜 역사만큼이나 그 처벌 과정 또한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재학생 혹은 졸업생 피해자들이 피해 사실에 대한 반복적 진술 과정과 낯선 수사와 재판 절차를 오롯이 감당하며 고소 진행 의지를 유지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그러므로 사법 처벌의 전 과정을 피해자 개인(학생)에게 전가하는 방식은 지양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평등하고 안전한 학교를 바라며 피해 학생들이 어렵게 용기를 낸 스쿨미투의 해결 주체는 누가 되어야 하는가? 사법부와 교육청은 각종 성범죄에 가담한 교·사대 예비교사들이 교단에 서지 못하도록 해야 하며, 스쿨미투 등 각종 성비위 관련 교원들을 강력하게 처벌해야한다. 일상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성범죄가 당연히 ‘범죄’임을 명확히 하고, 가해자가 처벌받고 피해자는 보호받는 제도를 실제 작동시켜, 피해자들이 자신이 목소리를 낸 것을 후회하지 않도록 응답해야 할 것이다.  스쿨미투 해결을 바라는 이들은, 스쿨미투의 첫 시작을 연 용화여고의 가해 교사 기소 및 재판부의 판결을 지켜보고 있으며, 정의로운 판결이 나올 때까지 ‘With You’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우리 사회가 더이상 스쿨미투 피해자들에게 ‘해결’까지 떠넘겨서는 안 될 일이다. 1) 정치하는 엄마들 스쿨미투 전국지도(https://www.politicalmamas.kr/school_me_too)
2020-06-10 | hrights | 조회: 1062 | 추천: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