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에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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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에가시’는 현장을 살아가는 활동가들의 목소리를 담기 위한 칼럼 공간입니다.

‘목에가시’는 김성은(서울신문 기자), 김태형(프리랜서 방송작가), 김형수(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 총장), 박용석(출판업), 신종환(공무원), 윤요왕(춘천별빛사회적협동조합 이사장), 이동화(아디 사무국장), 이승은(경찰관), 이원영(용산시민연대 공동대표), 정한별(사회복지사)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이동화/ 사단법인 아디 활동가  팔레스타인 나블루스(Nablus)의 부린(Burin)마을은 이스라엘 불법점령촌에 의한 가장 피해가 심각한 마을중 하나이고 사단법인 아디가 2017년부터 인권피해조사와 같은 현지 활동을 수행할 때 꼭 방문했던 마을이다. 그리고 아디의 방문시마다 도움을 주었던 부린마을 출신의 활동가인 갓산 나자르(Ghassan Najjar)가 이스라엘 군에 의해 체포되어 두 달 반이 지난 지금까지도 구금 상태에서 풀려나지 못하고 있다.  이스라엘군은 지난 6월 25일 한밤중에 마을에서 가족들과 함께 지내던 갓산을 체포해 알-잘리메(Al-Jalimeh) 심문 센터로 끌고 갔다. 이스라엘 군사법원은 갓산의 구금을 일주일 단위로 계속 연장했고, 그는 7월 말부터 8월 초까지 이어진 이슬람교 명절인 이드 알 아드하(Eid al-Adha) 기간도 가족들과 함께 보낼 수 없었다. 8월 중순이 되자 갓산은 다른 팔레스타인인 수감자들과 함께 알-잘리메 심문 센터에서 메기도(Megiddo) 감옥으로 이감되었으며, 이때부터 3일 단위로 구금이 연장되기 시작했다. 8월 27일에는 다음 재판 날짜를 10월 11일로 연기한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갓산이 언제쯤 석방될 수 있을지는 더욱 예측하기 어려워졌다. 8월 8일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진행한 팔레스타인 양심수 석방 캠페인에서 갓산 나자르의 석방을 기원하는 포스터를 들고 있는 스페인 국제활동가. (사진출처: 페이스북 페이지 Free Ghassan Najjar)  갓산의 체포와 구금은 어떠한 기소나 재판 절차도 없이 이루어졌으며, 현재까지도 그의 체포 사유는 명시적으로 밝혀지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은 ‘행정 구금(administrative detention)’이라고 불리는 이스라엘의 독특한 제도 때문에 가능했다. 행정 구금은 이스라엘군이 별도의 사법 절차 없이도 체포 및 구금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이다. 팔레스타인 서안지구에서 행해지는 행정 구금은 ‘군사명령 1651’의 제285조에 근거하고 있는데, 이 조항에 따르면 이스라엘군은 해당 지역의 안보와 공공의 안보를 위해서는 구금이 필요하다고 추정할 합리적 근거가 있는 팔레스타인 민간인들을 사법 절차 없이 구금할 수 있다. 구금의 타당성은 이스라엘 군사법원이 체포 및 구금이 행해진 지 8일 이내에 비공개 심리를 진행한 후에 결정하는데, 군 지휘관이 요청한 기간대로 승인이 이루어지며, 피구금인의 항소 요청은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스라엘 인권단체인 B'TSELEM에 따르면 갓산처럼 행정 구금제도에 의해 이스라엘에 수감된 팔레스타인인은 2020년 6월 기준 357명에 이른다고 한다. 가장 최근의 이스라엘 군사법원의 결정이 이행되더라도 갓산의 유무죄를 다투는 재판은 10월 11일에 시작되고 최종판결은 언제 확정될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그동안 갓산은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도,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도, 소중한 가족과 접견할 권리도 박탈된 채 최소한의 인간적 존엄성을 지킬 처우가 존재하지 않는 이스라엘 감옥에서 갇혀 지내야 한다. 이것이 중동에서 유일한 민주주의 국가라 홍보하는 이스라엘의 민낯이고 팔레스타인을 수십 년간 무력점령한 이스라엘 군의 지배정책이다.
2020-09-09 | hrights | 조회: 706 | 추천: 9
이회림/ 00경찰서  응답하라 시리즈로 인기를 끈 신원호 PD가 슬기로운 의사생활로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세계 최대 온라인 스트리밍 서비스 업체인 넷플릭스에서도 시청률 1위를 달릴 정도로 화제의 드라마가 되었지요. ‘슬기로운 의사생활'의 전작 '슬기로운 감빵생활' 도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었다고 합니다. 여동생의 성폭력범을 응징하다가 체포 된 야구스타가 별난 재소자들 사이에서 고군분투하는 내용이라고 하던데 아직 한 회도 제대로 챙겨 보지는 못했습니다.  병원과 교도소는 경찰이라면 입직과 동시에 가장 많이 왕래하게 되는 장소 중의 하나이기에 매우 익숙한 공간이지만 드라마의 주요 배경으로서 보고 싶지는 않은 곳입니다. 익숙한 공간이긴 하나 결코 친숙하지는 않기 때문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슬기로운 시리즈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슬기로운' 으로 시작하는 이 드라마의 제목부터가 무한한 호감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입니다.  오랜만에 국어사전을 열어 글자 모양마저 남달라 보이는 곱디 고운 '슬기로운'을 한 번 찾아보았습니다. <슬기로운> 슬기롭다의 ㅂ 불규칙 형용사 '슬기롭다'의 활용형 슬기롭다 즉, 슬기가 있다 ‘슬기’ 사리를 바르게 판단하고 일을 잘 저리해 내는 재능 유의어는 기지, 재치, 현명  처음 '슬기'라는 단어를 배운 때가 아마 초등학교 1학년 때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바른 생활, 즐거운 생활, 슬기로운 생활" 예전에는 세상에 나온 지 겨우 7년에서 8년 된 어린이들을 학교라는 생소한 공간에 모아 놓고 등교 첫 날 위의 책 세 권을 줬습니다. 선생님들은 이 세 권의 가이드북을 길잡이 삼아 바르고 즐거우며 슬기롭게 다른 사람들과 잘 어울려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쳤습니다. 사람의 기본적인 인성과 자아 정체성은 가정이라는 기초적인 사회화 공간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되지만 사회생활을 위한 체계적 교육은 이렇듯 인위적 단체인 학교에서부터 책 세권과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사진 출처 - 서울책보고  초등학교 1학년 입학식 때의 기억을 되살려 봅니다.  학교는 유치원과 분위기부터 매우 달라서 다들 긴장한 표정이 역력합니다. 어떤 아이는 긴장해서 과도하게 떠들고 또 어떤 아이는 긴장해서 아예 말이 없는 등, 각자 천성에 어울리는 모습으로 반응합니다. 어수선한 교실 안, 처음 보는 또래 아이들 사이에서 역시 처음 보는 어른인 담임선생님으로부터 책 3권을 받았습니다. 책을 받아들고 제목을 보며 제일 먼저 든 생각은 ‘바른’과 ‘즐거운’은 알겠는데 ‘슬기로운’은 정확히 뭘 말하는 거지?였습니다. 바른 생활과 즐거운 생활은 어렵지 않게 감이 잡히는데 ‘슬기로운 생활’은 다소 차원이 다른 단어로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슬기로운 생활은 국어사전의 뜻풀이처럼 ‘사리를 바르게 판단하고 일을 잘 처리해 내는 재능’을 필요로 하는 고차원적인 생활입니다. 즐겁게, 바르게 사는 사람이 곧 슬기로운 사람을 의미하지는 않지만 슬기로운 사람은 즐겁고 바르게 삽니다. 모든 것을 순수하게 받아들이고 대처할 수 있는 유연함을 가진 어른이 되어가는 것은 참으로 힘든 과정이 예약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기에 어른이 되어서도 늘 초등학교 1학년 같은 맑은 마음으로, 슬기롭게 생활하는 방법을 계속해서 업데이트하고 배워나가야 되나봅니다.  혹시 신원호 PD의 “슬기로운”시리즈에 "초등학교 1학년 슬기로운 생활'에 바치는 오마쥬가 조금이라도 들어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해 봅니다. 어느 공간에서 어떤 일을 하게 되든 늘 ‘슬기롭게’ 사람들과 관계 맺음할 수 있도록 도움 주는 인생 첫 가이드북 “슬기로운 생활” 에 대한 언급이 한 번은 있지 않을까요? 아직 시리즈의 한 회도 보지 못한 시점에서 하는 말이라 드라마 내용과는 상관이 없을 수도 있지만요.  요즘 모 포털 사이트의 커뮤니티에서 “감빵생활” 과 “의사생활”을 잇는 다음 직업군은 “경찰생활”이나 “형사생활” 이 될 것 같다는 예측놀이가 한창입니다. 현재 스코어로는 경찰생활이 우세한데 소방관, 군인이 그 뒤를 바짝 쫓고 있더군요. 그나저나 슬기로운 시리즈의 세 번째 이야기가 나오기 전에 감빵생활ㆍ의사생활부터 챙겨봐야겠습니다.
2020-09-02 | hrights | 조회: 958 | 추천: 6
최유라/ 지구의 방랑자  “어디 사세요?”, “자취하세요?” 이와 같은 질문으로 시작해서 대부분의 대화는 ‘고향이 어디예요’까지 이어지곤 한다. 그러면 그 순간 나는 입을 다문다. 일부러 라기보다는 저절로 닫히고 만다. 남들이 그토록 가보고 싶어 하고 아름답다고 상찬하는 그 도시가 내게는 기억에서 도려내고 싶을 만큼의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고향에는 바다의 굴만큼이나 다방이 많았다. 다방은 청소년들의 일자리이기도 했다. 나이를 가늠하기 어렵게 하려고 짙은 화장을 하고 짧은 치마를 입은 소녀들의 한 손에는 다방 커피를 감싼 보자기가, 다른 한 손에는 오토바이를 모는 이의 허리가 붙들려 있었다. 오토바이를 모는 그도 청소년이었다. 하지만 도시는 이 모든 풍경을 못 본 체했다. 청소년의 흔한 비행일 뿐이라고 여겼다. 누구도 이 사실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그렇게 아이들은 도시에서 버려졌다. 단지 청소년이 해야 할 학업이라는 ‘본분’에 충실하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침묵을 선택한 도시는 때때로 혐오로 침묵을 깼다. 다방에서 일하는 여자아이에게 “더럽다”느니 “이미 버린 몸”이라느니 하며 여성혐오로만 소비했고, 그 아이들은 ‘여자가 공부해야 하는 이유’의 예시가 되었다. 부모가 다방이나 술집을 운영하는 집의 딸들은 뒷말에 시달려야 했다. 학교에서도 바깥에서도, 편견의 꼬리표는 끈덕지게 달라붙어 있었다.  고향에는 특정 광고의 현수막도 수없이 많이 내걸렸다. “베트남 처녀와 결혼하세요.”와 같은 문구의 매매혼 중개였다. 엄마의 지인 가족 중 한 명도 매매혼을 통해 결혼했다. 내 또래인 베트남 여성은 마흔 넘은 남성과 결혼을 하게 되었다. 나는 이 사실을 듣고 울분에 찼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고 엄마에게 화를 냈지만, 엄마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받아넘겼다. 그 후 그녀의 임신 소식을 들었고, 매니큐어를 하고 밭일하다 시어머니에게 혼났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나는 매일 억지로 학교에 갔지만, 그녀에게는 학교에 가는 일은 꿈도 꿀 수 없는 것이었다. 누군가에는 평범한 일상이 누군가에는 애초에 주어지지 못하는 선택지였다. 사진 출처 - pixabay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도망치듯 서울에 온 이후 고향에 거의 가지 않았다. 나 또한 방관자라는 사실로부터 도망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곳을 벗어나면, 이 모든 것들이 내 눈에 띄지만 않는다면 괜찮으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리석은 생각이었다. 대한민국 곳곳에서 숨 돌릴 틈도 없이 사건들은 터졌고, 그것들은 고향에서의 감정들을 고스란히 되살려냈다. 현실에서도 꿈속에서도 나는 고향이 아닌 곳에서 자꾸만 고향과 대면해야 했고, 더는 달아날 곳이 없어 괴로웠다. 살기 위해 방황하는 나를 마주하는 것도 괴로웠고 내가 이 문제를 바꿀 힘이 없다는 사실에도 힘들었다.  손정우가 재판 도중 매매혼을 했다는 것도 충분히 역겨운데, 그게 저 어처구니없는 판결에 영향을 주었다니 할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서울시장의 성추행 사건을 두고 가해자에 이입한 채 터져 나오는 언어들에도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밤은 매일 찾아왔고 헤아릴 수 없는 고통이 쌓인 채 밤을 맞이하면 현실과 꿈 사이에서 헤맨다. 오늘도 또. 벗어나지도 마주하지도 못하는 이곳, 대한민국은 나의 고향인 것이다.
2020-07-29 | hrights | 조회: 994 | 추천: 6
홍세화/ 대학생  인간이 살아갈 때 ‘의(衣)·식(食)·주(住)’중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과거였다면 생명과 직결되는 ‘식(食)’이 가장 중요한 요소로 꼽혔겠지만, 요즘 같은 시대에는 제대로 된 거처를 마련하는 것이 먹을 것을 구하는 것보다 어렵기 때문에 아마도 ‘주(住)’가 삶을 영위하는데 가장 중요한 요소로 꼽히리라 생각된다. 어떤 고된 하루를 보내었다 하더라도 내 몸 하나 편히 뉘일 수 있는 공간, 돌아가서 쉴 수 있는 ‘집’이 있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사람들은 심리적으로 큰 위안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심리적 위안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사람이 대한민국에는 몇이나 될까? 사진 출처 - 1boon 카카오  대한민국의 주택보급률은 2018년 기준 104.2%이다. 주택 보급률이 100%가 넘어가는 기괴한 수치는 주택 소유의 양극화를 보여준다. 어떤 사람은 주택을 한 채도 갖고 있지 못한 반면, 어떤 사람은 수십 채, 수백 채의 집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몇몇 아파트에는 공실이 많아 문제라는데도 당장 잘 곳이 없어 길을 헤매는 홈리스들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이유다.  최근 정부에서 주택 공급 확대를 위해 서울의 그린벨트(개발제한구역) 해제를 검토한다는 입장을 밝힌 후 이에 대한 갑론을박이 이어졌다. 결과적으로는 그린벨트를 보존하는 것으로 일단락됐지만, 이러한 논란이 생겨난 배경에는 우리 사회에 만연한 ‘부동산 불패신화’가 한몫했다고 생각한다.  현재 발생하고 있는 주거난은 주택보급률 수치에서도 알 수 있듯이, 주택 공급 부족이 문제가 아닌, 불균형한 주택 소유율이다. 대한민국에서 집은 더 이상 살아가는 곳이 아닌 경제적 수단으로 여겨지고, 이에 따라 부동산은 투기의 장이 되어가고 있다.  주거난을 해결하기 위해서 정부에서는 청년 전세지원금 제도, 행복주택, 임대주택, 주거급여 등등 다양한 주거복지사업을 시행하고 있다, 그러나 얼마 전 주택공사의 한 간부가 임대주택 입주민 대표에게 “못 사는 게 집주인한테” 등의 망언을 남발한 것을 보면 주거 복지 수혜자들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저변에 어느 정도 깔려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때문에 주거난은 주거복지사업 선에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 근본적인 원인이 되는 부동산 투기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직 우리 대한민국에는 집 없이 살아가는 많은 ‘민달팽이’들이 있다. 우리나라가 진정한 선진국 반열에 오르기 위해서는 이들을 따스히 감싸줄 수 있는 확실한 방안을 찾아내야할 것이다.
2020-07-22 | hrights | 조회: 854 | 추천: 6
김형수/ 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 총장  최근 코로나 19 사태 속에서 3건의 발달장애인 존비속 살인이 있었다.  하나는 광주 성인발달장애인 질식사 후 부모 자살 사건, 또 하나는 제주도의 18세 장애학생의 죽음과 부모 자살 사건이며, 나머지 하나는 자폐성 발달장애 9세 딸 살해사건에 징역 4년을 선고한 사건이다. 광주의 경우에는 코로나로 인한 국가 개입의 부재가 부른 범죄가 분명해 보이고 제주도 사건은 양육부담 이외에도 다른 원인도 있으리라 여기지만 확실히 알 수는 없다. 마지막 울산 사건의 경우는 부모 한쪽도 자살을 시도 했지만 미수에 그쳐서 처벌을 받은 사건이다. 특히나 중증 장애인의 경우, 바이러스 사태 때문에 사회적 지원과 협력이 모두 중단된 나머지 장애인의 돌봄이 모조리 가족들에게 전가되어 모두가 최악의 상황에 몰려가는 중에 일어난 것이라 더욱 충격이 크다. 따라서 그 지역 부모님들이 ‘발달장애인 부모 일동’의 이름으로 참담한 사연들을 담아 국가적 지원과 사회적 관심을 촉구하는 청와대 청원까지 제기하셨다.  그리고 필자는 그 청와대 청원의 표현에 대하여 인권 감수성에 문제가 있다면서 공식적으로 SNS를 통해 반대했고 많은 장애인 부모로부터 비난과 질타를 받았다. “발달장애인 청년과 그 엄마의 죽음에 대해 대통령님 응답해주시기 바랍니다” 사진 출처 - 국민청원 게시판  중증 장애인의 지원과 조력, 그리고 돌봄에 있어 장애인 부모들의 극한의 어려움을 너무나 잘 알고 있고 분노하며 당신들의 요구에 대한 나의 입장은 분명히 동일하다. 그러나 이번의 죽음에 대하여 활동가들과 인권 단체들은 이제 불편하고 고통스런 토론과 논쟁을 시작할 때가 되었다. 장애인의 문제가 인권의 문제이며 소수자의 문제라면 이제 우리는 단순하고 감정적인 온정주의와, 무책임하고 무비판적인 연대와 침묵에 대한 성찰과 실천이 필요하다.  우리는 그동안 오랜 역사의 유교적인 가족주의에서 만들어진 법체계 내에서 자녀에 의한 부모의 살인 즉 존속 살인은 과중하게 처벌하고 – 우리나라는 ‘존속 살인’ 이란 개념 아래 이를 가중 처벌하는 법조문을 가진 몇 안 되는 나라 중 하나이다. - 그동안 경제 발전이란 미명 아래 부모에 의한 자녀의 살인은 오히려 감형해주는 기형적이며 가부장적인 제도를 운영하고 있었다.  감형의 근거는 과거 첫 번째가 ‘경제적인 이유’ 였고 두 번째가 ‘정신적인 이유’였다. 법원의 이런 온정주의는 90년대 후반부터 변하기 시작하여 사회적 여론도 점차 변하기 시작했으나 장애인 자녀의 죽음과 관련해서는 여전히 제자리다. 인권 활동가들과 인권 단체들은 이제 장애인 부모단체가, 일부 활동가들이 돌봄의 부담에 대해 국가적, 사회적 책임을 묻기 위하여 위의 청원처럼 자녀들의 죽음과 비자발적 안락사를 설득의 서사로 활용하는 것에 대하여 비판적 물음을 던져야 한다. 이것은 돌봄으로 야기된 어려움을 폭력과 반인권적으로 푸는 것을 합리화하거나 정당화시킬 수 있는 위험이 있으며 장애에 대한 자기혐오일 뿐 아니라 단체 이름으로 자행되는 집단 혐오이다. 그 언어들이 아무리 공감되고 설득된다 한들, 우리가 다른 소수자들에게 같은 언사로 사회적 메시지를 던지는가?  집단의 표현은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크게 준다. 당신들의 위치가, 발언 당사자들로서의 당신들의 힘이 문화적으로 그만큼 크기 때문이다. 대중들에게 설득하기 위해 풀어낸 감성적인 표현들이 보다 높은 인권 감수성으로 정제 되지 않으면 오히려 차별과 혐오를 스며들게 하는 반작용이 있다.  무엇보다 이 대목 “6월의 어느 날 새벽 발달장애청년과 그 엄마는 차안에서 연탄가스를 교통편 삼아......”로 이어지는 묘사 같은 것이 문제이다. 이런 표현들은 청원의 의도와는 달리, 발달 장애인의 존재부정의 메시지를 대중에게 보낸다. 개인이 아니라 인권 단체라면 먼저 이 부모의 일방적인 폭력과 살의에 사과하고 국가의 책임을 물어야 하지 않았을까?  이 사건은 명백한 부모 폭력이며 극단적 장애인 학대 사건이다. 정책적으로 국가가 방조 · 방기한 살인 사건이며 정부는 미필적 종범이다.  아무리 부모가 힘들고 고통스럽다 한들 단체 이름으로 그 살의와 살인을 표현하고 집행하는 것을 정서적으로라도 용인하면 안 된다. 상처와 이해라는 이름으로 상상하는 행위에 대한 비판과 반성을 멈추어서는 안 된다. 동기가 무엇이든 간에 부모라는 권력과 관계가 살인을 쉽게 도모할 수 있게 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비극과 안타까움의 이름으로 이 폭력과 범죄의 현실을 정당화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끊임없이 다른 방법, 다른 길이 있다고 외쳐야 한다.  장애인 비속 살인은 극단적 선택이 아니다. 상상으로라도 절대로 해서는 안 된다. 장애인을 개별 주체로 보지 않겠다는 자기혐오이자 순환 혐오일 뿐이다. 특히 광주와 같은 사건에서 장애인 당사자가 부모와 함께 자살하는 것에 동의 했는지, 부모가 장애인 당사자 살해 후 자살했는지 명확하지 않으나 – 명확하게 경찰이 사건 조사를 하지 않은 것도 분명히 문제 제기 해야 한다. - 장애인 당사자 살해 후 자살이라면 이건 분명 비속 살인으로 기록되어야 한다. 장애인 당사자가 억울한 피해자이기 때문이다. 장애인 당사자가 죽음을 자발적으로 선택하지 않았다면 극단적인 장애인 학대일 뿐이다. 단지 안타까운 사건으로만 말하는 언론의 태도가 바뀌지 않는다면, 온정주의적인 대중의 태도가 바뀌지 않는다면, 부모단체와 인권단체들이 보다 민감하게 다른 방법이 있음을 외치지 않는다면, 아무리 사회적 지원이 많아지고 풍부해지더라도 이런 사건은 반복될 것이다. 1990년대부터 그마나 늘어난 사회적 지원에도 지금까지 장애인 가족의 존비속 살인은 크게 줄지 않았다.  단체 청원이라고 하면, 인권단체라고 하면, 얼마든지 더 강한 표현으로 더욱 세고 다르게 청원할 수 있다. 장애인의 비속 살인을 멈추라. 가족들을 살인자로 만들지 마라. 이렇게 강하게 정부를 규탄할 수 있다. 장애인 부모 단체의 그 대표성이 개인화되지 않고 더 높은 인권감수성으로 더 많은 대중들에게 해결을 위한 강한 정치력과 연대를 끌어낼 수도 있다. 대중들이 발달 장애인에게 높은 인권감수성을 갖추기를 바란다면 부모 단체들과 인권단체들이 이를 이끌어 주면 좋지 않겠는가?  이런 사건과 청원을 접하는 대중들과 부모들이 장애와 장애인을 단지 ‘고통과 부담’으로만 받아들이지 않기를, 장애인 당사자들이 살인과 살해의 공포에 놓이지 않기를, 가족의 우울 앞에 당사자가 죄책감을 가지지 않기를, 부모들의 삶과 장애인 당사자의 삶이 온전히 정서적으로, 감정적으로, 법적으로 개별주체로 인식되어 지원되고 발달 장애란 존재 자체가 부정되지 않길 바란다. 장애인의 주체적 존중과 국가 책임제를 요구하는 마당에 이는 지극히 자기 모순적이며 자기혐오, 순환 혐오이다. 공적인 발언을 통해 그런 인식을 자꾸만 재생산하는 건 막아야 하지 않겠는가? 최소한 장애인 당사자를 죽음으로 이끈 부모가 같은 단체소속이고 같이 활동했다는 이유로, 돌봄의 책임을 죽음으로 다했다는 명예를 주는 것은 그만 목격하고 싶다. 최소한 함께 명복을 빌고 안타까워하더라도 가해자와 피해자가 같은 자리에서 죽음을 논하는 것은 전혀 인권적이지 않음을 다시 한 번 밝히고 싶다.
2020-07-08 | hrights | 조회: 1027 | 추천: 3
이동화/ 사단법인 아디 활동가  2019년에 다시 만난 팔레스타인 활동가 라쉬드는 많이 피곤해보였고 주름은 한층 깊어졌다. 그는 ‘요르단계곡’ 마을의 농부이면서 이스라엘의 부당한 인권침해 사실을 알리는 ‘요르단계곡연대(Jordan Valley Solidarity) 소속 활동가이기도 하다. 2018년에 이어 2019년에도 팔레스타인을 방문한 한국의 참가단에게 ‘요르단계곡’ 주민들이 겪는 부당한 현실에 대해 열성적으로 이야기하던 그가 저녁 즈음에 필자에게 짧게 하소연했다. “셀림(필자의 현지이름), 요즘 정말 힘들어. (한숨) 갈수록 어려워져.”  ‘요르단계곡(Jordan Valley)’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요르단 국경이 위치한 지역으로 예수님이 세례를 받은 요르단강과 지구에서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한 사해(Dead Sea)로 이어지는 지역을 일컫는다. 이 지역은 수천 년 동안 주변국가의 곡창지대(Food basket) 역할을 하며 팔레스타인 입장에서 보면 서안지구의 30%를 차지할 만큼 방대한 지역이고 6만 5천명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농업과 축산업에 종사하며 삶을 일구어 내는 터전이다. 하지만 1967년 3차 중동전쟁이후 이스라엘은 요르단 계곡을 포함한 팔레스타인 전 지역을 무력으로 점령하였다. 특히 이 지역은 대부분 군사지역으로 설정이 되어 사람들의 이동제한, 수자원 이용 제한, 토지 몰수 등 수십년동안 피해가 이어져 오는 지역이기도 하다. 이러한 ‘요르단계곡’이 또 한차례 심각한 위기에 직면해 있다.  2020년 1월, 이른바 ‘세기의 협상’이라는 미국 트럼프 행정부의 중동평화안이 공개되자 이스라엘은 환호했고 팔레스타인은 절망했다. 평화안의 주요골자는 ①서안지구 불법정착촌의 주권인정 ②예루살렘을 이스라엘 수도로 인정 ③요르단계곡을 이스라엘로 편입 ④팔레스타인에 500억 달러 금융제공 ⑤이스라엘 사막지역 팔레스타인 대체부지 제공 등이다. 완벽하게 이스라엘 우파쪽에서 수십 년 동안 추진하던 팔레스타인 합병계획을 뒷받침하는 평화안인 동시에 팔레스타인을 더욱 쪼개고 분리시키는 21세기판 아파르트헤이트(인종분리)정책이다. 요르단계곡 합병시위에 참여한 팔레스타인 여성들과 주민들 사진 출처 - 요르단계곡연대 JVS 홈페이지  이스라엘의 네타냐후 총리는 2019년부터 총선공약으로 팔레스타인 서안지구의 정착촌과 요르단 계곡 지역을 이스라엘에 합병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최근 기사에 따르면 2020년 7월부터 이 합병계획을 추진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국제사회는 미국 트럼프 행정부와 이스라엘 네타냐후 총리의 계획이 엄연히 국제법 위반이고 그동안 국제사회가 합의했던 원칙에 위배된다고 강조했다. 지난 6월 16일 유엔의 47명 인권전문가들은 “(이스라엘의 서안)합병은 전쟁과 경제 황폐화, 정치적 불안, 조직적 인권유린 등을 야기할 것이고 심각한 국제법 위반이다”라는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역시 강력한 반대의 의견을 수차례 발표하며, ‘합병이 진행될 경우 그동안 이스라엘과 맺은 모든 협상을 무효로 돌리겠다’고 선언하지만 현실적인 대응방법이 있는지는 미지수이다.  실제로 이스라엘의 합병계획에 맞서 싸우는 이들은 팔레스타인 풀뿌리 조직들과 그 지역에 거주하는 팔레스타인 주민들이다. 그들은 수십 년째 이스라엘 군대와 경찰에 저항하며 스스로의 인권과 평화를 위해 투쟁하고 있다. ‘요르단계곡연대’ 단체는 “We will fight to the end(우리는 끝까지 싸울 것이다)”라고 외치며 팔레스타인 내부에서 대대적인 시위를 조직하고 있다. 그리고 7월 1일 국제적인 캠페인 “The Day of Rage on 1st July(7월 1일 분노의 날)”을 준비하고 있다.  현지에서 긴박한 메일과 소식을 접하면서 다시 라쉬드의 한숨이 떠올랐다. 압도적인 무력 앞에서도 용기를 잃지 않았던 활동가가 순간 내비친 피곤함의 단면. 당시 그에게 힘이 되고 싶었지만 할 수 있는게 별로 없었다. 하지만 그는 다시 팔레스타인을 지지하는 해외의 활동가에게 연락하고 sns를 통해 시위를 조직하고 있다. 삶의 고단함속에서도 저항의 불씨는 아이러니하게 평화를 외치는 권력자들에 의해 계속 타오르고 있다. 미국과 이스라엘이 안보와 평화를 외치는 만큼 그 지역의 평화는 깨져나가고 사람들의 생존은 위협받는 현실이 계속 반복되고 있다.
2020-06-24 | hrights | 조회: 1179 | 추천: 7
김아현/ 인권연대 간사 아이  모자이크 너머로도 상처는 뚜렷했다. 온통 새까맣게 멍든 아이의 눈두덩은 언뜻 귀신처럼 보이기도 했다. 눈두덩뿐만 아니라 온몸에 격한 폭력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아이는 웬만한 성인도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결단을 했다고 했다. 학대하는 부모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창문을 넘어 4층 높이의 빌라 난간으로 맨발을 딛었다.  그런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것은 아이가 가지고 있던 어떤 기억 덕분일지 모른다고 했다. 그는 아홉 살 인생을 내내 지옥에서만 보내지 않았다. 2년 정도 위탁가정에서 지냈던 경험이 있다고 했다. 누가 때리지 않는 평온한 하루, 배를 곯지 않는 것이 당연한 일상을 살아본 아이는, 돌아온 제 집이 비정상이라는 것을 알아챘을 것이다. 살려면 여기를 나가야 한다는 것, 집 밖에는 도움을 줄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렇게 지옥을 나온 아이는, 아이의 맨발과 상처를 외면하지 않고 영문을 물어오는 어른을 만났다. 소녀  소녀의 어머니는 신병을 앓고 있었고 당뇨가 심각했다. 부모는 소녀가 초등학교 3학년 때 이혼했다. 어머니와 함께 살았지만 중학교 들어가던 해, 어머니가 당뇨 합병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와 살기 위해 서울로 돌아왔고 그때부터 지옥 같은 삶이 시작되었다.  한 달에 백만 원 남짓을 벌어오는 아버지는 심각한 알코올중독이었고, 술에 취하면 자기 엄마를 잡아먹은 년이라고 욕을 해댔다.  집 밖도 편하지 않았다. 어머니처럼 신병을 앓는 소녀는 어려서부터 집단 따돌림을 당했다. 소녀는 종종 집이 아닌 곳, 학교가 아닌 곳으로 나왔다. 술도 마시고 담배도 피웠는데 그러려면 돈이 많이 들었다. 그럴 때 소녀를 찾는 어른들이 있었다. 그 어른들은 소녀에게 돈을 주고 성을 샀다. 소녀는 열아홉 살에 임신을 했고, 이 일을 계기로 아버지의 폭언은 더욱 심해졌다. 낙태 후에도 소녀는 어른들에게 성을 팔다 발각되었고 분류심사를 거쳐 보호관찰 대상이 되었다. 사진 출처 - 영화 <범죄소년> 소년들  보호관찰 과정을 성실히 이행하지 못한 소년들이 많이 들어온다고 했다. 심각한 폭력의 가해자인 경우도, 어른 못지않은 사기행각을 벌인 경우도 있지만, 어쨌거나 보호관찰 과정에서 소년원으로 보내진 소년들도 많았다. 성인으로 치면 가석방에 해당하는 임시퇴원 과정에서 다시 들어온 소년들도 제법 있다. 우리는 성소수자나 빈자, 노인과 장애인, 여성, 아이들에게 대체로 가혹한데, ‘잘못을 저지른 소년’쯤 되면 어떨까. 좋은 밥을 먹을 수 없고, 책등이 떨어져나간 책을 읽어야하고, 눈앞에 있는 운동장에서 뛸 수 없어도, 죗값을 치르는 당연한 처우라고 말한다. 그런데, 그들이 소년원에 오기까지 살아온 ‘소년원 밖’의 세상과 어른들이 어땠는가를 들어보면, 부끄럽고 미안해지는 것이다. 어른의 조건  어른이란 무엇일까. 스무 해나 서른 해 넘게 살면, 결혼을 하면, 부모가 되면, 잘못을 저지르는 아이에게 잔소리를 하고 혼을 내는 게 어색하지 않은 나이가 되면, 우리는 어른이 되는 걸까. 어쨌거나 ‘생물학적인 어른’이 되는 일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최소한 만으로 20년은 사고나 병, 혹은 자살로 죽지 않고 살아있어야 하기 때문에 그렇다. 생각해보면 나쁜 어른이 되는 것도 쉬운 일만은 아니다. 돈을 주고 아이의 성을 사려면 감수해야 할 것들이 엄청나다. 아이를 때리고 굶기는 경우에도 그렇다. 자칫하다가는 남은 인생이 매우 곤란해질 것을 각오해야 한다.  그에 비하면 ‘좋은 어른’이 되는 것은 얼마나 쉬운 일인지 모르겠다. 사정이 있어 보이는 아이를 외면하지 않고 안부를 물어봐주거나, 배고파 보이는 아이에게 한 끼 밥을 먹일 짬을 내거나, 아이를 윽박지르고 때리는 부모를 신고하거나, 소년원 출신이라고 눈흘겨보지 않고 다정한 한 마디를 건네주거나 하는 아주 쉬운 일로도, 우리는 누군가의 삶에 손을 내미는 좋은 어른이 될 수 있다. 근사한 일이다.
2020-06-17 | hrights | 조회: 1217 | 추천: 38
주윤아/ 교사  스쿨미투의 시초였던 용화여고의 가해 교사가 한차례 무혐의 처분 끝에 지난 5월 불구속 기소되고 첫 공판을 앞두고 있다. 고발부터 재판에 이르는 2년 남짓의 과정에서 학생들과 시민의 힘이 크게 작용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용화여고 학생들이 2018년 4월 창문에 포스트잇을 붙여 학교 내 성폭력을 고발하며 시작된 스쿨미투는 1) 2년간 전국 100여 개의 학교로 번졌다. 용화여고의 가해 및 연루 교사 대부분은 가벼운 징계처분을 받은 후 다시 학교로 복귀했고, 파면된 교사 1명만이 유일하게 수사 대상에 올랐으나 같은 해 12월 증거불충분으로 불기소 처분되었다. 검찰과 교육청의 미온적 대응과 2차 가해까지 발생하며 학생들은 위축되고 지지 단체의 활동도 줄어들며 세간의 관심에서도 멀어지는 듯했다. 그러나 2019년 '노원 스쿨미투를 지지하는 시민모임'이 진정서를 접수하면서 추가 보완 수사가 이루어져 검찰이 지난해 12월 수사를 재기하자 다시 시민모임은 지난달 5월 검찰의 기소 여부를 앞두고 총 8,403명의 개인 및 단체 연명을 받아 탄원서를 제출하고, 검찰의 기소와 엄중한 처벌이 결정될 때까지 1인 시위를 이어갔다. 결국 피해 사실을 제기한 지 2년이 훌쩍 넘어 가해 교사가 재판을 받게 되었다.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는 신고를 하면 법이 해결해 줄 것이라 믿었던 학생들의 미투 이후 또 다른 지옥의 시간을 잊지 않아야 하고, 피해 학생들의 진술 의지가 가장 큰 역할을 했다는 점을 성찰해야 한다.  2019년 정치하는 엄마들은 스쿨미투 전국현황 데이터베이스(스쿨미투 전국지도)를 공개하며 학교별 사안처리에 대한 정보공개 청구 후 정보공개 판결을 받았지만, 서울시교육청이 항소하여 결국 깜깜이 징계가 되어 버렸다. 이처럼 스쿨미투 2년이 지나도록 학교가 평등하고 안전한 공간이 되기는커녕 최근 ‘속옷 빨래 숙제 낸 초등교사’, ‘애인이 필요하다’며 기간제 여교사에게 성희롱을 일삼은 초등 교감 사건에서 보여지듯, 다양하고 교묘한 방식의 학교 내 성폭력이 이어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학교가 오히려 각종 성범죄의 온상이 되고 있는 실정이다. 지난 3월 대한민국은 코로나19 신종바이러스의 습격 못지않은 텔레그램 집단 성착취 사건, 일명 ‘N번방’의 끔찍한 보도를 접하게 된다. 사실 우리 사회의 디지털 성착취 범죄 사건은 1997년 ‘빨간 마후라’ 사건이 세상에 알려진 이후 소라넷사이트, 연예인 단톡방 불법 촬영물 유포 사건 등 일일이 나열할 수 없을 만큼 많고 결코 그 역사가 짧지도 않다. 그러나 이를 단지 오락거리로 소비하거나 혹은 소수의 일탈로 치부하며 제대로 된 대책을 마련하지 않은 결과, 처벌받지 않은 소라넷 회원 100만 명이 보안이 강한 해외 사회관계망서비스(SNS)로 그대로 이동한 것으로 볼 수 밖에 없다.  특히 충격적인 것은 이번 텔레그램 N번방 사건에서 경찰이 확인한 피해자 중 아동청소년 피해자의 수가 16명에 달하며, 여기에는 초등학생까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디스코드 등을 이용한 디지털 성범죄에 가담한 10대 청소년이 전체의 70%에 달한다고 한다. 촌각을 다투며 발달하는 다양한 메신저는 10대 청소년 등 미성년 사용자가 많은 것이 당연하고 앞으로 더 가속화될 것이다. 피해자 단속을 강조하는 성폭력 예방교육과 여성 혐오가 일상의 유머로 통용되는 학교 문화, 오랜 억압과 차별이 구조화된 학교는 평등하고 안전한 공간은커녕 성폭력과 성착취 범죄의 토양이 되기 십상이다. 성인지 감수성의 변화 없이는 겉으론 스쿨미투는 지지한다고 말해도 뒤에서는 그릇되고 왜곡된 성의식으로 또 다른 성범죄를 주도하거나 가담하는 결과만 낳을 뿐이다. 사진출처 - 정치하는 엄마들(https://www.politicalmamas.kr/school_me_too)  스쿨미투 2년을 돌아보면 학내 성폭력의 오랜 역사만큼이나 그 처벌 과정 또한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재학생 혹은 졸업생 피해자들이 피해 사실에 대한 반복적 진술 과정과 낯선 수사와 재판 절차를 오롯이 감당하며 고소 진행 의지를 유지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그러므로 사법 처벌의 전 과정을 피해자 개인(학생)에게 전가하는 방식은 지양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평등하고 안전한 학교를 바라며 피해 학생들이 어렵게 용기를 낸 스쿨미투의 해결 주체는 누가 되어야 하는가? 사법부와 교육청은 각종 성범죄에 가담한 교·사대 예비교사들이 교단에 서지 못하도록 해야 하며, 스쿨미투 등 각종 성비위 관련 교원들을 강력하게 처벌해야한다. 일상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성범죄가 당연히 ‘범죄’임을 명확히 하고, 가해자가 처벌받고 피해자는 보호받는 제도를 실제 작동시켜, 피해자들이 자신이 목소리를 낸 것을 후회하지 않도록 응답해야 할 것이다.  스쿨미투 해결을 바라는 이들은, 스쿨미투의 첫 시작을 연 용화여고의 가해 교사 기소 및 재판부의 판결을 지켜보고 있으며, 정의로운 판결이 나올 때까지 ‘With You’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우리 사회가 더이상 스쿨미투 피해자들에게 ‘해결’까지 떠넘겨서는 안 될 일이다. 1) 정치하는 엄마들 스쿨미투 전국지도(https://www.politicalmamas.kr/school_me_too)
2020-06-10 | hrights | 조회: 1047 | 추천: 13
최유라/ 지구의 방랑자  함성이 울려 퍼진다. 그들의 후광에 눈을 뜨지 못한다. 심지어는 꿈에 나타나 어찌할 바를 몰라 소리만 지르는 경험도 하게 된다. 인생의 팔 할이 덕질(자신이 좋아하는 분야에 심취하여 그와 관련된 것들을 모으거나 찾아보는 행위를 이르는 말)인 사람이 있다. 그게 바로 나다. 최근에는 페미니스트 래퍼 슬릭(SLEEQ)에 빠져있다. Mnet의 음악 예능 프로그램인 “GOOD GIRL : 누가 방송국을 털었나”에 래퍼 슬릭이 나온다. 한 주의 시작인 월요일이 되면 벌써 목요일만 기다리게 된다. 방송이 목요일에 하기 때문이다. 페이스북에 떠돌던 포스터에서 슬릭을 발견했을 때는 당혹감이 먼저 방문했다. Mnet이라니. 과연 괜찮을까 하는 염려였기 때문이다. 우려의 시선으로 TV 화면을 바라보았었다. 첫 화에서 ‘크루 탐색전’을 했다. 크루 탐색전이란 자신을 가장 잘 표현하는 음악을 선정하여 무대 위에서 자신이 지향하는 음악을 보여줌으로써 어떤 음악적 색깔을 지녔는지 서로를 탐색하는 시간이다. 아티스트 슬릭은 이날 자신의 TITLE 곡 중 하나인 “HERE I GO”를 무대 위에서 선보였다. 이 음악을 Mnet에서 보게 될 줄 누가 상상했겠는가. LGBTAIQ 무지개 깃발이 휘날리는 무대의 장면을 보며 많은 이들이 눈물을 훔쳤을 것이다. 나 또한 무대를 보고 가슴이 먹먹해지고 눈물이 흐르고 말았다. 더 주목할 것은 가사다. “고민하지 / 어떤 게 예술가의 삶 / 누구 위에 있기 위해선 존재하지 않아 / 고민하지 아무도 죽이지 않는 노랫말 / 그 앞에선 어떤 게임도 / 시작 버튼 눌리지 않아 / Here I go Here I go here I” 여성 혐오 가사로 음악을 발매하기까지 한 몇몇 음악인들을 향한 일침일 것이다. 많은 예술인이 이 공연을 보고 심장이 덜컹했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이 생각이 든 이유에는 국립창극단에서 올린 마당놀이 “춘풍이 온다”가 그 문제의 중심에 있다. 사진 출처 - 경향신문  덕질의 반경이 상당히 넓은 편이다. 그중에는 국립창극단 소속의 국악인도 있다. 팬클럽 회원인 나는 팬클럽 사이트에 들어가 종종 공연 스케줄을 확인한다. 그렇게 국립창극단과의 인연을 몇 년째 맺고 있다. 그러다 어느 날 큰 문제에 부딪히게 되었다. 2018년도에 마당놀이 “춘풍이 온다”를 처음으로 봤었다. 극 중에 페미니스트를 비하하는 장면이 꽤 오래 나왔었다. 불편함과 내 연예인 사이에서 갈팡질팡했었다. 스스로 길티플레져(guilty pleasure,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즐거움을 느끼는 행동, 떳떳하지 못한 쾌락)가 되고 말았다. 2019년 또 올려진다는 소식에 덕질 주인공을 보러 간다는 생각만으로 마지막 공연을 약 두 달 전에 예매를 해두었다. 망각의 존재인 나는 그 1년 새 그 장면은 떠올리지도 못한 채 공연 당일만 기다리고 있었다. 2019년 12월의 어느 날 한 작가님의 극 중 페미니스트 비하 장면에 대한 문제 제기로 다시 이 문제가 불거졌다. 언론에 보도되거나 하지는 않았기에 아는 사람만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모른다. 사실 모르는 사람들이 더 많다. 심지어 공연은 성황리에 끝난 것으로 기억한다. 극 중 문제 장면은 이렇다. 페미니스트가 남성과 여성이라는 성별을 갈라 싸움을 유도하는 존재로 그려졌고 이에 “민족이 힘을 합쳐”라는 대사로 페미니스트를 모독한다. 문제 제기에 국립극장에는 이와 같은 답변을 보내왔었다.  “마당놀이는 풍자와 해학, 비틀기를 중심으로 시대정신을 담아내며 지난 40년간 사랑받아왔습니다.” 그 뒤로는 “그중 ‘춘풍이 온다’는 조선 후기의 소설 ‘이춘풍전’을 현대에 맞게 각색한 작품으로 가부장적 사회를 전복시키는 여성 주인공의 활약을 그리고 있습니다.”라는 답변이었다. 그 후 2차 답변으로 “극적 과장과 비틀기를 중심으로 마당놀이에서 자주 사용되는 연출 문법”, “여성 주인공의 활약을 통해 양성평등의 가치를 담고자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내용을 받았다고 작가님이 글을 공유해주셨다. 단순히 ‘여성’이 주인공이라는 것에 방점을 찍어 자신이 ‘평등’의 가치에 얼마나 신경 쓰고 있는가로 정서적 포만감을 느끼고 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심지어는 ‘성평등’이 이야기된 지 오래되었지만 여전히 ‘양성’에 갇힌 답변에 다른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것인가라는 생각도 들었다. 답변에 화가 나 예매를 취소해버렸다. 결국 국립창극단의 사과는 없었다. 아마도 또 똑같은 내용으로 극이 올려지지 않을까 예상한다. 예술의 이름으로 휘둘려지는 폭력은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다. “차별금지법”이 제정되었더라면 연출진은 분명히 처벌받았을 것이다. 차별과 혐오가 예술로 포장되는 현실 앞에서 나는 오늘도 내일도 용기로 맞서는 아티스트 슬릭의 행보를 응원한다. 누구도 죽지 않는, 누구도 다치지 않는 예술의 힘을 믿으면서 나는 오늘도 덕질한다.
2020-06-03 | hrights | 조회: 957 | 추천: 7
이회림/ 00경찰서  쿠르드 여전사 '딜진'은 CNN과의 인터뷰에서 “고향에서는 산책을 하고 싶으면 남자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면서 “여권(女權)을 수호하려고 전투한다. 적(IS)뿐 아니라 가부장제와 싸우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여성이 남성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역할(전쟁)을 수행해 편견을 깼다. 이것은 평등을 이루려는 투쟁”이라면서 “여성해방부대에 합류한 것은 처음 맛본 자유”라고 털어놓았다. ​  위의 쿠르드 여전사의 인터뷰를 읽고 가슴이 아팠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미투운동의 물결 이후 가속화 된 여권신장운동과 쿠르드 여성들이 자진해서 전쟁터로 뛰어드는 현상이 별로 다르지 않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  쿠르드 여전사들이 전쟁터에서 히잡을 벗고 총을 든 것처럼 한국에서 여성경찰이 된다는 것 자체가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성 역할에서 벗어나는 큰 걸음을 뗀 순간입니다. ​  한국의 여성경찰은 경찰의 당면 업무를 하나씩 배워나가며 이를 책임 있게 잘 수행해내는 과정을 통해 저절로 페미니스트가 되는 것 같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가부장제 사회 규범에 의해 양육되었을지라도 경찰 제복을 입게 되면서 새롭게 재사회화의 과정을 겪는 셈이지요. ​  그런데 얼마 전 저희 내부망으로 전달된 전체 메시지를 보고 실망을 금치 못했습니다. 4월 한 달에만 전국에서 접수된 경찰 내 성희롱, 성폭력사건의 수가 두 자리 수 였기 때문입니다. 성범죄가 보통 암수범죄인 것을 감안하면 사실상 더 많은 사건이 있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고 말입니다. ​  그동안 경찰 조직 내에서 이런 일이 생길 때마다 "소수 미꾸라지들의 소행"이라고 일축했던 직원들이 많았습니다. 교사 등을 포함한 공무원 전체의 발생 통계를 따져보면 경찰관에 의한 성비위 사건은 그 수가 매우 적은 편이라는 통계까지 인용하면서요. 그리고 오늘 5월 13일, 전주지법 제11형사부(부장판사 강동원)는 여성경찰관을 성폭행하고 성관계를 암시하는 촬영물을 찍어 동료인 남성경찰관들과 돌려본 혐의로 기소된 A에게 징역 3년 6월을 선고했습니다. 사진 출처 - 세계일보  재판부는 “자신의 신분을 망각하고 피해 여성이 얼마나 상처를 받을지 생각하지 않고 범행을 저질렀다”며 “범행으로 인해 피해자는 수치심과 정신적 고통을 받았으며 앞으로도 정상적인 근무를 어렵게 했다”고 양형 이유를 밝혔습니다. ​  징역 5년을 구형했던 검찰은 "피해자가 강간당한 이후 아무렇지 않게 보이려고 노력한 것은 같은 직장에 다니면서 소문이 날 경우 자신에게 닥칠 모진 현실을 우려했기 때문"이라고 강조했습니다. ​  성범죄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단어가 ‘수치심’ 입니다.  여러 범죄 유형 중, 피해자들이 ‘수치심’을 느끼는 경우는 ‘성범죄’ 이외에는 찾아보기가 힘듭니다. 성인들 사이에 가장 빈번히 일어나는 폭행사건의 경우, 대체로 남성 대 남성의 구도에서 발생하고 있고, 피해를 입은 쪽이 ‘수치심’ 때문에 피해 사실을 숨기려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반면에 남성 대 여성 구도에서 대표적인 범죄 유형인 ‘성범죄’의 경우, 여성 피해자들은 대체로 피해사실을 숨기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  위의 여성경찰의 사례에서도 알 수 있듯이, 피해자들은 종종 피해를 알리지 않고 숨기며 심지어 아무렇지 않게 보이려고 노력하는데다 불특정 다수에 의한 ‘소문’까지 두려워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수치심’이 그들의 마음속에 크게 드리워져 있기 때문에 마음 놓고 입을 떼기가 힘들어지는 것입니다. ​  2019년 10월, 노래방 안에서 만삭 여경에게 노래를 강요하고 부적절한 신체접촉을 하였다는 혐의로 A총경이 직위 해제되었다는 기사가 떠오릅니다. 그때 그 여경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임신까지 한 몸으로, 그런 분위기에 놓여 있었던 것 자체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비현실적인 상황인 것 같습니다.  총알이 난무하는 전쟁터나 그 노래방 안이나 둘 다 야만스럽기는 마찬가지 아닌지요? ​  "적(Is)뿐 아니라 가부장제와도 싸우는 것"이라고 말했던 쿠르드 여전사와 한국 여성경찰이 만난다면 서로 할 말이 참 많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요즘입니다.
2020-05-15 | hrights | 조회: 826 | 추천: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