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에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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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에가시’는 현장을 살아가는 활동가들의 목소리를 담기 위한 칼럼 공간입니다.

‘목에가시’는 김성은(서울신문 기자), 김태형(프리랜서 방송작가), 김형수(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 총장), 박용석(출판업), 신종환(공무원), 윤요왕(춘천별빛사회적협동조합 이사장), 이동화(아디 사무국장), 이승은(경찰관), 이원영(용산시민연대 공동대표), 정한별(사회복지사)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박용석/ 민주노총 전국건설노동조합 수도권북부지역본부 사무국장  궁금하다. 새파랗게 젊다는 게 밑천이 될 수 있을까? 쩨쩨하게 굴지 말고 가슴을 쫙 펴라지만, 가슴을 펴고 사는 전제조건이 단지 젊음일 수 있을까? 1985년생, 따지자면 얼마 전 당선된 제1야당의 당대표와 동갑이지만, 도통 이해할 수 없는 청년 담론의 홍수라는 생각이다. 익지 않아 고개 숙일 필요 없는 것이 청년의 전제조건이 아니라면, 근래 청년이란 꼬리표로 한데 묶이는 것이 꺼려지고 부끄러울 지경이다.  세대 담론이나, 그 세대 담론과의 상호작용으로 발명된 ‘청년 정치’라는 담론이나, 혹은 그에 대한 제각각의 주장과 해석 대부분은 괴상망측하다. 저따위 담론들 안에 얼추 나이가 같다는 것만으로 묶이지 않기를 바란다. “발톱 때 속 박테리아 계보도의 미적 감각을 토론한다”는 포스트 포스트 포스트……포스트 모더니즘. 같지도 않은, 같잖은 담론 실종의 시대라지만. 제발 적당히 할 일이다. “니가 진짜로 진짜로 원하는 게 뭐야”라고 노래하던 누군가도, 이제는 고인이 된 이 시대에. 이제 우리는 내가 진짜로 원하는 게 무엇일까 고민하는 것을 ‘꼰대스럽다’ 이야기하는 우습지도 않은 시대를 창조해 버린 게 아닐까 걱정스럽다. 사진 출처 - 한국일보  ‘짐승의 썩은 고기를 찾아 산기슭을 어슬렁거린다는 하이에나’마냥 여의도는 물론, 각종 관공서 언저리를 떠돌아다니는 젊은이들을 안다. 그네들이 건네는 명함에는 최소 다섯 개의 직함을 적은 경력들로 빼곡히 채워져 있곤 한다. 그렇게 나타나 적혀있기로만 화려한 경력 같지 않은 경력으로 경쟁자를 제치고 자리를 차지한다. 몇 개월 그 자리를 차지하고 나선, 다른 곳에서 다시 출몰하고, 또다시 다른 곳에 출몰하길 반복한다. 그리고 자기들끼리 ‘청년팔이 소년’의 카르텔을 꾸려 정계를 포위하고 나선다. 역설적인 것은 게 중에 잘 풀려 높은 자리에 간 사람은 또 별로 없어 보이긴 한다.  그래서 ‘청년팔이 소년’ 중에 현시점 가장 성공한 자가 이준석이라는 것을 부정하기 어려울 텐데, 그 반대편에 있는 이들이 이준석보다 나은지를 도통 모르겠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싶다. 어차피 직업정치가 특정한 집단이나 세력의 이익과 목적을 대변하는 것이라면, 이준석이야말로 그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는 점은 그래서 우습고, 그래서 무섭다.  청년 할 때 청이 푸르다는 뜻 외에 조용하고 잠잠하다는 뜻도 있다는데. 근천스럽게 즉자적 욕구를 떠들어대는 그저 나이만 젊은것들의 악다구니 속에 조용히, 잠잠히 제 자리에서 세상을 개척하고 있는 청년들은 그 빛을 발하지 못하게 될까 봐 무섭고 우습다. 착하고 예쁘고 말 잘 듣는 청년’임을 증명해내는 자만이 간택되어 청년의 지위를 누릴 수 있다는 증명이. 청년 없는 청년 정치 전성시대가.  어디서부터 어긋난 것일까를 고민해 본다. 세태에 찌들어 그 색이 바래 구차하다는, 소위 ‘꼰대’보다 맑고 푸른 이들은 존재하는지를. 존재하긴 한다면 대체 어디에 있는지를. 아파야 하고, 절망해야 하고, 그러면서 희망도 가지고, 짱돌도 들고, 분노도 하라고 주문받는 이 시대의 청년들은 청년이기를 포기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를. 청년이 필요한 시공간에 실종된 청년을. 정도를 넘은 젊은이들의 홍수를.  “그딴 게 청년이면 나는 청년 안 할란다. 배울 점이 한두 가지쯤은 있는 꼰대라도 될 수 있게 내 자리나 잘 지키고 있어야겠다. 그마저도 어려워 잘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래야 언젠가 다음에 올 청년에게, 그나마 덜 부끄러울 것 같다.” 내 마음은 이런데, 이 시대, ‘착하고 예쁘고 말 잘 듣는 청년’이길 거부한 우리들. 그대들도 아마 나와 비슷한 마음이지 않을까. 청년이기 전에 사람부터 되자고. 꼰대라도 되자고.
2021-07-14 | hrights | 조회: 1559 | 추천: 22
- 유명한 경찰관 A의 민낯 이회림/ 00경찰서  ‘의리’라는 단어를 입에 달고 다니는 남자 경찰 선배가 한 명 있었습니다. 편의상 A선배라고 부르겠습니다.  2017년 겨울, 경찰청 모 부서를 통해 A선배를 처음 알게 되었고 제가 만든 홍보 컨텐츠에 등장하여 형사 시절 이야기를 직접 들려주기도 하였습니다. A선배와 저희 부서는 녹음이 다 끝난 후 서대문구 미근동 모 족발집에 모여 회식을 하게 되었는데 여기에서부터 A는 인간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보다도 ‘의리’라는 썰을 풀기 시작했습니다.  솔직히 그날 A선배에 대한 첫인상은 그다지 좋지 않았습니다. 왠지 모르게 조폭, 양아치 느낌이었고 회식 자리에서 ‘의리’ 외에는 입에서 나오는 단어들이 매우 가벼운 느낌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첫인상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점과 말을 진중하게 하나 언행일치가 안 되는 사람들에게 이용당한 경험이 수 차례 있었던 터라 섣부른 판단을 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을 정리했습니다.  A선배와 저는 인맥이 겹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저와 오랜 인연이 있던 남자 형사 선배들뿐만 아니라 여성 형사 선배들과도 친분이 있었습니다. 특히 여성 경찰 사이에서 전설적인 존재로 존경받던 1세대 여형사 선배님들을 ‘누나’라고 부르기도 하였습니다. 실제로 A선배는 그 ‘누나 선배’와 술자리 중에 저에게 전화를 걸어 친히 ‘누나 선배’를 바꿔주기도 했습니다.  A선배는 2018년부터 소위 ‘잘 나가는’ 모습이 되어 눈썹 문신과 안면윤곽술 등을 시술받았다며 저에게도 권하는 등 마치 준 연예인 같은 분위기를 풍기기 시작하였습니다. 탑클래스 연예인들도 출연하기 힘든 인기 있는 예능 방송에 등장해 출연할 때마다 우호적인 댓글을 몰고 다니며 큰 인기를 끌게 되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요즘은 씨가 말랐다 싶은 정의로운, 의리파 형사의 모습으로 비추어졌기 때문입니다. 수사 형사를 그만둔 지 수년이었지만 방송에서는 계속 형사로 불리고 있었고 주변에 저런 형사 한 명 있으면 범죄가 정말 사라질 것 같은 그런 믿음직한 인상으로 시청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 같습니다. 저와 함께 모 예능에 출연하고 싶으시다며 저를 작가에게 추천한다고 했지만 저는 당시 감찰관으로 근무 중이라 곤란하다고 사양한 일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A선배를 알면 알수록 그 선배가 즐겨 말하던 ‘의리’와는 거리가 먼 언행을 하는 것을 듣게 되었습니다. 특히 본인이 싫어하는 여성에 대해서 뒷담화를 할 때, 입에 담기도 힘든 쌍욕을 즐기는 것이 저에게는 늘 공해였습니다. A선배가 그 여성을 욕하는 이유에는 공감하고 있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욕설이 매번 너무 저속하고 지나쳤습니다. 이러다 보니 1년에 많이 봐야 한 두 번, 그것도 지인들과 함께 만나게 되었고, 가끔 전화가 오면 대중교통 안이라 통화가 힘들다고 핑계를 대고 끊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이제 슬슬 경조사만 챙기는 정도로 멀고 느슨한 관계가 되고 싶었지만 어떤 명확한 계기가 생기지 않고는 딱 잘라서 그렇게 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저에게 그런 계기가 찾아왔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런 계기를 통해서라도 진실하지 못한 인간관계를 정리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시작은 모 영화의 시나리오였습니다. 2020년 7월경, A선배는 저에게 모 영화의 시나리오를 좀 써 줄 수 있겠냐는 제안을 합니다. 대학에서 연극영화과를 졸업한 뒤 경찰에 들어온 후 가끔 취미로 시나리오를 쓰고 있던 저였기에 이런 제안이 반가웠습니다. 어떤 식으로든 상업 영화의 시나리오 초고를 쓰게 된 것 자체가 영광이었기에 돈은 중요하지 않아 원고료도 사양하고 말 그대로 10원도 받지 않고 시나리오를 완성하였습니다. 정확히 2020년 8월 1일부터 9월 15일까지 자투리 시간 혹은 주말에 시간을 내어 시나리오를 썼고 9월 15일에 A선배의 이메일로 1차 완성 시나리오를 전달하였습니다.  그런데 시나리오를 전달하고 6개월이 훨씬 지난 시점에서도 A선배는 영화감독에게 시나리오를 전달했는지 어쨌는지 명확한 말이 없었습니다. 저는 직감적으로 이상하다는 느낌을 갖게 되었습니다. 짧은 경제팀 수사관 경험이지만 관악서와 종로서에서 경제팀 업무를 배우면서 크고 작은 사기꾼들을 여럿 보아 왔기에 A선배의 수법 정도는 훤히 보였습니다. A선배는 가장 낮은 레벨의 사기꾼들이나 하던 수법으로 후배 경찰인 저에게 버젓이 사기를 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A선배는 저와 카톡으로 대화하던 중 자신에게 불리한 증거를 저에게 부주의하게 전송하는 실수를 하였고 저는 그 카톡 덕분에 명백한 증거를 갖게 되었습니다. 제가 팩트를 들이대며 따져 물으면, “그건 너의 오해야~~”라며 증거 앞에서도 확증편향에 빠져 있는 행태를 보였습니다. 사진 출처 - adobe stock  세상엔 A선배처럼 사실을 들이대도 ‘오해야~’ 라고 대충 얼렁뚱땅 넘어가는 사람들이 적잖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기에 이때부터는 화도 나지 않고 마음이 차분해지기 시작했습니다. A선배에게 더이상 문자와 연락을 받지 않을 것이니 연락을 하지 말라고 경고하자 뒤늦은 사과와 읍소가 이어졌습니다. 자신의 번호가 차단된 후로는 다른 번호로 다시 연락이 왔습니다. 저는 그 번호마저 차단하며 더이상 연락하면 ‘스토킹’이라고 재차 경고하였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 출근길, 제가 다니는 경찰서 내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자마자 A선배의 얼굴이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00야..얘기 좀 하자.”며 힘없는 목소리로 말합니다. 저는 그 모습을 보자마자 기가 막혀 “뭐하시는 겁니까? 왜 여기까지 오셨어요? 명백히 스토킹입니다. 더 이상 다가오면 112신고합니다” 라고 말하고는 자리를 피했습니다.  사무실에 들어갔더니 A가 이미 팀장과 팀원들에게 저를 찾아왔다며 인사를 하고 간 후라 저는 이 일을 숨길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팀장님은 저에게 “서울에서 손님 왔던데요~ TV에 나왔던 분 같던데요”라고 친절히 말씀해주셨고 저는 그런 모습을 보면서 그냥 이대로 두었다가는 큰 오해와 소문에 휩싸일 것 같아 제가 당한 일에 대해 팀장님께 알리고 상의를 하였습니다. 그리고나서 저희 서 감찰직원에게도 A선배와의 일에 대해 알렸습니다.  잘못된 인간관계를 정리할 때는 확실히 깨끗하게 하는 것이 맞습니다. 일단 저의 직장 내에서는 팀장과 감찰직원께 얘기를 해 놨으니 A선배의 진실에 대해 알아야 될 다른 사람, 아마도 저처럼 피해를 입은 것이 명백해보이는 영화감독 K에게도 연락을 하였습니다. K의 연락처는 A선배가 끝까지 알려주지 않아 어쩔 수 없이 K가 소속된 일터에 저의 연락처와 메모를 남겼습니다. 운 좋게도 그날 오후에 K로부터 바로 연락이 와 그간의 일을 설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혹시 시나리오 비용은 어떻게 되었는지 아나요?” 저는 10원도 받지 않은 시나리오 비용에 대해 이렇게 K감독에게 질문을 받았습니다. 여기서 K감독이 저에게 해 준 말을 모두 옮겨 쓸 수는 없지만, K감독은 그동안 저의 존재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저에게 확인해주었습니다.  평소에 입으로만 ‘의리’, ‘의리’ 찾던 못난 A선배, 선배 덕분에 저는 표준국어대사전을 다시 열어봅니다. 의리 義理 [의ː리] 1. 명사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 2. 명사 사람과의 관계에서 지켜야 할 바른 도리. 사람으로서, 마땅히, 사람 관계에서, 지켜야 할, 바른, 도리.  A선배가 저와 K감독에게 한 언행은 전혀 ‘의리’와는 거리가 먼 모습일진대 A선배는 자신이 어떤 바르지 않은 행동을 하더라도 무조건 이해하고 감추어 주는 것을 ‘의리’로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이 글을 쓰느라 2018년부터 A선배와 주고받은 카톡을 처음부터 다시 읽어 보니 그동안 꼼꼼히 보지 않은 징글징글한 글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합니다.  “남자나 여자나 의리가... 술 마니 마시고 있네. ㅋ 짐 텐프로 왔네 ㅋ”  위의 문자는 제가 해외에서 장기간 여행 중일 때 보낸 문자로 보이는데 그때 당시에 제대로 못 읽어봤나 봅니다. 이제는 3년이 다 되어가는 시점이지만 저 괴상한 문자에 답글을 한 번 달아보며 이 글을 마쳐보겠습니다.  “어이구, A선배님, 그놈의 ‘의리’ 입으로만 ‘의리의리’ 거리시더니 결국은 후배 여경한테 이런 짓을 다 하시네요. 근데 텐프로를 가든 영프로를 가든 어디 가서 경찰이다, 형사 출신이다. 소리 좀 하지 마세요. 그러다 훅 갑니다.”
2021-07-13 | hrights | 조회: 1120 | 추천: 24
홍세화/ 대학생  지난 6월 9일 광주에서 건물이 붕괴되어 희생자들이 생겨난 참사가 벌어졌다. 이 소식을 뉴스로 접하면서도 대한민국에서, 그것도 2021년에 벌어진 사건이 맞는지 몇 번을 확인했다. 멍하니 뉴스를 보면서도 믿기지가 않았다. 요즘 같은 세상에서 이러한 일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이. 하청의 하청의 하청으로 인해 벌어진 사건이라고 한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부조리는 뿌리를 내려 무고한 이들을 해치는 재앙으로 자라나고 있다. 이번 참사를 가만히 보고 있으니 떠오르는 비슷한 참사가 있었다.  1995년 6월, 삼풍백화점이 붕괴되었을 때 역시 그 원인은 부실 공사를 진행한 삼풍건설과 이를 알면서도 뇌물을 받아 눈감아주고, 용인해 준 강남구청 공무원들의 합작이었다. 얼마 전 TV 프로그램에서 삼풍백화점 붕괴와 관련된 이야기를 방영해 주어 시청하였는데, 시청하는 내내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건축 과정에서부터 설계도를 무시하고 경제적 이윤에만 치중하여 부실 공사를 한 것은 물론이고, 붕괴 이전에 붕괴 전조 현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을 대피시킬 생각보다 먼저 한 것이 백화점 4층에서 진행되었던 보석전의 보석들을 옮기라고 지시한 것이었다. 삼풍백화점 붕괴는 상상을 초월하는 일들이 모여 만들어낸 인재(人災)였다.  이번 광주 건물 붕괴 참사도 마찬가지이다. 싼값에 빨리 건물을 해체하겠다는 생각으로 건설업체는 해체계획서를 무시한 채 공사를 진행했다. 한눈에 봐도 위험천만한 건물 철거 광경에 광주 시민들은 몇 차례 시청과 구청 등에 민원을 제기했으나 그에 대한 조치는 적절히 취해지지 않았고, 건물 붕괴 전조 현상이 나타나자 공사현장의 사람들은 모두 대피하고 약 20분간 건물이 붕괴될 때까지 지켜만 보았다고 한다. 말도 안 되는 일인 것이다. 사진 출처 - 게티 이미지 뱅크  안전불감증과 부조리의 컬래버레이션은 그동안 우리 사회에 많은 재앙을 가져왔다. 그러나 제대로 된 책임자 처벌이 이뤄지지 않고, ‘눈 가리고 아웅’ 식으로 사건을 해결하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 앞서 말한 컬래버는 여전히 우리 사회 곳곳에서 곪아가며 좀먹고 있다.  그 무엇도 생명보다 우선시 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이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해왔는데, 한국 사회에서는 종종 ‘돈’과 같이 생명보다도 우선시 되는 것들이 있는 것 같아 씁쓸하다.  故 김광석 님께서는 삼풍백화점 붕괴 당시, 삼풍백화점 참사와 관련하여 “상식적이지 않은 것이 상식화되어가는 그런 모습들이 많습니다. 주변에.”라며 말씀을 꺼내셨다. 26년이 지난 지금도 그다지 변한 것 없어 보이는 우리 사회가 안타깝다. 앞으로 내가 살아갈 대한민국은 눈 가리고 아웅 식의 일 처리가 아닌, 소를 잃었을 때 외양간을 제대로 고칠 줄이라도 아는 사회가 되었으면 한다.
2021-06-30 | hrights | 조회: 1007 | 추천: 4
김형수/ 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 사무국장 "장애인은 인간으로서의 존엄이 존중되는 권리를 출생하면서부터 갖고 있다. 장애인은 그 장애의 원인 또는 정도에 관계없이 같은 나이의 시민과 똑같은 권리를 갖는다." -장애인의 권리선언 제3항(1975년 12월 9일 제30차 UN 총회에서 결의) ■ 누가 ‘발달’된 인간인가?  필자는 올해 발달장애인 당사자에 대한 연구와 교육 활동을 다섯 가지나 진행하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지적 자폐성 장애인에 대한 특수교육 전문가도 아니요, 가족이나 친지 중에 당신들 당사자가 있는 것도 아니다. 굳이 그들과 연관성을 찾자면 본인의 공식 아이큐가 발달장애 판정이 가능한 경계선 급(?)이란 정도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인이 작년에 이어 계속 지적 자폐성 장애인 청년들, 성인들과 교류하는 것은 기존의 특수교육이나 신경 정신과 관련 전문가 부모들과 전혀 다른 목표를 추구했기 때문일 것이다. 본인의 목적은 그들을 교육하거나 재활하게하는 것에 있지 않다. 나의 목표는 지적 자폐성 장애인 당사자들과 대화하고 소통하고 그들의 표현을 수용하고 그래서 그들을 이해하며 그들에게 그들이 원하는 방식대로 ‘나’를 이해시키는 것에 있다. 왜냐하면 위에서 진행하는 모든 프로그램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그분들의 생각과 의견 그리고 그분들의 ‘선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 그분들과 필자 사이에 원활한 의사소통 코드와 기제를 아직 충분히 ‘발견’하지 못했다. 마치 컴퓨터란 기계와 내가 직접 소통하기 위해서는 도스나 윈도우, 키보드, 마우스, 모니터 등의 ‘인터페이스’ 등이 손쉽게 개발 발달되어 내가 충분히 숙련되어야 하는 것처럼. 나는 아직 그분들과 의사소통을 제대로 할 만큼 나의 직관과 감각과 인터페이스를 발달시키지 못했고 숙련되지 못했다. 누구의 책임이자 능력인가? 그들을 위한 민주주의는 아직 없다.  그래서 나와 세미나를 하는 지적 자폐성 장애인들은 나와 소통할 의무와 책임이 없다. 나를 이해하고 수용해야 할 이유가 없다. 오로지 세미나 진행자인 내가, 그들을 이해하고 수용하고 의사소통을 해야 한다. 나는 그들의 강의 평가에 따라 강의료를 지급받고 고용 계약을 연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갑과 을의 관계에서 ‘을’ 위치에 있는 내가 실질적으로 갑의 관계에 있는 ‘그들’에게 장애 등급을 이유로, 주관적이고 비과학적인 아이큐 검사의 결과로, 언어 사용과 정서적인 유대감이 결여되었다는 이유로 ‘그들’에게 ‘발달’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교육하고 주입하고 강제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 것인가? 그들을 발달장애인이라고 부르는 것도, 지적 자폐성 장애인이라 부르는 것도, 발달이 지체된 사람이라고, 심지어 영혼이 맑디 맑은 사람이라고 부른 것도 나는 그분들에게 물어보지 않았다. 갑의 관계인 그들에게 어떤 이름으로 불러야 하는지 을의 관계인 필자는 동의를 구하지 못했다. 장애인복지법에 발달장애인이란 낱말이 지적 자폐성 장애인이란 말로 개정되었을 때도 당사자인 그분들에게 그 말이 어떤 느낌인지, 좋은지 싫은지 어떤지 당사자에게 인터뷰를 해보거나 설문을 해 본 적이 있는가? 가까운 시일 내에 발달장애인 분들이 우리의 입회 없이, 우리의 참여 없이 우리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름 붙이는 것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대사회적으로 표명하신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필자와 우리는 모두 발달장애인에게는 제국주의이며 파시즘이다. 요즈음 장애계의 가장 큰 화두가 발달장애인법 제정인데 그 과정에 전문가, 교수, 부모, 시설 운영자들은 적극 참여하고 있지만 정작 시설에서 생활하시는 발달장애인분들에게 어떤 법이 얼마나 필요한지, 그들의 언어와 의사소통 방법으로 의견을 구해 본 적이 있는가?  그럴 생각이나 의지라도 있는가? 이 글은 읽고 있는 독자들이 어떻게 발달장애인들이 법을 이해하고 의견을 표명하느냐며 의구심을 갖는다면 나는 이렇게 답해 주고 싶다. 그럴 의심할 시간에 발달장애인이 이해하고 의견을 제시할 수 있는 설문지나 법 해설서나 개발하셔요.라고.  사실 발달장애인분들의 직접 참여 없이 이루어지는 작금의 법 논의나 보건복지부의 발달장애인지원센터 설립 연구들은 그 가치와 이념에 비해 실천과정은 그래서 퇴행적이고 모순적이다. 발달장애인의 지적 능력이 그렇게 의심스럽다면, 발달장애인 중에서도 상위 1%가 있다는 것을 기억해달라. 비장애인 모두가 서울대를 가지 못한다고 우리는 모두 자신의 능력을 제한하지는 않는다. 사진 출처- freepik 지적 자폐성 장애, 발달 장애는 가지고 있는 것일 뿐이다.  발달장애인은 없다.  발달장애인을 이해하고 소통하는 인터페이스와 능력이 없는 우리와 필자와 우리 사회가 있을 뿐이다. 오늘날의 자폐 스펙트럼 진단체계로 보면 과거 뉴튼이나 아인슈타인은 모두 자폐성 장애인으로 분류되었을 테고, 학교 부적응 학생들도 바로 학교라는 시스템이 있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니까. 태초부터 지적 자폐성 장애인은 애초부터 발달이 지체되고 소통이 부재된 것이 아니라 사회 시스템이 인간의 발전속도 인간의 적응 속도보다 훨씬 빠르게 변화한 것뿐이다. 그래서 발달 장애는 앓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기준일 뿐이다. 그들의 기준에서 굳이 이름을 붙인다면 가지고 있을 뿐이다. 지금 필자의 지면에서도 그들이 발달장애인이었다가, 지적 자폐성 장애인이었다가 그들이라 불리기도 한다. 내가, 우리가 그들에게 어떤 이름이 좋은지 물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엑셀도 못하고 카카오톡도 못하는 대학교수는 이 스마트 시대에 발달 지체, 학습 부진이라 부르면 안 되는가? 필자는 문자를 잘 보내지 못하는 아버지와 나날이 소통의 부재와 단락을 느낀다. 상대적인 기준을 가지고 절대적인 학력 평가를 일삼고 사람을 평가하고 한계 짓는 것이 정말 非발달스런 일이다.  다시 한번 묻자. 인간 대뇌의 2%도 그 비밀을 못 밝혀내면서 아이큐 지수 하나로, 산업화 이후 학교 시스템 하나로 인간을 평가하는 것이 정말 발달된 판단인가? 누가 발달장애인인가?
2021-06-30 | hrights | 조회: 934 | 추천: 1
김아현/ 인권연대 전임간사  지금은 온 국민이 그 수용번호를 다 아는 전직 대통령이 현직이던 시절의 일이다. 경제활성화법, 노동개혁법, 테러방지법 등의 입법을 촉구하는 서명운동이 대대적으로 벌어졌었다. 경제계와 청와대는 당시 이것을 ‘민생구하기 입법’이라고 불렀다. 경제계와 청와대는, 천 만 명의 서명을 받아 위 법안들의 국회통과를 촉구하고 경제를 살리는 한편 테러를 방지해 민생을 살리겠다고 했다.  삼성은 물론이고 대한상공회의소를 비롯한 수십여개 경제단체들이 적극적으로 팔을 걷고 나섰다. 보통 서명운동이니 집회니 하는 것들은 주로 ‘빨갱이’들이나 하는 일이었다. 노동조합도 못 만들게 하던 삼성이 사옥에 서명 부스까지 설치하며 팔을 걷고 나설 정도로 우리나라 경제가 백척간두에 서 있나 아무리 둘러봐도, 고급호텔은 늘 예약이 꽉 차 있고 공항엔 출국을 앞둔 이용객들이 가득했다.  재계의 투쟁은 외롭지 않았다. 대통령, 국무총리, 각 부처 장관 등 고관대작들의 서명 참여 인증샷이 이어지는데 전국의 작은 지자체와 산하기관들이 가만있을 도리가 없었다. 21세기형 관제 운동이라는 비판이 일부 진보언론을 중심으로 제기되었다. 그로부터 5년여가 지난 지금, 테러방지법을 제외한 해당 법안들의 처리 과정과 결과가 어땠는지 그닥 기억나지 않는 것을 보면 한국사회의 집단지성이 절망할 만한 수준은 아니었나 보다. 사진 출처 -정책주간지 공감  집회 및 결사의 자유가 보장된 사회에서 빨갱이든 삼성의 총수든 그 누구든, 데모도 할 수 있고 서명운동이라면 더욱 못 할 일이 없다. 대통령도 예외가 아니다. 그런데 나는 대통령이 거리에서 서명운동에 동참하는 사진이 실린 기사를 읽으며 꽤나 크게 분노했다. 아주 상스러운 욕을 하고 싶었는데 남들 다 할 줄 아는 욕 말고 더 심한 수위의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분노보다는 모욕감이 더 컸다. 람보르기니 우라칸을 타고 나타난 이들에게 느닷없이 발가벗겨지는 것도 모자라, 손에 쥔 마지막 푼돈을 빼앗긴 느낌이라고 하면 엇비슷하겠다.  서명운동은 누가 하는가. 땡볕과 매연과 칼바람을 막아줄 문명의 이기 하나 없이 길바닥 위에 서서, 일면식은 물론이고 내 말 들어줄 시간도 관심도 없는 이들을 붙잡아 말을 건네고 허리를 굽히는 그런 일은, 과연 누가 하는가.  절실함 말고는 가진 게 없는 이들이다. 마이크, 호화 변호인단, 법개정이나 예산반영을 관철시킬 유무형의 네트워크, 또는 사람들의 관심 가운데 단 하나도 갖지 못한 이들이 주로 거리로 나선다. 그들은, 언론 보도의 논조를 조율할 수 있고 법과 예산도 주무를 수 있으며 정치와 행정을 통해 세상을 움직일 힘이 있는 사람들에게, 거리마저 빼앗겼다. 관제 여론몰이 정치쇼가 서명‘운동’의 옷을 입었을 때 누군가는 모든 것을 잃었다. 누군가는 그 행위를 들어 서명‘운동’이 아니라고, 그런 것은 운동일 수 없다고 지적했어야 했다. 고관대작들이 할 일은 서명이 아니라 다른 것이라고 말했어야 했다.  ‘젊은 보수도 젊은 진보도 발렌시아가를 입는다’며, 국민의힘 이준석 신임 대표를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추켜올린 어느 진보언론의 기사를 읽고 이 글을 쓴다. 부연하자면 그 기사에 대한 분노와 절망, 비아냥거리고 싶은 마음을 표현하려는 목적이다. 하이엔드(고급) 패션의 혁신을 K-정치에 빗대어 자칭 진보의 각성을 촉구하고자 하는 그 마음 모르는 바 아니지만, 108만 원짜리 후드티, 474만 원짜리 털재킷, 130만 원짜리 스커트, 127만 원짜리 스니커즈, 64만 원 넘는 수영복을 입을 수 있는 ‘젊은’ ‘진보’는 어디에 있는가. 돈 많이 벌고 옷 잘 입는 진보도 있어야 하고 간혹 그 기사를 쓴 기자 주변에 많을지 모르지만, 그 몇몇은 통계적으로도 계급을 대변할 수 없다. 교과서만 파서 입시에 성공한 사람은 있을 수 있지만 그게 보편적일 수 없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이준석이 창조하고 이준석이 변화시킨 정치 지형이 뭐가 있는지 알고 싶다. 이준석의 성과에 그의 성별과 나이, 학력 말고 대체 어떤 것이 기여했는지 정말 궁금하다. 그가 대변할 수 있는 계급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 다만 생물학적 젊음에만 빗대어 크레이티브 디렉터라느니 사상 초유의 30대 당대표라느니 하는 ‘진보’ 언론의 말들은 낯 뜨겁다. 그보다 젊은 나이에 당대표를 역임한 작은 정당, 다른 성별의 대표들이 숱하게 스친다. 기성세대의 출혈경쟁에 미래를 강탈당해, 발렌시아가를 입기는커녕 지․옥․고를 벗어나지 못하는 청춘들의 절망을 ‘코인 같은 도박에나 베팅하는 철없음’으로 조롱하는 말들도 스친다. 속이 부대낀다.  그가 ‘국회의사당역’에서 ‘국회 본청’까지의 그 짧은 거리를 공유자전거로 출근하는 구태의연한 정치쇼를 벌일 때도 언론은 혁신이라고 추켜세우기 바빴다. 말은 누가 오염시키는가. 오염된 말은 누가 유통시키는가. 오염된 말이 유통되어 프레임이 변화할 때 그 때문에 고통받는 이들을 지켜보는 건 누구인가. 적어도 ‘발렌시아가를 입는’ 기자가 그들 곁에 있을 거라는 상상을 하지 못하는 편협함만이 아주 조금 미안할 뿐이다.
2021-06-16 | hrights | 조회: 991 | 추천: 27
주윤아/ 교사  지난 한 달간 중·고등학생과 군인 등 성폭력 피해자들의 안타까운 죽음이 연이어 세상에 알려졌다. 특히 이들은 성폭력 피해를 용기 내어 신고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법 정의 실현은커녕 성폭력 피해자로서 기본적인 보호나 지원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는 점과 피해자들이 고인이 된 뒤에야 본격적으로 수사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공군 내 성폭력 피해 발생 석 달 뒤인 바로 피해 당사자가 고인이 된 뒤, 그것도 언론 보도 직후 여론의 집중 질타를 받은 뒤 가해자에 대한 영장실질심사가 단 3시간도 걸리지 않고 구속이 이루어졌는데, 이는 다른 사건의 경우도 유사하다. 청주에서도 중학생 피해 학생 2명의 극단적 선택이 세상에 알려지고 엄중 수사 및 처벌에 대한 국민청원이 등장하고 나서야 성폭력 혐의를 받고 있던 피의자에 대한 체포영장과 구속영장을 앞서 세 차례나 기각했던 검찰이 피의자를 구속했다. 이처럼 피해자들이 성폭력 피해를 신고한 후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경과가 언론을 통해 조금씩 실체를 드러내면서 우리 사회가 결국 이들을 죽음으로 내몬 것이라는 비판과 성찰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청주 중학생들의 죽음은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가장 최소한의 보호 조처가 이루어지지 않은 안타까움이 큰 사건이다. 피해자 측의 고소에도 불구하고 가해자와 피해자의 분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피의자에 대한 체포영장과 구속영장이 번번이 반려되면서 의붓아버지이고, 그리고 친구의 가족인 가해자를 피하기 어려웠던 두 학생의 고충과 공포를 가히 상상조차 하기 어렵다. 1)전국교직원노동조합 충북지부는 24일 성명서를 통해 "오창 중학생 두 명의 죽음은 성폭력 피해 대응체계 부재가 부른 참사"라고 규정하며 특히 "아동학대, 성폭력의 경우 가해자와 피해자가 즉각 분리될 수 있도록 피해자 보호 체계를 보강할 것과 수사기관, 아동 성폭력 전담기관, 교육 당국이 공조해 피해 청소년을 실질적으로 보호할 수 있는 대응체계를 마련할 것"을 요구했다.  성추행 피해 공군 부사관 사망 사건은 미투 운동 이후 우리 사회가 근본적으로 크게 변화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성폭력 피해 사실 인지 후 조직의 대응 과정에서 끝도 없이 나오고 있는 군 조직 전체의 총체적 난국은 일일이 열거하기도 어려울 정도다. 현재까지의 수사 결과로는 여성 변호사 우선 배정 매뉴얼도 어긴 데다 피해자와 국선변호사의 직접 면담은 단 한 차례도 없었으며 사건을 넘겨받은 군검찰도 피해자가 숨진 채 발견될 때까지 두 달 가까이 피해자, 가해자 조사를 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2)피해자가 최초 신고 이후에도 20번이나 성폭력 피해를 호소했지만, 공군은 한 달이 지나서야 국방부에 ‘월간현황보고’에 수치만 반영해 넣는 단순 보고로 처리했다고 한다. 가장 기본적인 가해자와 피해자 즉각적인 분리 조치를 하기는커녕 ‘신고해봐’라며 조롱하고, ‘없던 일로 해 달라, 살면서 겪을 수 있는 일이다’ 등 사건을 은폐하기에 급급하거나 ‘상부나 외부에 알리지 말라, 가해자가 명예로운 퇴임을 하게 해달라’ 등 성폭력 피해 이후에도 가해자와 부대의 조직적인 회유와 n차 가해에 시달렸고 설상가상 부대를 망치는 관심병사로 따돌려 낙인을 찍으며 공식 신고 접수도, 후속 조치도 없이 피해자를 죽음으로 몰고 갔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부대관리훈령>에 명시된 성폭력 피해자 보호와 비밀 유지, 가해자와 피해자 우선 분리, 신고를 포함한 피해자의 제반 권리행사를 방해하는 행위 금지 등 성폭력 피해자를 보호하는 매뉴얼 중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가장 안타까운 사실은 성폭력 피해 사실을 신고한 피해자가 석달 동안 방치되는 동안 피해자를 보호하고 피해자 편에서 지원한 사람이 현재까지는 특별히 확인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올해는 스쿨미투 운동 3주년이 되는 해이다. 스쿨미투 운동 이후 학교의 변화를 정확히 파악하긴 어렵지만 분명 이전과 같지는 않을 것이다. 여성 청소년들이 학교 안에서 겪고 있는 성차별과 성폭력 등을 용기 내어 말하며 공론화 활동이 시작되었고 동시에 비민주적이고 불평등한 학교의 민낯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이후 교육부는 사립학교 교원에 대해 국공립 교원과 같은 징계기준 적용 등 개선안을 담은 교육 분야 성희롱·성폭력 근절 대책과 ‘학교 내 성희롱·성폭력 대응 매뉴얼’ 등을 발표했고, 서울시교육청은 ‘성평등 교육환경 조성 및 활성화 조례’를 제정을 하는 등 관련 법적·제도적 장치들을 마련했다. 그러나 학교구성원들의 인식이 근본적으로 개선되지 않고, 성인지 감수성이 낮은 조직의 구조와 문화가 학교 대지에 깊이 뿌리박혀 잔뿌리조차 뽑힐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면 법과 제도가 완비되어 있다 한들 실효성이 없는 전시성 조치로 전락할 것이 뻔하다. 스쿨미투 운동 3년이 된 지금, 스쿨미투가 발생했던 학교에서 다시 스쿨미투가 일어나는 사례가 있고, 스쿨미투 가해 교사들이 솜방망이 처벌을 받고 다시 교단에 복귀하는 등 학교는 크게 변하지 않았고 스쿨미투도 끝나지 않았다. 또 스쿨미투를 드러내놓고 반대하는 구성원들은 줄었지만, ‘하고 싶은 말이나 농담을 자유롭게 할 수 없어 수업이 지루할 수밖에 없다’라는 등의 펜스룰이나 ‘요즘 선생 노릇하기 어렵다’는 등 ‘교권’침해를 운운하며 학생인권(조례)과 대립시키는 왜곡된 프레임으로써 스쿨미투를 폄하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사진 출처 -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여성위원회  이런 학교가 위의 군대 문화와 다르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학생들은 일상 속에서 자유롭게 의견을 개진하기 어렵고, 성폭력 피해 사실을 용기 내어 말하는 학생에게 ‘어떻게 선생님한테 그럴 수가 있냐’며 말문을 막으며 입단속부터 시키고, 피해 학생보다 가해 교사를 옹호하며 회유와 협박의 2차 가해를 하던 학교 조직과 구성원은 스쿨미투 이후 얼마나 달라졌는가 말이다. 폐쇄적 조직 문화, 낮은 인권 감수성, 금지와 지시 일색인 비민주적 규율과 규정 등 유서 깊은 전근대적 구조와 문화를 과연 얼마나 개혁했는지 객관적 진단이 시급하다.  인권적이고 평등한 학교는 누가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 전국의 모든 교육청에서 학생(학교구성원)인권조례가 입법되는 과정 자체가 교육 과정의 일부가 된다면 인권과 민주시민 교육의 효과까지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교사들은 교실 내 자신의 권력과 위계를 끊임없이 성찰하고 약자와 소수자, 피해자의 입장에 서서 모두가 안전한 학교 환경을 만들기 위해 행동해야 한다. 1) 2021.05.24. 충북일보 "성폭력피해 대응체계 부재가 부른 참사" 2) 2021.06.07. 시사저널 “20번이나 피해 호소했지만..'성추행 감추기'에 일치단결했던 공군”
2021-06-09 | hrights | 조회: 986 | 추천: 10
이동화/ 사단법인 아디 활동가  지난 5월 21일, 언론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하마스 측이 11일 동안의 무력충돌을 끝내고 휴전에 합의했다고 전했습니다. 이번 충돌로 인하여 팔레스타인 측 248명, 이스라엘 측 12명의 사망자가 발생했고 총 2,200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습니다. 특히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의 경우에는 여성과 아동의 사망자가 99명에 이르고 수백 채의 건물이 파괴되었으며, 학교, 병원, 방송국, 전기 수도시설, 전력시설과 같은 일반생활시설과 기간시설들이 폭격당했습니다. 이번 사태로 인해 희생당한 모든 분의 명복을 빌고 유가족분들께 위로를 전합니다.  이번 충돌의 해결을 위해 국내에서도 아디를 포함한 160개 시민단체가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침공을 규탄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기자회견을 개최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많은 분이 현지의 사정을 오해하거나 제대로 알고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먼저 이번 충돌의 성격입니다. 많은 분이 이번 사태를 이스라엘 국가와 팔레스타인 국가 간의 충돌이라고 생각하지만, 팔레스타인은 정식 국가가 아닙니다. 유엔의 표현에 따르면 팔레스타인은 the Occupied Palestinian Territories 즉 이스라엘의 점령지입니다. 이스라엘은 1948년 건국 이후 ‘역사적 팔레스타인 영토’의 78%의 땅 위에 건국되었습니다. 그리고 1967년 3차 중동전쟁 이후 남은 22%의 땅, 즉 동예루살렘을 포함한 서안지구와 가자지구를 군사 점령하였고, 우리가 이야기하는 팔레스타인 지역은 이 지역을 뜻합니다. 이스라엘 가자지구 침공 규탄 기자회견 사진 출처 - 필자  그리고 이번 충돌의 원인입니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정당 ‘하마스’가 로켓을 발사했기 때문에 가자지구를 폭격하였다고 밝혔으나 그 시작은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거주지인 동예루살렘 ‘세이크자라’ 마을로 자국의 유대인 정착민을 이주시키기 위해 팔레스타인 주민을 강제퇴거 시키려 했고 이에 저항하는 주민들을 잔인하게 진압했습니다. 이 소식을 접한 팔레스타인 시민사회가 공분하여 시위가 전역으로 확산되자 이스라엘은 이슬람의 성지인 알 아크사 사원 안까지 침입하여 시위대와 예배중인 신자들에게 섬광탄과 최루탄 등을 발사했습니다. 하마스는 이스라엘 측에 알 아크사 사원에서의 철수를 요구하며 통첩을 보냈지만 이스라엘은 전쟁준비를 서두를 뿐이었고, 최후통접 시간이 지나 하마스가 로켓을 발포하자 이를 구실로 가자지구에 무차별적 공습을 진행한 것입니다. 사실 이번 공습 이전에도 이스라엘은 하마스를 공격하기 위해 가자지구에 공습을 지속적으로 이어왔습니다.  또한 이번 공습의 대상지역인 가자지구의 상황도 많은 분들이 잘 모르는 지점입니다. 가자지구는 2007년 이후 이스라엘에 의해 땅, 바다, 하늘길이 모두 막힌 봉쇄지역입니다. 국제사회는 이 곳을 세계에서 가장 큰 감옥이라 부릅니다. 한국의 세종시 만한 크기에 인구는 200만명, 전세계적으로 가장 인구밀도가 높은 지역입니다. 이번 공습 이전에도 이스라엘은 2008년, 2012년, 2014년 대규모 공습을 진행한바 있습니다. 전체 실업율은 50%에 이르고 주민 95%가 지하수를 활용하지 못하며 빈곤율은 39%입니다. 세계은행은 유엔 등의 구호단체 활동이 없으면 최악의 인도주의적 재앙이 발생할 거라 했습니다. 올해 국제형사재판소가 2014년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공습에 대한 전쟁범죄 조사를 개시하였지만, 이스라엘은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이곳에 무차별 공습을 가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왜 이러한 충돌이 지속적으로 발생하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번 충돌의 빌미가 되었던 ‘세이크자라’의 팔레스타인 주민들의 강제퇴거에서 알 수 있듯이, 이스라엘은 점령지인 동예루살렘과 서안지구에 유대인 정착촌을 만들어 자국민을 이주시키고 군대를 보내고 있습니다. 국제법상 팔레스타인 지역에 유대인 정착촌을 건설하는 것은 불법으로 규정되어 있지만, 이스라엘은 전혀 개의치 않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정착촌은 인근에 살고 있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내쫓고 그들의 경작지를 몰수하며 시간이 갈수록 확장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유대인 정착촌 사람들이 주변의 팔레스타인 마을을 공격하는 경우도 빈번해지고 있습니다. 갈등이 깊어질수록 충돌은 늘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이번 휴전 소식을 통해 많은 사람이 평화로운 일상을 기대하겠지만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공습 이전과 크게 달라진 게 없다고 합니다. 휴전 소식을 접하고 팔레스타인 지인에게 현지상황을 묻자 그는 가자지구에서의 로켓 발사와 공습은 멈췄지만, 이스라엘은 서안지구와 동예루살렘에서 시위에 참여한 팔레스타인 주민들을 색출하여 체포, 구금하고 있다고 전했습니다. 그가 한 말에 따르면, 지금도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싸우는 중입니다.  11일간의 충돌은 끝났지만, 여전히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을 점령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유대인 정착촌을 건설하고 있습니다. 점령과 봉쇄가 끝나지 않는 이상 이와 같은 충돌은 계속 이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언제든 다시 폭격을 재개할 것입니다. 우리 역시 이스라엘의 아이언돔 성능을 찬양할 것이 아니라 이번 충돌로 피해를 받은 사람들 한명 한명의 비극을 이야기하며 이스라엘의 점령중단을 외쳐야 할 것입니다.
2021-05-26 | hrights | 조회: 1089 | 추천: 12
이회림/ 00경찰서  "담배 한 대 하러 가자~"  같은 사무실에서 일하는 21년차 경찰 선배가 말씀하십니다. 비흡연자인 저에게 백해무익한 담배를 강권하는 50대 아재일까요? 알고 보면 답답한 사무실보다는 하늘도 보이는 곳에서 허심탄회하게 대화 좀 하자는 그런 시그널이지요.  왼손엔 달달한 믹스커피, 오른손엔 전자담배 아니고 진짜 담배, 건강에 해로울 수밖에 없는 두 가지를 양손에 야무지게 챙겨 들고는 씽긋 미소 짓는 선배를 따라 오늘도 야외 흡연실로 따라갑니다.  "이 경사, 니 요새 안 디나(안 피곤해)? 살살해라 살살~ 그렇게까지 안 해도 된데이~~"  선배와 저 그리고 저의 후배, 우리 셋은 지난 11월에 신설한 경찰서에 학교전담경찰관으로 발령을 받아 51개 초중고등학교를 17개씩을 맡고 있습니다. 일주일에 1회 이상 방문해야 하는 A등급 학교, 한 달에 2회 이상 방문이 요구되는 B등급 그리고 한 달에 1회 이상 방문하게 되어있는 C등급 학교로 나누어져 있지요. 이렇게 A, B, C로 등급을 나누는 기준은 이전 해까지 집계된 각 학교의 학교폭력 범죄 발생 현황과 상관관계에 있습니다.  A등급 학교인 H고에서 최근에 일어났던 일입니다. H고 1학년 여학생 지민(가명)이는 평소 교내에서 일진이라고 불리는 아이들 무리가 12명 있는 것이 늘 불편하게 느껴졌습니다. 특히 12명 중의 우두머리인 해룡이(가명)가 “ㅋㅋㅇ 단체톡방”에서 특수반 장애학생 남준(가명)에게 욕설을 하며 놀리는 모습을 보면서 더욱 그러했다고 합니다.  그날 밤 지민이는 단체톡방 안에서 남준이를 도와주지 못한 미안함에 잠을 이루지 못했고 고민 끝에 담임 선생님을 찾아가 모든 일을 알렸다고 합니다. 담임 선생님은 해룡이를 불러 주의를 주고, 문제의 그 단체톡방을 해체하도록 조치했습니다. 그런데 그 후에도 해룡이를 비롯한 12명의 일진은 활개 치고 다녔고, 선생님들의 시선을 피해 여전히 아이들을 괴롭혔다고 합니다. 사진 출처 - gettyimage  일진들의 비행이 점점 교묘해져 선생님들이 관리할 수 있는 영역 밖으로 치닫고 있다고 느낀 지민이는, 어느 토요일 오후, 용기를 내 동네 지구대로 찾아갑니다. 지민이의 호소를 들은 순찰 요원분들은 스쿨폴리스인 저에게 이 사실을 전달해주었고, 저는 지민이에게 전화를 걸어 간단히 1차 전화 면담을 진행하였습니다. 월요일 방과 후, 지민이를 만나 그간의 자세한 이야기를 들었고 화요일에는 H고로 찾아갔습니다. H고 교감 선생님은 늘 저에게 “정말 열심이시네요, 열정이 대단하시네요~” 하시면서 격려를 아끼지 않던 분이라 마음 편히 신고 사실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교감 선생님은 12명 일진의 존재에 대해 매우 놀라워하시며 전혀 존재를 모르고 있었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한 달 정도 열심히 파고든 노력 끝에 피해 학생 4명과 목격한 학생 2명을 찾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들로부터 놀랄만한 말을 듣게 됩니다.  교감 선생님이 전교생들을 다 모아놓고 “애들아~ 앞으로 학교폭력 등 문제가 생기면 스쿨폴리스에게는 말하지 말고 선생님한테 먼저 말하도록 하자~ 학교 위신 깍이니까”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교감 선생님의 말씀이 너무 이해가 안 된다며 저에게 알린 것이었지요. 저는 이 말을 듣고 나서부터 생각이 많아졌습니다. 그래서 이날 이후로부터 교감 선생님 등 학교 측에는 제가 수집한 정보를 전부 다 알리지 않고 일부만 선별해서 알렸습니다. 학교 측이 가해 학생들의 편에 서 있는 것은 결코 아니겠으나 교감 선생님의 “위신 깎인다”라는 그 한마디에 저와 피해 학생들은 학교에 대한 신뢰를 잃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뒤로 H고를 방문해 교감 선생님을 뵐 때마다 ‘열정적이라 보기 좋습니다’ 와 ‘위신 깎이니까 스쿨폴리스에게 말하지 말아라’ 두 마디가 교감 선생님의 얼굴 좌, 우 말풍선 안에 들어있는 듯했습니다.  이후, H고 12명 일진사건 뿐만 아니라 B, C등급 학교에서도 ㅋㅋㅇ톡 개정 갈취 사건 등 연이어 심각한 수준의 학교폭력이 발생하였습니다.  "안 디나? 살살해래이~~"  담배도 안 피우는 저를 굳이 하늘이 보이는 야외 흡연 공간으로 불러 내 이렇게 격려의 말씀을 해주시던 선배님께 이렇게 대답합니다.  “선배님~ 저 이제 7개월 차 스쿨폴리스이지만 확실히 알게 된 거 하나 있어요. 어디에서나 어른들이 제일 문제라는 거네요~ 그 교감선생님처럼요”  “그래 맞데이~ 학교폭력도 가해 학생들 가정환경 보면 답 나온다 아이가~~ 가해 학생들도 어찌 보면 다 피해자다, 피해자!”  허허로운 담배 연기를 허공에 확 뿜으시며 이렇게 한마디 하시는 선배가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교감 선생님 같은 사람도 있고 이런 선배도 있고 뭐 그런 건가요?
2021-05-26 | hrights | 조회: 765 | 추천: 5
홍세화/ 대학생  어느덧 대학교 4학년, 사회에 나갈 준비를 하며 느낀 점들이 있다. 확실히 부모님 세대에 비해 지금의 나는 어른이 되지 못했다. 어렸을 땐 하루빨리 나이를 먹어 어른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막상 성인이 된 이후에는 아니었다. 그 이유로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첫째로는, 어른으로서 지녀야 하는 책임과 의무에 대한 부담감이다. 어린 시절에는 내가 성인만 되면 나를 속박하던 제재들은 사라지고 자유만이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성인이 되어 나를 반긴 것은 자유보다는 이에 따른 책임과 의무이다. 나를 속박하는 것으로 여겼던 제재들은 나를 보호하기 위한 수단이었고, 나를 보호해줄 울타리 밖으로 나온 지금은 개인적인 일들이나 금전적인 부분에서 온전히 나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져야 할 일들이 늘어나고 있단 사실에 부담이 생겼다. 때문에 이런 일들이 앞으로 더욱 많이 일어날 텐데 내가 잘 헤쳐 나갈 수 있을지 미래에 대한 불안과 걱정들은 늘어만 갔다. 이러한 고민과 함께 그 옛날 지금의 나보다 두 살 밖에 많지 않던 스물여섯의 엄마는 어떻게 그 나이에 결혼을 하고 언니까지 낳으실 수 있었을까 놀라운 마음과 존경심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책임과 의무를 회피하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된, 아직 어른이 되기 싫은 ‘어른’과 ‘어린이’의 중간인 ‘어른이’인 상태이다. 사진 출처 - 구글  두 번째 이유는 요즘 들어 더 이상 나이 들고 싶지 않은 가장 큰 이유인데, 내가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나 혼자만 나이 먹는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연의 섭리에 따라 모든 인간은 시간이 흐를수록 나이를 먹고 늙어가며 노화가 찾아오는 것이 당연하다. 올해 스물 네 살인 나도 이제는 육체의 성장이 한계에 이르렀고, (나보다도 어른이신 분들이 들으신다면 기가 찰 말이겠지만) 점차 노화가 찾아와 체력이 점점 떨어져 가는 게 느껴진다.  하지만 나의 노화가 시작되었다는 것보다 더 괴로운 것은 앞서 말했던 어린 시절의 나를 지켜주고, 사랑해주셨던, 그리고 여기까지 이와 같은 것들을 베풀어주시는, 나에게 진정 ‘어른’들이라고 생각되는 분들의 노화가 가속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얼마 전 한 인터넷 기사에서 스탠포드 대학의 연구 결과 하나를 보았는데, 인간의 노화는 각각 34세, 60세, 78세를 기점으로 단계별 노화가 가속된다고 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후 요즘 들어 부쩍 부모님과, 나를 돌봐주셨던 가족들께서 연로해지시고 많이 쇠약해지고 계시다는 것을 느끼게 되어 마음이 아팠다.  ‘피터팬’을 보면 부모를 잃은 아이들이 네버랜드에 가게 된다. 나는 부모님과 같은 소중한 가족들이 있기 때문에 나이를 먹지 않을 수 있는 환상의 나라가 있다면 그곳으로 다 같이 떠나고 싶은 마음이다. 이러한 몽상과 더불어 첫 번째 내용과는 모순되지만, 내 성장 과정 속 많은 어른의 베풂에 보답하기 위해 어서 안정적인 직장에 자리를 잡고 책임과 의무를 다하며 이분들을 부양하고 싶은 마음도 생겨나고 있다.  최근 내가 쓴 ‘칼럼’이라 칭하기엔 민망한 글들을 찬찬히 읽어보았다. 대부분 이 시대에서 살아가는 청년들의 아픔과 설움 등을 주제로 다뤘지만 사실상 그 글을 쓰는 나는 제대로 노력도 해보지 않았고, 그저 징징대는 글들에 가까워 보였다. 이제 와서 읽어보니 일종의 도피성 글인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현실을 마주하고 ‘어른이’가 아닌 ‘어른’이 되어야 할 때인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바로 어른으로서 성장하긴 어렵겠지만, 이제는 적어도 내가 받은 것을 돌려줄 수 있는, 성숙한 사회구성원으로서 성장할 것을 다짐할 줄 아는 어른이로 나아갈 것이다.
2021-05-06 | hrights | 조회: 909 | 추천: 7
김형수/ 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 총장  부산에서 나보다 3년 먼저 대학 신입생이었던 친형은 사흘이고 나흘이고 집에 들어오지 않은 날이 잦았다. 어느 날은 지리산에서 전화가 오고 어떤 날은 서울의 대학 학생회관에서 생존만을 확인시켜 주는 전화를 가끔 할 뿐이었다.  유스호스텔 (youth hostel) 동아리 활동이었다. 정신없이 대학에서 첫 중간고사를 끝내고 국제학사로 돌아오는 청송대 긴 의자에서 결심했다. OX 문제로 전공시험을 내는 자괴감 가득한 문과대학을 탈출하자 혼자 결의했다. 돌아올 체력이 부족할까 대학 정문까지는 내려가지는 못하더라도 다른 학과 학생들을 만나는 동아리들이 있는 학생회관까지 진출해 보자 결정했다. 나도 여행동아리에서 태백산맥 전국을 다니리라 했다.  입학한 대학에는 매주 필수로 들어야 했던 예배 수업이 있었다. 그 대강당 2층 맨 끝에 그 동아리가 있었다. 그런데 대강당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따로 손잡이가 없이 넓은 돌난간만 있었다. 손으로 잡기에 너무 미끄럽고 넓어서 올라가기가 너무 어려웠다. 몇 번이나 미끄러져서 정강이에 피멍이 들었다. 길고 긴 백두대간의 여행보다 그 돌계단이 나의 최초 동아리 가입을 가로막았다. 국제학사 지하 1층에서 우연히 만난 얼굴이 하얀 유스호스텔 선배가 다시 학생회관 3층의 한 동아리를 소개했다.  이제는 강제로 폐지된 총여학생회가 있는 학생회관 3층에는 왼손잡이를 위한 손잡이는 없었다. 대신에 따뜻하고 얇은 나무 손잡이가 4층까지 이어졌다. 승강기가 없어서 힘들었지만, 발을 단단히 못 디뎌 다치는 일은 별로 없었다.  12년 전쯤, 1980년대에는 서울 보라매 공원 안에 있었던 이름있는 학교, 7살짜리 나를 업고 부산에서 올라와 기숙사 앞에서 하염없이 고민했던 어머니께서 차마 맡기지 못하고 발길을 돌렸던 그 학교에, 어쩌면 나의 모교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바로 그 학교에 주말마다 학습지도 봉사활동을 가는 동아리였다.  설레임을 안고 들어갔다. 입학은 안 했지만 친한 후배들을 만나는 것만 같았다. 동아리 무리 사람들은 말로는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매주 갈 것처럼 했지만 실제로 매주 봉사를 가는 사람들은 드물었다. 나도 딱 한 번 그곳으로 봉사활동을 갔다. 나처럼 걷고 나처럼 손짓하고 나처럼 말하는 많은 아이들을 만났다. 이름있는 학교의 대학생이라니 그곳 후배들은 나를 선망의 눈빛으로 바라보아 주었지만 나는 설명할 수 없는 슬픔을 삼켰다. 주말마다 경기도 광주 그 학교로 봉사 가겠다던 동아리 친구들은 신촌로터리에 돌아오면 마을버스조차도 잘 오지 않은 경기도 광주의 그 아이들에 대해서 안줏거리로라도 말하는 법은 없었다.  왜 그 학생들은 버스조차 잘 이용할 수 없어 외출조차 못 하는지 분노하는 대학생은 거의 없었다. 아니 내 동기 중에는 딱 한 명 있었다. 학술부에서 활동하면서 ‘시대의 어둠을 넘어 실천하는 인간사랑’ 동아리의 목표 규칙 학기마다 표지로 실었지만, 그 딱 한 명의 동기가 지면을 빌어 에둘러 대학생들의 맥주잔을 깨자고 비판을 했지만, 그들은 또 술에 취해 주말에 늦잠을 잤다.  여전히 대강당에 내가 잡을 만한 손잡이는 생기지 않았고 4층짜리 학생회관에 승강기는 만들지 않았다. 광주에 그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이 여기 대학교에 와서도 안전하고 독립적으로 자유롭게 멋지게 동아리방들을 돌아다닐 수는 없을 것 같았다.  학생회관 3층 총여학생회 맞은편에 자리 잡았던 동아리는 다른 곳보다 훨씬 넓었다. 낡고 오래된 갈색 소파에서 여름방학을 보냈다. 새내기 학부생은 국제학사에 방학기간 동안 더 이상 머무를 수 없었다. 외국인 유학생을 위한 국제학사에 들어 가는 것을 도와주었던 91학번 선배와 함께 처음으로 학교 정문 밖에서 함께 하숙집에 들어가고 싶었으나, 가파른 철제 계단 옆 싼 가격의 집들은 모두 나의 부상을 걱정하게 했다고 선배는 귀띔해 주었다. 그렇게 나는 1학년 여름방학을 한 달 넘게 동아리방을 자취방 삼아 먹고 잤다. 학생회관 화장실에서의 샤워는 정말 차가웠지만, 창문도 없는 동아리방의 여름밤은 정말 꾸덕꾸덕 진저리나게 더웠다.  더위를 정 참기 어려우면 학생회관에서 세브란스 병원 넘어가는 길에 걸려 있는 큰 종 밑의 화강석에 누워서 잤다. 화강석은 해가 떨어지면 열기가 주변보다 빨리 식기 시작해서 새벽에는 한기가 들 만큼 차가웠다. 병원에 인턴 의사들이 출근하기 시작하면 일어났다. 더위를 피할 수 있다면 수십 마리의 모기라도 내버려 둘만 했다.  동아리 방에서 처음으로 농활도 출발했고 농촌 아이들의 울음을 뒤로하고 일주일 뒤에 다시 동아리 방으로 돌아왔다. 열흘 넘게 몸을 씻지 못하면 강남에 사는 선배가 집에서 욕실을 사용하게도 해주었다. 1990년 MBC 드라마 ‘우리들의 천국’ 한 장면을 구현해 버렸다. 그러나 농촌 현실을 체험하면서 우루과이라운드를 반대하는 나의 대학의 친구들은 나와 함께 대학에 들어온 21명의 특수교육대상자의 학교생활은 체험해 주지 않았다. 백 년이 넘었다고 기념 우표도 발행하고 당시에 우리나라 최초의 지체 장애인 특수학교를 열었던 대학에서 휠체어가 접근 가능한 화장실은 정문과 학생회관 사이에 있는 백주년 기념관에 딱 하나 있었다. 친구들은 당연하게 오줌통을 들고 다녔다.  신촌에서 대학 정문까지 휘젓고 올라오면 축축한 잔디밭 말고는 마땅히 쉴 곳이 없었다. 그래도 어떻게든 백주년 기념관 앞까지 오면 백양로 길가까지 삐죽이 나온 하얀 계단석에 편히 앉을 수 있었다. 그래도 우리 학교의 유일한 장애인 화장실은 뒤풀이가 끝난 동아리 가는 길에는 사용할 수 없었다. 기념관 운영 시간에 따라 늘 문이 잠겼기 때문이다. 학생들을 위한 건물 투자에 필요한 기성회비를 다 내었지만, 우리가 들어갈 수 있는 도서관도, 강의실도, 연구실도 거의 없었다. 등록금을 낼 것을 다 내고 입학했지만, 우리가 읽고 쓰고 싸는 것에 쓰이지 않았다. 누구는 우리를 보고 소수를 위한 과잉 투자라고 비아냥거렸지만, 그 누구는 우리들의 기성회비와 등록금으로 ‘무임승차’ 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일어나는 차별과 어려움의 고달픔보다 입학을 ‘허가’해 주었으니 마냥 고마워하라는 것이 더 서글펐다.  어느 날 사회학과 대학원생 서동진 씨가 연세대 학보인 ‘연세춘추’에 ‘게이ㆍ레즈비언 회원을 모집한다’는 글과 함께 자신의 삐삐번호를 공개했다. 한 달도 안 되어서 대학 최초의 성소수자 모임 ‘컴투게더’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중앙도서관 앞에 천막 동아리방이 열렸다. 대학 오기 전까지 동성애가 무엇인지 성소수자가 누구인지 몰랐고 게이나 레즈비언이란 단어도 처음 들었지만 솔직히 부러웠다. 그 분들을 향한 욕설과 혐오조차 부러웠다. 하루가 멀다하고 그들을 향한 기사들이 학교 안팎에서 쏟아졌다. 하루는 그 천막에 가서 여쭤보았다.  “저희도 우리의 인권과 문제를 알리기 위해 농성하고 싶어요. 어찌하면 좋을까요?” 우리가 천막에 다다르기도 전에 우리 앞에 무리지어 앉았던 그들은 대답했다. “우리가 곧 철수하는데 다 남겨주고 가겠다. 천막 간판만 ‘동성애’에서 ‘장애인’으로 바꿔 달아주겠다.” 얼마되지 않아 그분들이 남겨 준 책상과 서명판을 가지고 학생회관 앞에서 서명 운동을 시작했다. 전동 휠체어를 탄 동기가 고무 타는 냄새가 날 정도로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붙잡고 다녔으나 바삐 가는 사람들을 쉬이 잡을 수는 없었다. 우리는 그렇게 사람 많은 중도까지 다 들리도록 소리만 빽빽 지르고 있었다. 갑자기 수십 명의 여성이 책상 앞으로 몰려들었다. 양쪽 손 가득히 김밥과 생수를 안겨주고는 서명지와 요구안을 들고 갔다. 한 두 시간 뒤에는 더 많은 여성이 몰려 왔는데 온몸에 요구안을 손으로 적은 긴 플랭 카드를 잔뜩 들고 와 우리 앞뒤 가로수에 잔뜩 걸어 주고는 서명지도 잔뜩 복사해서 서명을 받기 시작했다. 그 플랭 카드 아래에는 온통 총여학생회라고 적혀 있었다.  해가 지고 나서는 총여학생회에서 짐을 두고 정리하라고 초대받아 올라갔다. 어안이 벙벙해서 물어봤었다. “우리를 왜......?” 그중에 한 분이 조용히 이야기했다.  “너의 문제는 나의 문제, 너의 차별은 나의 차별, 우리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사진 출처 - 게르니카 페이스북  장애인 인권운동 동아리 ‘게르니카’는 그렇게 탄생했다.
2021-05-06 | hrights | 조회: 917 | 추천: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