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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차 수요대화모임(06.05.24) 정리 - 김민웅 목사(성공회대 정책대학원 교수)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8-08 10:06
조회
387

“수구보수 세력의 이익에만 관심 있는 뉴라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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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웅/ 목사, 성공회대 교수


 

뉴라이트’란 가면 속에 숨겨진 검은 본질

언젠가 탈 식민지화에 관한 논쟁의 자리에 참석한 적이 있다. 그곳에 참석한 사람들이 준비한 자료와 사용하는 말의 대부분이 대표적인 제국주의 식민침탈 국가의 언어였던 영어인 것을 보고 놀랐던 기억이 난다. 이러한 모습에서 과거 식민지배 역사의 잔재들을 극복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또 제국주의 지배의 피해경험이 그 후 이들 국가의 정체성 형성을 얼마나 왜곡시키고 오염시켰는지에 대해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뉴라이트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신우익 세력들은 애써 자신들을 가리켜 ‘뉴’라이트란 영어 명칭을 사용하면서 그들의 본질을 포장하여 감춘다. 겉으로는 민족과 국가의 이익과 자존이란 명분을 내걸고 있지만, 여전히 제국주의 강대국의 잔재와 향수에 의존하지 않으면 존립할 수 없는 신우익 세력들의 모순과 허구성을 여실히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철저히 대외 종속적인 한국의 우익

뉴라이트가 기존 한국의 우익과는 차별화된, 뭔가 더욱 합리적인 방식으로 진정한 국익을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행세하고 있지만 이 역시 국민에 대한 기만이자 허구일 뿐이다. 맹목적 애국주의, 배타적 국익지상주의 등의 위험성을 차치하더라도, 뉴라이트는 진정한 민족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대외 종속적이고 사대적인 움직임만 보여주고 있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한미FTA 추진과정, 북한 인권문제에 대한 접근 방식 등이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민족 전체의 이익이 아닌 일부 수구보수 세력들의 이익을 위해 미국, 일본 등의 대외정책에 부합하는 방향으로만 움직이고 있다. 이것이 뉴라이트가 갖는 위험성이다. 그래서 뉴라이트는 일본 신우익 세력과 미국 네오콘의 수준조차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일본의 신우익과 네오콘이 철저하게 자국 또는 민족의 이익을 앞세우는 반면, 뉴라이트는 민족의 이익을 외치면서도 그저 수구보수 세력의 이익만을 대변하고 있다.

최근 일본에서는 교육기본법 논쟁이 점점 뜨거워지고 있는데 이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일본의 교육은 2차 대전 이전에는 집단적 군국주의 가치, 패전 이후는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강조하는 가치로 교육의 지향점이 변화되어 왔다. 교육의 목적이 국가에서 개인으로 바뀌었던 것이다. 그런데 현재 일고 있는 교육기본법 개정 논쟁은 교육의 목적을 국가, 전통, 향토 등을 사랑하자는 방향으로 다시 바뀌고 있다. 이런 현상이 겉으로는 바람직해 보이나 문제는 그 본질이 맹목적 집단주의, 애국주의의 강조라는데 있다. 그리고 이러한 움직임은 일본 우익 세력들이 주도하고 있고 국내외에서의 뜨거운 논쟁과 우려의 대상이 되고 있다. 왜냐하면 아직도 과거 군국주의 역사의 잔재들이 청산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러한 움직임은 또다시 일본을 왜곡되고 위험한 역사의 방향으로 이끄는 출발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구 - 신우익 구분은 의미 없어

이것이 과거와는 다르다고 스스로를 표방하는 오늘날 일본 우익의 모습이다. 이들도 이전의 일본 우익들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1945년을 과거 반성과 청산을 통한 평화적 공존과 상호발전의 계기로 인식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패전의 굴욕감을 강조하고, 다시는 지지말자는 식의 다짐을 외치고 있다. 올바른 역사인식과 과거청산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오늘날의 일본 우파도 결국 자신들의 정체성 뿌리를 이루고 있는 과거의 우파들의 맥락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그 본질 역시 같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미국의 경우도 살펴보자. 1960~70년대는 미국에게 매우 중요한 시기이다. 베트남 전쟁에서의 패배는 미국사회에 강력한 반전, 평화주의를 불러 일으켰고 이에 대한 반발로 ‘네오콘’이라고 불리는 신우익 세력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당시 반전운동 확산 등의 분위기를 미국의 민주주의, 자유를 위협하는 혼란으로 규정하고 미국적 질서를 지킨다는 것을 명분으로 내세웠다. 이는 1950년대의 우익이 공산주의 진영의 팽창을 미국적 질서에 대한 심각한 위협으로 느끼고 이에 대한 경계와 반발로 미국사회 내에 강력한 ‘매카시즘 운동’을 일으켰던 것과 매우 유사하다. 50년대와 60년대의 미국 우익이 적으로 규정한 상대에는 차이가 있지만 자국 질서와 이익의 수호라는 목표는 공통적이다. 이런 점에서 60년대 네오콘의 등장은 전혀 새로운 신우익의 출현이라기보다는 인권, 반전, 평화운동 등으로 잠시 위축됐던 우익의 지배력이 되살아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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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울 것 없는 뉴‘우익’

앞에서 살펴봤듯이 공통된 정체성을 가지고 하나의 맥락에서 움직이고 있는 우파를 굳이 구우익, 신우익으로 구분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한국의 뉴라이트 역시 마찬가지이다. ‘뉴’라이트라고 해서 기존 우익과 차별화된 뚜렷한 차이점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 이들 역시 여전히 배타적이고 냉전적인 사고를 하고 있으며, 수구반공 세력을 그 기반으로 한다. 또한 민족 전체의 이익과는 상관없는 철저한 대외 종속적 속성을 그 바탕에 깔고 있다. 더욱이 뉴라이트 세력들은 식민지근대화론, 전교조에 대한 색깔논쟁 등을 통해 그 기만적 정체성을 점점 더 공공연히 드러내고 있다. 엄밀히 얘기하면 오늘날 한국의 우익은 ‘우익’이라는 명칭을 붙일 수도 없다. 이들에게는 특정 집단의 이익 앞에 민족 전체의 이익과 미래는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미국과 일본의 우익과도 다르고, 오히려 훨씬 더 위험한 집단일 수 있는 것이다.

“가랑비에 옷 젖는다”는 속담이 있다. 뉴라이트의 주장이 꾸준히 전개되고, 우리가 이것에 대한 경계와 대비를 하지 않는다면 우리 사회에서 뉴라이트가 갖는 기반이 의외로 커질 수 있다. 아직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뉴라이트 진영의 허구성과 비논리성을 지적하며 이들의 주장을 귀 담아 듣지 않지만 사람들의 감성을 자극하여 파고드는 이들의 전략이 한국적 상황 속에서 어느 정도 효과를 내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또한 다른 나라의 우익들과 마찬가지로 뉴라이트 역시 미디어와 교육부문의 장악을 계속해서 시도할 것으로 보인다. 이는 일본의 교육기본법 개정 움직임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우리 사회의 다른 진영 또한 사람들의 감성을 파고드는 전략에 대한 대응방식도 의미 깊게 연구할 필요가 있으며, 교육과 미디어가 특정 이익집단에 의해 장악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다각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이런 움직임을 통해 우리 사회에서 뉴라이트의 허구적 외침이 줄어들어 갈수록 부끄러운 역사의 반복을 막을 수 있고, 모든 삶의 주체들의 행복한 삶을 보장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정리=박성옥/ 인권연대 인턴활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