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대화모임

home > 교육센터 > 수요대화모임

40차 수요대화모임(06.04.26) 정리 - 고병권 공동대표(연구공간 ‘수유+너머’)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8-08 10:04
조회
374
“지식인, 현장성 기반한 불온한 문제제기 왜 없나?”

고병권/ 연구공간 ‘수유+너머’ 공동대표



가까이에 있는 것이 가장 어둡고, 가장 크게 오해하는 것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라는 얘기가 있다. 지난번에 있었던 <한겨레신문> 포럼에서 ‘지식과 지식인’에 대한 얘기가 나왔다. 그런데 그 때 ‘지식인’이란 주제에 대해 지식인들이 가장 무지하고, 가장 지적 열정을 못 느끼는 듯 했다. 신체성의 부재. 즉, 지식인들의 정신은 타자 신체의 관념일 뿐, 자기 신체의 관념은 아닌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진보운동에 대해서는 나보다 훨씬 진보적이기까지 했던 다른 지식인들을 바라보며 어떤 강한 이질감을 느꼈던 것은 왜일까? 문제는 바로 위치(position)와 시선(perspective)이다.
위치와 시선의 문제

오늘날 지식인들은 대중을 ‘그들’과 같은 ‘3인칭’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다. 지식인에게 대중은 하나의 이해 관계자 또는 객관적 분석 대상인 것이다. 이는 지식인들이 대중을 대하는 위치가 과거와는 근본적으로 달라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80년대의 지식인은 대중을 부를 때 ‘우리’라는 표현을 즐겨 썼다. 지식인 스스로가 자신을 대중과 하나로 사유하고 함께 움직이고자 했다. 하지만 90년대를 거치면서 지식인은 대중으로부터의 거리가 확보된 위치에 서있다. 대중들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특성은 지식인으로 하여금 적극적으로 대중을 만들어 내려고 하지 않고, 기존의 대중에 대해 적응하는 문제만 사유하게끔 하고 있다. 즉, 새롭게 도래할 대중에 대한 사고가 부족해지고 있다.

또 하나는 시선의 문제다. 앞에서 말한 위치의 문제보다 훨씬 강조하고 싶은 부분이다. 지식인들이 현재의 집권 세력과 자기 자신을 마치 동일시하고 있는 것 같다.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정부를 거치면서 진보세력들은 자신들이 집권하고 있다는 착시효과에 젖어들고 있다. 노무현과 의견이 다를 때조차 그 시선은 동일하다. 어떻게 사회적 문제를 제기할까 보다는 어떻게 사회적 문제를 해결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 어떻게 운동을 생산할까 보다는 어떻게 하면 사회적 갈등을 해소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으로 흐르고 있다. 이러한 시선은 어느덧 지식인들마저 코포라티즘(corporatism)적으로 문제를 바라보게 만들고 있다. 결과적으로 지식인에 대해 지속적인 비전 제시 능력과는 상관없이 실증적인 정책능력이 있고 없음을 기준으로만 유능 또는 무능을 평가하도록 만드는 원인이 되고 있다.

코포라티즘에 매몰된 지식인들

그래서 <한겨레신문> 토론회에서 지식인의 위치와 시선으로 인한 문제를 ‘현장성의 상실’이라고 했다. 이것은 두 가지로 표현될 수 있는데, 운동현장의 상실과 자기 삶의 현장의 상실이다. 80년대를 지식인들의 ‘운동현장으로의 침투’라고 표현한다면 90년대 이후를 ‘운동현장으로부터의 퇴각’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공장만이 현장이라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공장만큼이나 대학도 현장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스스로가 서있는 그곳을 현장으로서 사유하고 그만큼 치열하게 행동하려는 의지와 실천인 것이다. 이때 비로소 대학도 운동의 살아있는 현장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그냥 프로젝트만 따면 그만인 것인가에 대한 사유, 이 프로젝트는 누가 준 것이며 그 결과는 어떻게 유통되고 있는지에 대한 고민, 자신은 어떤 지식을 어떻게 생산하는지 등 자기 삶의 현장에 대한 문제의식을 끊임없이 발견하고 사유하며 살아가야 한다.

오늘날 ‘지식기반사회’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다. 그만큼 지식과 정보의 중요성이 매우 커졌다는 의미인데, 그렇다면 지식기반사회에서 ‘지식’이란 무엇을 의미할까? 지식이란 이윤을 낼 수 있는 특허나 정보를 의미한다. 인격 도야, 삶에 대한 다양한 인식 등의 가치와는 무관하게 단순히 비즈니스 재료로서의 지식에 불과함을 의미한다. 이러한 인식은 우리 사회에 많은 우려와 변화를 야기하고 있다. 대학에서는 법인화 움직임과 함께 기업과 대학의 지적 집합체 구축 움직임이 본격화 되고 있다. 즉, 대학 운영에 기업적 발상을 적용하고 즉각적인 이윤을 낼 수 있는 지식, 성과 향상에 효율적인 지식만이 중요해지고 있으며, 대학은 이러한 지식의 생산 및 공급 기관으로 전락하고 있다.
테크노크라시와 현장성 상실

지식기반사회의 또 다른 특징은 테크노크라시(technocracy)의 출현이다. 이들은 고시합격 후 미국유학파들로 고급 기술 지식을 소유했으며, 기존의 관료들과는 달리 매우 의욕적이고 창의적이다. 하지만 전문기술지식을 독점하고 한-미 FTA 추진에서 볼 수 있듯 시기의 긴급성, 비밀주의 등을 통해 상황에 대한 그들의 지배력을 극대화한다. 이들은 실증적 수치를 중시하고 구체적 정책화 능력만을 지식인의 조건으로 강조한다. 테크노크라시들은 노조와 시민단체까지 적극적으로 진출하는 등 우리 사회의 전 분야에서 지배력을 확대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에게 있어서도 지식은 그들의 권력을 강화시켜주고 이익을 제공해주는 수단으로서만 가치를 가진다.

미국 학위를 취득하고 있다. 단적인 예로 서울대 사회대 교수진의 92%가 해외 학위이고, 이 중 80%가 미국학위 소지자라는 사실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는 우리 사회의 지식인들이 가치판단 기준의 다양성과 고유의 전통가치, 대중의 구체적 삶에서 멀어짐으로써 현장성을 상실하게끔 하는 원인이 된다.

060517web08.jpg


불온함이 대중을 움직인다

현장성을 상실한 지식인이 문제를 제기할 때 그것은 전혀 불온하지 않다. 부르디외의 표현을 빌리면 “긴급하기 때문이 아니라 해결의 즐거움을 위해서 문제를 제기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지식인의 문제제기는 세상을 술렁이게 하거나 대중을 움직이게 하지 못하는 ‘프로의 안전한 사상’으로 안착하고 만다. 대중으로부터 분리된 지식인은 전체를 기술하려는 성향이 강하다. 하지만 대중의 구체적 삶은 총체적이기보다는 부분적이고 파편적이며 다양하다. 지식인들이 현장성의 상실을 극복하고 진정으로 대중의 삶을 위해 존재하기 위해서는 ‘국익’ ‘공동체 전체’ 등과 같은 총체화된 이미지만을 외치기보다는 농민, 예술인, 비정규직 등 대중의 구체적인 삶의 문제들을 강력하게 제기해 나가가는 것이 우선이다.

정리=박성옥/ 인권연대 인턴활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