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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산책’에는 박록삼(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박상경(인권연대 회원), 서보학(경희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이윤(경찰관), 이재환(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책임관), 조광제(철학아카데미 대표), 황문규(중부대학교 경찰행정학과 교수)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기본소득과 지역화폐(이재환)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0-03-11 14:37
조회
862

이재환/ 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주무관


 신종 감염병 코로나19의 여파가 길어지고 있다. 역병이 창궐하니 민심도 흉흉하다. 타인에 대한 공포와 혐오가 생활 속 깊이 스며들고 있다. 그 뿐 아니다. 사회적 거리두기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지만 소상공·자영업자들이 감내해야 할 고통이 크다. 거리는 한산하고 골목가게의 한숨은 깊어지고 있다.


 시흥시의 지역화폐 ‘시루’ 가맹점 중 가장 결제 건수가 떨어진 업종은 숙박업과 스포츠 및 여가관련서비스업이다. 음식점업이 그 뒤를 따르고 소매업은 큰 변화가 없다. 여행은 안가고 헬스장도 잠시 쉬며 외식은 없되 라면은 쌓아두는 소비패턴이다.


 급기야 정부는 경기활성화대책을 세우고 대규모 추경을 편성했다. 얼어붙은 소비를 되살리겠다는 목표로 11조 7천억 원에 달하는 추경안을 제출하며 그 중 2조 4천억 원을 ‘중소기업·소상공인 회복지원’, 8천억 원을 ‘침체된 지역경제 회복지원’에 투입하겠다고 밝혔다.


 물론 건물주 임대료 인하 보상처럼 도대체 누가 제안했는지 궁금해지거나 신차 구매 시 소비세 감면처럼 왜 굳이 지금 하는지 도통 모를 방안도 포함되어 있지만 어쨌건 재난에 준하는 국가적 위기상황에서 골목경제를 살리는 적극적인 재정투입정책을 펼치는 것은 국가의 의무이니 환영할만하다.


 한발 더 나아가 보다 도전적인 재정투입 방안도 제시되고 있다. ‘약탈적 플랫폼 경제 전도사’ 또는 ‘한국적 공유경제의 개척자’란 상반된 평가를 받고 있는 이재웅 쏘카 대표가 쏘아올린 ‘국민들에게 재난 기본소득으로 50만원씩 지급해 달라’는 청와대 국민청원이 그것이다.(글을 보내기 직전 경남도지사도 100만 원 재난 기본소득을 공식 제안했다)


 비슷한 시기 홍콩 정부도 코로나19 대책으로 모든 영주권자들에게 1만 홍콩달러(약 156만 원)를 지급하기로 결정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국내 보수야당 대표가 4월 국회의원 총선거라는 정치이벤트를 앞두고 냅다 ‘그 정도로 과감성 있는 대책이 있어야 한다’고 한발 얹은 것도 재밌는 관전 포인트이다.


 재난 기본소득 찬반을 묻는 설문조사도 나왔다. 여론조사 전문기관 리얼 미터가 오마이뉴스의 의뢰를 받아 실시한 조사 결과 찬성 42.6%, 반대 47.3%로 오차범위 내에서 비슷한 응답률이 나왔다. 무응답/모름은 10.1%였다.


 세부결과를 살펴보면, 보수층의 59.0%가 반대, 진보층은 35.0%가 반대 의견을 보였다. 찬성은 광주·전라(반대 30.1% vs 찬성 65.3%)와 경기·인천(38.9% vs 47.5%), 40대(43.0%, vs 49.6%)와 진보층(35.0% vs 57.8%)과 더불어민주당 지지층(33.8% vs 57.4%)에서 많았다.


 기본소득에 대한 논의는 상당히 오래전부터 있어왔다. (다음의 사례들은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 등의 자료를 가져왔다.)


 16세기 초엽에 후안 루이스 비베스는 ‘구빈문제에 관한 견해’에서 빈민에게 최소 소득을 지급하자는 구상을 내놓았다. 몽테스키외는 1748년 ‘법의 정신’에서 “국가는 모든 시민에게 안전한 생활수단, 음식, 적당한 옷과 건강을 해하지 않는 생활 방식을 제공할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 콩도르세는 1795년 ‘인간 정신의 진보에 관한 역사적 개관’에서 기본소득이란 사회 전체에 걸쳐 확장한 보험이라는 발상을 꺼냈다.


 18세기의 사상가 토머스 페인은 토지가 공공재이므로 지대수입으로 모든 사람에게 일정한 금액을 지급하자고 주장했다. 샤를 푸리에는 1836년 ‘잘못된 산업’에서 “기본이 되는 자연권을 누리지 못하는 탓에 자신의 필요를 충족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사회는 기본 생존을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현대적 의미의 기본소득은 조지프 샤를리에의 1848년 ‘사회 문제의 해법 혹은 인도적 헌법’과 존 스튜어트 밀의 1849년 ‘정치경제학의 원리’ 제2판에서 구체화된다. 존 스튜어트 밀은 “분배에서 특정한 최소치는 노동을 할 수 있거나 없거나 간에 공동체 모든 구성원의 생존을 위해 먼저 할당된다. 생산물의 나머지는 노동, 자본 그리고 재능이라는 세 요소 사이에 사전에 결정되는 특정한 비율로 분배된다”라고 서술했다.


 버트런드 러셀은 1918년 ‘자유로 향하는 길’에서 생계에 충분한 소득을 모든 사람에게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에서는 20세기 초 다양한 사상가와 정치인들이 국가배당, 사회배당, 사회크레디트, 사회배당, 기본소득(Basic income) 등의 개념이 제시됐다.


 재밌는 것은 시장경제의 수호성인과도 같은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이 1962년 ‘자본주의와 자유’에서 ‘음의 소득세’를 주장했다는 사실이다. 음의 소득세는 고소득자에게는 세금을 징수하고 저소득자에게는 보조금을 주는 소득세 또는 그 제도를 말한다


 제도의 실행 측면에서 주목할 만한 지역은 알래스카와 핀란드이다. 1976년 알래스카주 당국은 주 헌법을 개정해 알래스카 영구 기금을 설치했다. 1982년 알래스카주 당국은 6개월 이상 알래스카에 거주한 모든 사람에게 나이와 거주 기간에 무관하게 영구 기금에서 매년 균일한 배당을 실시하기 시작했다.


 2017년 핀란드 사회보장국(KELA)은 2017년부터 2018년까지 장기 실업수당을 받는 시민 중 2,000명을 무작위로 선발해 기본소득 월 560유로(70만 원)를 지급했다. 기본소득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국가가 주도해 시행한 세계 최초의 사례이다.


 2019년 KELA는 기본소득 실험의 중간 결과를 발표했다. 기본소득 수령 여부와 취업률 간에는 상관관계가 없는 것으로 보이나 기본소득 대상자들의 삶의 질은 향상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핀란드 정부는 좀 더 면밀히 기본 소득의 결과를 분석해 2020년에 최종 결과를 발표할 예정이다. 만약 긍정적인 평가가 나온다면 핀란드는 국가 주도로 기본소득을 입법화하는 첫 국가가 될 수도 있다는 예측이 나온다.


 우리나라에서는 2010년 기본소득연합이 발족되고 같은 해 치러진 지방선거에서 기본소득 의제를 사회적으로 확산하는 활동을 벌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가 국내 기본소득 논의를 이끌며 시민사회와 정치권 일각에서 확산되었다. 특히 녹색당에서 활발한 내부 논의가 있어왔고 이와 별도로 2019년 9월에는 기본소득당이 창당됐다. 변종으로는 허경영 씨의 국가혁명배당금당이 있다.


 점차 확산되던 기본소득 화두가 코로나19 창궐 국면에서 또 한발 나아갈 조짐을 보이고 있는 가운데 정부의 코로나19 추경 세부안에 기존과 다른 점이 눈에 띈다.


 정부는 한시적으로 아동수당 지급 대상자에게 월 10만 원, 기초생계수급자들에게 최대 22만 원, 노인일자리사업 참여자 수당을 추가로 지급하되 현금(법정화폐)이 아닌 온누리상품권 또는 지역사랑상품권(지역화폐)으로 전달하는 방안을 마련했다.


 이 방안은 국가재난 시 경기침체를 극복하기 위해 반복적으로 써왔기 때문에 큰 틀에서 새로울 것이 없다. 그런데 현금이 아니라 지역화폐 등으로 전달하겠다는 점은 새롭다. 이럴 경우 현금 지금에 따른 퍼주기 논란과 소비가 아닌 저축으로 이어져 기대한 효과를 볼 수 없었던 전례를 극복할 수 있다. 지역화폐는 애당초 저축이 불가능하고 해당 지역 골목상권 가맹점에서만 쓸 수 있어 골목상권에 온기를 불어넣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기 때문이다.


 일부에서는 소비처가 한정되어 있어 경기부양 효과가 낮을 것이란 지적도 있지만 시흥시만 하더라도 가맹점이 6천 곳이 넘고, 온라인쇼핑몰과 대형마트에서는 사용할 수 없는 대신 대부분 가맹점이 생활밀착형 소비처라 사용에 큰 불편함이 없다. 무엇보다 지역화폐의 가맹점은 골목상권이란 점에서 재난 상황에 가장 큰 피해를 입는 계층과 부문에 대한 집중적인 투입 효과를 볼 수 있다.


 기존의 기본소득 논의에서도 지급수단을 지역화폐로 하는 방안이 있어왔다. 완전한 형태는 아니지만 이를 실행에 옮긴 것은 경기도이다.



사진 출처 - 구글


 경기도는 2019년부터 경기도 거주 3년 이상 만24세 청년에게 분기에 25만 원씩 1년 동안 100만 원의 청년기본소득을 지급하고 있다. 지급수단은 경기도 31개 시군에서 각각 시행하는 지역화폐이다. 경기도 시흥시에 사는 A씨는 시흥화폐 시루로, 안산시에 사는 B씨는 안산화폐 다온으로 받는 식이다. 이 돈은 소비의 부가 외부로 유출되는 주요 통로인 온라인쇼핑몰, 백화점, 대형마트, SSM 등에서는 쓸 수 없고 지역에서만 순환된다. 산후조리지원비 50만 원도 동일한 방식으로 지급된다.


 만일 청년기본소득을 현금으로 지급했다면 어떤 상황이 벌어졌을까? 포퓰리즘의 극치, 퍼주기의 끝판왕 또는 빨갱이라는 소리가 곳곳에서 터져 나왔을 것이다.(유럽 쪽 좌파에서는 지역화폐를 우파 정책이라고 본다) OECD 국가 중 GDP 대비 복지비 최하위 수준인 우리나라에서 청년기본소득이라는 도전적 정책이 건재한 것은 ‘복지+지역화폐 지급에 따른 지역경제 활성화’라는 패키지 때문이었다.


 경기도는 지난해 1월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지역화폐 활성화 방안 토론회’에서 지역화폐와 복지정책을 연계해 지역경제를 활성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65세 이상 노인에게 주는 기초연금의 30%를 지역화폐로 전달하면 생산유발효과가 연간 13.3% 증가할 것이라는 내용을 담은 ‘지역화폐 연계를 통한 복지전달체계와 지역경제 활성화’ 연구 결과를 내놓기도 했다.


 경기도의 청년기본소득이 완전한 형태의 기본소득은 아니다. 기본소득은 보편성을 가져야 하지만 청년 기본소득은 24세 청년에게만 보편적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없었던 가장 근사치에 가까운 기본소득임은 틀림없다.


 핵심은 기본소득을 지역화폐로 전달한다는 점이다. 경기도의 시도는 전 세계 3,000여개의 지역화폐 중에서도 전례가 없던 실험이다.


 물론 보편적 기본소득 적용이 현실화된다면 그 모두를 지역화폐로 전달하는 것은 무리가 따를 것이다. 지역화폐는 말 그대로 지역 내 소비의 순환을 목적으로 하므로 생활을 유지하기 위한 다양한 소비에 모두 대응할 수 없다. 기본소득 전체 비중에서 일부를 지역화폐로 지급하는 등의 보완책이 필요할 것이다.


 코로나19는 꿈틀거리던 기본소득을 수면 위로 떠오르게 했다. 미래 사회는 근로소득자와 기본소득자로 나뉠 것이라는, 유토피아일지 디스토피아일지 모를 전망도 나온다. 기본소득 그리고 지역화폐와 결합한 기본소득 논의가 향후 어떤 경로를 거쳐 어떤 결과물로 나올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