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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산책’에는 박록삼(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박상경(인권연대 회원), 서보학(경희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이윤(경찰관), 이재환(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책임관), 조광제(철학아카데미 대표), 황문규(중부대학교 경찰행정학과 교수)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현행의 법적 정의와 미래의 정의로운 법(조광제)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1-05-21 11:08
조회
691

조광제/ 철학아카데미 대표


1. 정치는 정의를 둘러싼 투쟁이다.


 흔히 사실과 당위를 구분한다. 둘 다 순수하게 사적인 차원에서 성립해서 작동하지 않고 공공적인 차원에서 성립 · 작동한다. ‘기회는 균등하게, 과정은 공정하게, 결과는 정의롭게’ 문 대통령이 취임사에서 제시하기도 했던 대표적인 당위의 언명이다. 평등으로 균등을 대신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과 당위를 구분한다고 해서 둘이 무관한 것은 결코 아니다. 그 반대다. 둘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는다. 위 취임사의 당위는 ‘기회가 균등하지 않고 과정이 공정하지 않고 결과가 정의롭지 않다’라는 사실에 대한 인식이 전제되어 있다. 그리고 이 사실은 그저 그렇다고 받아들일 수 없다. 누구나 고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사실에 이미 당위가 함축되어 있다.


 시제로 보자면, 사실은 현재에 이른 과거 즉 현재완료에 해당한다. 당위는 현재에서 미래로 향한 미래완료에 해당한다. ‘그래야만 했다’라는 과거의 당위는 독특한 사실이다. 이 진술은 ‘그럴 수밖에 없었다’라고 해석될 수도 있고,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라는 사실이 덧붙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라는 것은 당위가 아니고 필연이다. 필연은 사실관계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필연은 행위 주체를 수동적으로 규정한다. 행위 주체는 자신의 의지에 따라 능동적으로 사실을 만들어낼 수 있다. 그럴 때, 행위 주체의 능동성에는 암암리에 당위가 작동한다. 그래야만 한다고 판단한 뒤, 그렇게 행위하고 그 행위에 따라 사실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보수는 기존의 사실을 지속하고자 하고, 진보는 새로운 당위를 현실화하고자 한다.


 행위 주체의 능동성을 강하게 요구하는 것은 정치적인 행위를 수행할 때이다. 그런 점에서 대통령의 정치적인 행위야말로 가장 강한 능동성을 띨 수밖에 없고 당연히 그래야 한다. 만약 대통령의 통치 행위가 그러지 않아야 했고 그래서는 안 되었는데, 그럴 수밖에 없었다면 그 대통령의 통치 행위는 무능함을 나타낸다. 그때는 그래야 한다고 판단해서 능동적으로 행위를 했는데, 지나고 보니 그렇게 한 것이 잘못된 것으로 판명될 때도 역시 그때 대통령의 통치 행위는 무능함에 따른 것이다.


 기회가 균등하다는 것도 정의에 해당하고, 과정이 공정하다는 것도 정의에 해당한다. 그러니까 결과만 정의롭다고 해서 정의를 실현하는 것은 아니다. 시작도 과정도 끝도 정의로와야 한다. 정의가 무엇인가에 관해 온갖 복잡한 논의가 가능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정의가 무엇인가에 대한 절대적인 보편적인 원칙은 성립할 수 없다는 점이다.


 사회적인 현실이 각자의 삶을 규정한다고 할 때, 그 규정은 근본적으로 사회적인 가치에 대한 자신의 몫이 어떻게 배분되는가로 귀착된다. 사회적 가치에 대한 각자의 몫의 배분이야말로 정의의 근본 내용이다. 노예가 생산한 것을 주인이 다 가져간 뒤, 노예에게 생명 유지에 필요한 만큼의 몫을 나누어주는 것도 정의의 한 방식이고, 농노가 생산한 것에서 지주인 영주가 상대적으로 많은 몫을 가져가는 것도 정의의 한 방식이다. 그뿐만 아니라, 현행의 법에 따라 자유롭게 시장 행위를 하여 이윤을 올린 뒤 상응하는 세금을 내고 남은 이익을 온통 자신의 몫으로 가져가 축적함으로써 가난한 자들과 아예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부를 소유하는 것 역시 정의의 한 방식이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현실에서 통용되는 정의의 내용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사람만으로 구성된 사회는 존재한 적이 없다. 통용되는 정의를 정의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고, 그 사람들은 현실의 정의가 정의의 원칙에 어긋나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들이 원하는 정의에 어긋나기 때문에 불만을 느끼고 급기야 견디다 못해 단합하여 노예 반란, 농민 반란, 부르주아 혁명 및 노동자 대투쟁 등으로 불리는 방식으로 대대적인 투쟁을 벌이기도 하는 것이다. 반란과 혁명을 둘러싼 세력 투쟁이야말로 가장 첨예한 정치적 활동이다. 이에 정치는 곧 정의를 둘러싼 투쟁의 과정이라 할 것이다. 현행의 법적 정의의 실현에 만족하지 않고 앞으로 세워야 할 정의로운 법을 향한 투쟁이야말로 정치의 본령이다.


2. 문 대통령과 검찰개혁


 사회적인 정의를 책임지는 주체는 국가다. 우리나라의 대통령중심제에서는 국정을 총괄해서 권한을 행사하고 책무를 다하는 자는 대통령이다. 즉 대통령은 국가를 대신해서 사회적인 정의를 책임진 대리자다.


 국가가 책임지는 사회적인 정의에서 기초는 국가 공동체 자체의 안정된 유지다. 이는 기본적으로 형법을 통해 명문화된다. 크건 작건 국가 공동체의 안위를 중심으로 한 사회적 정의는 형법 중심의 법적 정의로 현실화된다. 그동안 국가의 법적 정의를 배타적으로 책임진 조직은 검찰이었고, 이를 위해 검찰의 독립성과 중립성이 강조되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보아 우리나라의 검찰은 그 수장인 검찰총장을 임명하는 대통령의 통치 권력의 눈치를 보면서 대통령뿐만 아니라 관련 조직이나 인물들의 범법 행위를 짐짓 보아 넘기거나 비밀리에 보호하는 등 통치 권력의 수족 노릇을 함으로써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들었다. 그러면서 현행의 법적 정의를 수호하는 척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검찰이 직접 나서서 새로운 정의로운 법을 세우고자 한 적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그것은 정치의 몫이고, 검찰은 정치적 주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촛불 시민혁명이 일어났고, 그 시민의 힘으로써 임기를 채우지 않은 대통령을 탄핵하는 성과를 올렸고 급기야 현재의 문 대통령이 당선되었다. 그래서 현 정권을 일컬어 촛불 정권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러한 촛불 시민의 힘을 바탕으로 검찰은 마치 새롭게 거듭난 듯 전직 두 대통령의 반국가적인 행위를 적발해 내어 구속 · 기소하여 재판에 넘겼고, 최종심은 아직 아니지만 적어도 수십 년의 징역형이 선고되도록 했다.


 다들 알다시피, 이를 기회로 삼아 문 대통령은 적폐청산을 내세웠다. 그리고 그 첫 번째 대상으로 검찰개혁을 제시했다. 조국이라는 교수에게 민정수석을 맡겼고 조국은 검찰개혁의 선봉에 서게 되었다. 그러면서 두 전직 대통령을 법적으로 조치하는 데 큰 공을 세운 윤석열을 마침내 검찰총장으로 임명했다. 임명장을 수여하는 자리에서는 “청와대든 여당이든 살아있는 권력에도 엄정한 자세로 임해주길 바란다.”라고 당부했다. 문 대통령의 법적 정의에 따른 원칙주의가 발동한 것이다.


 윤석열은 두 전직 대통령을 자신이 직접 나서서 처리함으로써 검찰의 순수성이 회복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럼으로써 자신이 몸담고서 충성한 검찰이야말로 국가 공동체의 안위를 위한 법적 정의의 화신임을 입증해 보였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더군다나 ‘살아있는 최고 권력’이라 할지라도 법적 정의의 대상으로 삼을 것을 주저하지 말라는 문 대통령의 당부가 자신이 지휘하는 검찰이야말로 법적 정의를 실현할 수 있는 유일한 조직임을 실감케 한 것은 아니었을까? 만약 그렇다면, 윤석열은 검찰 스스로 검찰개혁을 수행해 주기를 자신에게 주문한 문 대통령을 어리석고 순진하기 짝이 없는 인물로 여겼을 것이라 짐작된다.


 아무튼, 윤석열에게는 두 개의 상반된 임무가 주어졌다. 살아있는 권력을 잡아야 한다는 것과 검찰개혁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어느 쪽에 무게를 두어야 할까? 검찰개혁은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목을 죄는 것과 같다. 이는 자신을 희생함으로써 새로운 정의로운 법체계를 세우는 일이다. 그리고 살아있는 권력을 잡는 것은 두 전직 대통령을 구속 · 기소함으로써 확보한 검찰의 순수성과 위력을 다시 한번 입증해 기정사실로 만드는 일이다. 윤석열은 후자를 택했다. 검찰개혁을 진두지휘하는 조국 민정수석을 살아있는 권력을 대표하는 인물로 선택했고 검찰 조직을 총동원하다시피 하여 그와 그의 가족이 만신창이가 되도록 몰아붙였다. 그러면서 자신의 부인과 장모의 탈법 · 위법이 세간에서 크게 문제가 되는데도 아랑곳하지 않았고 부하 검사들의 행위가 위법가능성이 충분히 드러나는 데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사진 출처 - getty image


 ‘적폐청산’이란 말은 자신이 그 대상이라 여기는 자들에겐 대단히 폭력적인 낱말이다. 이 낱말을 쓰는 순간, 그동안 일본 강점기로부터 이어지는 오랜 독재정권에 요모조모 빌붙어 현실적인 사회 권력을 확보한 숱한 세력들의 거센 반동의 저항을 염두에 두어야 했다. 그리고 그 반동적인 저항을 어떻게 분쇄해 나갈 것인가에 대한 치밀한 전략 · 전술을 마련해 놓았어야 했다. 그런데, 그 전략 · 전술의 선봉장이라 여겨 내세운 검찰총장이 아예 반동적인 저항을 마치 총괄적으로 이끄는 야전사령관과 같은 역할을 자임하고 나선 것이다. 부랴부랴 조국을 법무부 ― ministry of justice ― 즉 ‘정의 수호의 내각부 기관’ 의 수장으로 내세워 진화 작업에 나섰지만, 이는 이미 대안 부재의 무능을 노출했을 뿐이었다. 두 전직 대통령의 감옥행을 실현할 정도로 무서운 시민혁명의 힘에 눌려 있던 반동적인 세력, 특히 수구 언론세력은 이를 기회로 조국을 촛불 정권의 대리 표적으로 삼아 대대적인 공격을 무자비하게 가했다. 자신들의 두 대통령을 마치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빼앗겨버린 야당으로서는 천군만마를 얻은 듯 기염을 토했다. 그 와중에 듣지도 보지도 못한 전광훈을 비롯한 태극기 부대가 촛불 혁명으로 다져놓은 민주주의에 따른 집회와 결사 및 표현의 자유를 마음껏 누리면서 심지어 청와대 근처에서 ‘빨갱이 문재인을 찢어 죽이자!’ 하는 구호를 외쳐대기도 했다. 야당의 지도부는 이에 편승하여 마치 물을 만난 물고기들처럼 어깨를 나란히 하고 행진했다.


 참으로 다행한 것은 탁월한 ‘K-방역’과 같은 호조건이 작동하기도 했지만, 반동 세력의 대대적인 황당한 쇼 덕분에 오히려 21대 총선에서 여당이 사상 유례없는 대승리를 거둔 것이었다. 엄청난 의회 권력을 장악한 여당은 검찰개혁을 강력하게 밀어붙였고, 다들 알다시피 검경 간의 수사권과 기소권의 분리에다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를 신설하는 데 성공했다. 묘한 일은 거대 여당이 밀어붙인 검찰개혁의 성과가 과연 무엇인지 실감하는 사람은 거의 없는 상황이고 심지어 공수처가 종이호랑이에 불과하다는 비아냥이 나올 정도로 그 실효성을 비관한다는 사실이다. 더욱 묘한 일은 거대 여당의 검찰개혁을 당할 수밖에 없었던 윤석열은 검찰총장직을 마치 개선장군처럼 사퇴하고 그 이후 설문 조사에서 차기 대선 유력 후보 1위를 오르내리는 기이한 정치적 사태가 벌어지는 진풍경을 연출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에 검찰개혁을 둘러싸고 윤석열과 대립각을 세웠던 조국과 추미애 두 전직 법무부 장관은 윤석열을 키운 마치 미필적 고의를 저지른 인물들인 양 치부되면서 그들이 일군 검찰개혁의 공은 온데간데없는 것처럼 되고 만 것 역시 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정말 궁금한 인물은 문 대통령이다. 자신이 윤석열에게 살아있는 권력에 대해서도 엄정한 자세로 임할 것을 당부했을 때, 자신의 그 당부가 자신이 민정수석에 이어 법무부 장관직을 맡긴 조국에게 그처럼 황당한 법적 정의의 칼을 휘두르는 ‘빌미’가 될 줄 알았을까? 그럴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하면서도 민주적인 법적 공정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고 여긴 것일까? 두 사람 사이에 한 치 양보 없는 충돌이 일어났을 때, 문 대통령은 왜 두 사람을 조용히 불러 조율 · 조정하여 검찰개혁을 필두로 한 적폐청산의 방향키를 쥐고자 하지 않았을까?


 현행의 법적 정의와 정의로운 법은 겹치는 부분이 있을지언정 일치하지 않는다. 정의로운 법은 미래를 향해 있고, 현행의 법적 정의는 현재에 한정된다. 문 대통령은 현행의 법적 정의가 무너지면 정의로운 법을 세울 수 없다고 여긴 것은 아닐까? 그래서 정의로운 새로운 법을 향한 검찰개혁을 부정하는 윤석열 검찰이 조국과 그의 가족을 온통 짓밟듯이 하는 데도 그것이 현행의 법의 정의에 따른 것이기에 받아들일 수밖에 다른 길이 없다고 여겼던 것은 아닐까? 그런 순진무구함이 적폐청산을 내세우면서도 구체적인 전략 · 전술을 마련하지 못했던 것과 연결되는 것은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민주주의 원칙에 충실한 순수함을 인정받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무능하다는 평가를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문 대통령이 남북 평화를 위해 큰 걸음을 개척하고자 했던 업적이 대미 관계에서 최대한 독자성을 확보하는 길을 여는 것으로 연결된다면, 그래서 그 과정에서 하다못해 임기 내에 거대 여당의 위력을 활용하여 국가보안법 폐지를 실현해 낸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그의 통치는 충분한 의미를 획득한 것이 될 것이다. 아무쪼록 남은 임기에 정의로운 법을 위한 새로운 지평을 열어나감으로써 한국 사회의 민주주의 진보에 크게 도움을 주기 바라며 그리하여 내년 대선에서 ‘별은 잡은 것 같다’ 운운 되는 인물에게 ‘죽 쑤어 개 주는’ 일이 없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