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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산책’은 각계 전문가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수요산책’에는 김재완(방송대 법학과 교수), 신하영옥(여성활동가), 윤영전(평통서문예원장), 이광조(CBS PD), 이문영(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교수), 정보배(출판 기획편집자), 정재원(국민대 국제학부 교수), 조광제(철학 아카데미 상임위원), 최정학(방송대 법학과 교수), 홍미정(단국대 중동학과 교수)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남들이 자른 것을 우리가 잇는다 (조광제)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8-05-30 10:03
조회
306

조광제/ 철학아카데미 상임위원


1.
 철학자 라이프니츠(Gottfried Wilhelm Leibnitz, 1646〜1716)가 제시한 “충족이유율”이란 것이 있다. 그 어떤 개별적인 사건에 대해서도 원인을 물을 수 있고 대답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확대해서 보면, 당연히 원인도 하나의 사건일 터이고, 원인의 원인은 꼬리를 물고서 확산되면서 결국에는 마치 불교의 “연기”(緣起)처럼 만물 생성의 무한 인과의 네트워크를 제시한 셈이 된다.


2. 
 2018년 1월 1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신년사를 통해 남북관계 개선을 위해 진지하게 토의를 하자고 제안하고 평창동계올림픽 대표단을 파견하겠다고 통보 한 것을 시발점으로 그 이전 북미간의 핵전쟁 운운하면서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이 순식간에 급물살을 타고서 평화 쪽으로 일변했다. 평창동계올림픽을 계기로 한 남북문화교류에 의한 화해의 분위기에 이어 무엇보다 4월 27일 김정은 위원장의 판문점 남쪽 지역 <평화의 집> 방문에 따른 남북정상회담과 그 결과인 ‘완전한 비핵화와 평화 번영’을 중심으로 한 <판문점 선언>은 한반도 거주민들, 특히 남쪽 우리들에게 마치 금방이라도 전반적으로 자유왕래가 가능해지기라도 할 것처럼 온 마음 온 몸을 한껏 설레게 만들었다. 그런 가운데, 전 세계인들이 문재인 대통령을 현 세계정세에 가장 영향력이 높은 인물로 평가한다는 소식이 들려왔고, 북미정상회담을 해서 북한의 비핵화와 체제보장을 통한 개혁 개방과 평화 번영에의 물꼬를 트기 위한 실질적인 만남들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런가 하면, 이러한 한반도의 평화 대행진의 새로운 역사의 전개에 기회를 놓칠세라 중국도 일본도 러시아도 그들의 수뇌들 및 대변인들의 입을 통해 발 빠르게 호응하고 환영한다는 반응을 보였다. 마침내 5월 10일에, 6월 12일 싱가포르에서 북미정상회담을 한다는 미국대통령 트럼프의 발표가 있었다. 그 직전 5월 7-8일에 김정은 위원장이 3월 25-28일의 1차 방중 북중정상회담에 이어, 2차 방중 북중정상회담을 가졌다. 그러나 그 이후, 북미 간에 비핵화 방식을 둘러싸고 강경한 발언들이 오가면서 결국 5월 23일 미국에서 한미정상회담이 있은 직후인 5월 24일 미국대통령 트럼프가 한국 대통령에게 알리지도 않은 채 전격적으로 북미정상회담 취소를 선언해버렸다. 전 세계인들을 당황하게 만든 행위이거니와 누구보다도 문재인 대통령을 비롯한 한반도 평화를 절실히 원하는 우리 모두를 하루아침에 배신하는 행위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러자 북한에서 북미정상회담을 원한다는 전언들을 즉시 내놓았고, 이에 취소한 하루 만에 트럼프는 ‘취소한 것을 취소할 수 있다’는 취지의 모호한 발언을 내놓았다. 북한의 전유물이라 여겨왔던 이른바 ‘벼랑끝 전술’을 트럼프 미국 쪽에서 구사한 것 아니냐, 하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런 와중에 5월 26일 오후 김정은 위원장의 요청으로 문재인 대통령이 판문점 북쪽 지역의 <통일각>으로 올라가 극비리에 두 시간에 걸쳐 2차 남북정상회담을 했다. 두 정상이 뜨겁게 포옹하는 장면이 방영되었다. 그 이후, 이 글을 쓰는 이 시간, 텔레비전에서는 북미정상회담을 둘러싼 뉴스들이 연신 급하게 전달되고 있다.  



사진 출처 - 노컷뉴스


3.
 다들 아는 이야기다. 하지만 역시 인권연대의 <수요산책>을 통해 이 정도로나마 정돈해서 기록해 두고 싶은 마음이다. 중요한 귀결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겠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앞으로 한반도 남북의 진정한 평화를 바탕으로 한 공존공영의 탄탄한 길을 여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작금에 이루어지고 있는 일련의 사태들을 통해 이러한 길을 열 수 있는 역사적인 의식을 간추리는 일이다.
 위 최근의 일들을 보면서, 직접 경험하지는 않았지만, 1946년 1월 16일 예비회담을 기점으로 같은 해 3월 20일부터 1947년 10월 21일까지 한국의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미국과 소련 사이에 열렸던 이른바 <미소공동위원회>를 생각하게 된다. 이 위원회는 1945년 12월 16일에 전후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열렸던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결의한 <한국 문제에 관한 4개항의 결의서>에 들어있었던 ‘임시정부 수립을 돕기 위해 미소공동위원회를 설치한다.’에 따른 것이었다. 그런데 그 결의문에 ‘미국과 소련, 영국, 중국은 임시정부 수립을 돕기 위해 최대 5년간의 신탁통치를 실시한다.’가 함께 들어 있었다. 그러니까 ‘미소공위’의 핵심 의제는 38도선을 경계로 양쪽에 분할 주둔한 미국과 소련의 일시적인 군정 상태를 종식시키고 남북의 통일정권 수립을 어떻게 진전시켜나갈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문제는 신탁통치였다. 한국의 지도자들은 누구도 신탁통치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를 둘러싸고서 또는 이를 이용해서 한국 지도자들 간의 정치적 우위를 둘러싼 각종 쟁투와 갈등 및 암살 등이 있었고, 또 이를 역용한 미국과 소련의 냉전적인 대결이 있었던 것이다. 결국 우여곡절 끝에 미소공위는 결렬되어 해산되고 말았고, 한국문제가 유엔에 상정되어 1947년 11월 14일 유엔 감시 하에 남북총선거를 실시하기로 가결하였지만, 소련이 북쪽의 인구가 적다는 점을 염두에 둔 탓에 이를 거부하고, 1948년 5월 10일 많은 반대 속에 남한 단독으로 총선거를 실시하여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하고, 북조선에서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선포하여 남북 분단이 고착되었고, 결국에는 한국전쟁이라는 최고도의 비극을 낳게 된 것이다.
 이제 그동안 7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소련은 해체되었고, 그 대신 중국이 미국과 더불어 2극 체제를 형성하는 한 축으로 부상했다. 애초 철저히 외세에 의해 분단된 한반도는 분단과 전쟁 그리고 휴전으로 이어지면서 ‘분단-휴전 체제’를 악용하는 내외의 이데올로기적인 냉전 내지는 호전 세력들에 의해 여러모로 그야말로 체제적으로 상처받고 불이익을 당하고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는 등의 처절한 역사를 거듭해 왔다. 이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힘은 한반도 거주민 당사자들로부터 나올 수밖에 없고, 그렇지 않고서는 설혹 해결이 된 것처럼 보인다고 할지라도 언제든지 다시 수렁에 빠질 수밖에 없다. 
 내가 아닌 자들을 철저히 배척하자는 것이 결코 아니다. 이른바 대타성(對他性), 즉 내가 아닌 것들과 관계를 맺고 상호작용함으로써 존재를 유지한다는 것은 만물의 근본 이치다. 하지만, 자성(自性), 즉 늘 제 자신이고자 하는 위력을 지니지 못하는 한 존재를 유지할 수 없다는 것 또한 만물의 근본 이치다. 자성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추구하는 대타성은 의존에 이어 굴욕과 수치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대타성을 무시하고서 자성만을 추구하는 존재는 독단에 이어 고립과 자폐로 이어지고, 권력을 지닐 경우 그 권력은 배타적인 폭력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미국 대통령 트럼프가 김정은 위원장이 중국 시진핑 주석과 두 번 만나더니 태도가 변했다는 말을 하면서 ― 물론 그 외 다른 말들도 했다. ― 북미정상회담을 취소한다고 선언했다. 애초에 1차 남북정상회담에 이어 북미정상회담 이야기가 나왔을 때 ‘재팬 패싱’에 이어 ‘중국 패싱’ 이야기가 나왔다. 곧바로 최초의 북중정상회담이 이뤄졌다. 시진핑 중국주석이 김정은 위원장을 그처럼 성대하게 맞이할 줄 몰랐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또 다시 외세다. 미국과 중국이다. 만약 트럼프의 북미정상회담 취소가 한편으로 중국의 배후 개입을 차단하기 위한 전술이라면, 한반도 문제는 또 다시 ‘그들만의 리그’를 위한 보조 장치에 불과한 셈이다. 그런데 만약 갑자기 극비리에 이루어진 2차 남북정상회담을 하면서 ― 그럴 가능성이 매우 높아 보이는데 ― 문재인 대통령이 전혀 미국대통령 트럼프와 사전에 아무런 조율 없이 이루어진 것이라면, 이는 우리 나름의 자성적인 위력을 바탕으로 외세에 의거한 힘들을 조절해 나가는 중요한 계기가 되는 것이다. 더욱이 6월 12일 싱가포르에서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북미정상회담이 남북미 정상회담으로 이어질 것으로 점쳐지기도 한다. 이는 요컨대 남측이 북측을 끌어안음으로써 북측에게 중국에 대한 자성을 강화시키는 대타적인 계기로 작동하고, 북측이 남측을 끌어안음으로써 남측에게 미국에 대한 자성을 강화시키는 대타적인 계기로 작동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을 함축한다고 할 수 있다. 한반도 양쪽이 서로의 자성과 대타성의 위력을 공히 호혜적인 방식으로 강화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남들이 자른 것을 우리가 잇는 것이다.”


4.
 한 가지 덧붙일 것이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촛불시민혁명이 낳은 대통령이다. 촛불시민혁명은 세계 역사상 유례가 드문, 평화로써 성공한 혁명이고, 아직 실현 과정 중에 있는 혁명이다. 이는 한국의 정치적인 자성이 얼마나 강한가를 전 세계에 드러내 보인 엄청난 사건이다. 그 평화에 입각한 집단적 자성의 힘이 바탕이 되어 작금의 세계사적인 대전환의 물꼬를 트는 위업을 수행해 나가고 있는 것이다. 아직 촛불은 우리의 삶과 존재 속에 이미 늘 충분히 켜져 있고, 앞으로도 필요하면 얼마든지 또 다시 촛불은 광장에 집결될 것이다. 결국, 우리의 촛불시민혁명은 앞으로 있을 세계사적인 평화의 역사 전개에 충족이유의 핵심으로 작동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