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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산책’에는 김재완(방송대 법학과 교수), 신하영옥(여성활동가), 윤영전(평통서문예원장), 이광조(CBS PD), 이문영(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교수), 정보배(출판 기획편집자), 정재원(국민대 국제학부 교수), 조광제(철학 아카데미 상임위원), 최정학(방송대 법학과 교수), 홍미정(단국대 중동학과 교수)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여성주의에게 진보란 무엇인가? (신하영옥)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11-17 17:55
조회
26

신하영옥/ 여성운동연구활동가 네트워크 ‘젠더고물상’


- “내 아내 성폭행하실 분” 인터넷서 물색한 남편, 모텔에서 술에 취한 아내를 함께 성폭행... 경찰에 체포
- 대법, '여중생 성폭행·임신' 40대 기획사 대표 무죄 확정. "사랑해서 이뤄진 관계" 주장 받아 들여
- 한샘 신입여직원 강간 및 성폭행, 몰카, 성폭행 재시도
- 현대카드 여직원 성폭행
- '장기자랑 논란' 성심병원, 임산부까지 동원? "응원 강요…아스팔트 위에 장시간 방치"
- 일선 간호사들에게 강요되고 있는 '임신 순번제'


오늘, 인터넷 검색 3순위가 페미니스트였다. 의아해서 검색해보니 가수지망생 모씨가 발언한 ‘트랜스젠더와 여성혐오’에 대한 sns의 글이 1순위로 오르면서 ‘페미니스트’도 덩달아 검색순위에 오르게 된 것이었다. 여기서 트랜스젠더가 여성이냐 아니냐를 논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페미니스트가 검색 상위에 오를 정도로 이제 페미니즘, 여성주의는 어쩌면 일상 곁으로 다가온 건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희망을 주워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페미니즘이라는 말이 보편화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페미니즘의 확산의 뿌리는 긍정적이지 못하다. ‘꼴페미’, ‘김치녀’ 등의 용어와 더불어 사용되는 예가 많고, 페미니즘 논쟁이 있는 곳이면 어김없이 ‘여성혐오꾼’들이 등장하기 마련이다. 어쩌면 이들이 오히려 페미니즘을 일상의 용어로 확산하는 데 기여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하여간 페미니즘은 사회적 여성이슈나 여성폭력 관련해서 논쟁이 발생하는 곳에서부터 퍼져나오고 있다.


위에 열거한 사건들은 최근에 발생한 여성들에 대한 폭력과 차별, 성희롱 사건들이다. ‘페미니스트’임을 자처한 이가 대통령이 되고, ‘진보’를 자처한 이들이 정권을 이루고, ‘야당’을 자처하는 이들이 집권정당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여성들에게는 ‘페미니스트’도, ‘진보’도, ‘야당’도 안 보이는 걸까? 남편은 아내를 윤간 대상으로 보고, 기업들은 여성사원들을 ‘성폭력’과 ‘선정’의 대상으로 보며. 기획사 대표는 연예인 시켜주겠다는 것을 빌미로 수차례 강간을 했는데, 법원은 그걸 ‘사랑’이라 부른다. 그리고 출산율 저하를 우려하는 국가와 사회는 간호사들이 ‘임신’을 위한 순번제를 한다는 것을 모르쇠하고 있다. 여성단체들은 며칠 전 한샘과 현대카드 성폭력 문제에 대한 성명을 통해 “여성에겐 모든 기업이 한샘!”이라고 못을 박았다. 드러나지 않았으나 만연한 직장 내 성희롱 및 성폭력 사건을 꼬집는 말이다. 여성들에게 모든 기업은 성희롱과 성폭력에 대한 두려움이 존재하는 곳이다. 직장 내 성폭력과 성희롱은 결코 일회성으로 끝나지 않는다. 때문에 피해여성들은 그곳이 직장이 아니라,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이 되어버린다. 어렵게 입사한 직장을 그만두고 평생을 우울증과 자폐에 시달리며 살아내는 여성들. 모든 범죄 중에서 유독 성폭력만 피해자가 손가락질 받는 사회문화 속에서 성폭력 피해여성들은 피해자임에도 가해자처럼 숨거나 숨기거나 하는 것이다. 나의 직장이 일터가 아니라 폭력의 현장이라고 느껴질 때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아내를 물건만도 못하게 취급하는 남편, 연예인 후보생을 성적 노리개로 취급하는 기획사 대표, 그 남편들이 만드는 기업문화, 기획사 대표가 만드는 우리사회 성문화, 몇몇 글만을 보고 성폭력을 사랑이라 인정하는 법제도가 만드는 법의식과 문화...... 가족, 기업, 미디어, 그리고 법과 제도까지, 가부장제는 굳건히 뿌리를 내리고 있다. 가부장제도는 여성에겐 굴레이자 억압 그 자체다. 억압과 차별이 만연하고 폭력으로 일상이 두려움과 불안이라면 그것은 민주주의일까? 그리고 그것은 진보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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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 여성신문


며칠 전 강의를 하러 간 어떤 여성단체에서 한 여성이 진보주의자인 남편에 대해 분통을 터뜨리는 것을 보았다. 집안일은 전혀 하지 않고, 소통도 않으며, 경제생활도 하지 않고 오로지 ‘진보정당’ 일에만 매진을 한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경제생활과 임신/출산/양육에 가사노동까지 전담해야 했던 이 여성은 현재 우울증 치료약을 먹고 있다.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 남편의 주장이라고 한다. 무엇이 큰 것이고 무엇이 작은 것인가? 불통을 우린 ‘독재’라 한다. 스스로 자신을 돌볼 수 없는 사람을 우리는 뭐라 불러야 할까? 그 남편은 진보주의자이지만 실상에선 무능력하고 무위하며, 독재자일 뿐이다. 여성에게 그러한 진보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진정한 진보정권을 자처한다면, 여성문제가 민주주의의 척도라는 생각을 좀 더 진지하게 하길 바란다. 모든 인권은 피해자들의 존재로부터 출발한다. 피해자들에게는 존재를 드러내는 것 자체가 커다란 용기이고 투쟁이다. 인권은 투쟁으로부터 나온다. 성폭력 피해자 여성들이 드러내는 ‘성폭력의 존재함’은 여성인권의 바로미터이고 이로부터 여성인권의 방향이 나오는 것이다. 국가는 이러한 피해자들의 목소리, 폭력의 존재함에 대해 민감성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인권임을 직시하고 전 사회적인 변화를 위한 조처를 취해야 할 것이다.


여성에 대한 폭력이 만연한 사회는 결코 진보한 사회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진보한 국가도 정권도 아니다. 고통 받는 이들을 외면하는 정치란 존재할 수 없다. 정치란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이 아니라 ‘소를 위한 대의 헌신’이 필요한 데서 발생한다. 진보란 작은 것, 일상, 생활의 평화를 보장하고자 하는 것, 그것은 인간이 가장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란 점에서만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단지 주장으로만 그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여성주의에게 현 정권은 결코 진보적이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