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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 테러, 승리가 아닌 평화를 (이문영)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8-07 15:01
조회
288

이문영/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교수


올해 IS가 아프리카, 아시아, 유럽 3개 대륙을 넘나들며 자행한 테러로 8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얼핏 떠오르는 것만 헤아려 봐도, 2015년 10월 10일 터키 앙카라역에서 자살폭탄테러로 128명이 목숨을 잃었고, 같은 달 31일 이집트 시나이 반도 상공에서 러시아 여객기를 대상으로 한 폭탄 테러로 탑승객 224명이 전원 사망했다. 또 11월 12일 레바논 베이루트 폭탄 테러로 43명이, 그 다음 날 발생한 파리 연쇄 테러로 132명이 사망했다. 하나의 테러 조직이 이렇게 글로벌한 기동력으로 이렇게 많은 지역에서 이렇게 많은 사람을 희생양으로 삼은 경우가 있었던가.


특히 파리 테러의 경우, 그것이 전 세계에 던진 충격과 파급력으로 인해 ‘알카에다의 911’ 테러에 빗대 ‘IS의 911’, ‘유럽의 911’로 불린다. 그런데 두 911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뉴욕의 911이 세계무역센터와 펜타곤에 돌진해 미국으로 표상되는 글로벌 자본주의의 ‘상징’을 가격했다면, 파리의 911은 극장과 축구장, 펍과 바를 종횡무진하며 유럽인으로 표상되는 세계시민의 ‘일상’을 가격했다는 점이다. 이 테러가 파괴한 것은 단지 일상만이 아니다. 아주 오랫동안 우리가 일상 속에 소중히, 공들여 만들고 가꾸어온 가치들, 나와 다른 사람, 다른 문화에 대한 존중, 그들과의 공존과 공생, 그렇게 함께 하는 삶의 의미 자체를 무너뜨렸다. 파리 테러 후 등장한 “똘레랑스가 유럽을 망쳤다”는 구호는 더 이상 일부 보수정치인만의 레토릭이 아니다. 이해, 관용, 용서, 사랑, 연대 같은 ‘보편적’ 가치를 ‘보편적’이게 만들기 위해 지불해야만 했던 역사 속 수많은 희생이 무위로 돌아갈 판이다. 파리의 911은 뉴욕의 911보다 훨씬 더 본질적인 것을 테러의 제물로 삼았고, 따라서 제대로 되새기지 않으면 더욱 참혹한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더구나 유럽이 어떤 곳인가. 소수자 인권과 문화다원성, 똘레랑스, 민주적 참여, 지속가능한 발전 등 세계 어느 지역보다 진보적인 가치감각이 발달, 공유해왔다고 인정되는 곳이다. 물론 발리바르가 진즉에 경고했듯이, 유럽연합은 그 안에 수많은 내부경계들, 차별과 억압의 경계들을 품고 있는 만만치 않게 문제적인 공동체다. 그리스 재정위기나 난민정책을 둘러싼 유럽연합 내 갈등이 이를 잘 보여준다. 어쩌면 파리 테러는 이 내부경계를 제대로 건드린 것인지도 모른다. 파리 테러가 유럽이라는 하나의 표상 아래 강제 봉합되어온 이 유럽의 틈과 균열들이 만나 다시 한 번 폭발하는 것, 이것이 파리 테러의 후폭풍이자 파리 테러의 완성일 터다. 불행하게도 이미 유럽은 그런 불길한 조짐을 내비친다.


파리 테러 후 프랑스 국민전선의 마리 르펜은 “무슬림 단체를 모두 해체하고 불법이주민을 추방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파리 테러 용의자 중 일부가 난민 신분을 이용해 프랑스에 입국한 정황이 포착되면서 이러한 목소리는 더욱 거침이 없다. 포용적 난민 수용정책으로 올해 노벨평화상 후보로까지 거론됐던 메르켈 독일 총리는 리더십의 심각한 도전에 직면해 있다. 독일 기독사회연합의 마르쿠스 줴더 의원은 “통제불능과 불법이민의 시간은 끝났고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다... 파리가 모든 것을 바꾸었다”고 외친다. 이러한 움직임은 이탈리아, 헝가리, 폴란드, 네덜란드 등에서도 뚜렷이 목격된다.


유럽이 이러할진대 미국은 어떨까. 파리 테러가 일어난 지 일주일 만에 미국 하원은 오바마 대통령의 시리아 난민 수용을 반대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 법안의 이름은 ‘외적에 대항하는 미국인 안전법’. 난민이 미국인의 안전을 위협하는 적이라는 말이다. ‘미국의 민낯’을 적나라하게 과시 중인 트럼프가 파리 테러 후 무슬림과 외국인을 상대로 쏟아낸 막말들은 이미 아찔한 수준조차 넘어섰다. 그럼에도 트럼프의 보수층 공략은 여전히 먹히는 중이다.


IE001894231_STD.jpg파리 바타클랑 공연장 앞 추모 현장
사진 출처 - 연합뉴스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파리 테러 후 시리아 난민 200명이 국내 체류 중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문제는 시리아 난민에 대해 “메르스보다 위험하다”거나, “헬조선만으로도 버겁다, 파리 꼴 나기 전에 돌려보내라”는 여론이 범람한다는 사실이다. ‘난민=테러리스트’라는 비이성적인 등식에 기대어 한 여당 정치인은 테러방지법을 제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불온한 테러리스트에 대한 경계는 불순한 국민들을 향한 날선 경고로 이어진다. 복면을 한 시위 참여자는 IS나 한가지라고 한다. 대통령이 직접 한 말이다.


테러는 공포의 확산기제를 통해 최소한의 폭력으로 최대한의 효과를 얻고자 한다. 그렇다면 IS는 소기의 목적을 충분히 달성했다. 연이은 테러로 세계는 공포를 넘어 공황 상태에 빠졌다. IS의 원칙을 전 세계에 퍼뜨리고자 하는 목적도 효과적으로 달성했다. 이슬람 극단주의가 설파하는 나와 타자의 극단적 분리, 오로지 나의 편에만 진리가, 존재의 권리가 존재한다는 독선이 파리 테러 후 난민에 대한 거부로, 무슬림 혐오주의로 변복(變服)해 유럽을, 세계를 거꾸러뜨린다. IS에 대한 공포가 자신 속의 IS를 깨워 일으킨 셈이니 역설적이라 할 만 하나, 테러는 본디 이러한 공포의 역설을 먹고 자란다.


파리 테러로 인한 전 세계의 우경화, 이러한 기류에 편승한 공안통치의 강화도 문제지만, 정치 이전에 사람들 각자의 삶과 삶이 부딪혀 일상이 전쟁이 되어버린다. 나와 다른 사람, 다른 생각, 다른 종교, 다른 문화를 허용하지 않고, 다름을 적으로 돌리는 것. 공포를 빌미로 가상의 적을 만들어내고, 나와 그 사이에 예리한 경계를 그어대는 것. 그 칼날은 결코 강한 타자를 향하는 법이 없다. 난민은 누구보다 약하고 가난하여 도움이 절실한 사람들이다. 그런 난민 속에서 적을 보는 사람에게나, 그 터무니없음을 보는 사람에게나 삶은 너무나 버거우면서 하찮고, 결국 허하다. IS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이러한 삶의 파괴, 인간의 파괴일지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파리 테러 직후 발리바르도 한 칼럼을 통해 같은 질문을 던진 바 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자답했다. 우리 함께 되돌아볼 것, 그리고 온갖 공포, 또 복수의 충동에 저항할 것. ‘자칭’ 애국자들에 의해 내부의 적으로 배제된 사람들을 향한 증오행위를 가장 철저하게 경계할 것. 그의 마지막 호소는 평화를 유럽의 의제로 다시 세우자는 것, 그리하여 ‘승리’가 아니라 ‘평화’를 외치자는 것이다. 뉴욕의 911이 파리의 911을 낳았듯이, 파리 테러가 더 큰 비극, 더 잔혹한 폭력의 시작이 되지 않도록 승리가 아닌 평화를 궁구하는 것이 결코 유럽만의 의제는 아닐 것이다.


이 글은 2015년 12월 9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