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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명예를 위하여(석미화)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2-09-07 15:21
조회
333

석미화/ 평화활동가


 9월 2일 방송의날 축하연이 열리는 여의도 63빌딩 앞에서 공영언론 사장 퇴진을 촉구하는 보수단체 집회가 열렸다. 집회 참석자 대부분은 월남 참전군인이었다. 참전군인들이 왜 공영방송 관련 집회에서 사장 퇴진을 외치고 달걀을 던지게 되었을까. 그 배경은 응우옌티탄의 방한과 이에 맞춰 편성된 <KBS시사멘터리 추적> 8월 7일 방송분 ‘얼굴들, 학살과 기억’과 관련이 있었다.


 이 프로그램은 1968년 2월 12일 베트남 중부 퐁니퐁넛마을에서 일어난 한국군 청룡부대 민간인학살과 이 사건 피해자인 응우옌티탄이 한국 정부를 상대로 벌이고 있는 소송을 다루었다. 참전 관련 단체는 이를 편파방송으로 규정하고 참전군인 명예를 훼손했다면서 항의했다. 방송 열흘 후 월남참전전우회, 고엽제전우회, 무공수훈자회, 상이군경회 4개 참전 관련 단체가 KBS본관 앞에서 집회를 열고 KBS사장 면담과 사과를 촉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화형식과 삭발식, 국회까지 행진하면서 그들은 ‘우리는 양민을 학살하지 않았다’ ‘참전군인의 명예를 훼손하지 말라’고 했다.


 집회 다음 날 KBS 소수 노조는 ‘20년 전 알려진 논쟁 아이템, 한국군의 베트남 민간인 총살사건을 1심 선고 전 방송한 까닭은?’이라는 성명을 냈다. 이후 노조 위원장이 월남참전자회 회장을 찾아 KBS를 대신해서 사과하고 문제해결에 적극 나서겠다는 뜻을 밝히기도 했다. ‘총살’이나 ‘논쟁 아이템’ 등 사려 깊지 못한 용어의 표현에서와같이 이 입장은 베트남전쟁 과거사 문제에 대한 진지한 접근보다는 ‘공정’을 빙자한 선동의 언어와 편협한 이해 수준을 드러내고 있었다. 방송의 날 리셉션 행사장 앞 거리에 참전군인이 모이게 된 것은 이러한 과정에서 발생한 일이다. 집회에 참석한 한 참전군인은 “우파 노조 분들이 월남전에 대해 상세하게 보도하고 우리 위상을 높여줄 것이다”라는 기대를 말했다고 한다. 보편적 인권개념에 반하거나 미달하는 노조가 과연 그렇게 할 수 있을지 자못 의문스럽다. 언제 한 번이라도 참전군인들의 고통과 절박함을 그들이 진지하게 접근하는 걸 본 적이 없는 데다가 자칫 그들이 긴 세월 겪어 온 아픔을 도리어 도구화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앞선다.



지난 9월 2일 한국방송협회 주최 방송의날 축하연이 열리는 서울 여의도 63컨벤션센터 앞에서
보수단체들의 공영언론 사장 퇴진 촉구 집회가 진행됐다.

사진 출처 - 미디어오늘


 며칠 뒤 국가보훈처는 <KBS 시사멘터리 추적> 프로그램 관련해 입장문을 냈다. 보훈처장이 국회에 출석해서 유감을 표명하기도 했다. 역시 KBS가 편파방송으로 참전군인의 명예를 훼손했으며 이에 대응하겠다는 것이었다. 국가보훈처가 오래도록 참전군인의 ‘명예’를 지키기보다는 이러한 노력 자체를 망각해왔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20년 넘게 국가가 방관함으로써 일어난 갈등과 참전군인의 분노에 대한 책임 있는 입장을 내기는커녕 얕은 수준의 문제 인식을 보여주는 데 그쳤다.


 참전군인들은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활동과 퐁니퐁넛 사건 재판이 자신들의 명예를 훼손할 뿐 아니라 참전단체에서 추진하고 있는 전투수당, 참전명예수당 등을 받는 일에 걸림돌이 될 것이라고 보고 있다. 참전군인 한 사람이 단체 누리집에 쓴 글이다. “이 문제가 잘못되어간다면 우리들 희망 사항인 전투수당, 참전명예수당, 이러한 모든 것이 순조롭게 되가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훗날 자손들에게도 부끄러운 조상이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참전군인들의 걱정과는 달리 국가의 이름으로 전쟁에 참여한 뒤 받아야 하는 대우가 전쟁의 진실 때문에 어그러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나아가 국가에 공헌했다고 해서 전쟁 때 행한 모든 행위가 정의일 수는 없는 일이다. 참전군인들 스스로가 걱정하듯이 그 부끄러움이 참전군인들의 몫만이 아니라 후대들의 몫으로 넘겨주어서는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진상규명과 참전군인의 진심 어린 성찰이 반드시 필요하다.


 8월 초 익산에서 참전군인을 찾아다니고 있는 동안 응우옌티탄은 한국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익산에서 태어나 6.25를 겪고, 초등학교를 다니고 지금은 고향에서 농사일을 하거나 노년을 보내고 있는 월남전 참전군인들의 기억을 들었다. 마을은 고요하고 참전군인들의 이야기는 가슴이 저려왔다. 응우옌티탄의 눈물과 참전군인의 애환은, 실은 둘이 아니다. 오랫동안 피해자 가해자로 나누어 인식해온 사회적 관점이 둘을 만나지 못하게 했던 것이다. 참전군인 32만여 명 중 5천여 명은 베트남에서 죽었고 살아 돌아온 이들도 이미 70대 중반과 80대 노년으로 접어들었다. 18만여 명 정도가 있다지만 그들과 만날 수 있는 시간 또한 그리 길지 않다. 시간이 없다. 이 둘을 이제라도 만나게 하려면 최소한의 진실에 접근해야 한다. 다시 짐을 싼다. 참전군인 할아버지들을 만나러 가기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