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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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산책’은 각계 전문가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수요산책’에는 박록삼(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박상경(인권연대 회원), 서보학(경희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이윤(경찰관), 이재환(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책임관), 조광제(철학아카데미 대표), 황문규(중부대학교 경찰행정학과 교수)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무제(無題) (박상경)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2-08-23 17:44
조회
315

박상경/ 인권연대 회원


 코로나19가 기승을 부리던 늦은 밤, 전철을 타려던 내 발길이 잠시 멈칫거렸다. 승객이 별로 없는 전철 안에 기괴한 기운이 감돌았던 것이다. 불콰한 취객의 고성도 수군거리는 대화 소리도 없는, 이런저런 소리와 사람들로 북적거려야 할 전철에 적막감이 감도는데, 그 느낌이 기괴했다. 코로나19로 말을 빼앗긴 사람들의 마스크를 쓴 표정 없는 얼굴은 영화에서나 보던 미래의 암울한 도시 풍경을 보여 주는 것만 같았다.


 이 기괴한 적막을 깬 것은 서울역을 벗어나면서였다. 그전부터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걸 미처 깨닫지 못했던 걸까,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서서 가는 사람이 별로 없던 전철 안의 사람들 눈길이 소리 나는 쪽으로 일시에 달려가는 느낌이었다. 서른 중반의 두 남녀가 마스크를 쓰지 않은 채 이야기를 나누는데, 고요한 전철 안에 울림마저 느끼게 하는 대화 소리를 정작 두 사람은 인지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사람들의 못마땅한 눈길을 느낄 만도 한데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대범하게) 이어지는 두 사람의 대화는 마치 고장난 라디오에서 나오는 소리처럼 신경을 긁었다. 적막 속에 이어지는 말소리에 오히려 사람들이 숨을 죽였다.


 그때였다. 전철 한쪽 끝에 서 있던 한 남자가 발소리를 쿵쿵 내며 흔들흔들 두 사람을 향해 걸어갔다. 그는 보통 사람보다 머리 하나는 더 있는, 덩지가 아주 컸다. 사람들의 긴장한 눈길이 그 남자를 따라가는데 당사자들은 모르는 눈치였다. 일부러 쿵쿵 소리를 내며 두 남녀 앞에 다가간 남자가 앉아 있는 남자의 코끝에 거칠게 손가락을 흔들며 소리쳤다. “마스크 써!”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었는지 앉아 있던 남자는 멀뚱히 남자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다시 한 번 “마스크 써, 마스크 쓰라고!”라며 덩지 큰 남자가 우악스럽게 소리를 쳤다. 순간, 상황을 파악한 남자의 얼굴이 당황스러움과 수치심으로 발개졌다. 사과하고 끝내기에는 자존심이 너무 상했고, 대거리하기에는 본인의 실수와 남자의 덩지가 만만치 않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남자를 대신해 옆에 앉은 여자가 남자의 주머니에서 마스크를 꺼내 입에 씌워 주고 자기도 마스크를 썼다. 그들의 행동에 만족했는지 덩지 큰 남자는 자기가 있던 자리로 돌아갔고 상황은 일단락되는 듯했다.


 그러나 두세 역을 가지 않아 두 남녀는 다시 ‘턱스크’를 한 채 두런두런 대화를 하였다. 조용한 전철 안에서 그 말소리는 사이렌 소리 같았다. 덩지 큰 남자가 더욱 거칠고 험악한 몸짓으로 그들에게 다가가 욕설 섞인 말로 “너, 마스크 써, 마스크 쓰라고, 왜 벗고 난리야!”라며 큰소리를 쳤다. 이번에도 옆에 있는 여자가 남자의 마스크를 슬그머니 코 위로 올려 주며 자신도 바르게 썼다. 남자는 여전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그저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덩지 큰 남자의 기세가 사나워지면서 사태가 커지려는 순간, 한 청년이 다가가서 덩지 큰 남자의 팔을 부드럽게 잡으며 “이분들 이제 마스크 쓰셨으니 됐잖아요! 아저씨도 그만하세요!”라며 달랬다. “좋은 말로 할 때 들어야지~ 우이 씨~” “이제는 (마스크) 쓰셨으니~” 청년은 남자를 달래면서 두 남녀에게는 참으라는 몸짓을 했다. 쉽지는 않았지만 사태는 그쯤에서 매듭지어졌다. 뭔가 뒤끝이 개운치는 않았지만, 덩지 큰 남자와 청년은 자기가 있던 자리로 돌아갔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창피를 당한 두 남녀는 분하기는 하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는지 그다음 역에서 내렸다.


 코로나19는 은연중에 내가 모르는 사람들을 적대시하는 감정까지도 용인하게 만들었다. 코로나19 초기, 집단 감염이 발생하면 우리는 초기 확진자를 향해 거침없이 손가락질을 하며 매도하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았던가. 돌아보니 그때 우리한테 있던 절대 감정은 언제 전염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따른 공포였다. 그 불안감에 따른 공포를 나는 전철 안에서 체감하였다. 그리고 그 공포감을 제압한 것은 폭력이었다. 누군가의 잘못된 행동을 알려주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고, 전철 안에 있던 우리는 그들 스스로가 대화를 멈추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들은 눈치 없이 자신들만의 세상에 있었고, 이를 참지 못한 한 사람이 그들을 폭력적으로 제압하였다. 종료된 상황이 그저 유쾌하지만은 않았던 이유다. 덩지 큰 남자보다 먼저 “마스크 좀 써 주시겠어요!”라고 말하지 못한 걸 자책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저녁 뉴스를 들으며 상식보다는 권력이 우위에 있는 세상이라는 걸 새삼 확인하면서, 공포를 제압하는 폭력이 이렇게 우리를 세뇌시키도록 놔두어도 되는 건지 하는 생각에, 코로나19를 살아가는 나를 되돌아보는 오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