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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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산책’은 각계 전문가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수요산책’에는 박록삼(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박상경(인권연대 회원), 서보학(경희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이윤(경찰관), 이재환(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책임관), 조광제(철학아카데미 대표), 황문규(중부대학교 경찰행정학과 교수)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삶의 속도(박상경)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2-12-28 09:52
조회
251

박상경 / 인권연대 회원


1.


새벽부터 아침 녘까지 내린 눈이 쌓였다. 올해는 눈 소식이 잦은 듯한데, 출근길을 걱정하는 어른과 달리 신이 난 아이들의 왁자지껄하는 소리가 기분 좋게 들린다. 며칠 전, 걸음마를 뗀 듯한 아이 한 명에 네 명의 어른이 둘러싸고 가는 모습을 보면서 웃던 생각이 났다. 나 어릴 때는 서너 명의 아이들이 엄마 치마꼬리를 붙잡고 칭얼대곤 했으니까. 며칠 전 내린 눈이 녹으며 빙판이 졌는데 그 위로 쌓이는 눈을 보자니 조금은 짜증이 났다. 그런데 팔짝팔짝 뛰며 좋아하는 아이들을 보고 있자니 슬며시 기분이 좋아졌다. 아이들이란 참, 이렇게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힘이 있다니…. 그래도 지금 할 일은 눈을 쓸어야 하는 것, 그렇게 서둘러 3층에서부터 쓸어내린 눈은 대문 앞에 한가득 쌓였다.


이른 오후,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보니 차도와 학교 앞 거리는 눈이 깨끗이 치워졌다. 그런데 학교 앞 신호등 앞에 있는 두 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한 아이는 제 몸집만큼 커다란 눈뭉치를 들고 있고 한 아이 옆에는 그만한 눈뭉치가 있었다. “쟤들이 저걸 어떻게 하려고 그러는 거지?” 생각하며 아이들을 보고 있는데 신호등이 바뀌니 두 아이는 낑낑대며 그것을 옮기려고 애를 썼다. 잘못해서 눈뭉치가 깨지기라도 할까 싶어 행동에는 조심스러움마저 있는 게 아닌가. 길 건너온 아이들한테 너희 몇 학년이니 물으니 3학년이요 그런다. “그거 집으로 가져가는 거야?” “네.” “무겁지 않아?” “무거워요.” 하며 웃는다. “손도 시려워요.” 아이들의 행동을 보면서 오가는 어른들이 웃으며 한 마디씩 거든다. “그걸로 뭐하려고?” “어디로 가져가는 거냐?”



출처 - 저자


눈이 많이 내린 아침 뉴스는 내 집 앞 눈 쓸기, 출근길 대중교통 이용하기 등을 쉴 새 없이 안내했다. 빙판길 행동요령도 잊지 않았고, 방한 차림 얘기도 빼지 않았다. 덕분인가, 도로 주변으로 군데군데 보이는 흰눈 빼고는 눈이 왔나 싶을 정도로 깨끗했다. 그런데 눈이 내린 날의 즐거움을 아이들은 즐기고 있었다. 그래서 학교 운동장에서 굴린 제 몸집만큼 커다란 눈 뭉치를 집으로 가져가려는, 힘에 부친 일을 하면서도 행복에 겨워하고 있었다. 그런 아이들의 노고는 제 집 앞에서 살아나겠지. 위아래로 눈뭉치를 잇고, “야, 눈사람이다!” 하고 환호했을까? 그런데 눈 코 입은 무엇으로 그렸을까?


아이들을 생각하며 나도 눈사람 하나 만들어야겠다 생각하며 골목길을 들어서는데, 두 아이가 대문 앞에서 무언가에 열중해 쌓아놓은 눈을 이리저리 헤집어 놓아 다시 쓸어야 할 판이다. “너희 여기서 뭐하는 거야?” 놀이에 열중하던 아이들이 소리에 깜짝 놀라 주변을 돌아보더니 저희들이 한 짓이 있다고 생각했는지 움찔하며 대답을 못 한다. 할머니 집에 왔다 쌓인 눈을 본 아이들이 그냥 지나치지 않고 저희들의 놀이를 즐기던 것이다. 놀 줄 아는 아이들의 예술 행위는 담벼락 위로 오리 조각상들을 올려놓았고, 한겨울의 회색빛 골목을 환하게 밝혀 주고 있다.



출처 - 저자


2.


엄마의 시간이 자꾸만 깜박인다. 좀 전에 한 일은 기억나지 않고 오래전 일은 새록새록 기억이 나면서 같은 이야기를 반복한다. 딸내미는 자꾸 소리가 커진다. 예쁘고 멋쟁이던 엄마의 구부정한 뒷모습을 보면서 가슴이 싸한 적이 있다. 우리 엄마가 늙어가네 싶어서. 그런 우리 엄마가 늙었다. 책을 읽으려고 해도 기운이 없어 힘들다 하고, 글씨를 쓰려고 해도 자꾸만 손이 떨려 글씨가 삐뚤어져 쓰기가 싫다고 한다. 자꾸 기억이 나지 않아 밖에 나가면 흉잡힌다고 나가는 일도 싫어하는 엄마가 집에 찾아온 친구와 이야기 나누는 걸 들으니 두 분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하고 또 한다. 두세 달에 한 번씩 병원에 가려면 “이제 죽을 나이에 무슨 병원이야!” 하면서도 의사 앞에서는 소녀처럼 말한다. “선생님 덕분에 이렇게 건강하네요, 고맙습니다.”


그런 우리 엄마가 아이들이 만드는 눈사람을 보며 환하게 웃는다. 담벼락에 올려놓은 오리 조각상을 보면서는 감탄을 한다. “아이들 솜씨가 어째 저리 좋으냐! 정말 이쁘지 않냐! 애들이 진짜다!”


3.


열 살 꼬맹이들의 삶의 속도는 어떤 걸까? 지금을 즐길 줄 아는 아이들의 삶은 현재를 걱정하는 어른들의 삶의 속도보다는 천천히 갔으면 싶다. 자꾸만 옛일이 생각나는 엄마의 삶의 속도는, 지금 이 시간에 옛일을 추억하는 만큼 좀 더 느려도 되지 않을까 싶다. 며칠 남지 않은 2022년, 내일을 걱정하는 오늘을 살아가는 나의 삶의 속도는…. 서녘으로 넘어가는 해가 자연스럽게 살라고 하는 것 같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