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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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산책’은 각계 전문가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수요산책’에는 박록삼(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박상경(인권연대 회원), 서보학(경희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이윤(경찰관), 이재환(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책임관), 조광제(철학아카데미 대표), 황문규(중부대학교 경찰행정학과 교수)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오죽하면 글겄냐(이윤)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3-01-03 09:48
조회
317

이윤 / 경찰관


40대 중반까지는 1년에 한두 번 크게 화를 냈다. 주로 상대가 (내 기준으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며 제 고집을 부릴 때 화가 났다. 그때까지만 해도 부조리함에 분노하지 않는 것은 죄악이라는, 어릴 적 들었던 출처 불명의 말이 불쑥불쑥 마음을 헤집었던가 보다. 지금 생각하면 옳다는 기준이 나였다는 것부터가 부조리했다. 40대 후반부터는 철이 들었는지 그나마도 화를 잘 안 내고 있다. 화가 나려고 할 때마다 ‘그럴 수도 있지’라는 말을 되뇌고 있다. 사람 하는 일에 한 가지 길만 옳은 것이 아니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만 밀어붙일 수도 없으니 ‘그럴 수도 있지’하고 상대를 이해하려 노력했다.


출처 - yes24


아버지의 해방일지


최근에 ‘아버지의 해방일지’라는 소설을 읽었다. 화자 아버지의 ‘오죽하면 글겄냐’, ‘긍게 사램이제’, ‘다 사정이 있겄제’라는 세 문장은 관용과 이해의 표현이었고, ‘그럴 수도 있지’보다 강력한 무기였다. 전직 빨치산이었던 소설 속 아버지는 사회주의자로 평생을 산 사람에게서 연상되는 단단하게 날 선 이미지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아마도 그 이념과 사상의 뿌리에 사람에 대한 연민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항꾼에’라는 사투리가 그 추측을 뒷받침한다. 스스로는 유물론자이며 사회주의자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사람들과 관계 맺으며 함께 사는 세상을 꿈꾸었던 박애주의자에 더 가까워 보였다. 가진 것은 쥐뿔도 없었지만, 다른 이를 돕고 보듬으며 맺은 관계의 덩굴은 장례식장에서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운 모습을 드러냈다. 이분의 딸처럼 냉정한 합리주의자 범주에 포함되는 나로서는 부럽기도 하고, 반성도 되었다. 그래도 읽는 중에 4번 정도 눈물을 훔칠 정도면 감성이 아주 말라버리지는 않은 것 같아서 좀 안심했다. 감성의 문제가 아니라 50대 중반 갱년기 증상이라는 지적도 있긴 하다.


언론을 통해 보는 요즘 세상은 증오, 분노, 탐욕으로 가득하다. 간혹 돈쭐내는 미담기사 같은 이야기가 나오기도 하지만 기사 대부분에서는 각박함을 넘어 두려움까지도 느껴진다. 이태원 참사나,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지하철 시위 등에 대해서도 증오와 비난, 모욕을 표현하는 반응이 많고, 심지어는 오피니언 리더라는 분들도 부정적 반응에 동참했다. 이태원 참사 유가족을 향해 ‘자식팔아 장사한다’라고 한 정치인도 있었고, 전장연의 지하철 출근길 승하차 시위에 시위 전철역을 무정차 통과하라는 서울시 결정도 있었다. 총파업을 하는 화물연대를 ‘사회 악의 축, 암적인 존재들’이라고 한 정치인도 있었다. 사람들에겐 다 저마다의 사정이 있을 것이다. 사람이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부족한 부분도 있고, 이해되지 않는 점도 있다. 그러니 내가 불편하고 힘들다고 해서 너무 각박하게 몰아세우기보다 ‘오죽하면 글겄냐’라는 마음으로 보듬어주는 세상이 되면 좋겠다.


 

 

출처 - 네이버블로그


똘레랑스


프랑스에서는 파업과 시위가 무척 많다고 한다. 소방관, 교사, 판사도 파업하고, 심지어 경찰도 파업 때문에 힘들어서 파업한다고 한다. 파리 곳곳은 파업과 시위로 예상치 못한 불편과 불친절과 비효율이 넘쳐난다고 한다. 며칠 전 파리에서 쿠르드족 대상 총격 사건이 있었다. TV 뉴스에서는 이 때문에 시위대가 차량을 뒤집거나 불태우고, 경찰에 물건을 던지는 모습이 보였다. 최근에 한국에서는 접하지 못했던 영상이었다. 만일 요즘 한국에서 그런 폭동에 가까운 시위가 있었다면 난민에 대한 혐오와 그들을 받아들인 정부에 대한 비난, 주동자 색출과 처벌 요구가 각종 미디어 및 SNS에 흘러다녔을 것으로 예상한다. 하지만 그런 내용의 프랑스발 기사를 아직 보지 못했다.


파업과 시위가 많아도 프랑스 사람들은 ‘그들이 내가 될 수도 있잖아’라며 서로 감내하면서 살아간다고 한다. 불평할지언정 비난하지는 않는 것 같다. 그런 프랑스인의 가치관을 잘 표현한 단어가 ‘똘레랑스’다. 똘레랑스는 우리말로 ‘관용’이라고 번역되지만, 정확하게는 ‘다른 사람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의 자유 및 다른 사람의 정치적ㆍ종교적 의견의 자유에 대한 존중’이라고 한다. 가진 자가 못 가진 자에게 베푸는 자비나 관대한 마음이라기보다는 ‘나와 다르지만 그렇게 생각하거나 행동할 수도 있겠다’라고 인정하는 마음에 가깝다.


점점 각박해지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도 타인의 사정과 생각을 이해하고 인정하는 사람이 더 많아지면 좋겠다. 이해하고 인정하려면 서로 대화를 많이 나누어야 하는데, 대화보다는 자기 주장의 목소리만 커지는 모양새라 안타깝고 불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