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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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산책’은 각계 전문가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수요산책’에는 박록삼(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박상경(인권연대 회원), 서보학(경희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이윤(경찰관), 이재환(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책임관), 조광제(철학아카데미 대표), 황문규(중부대학교 경찰행정학과 교수)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풍경과 인연(박상경)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2-10-26 10:54
조회
374

박상경/인권연대 회원


 

1.

오래전 일이다. 취재 일로 문경새재에 간 적이 있다. 새벽부터 빡빡하게 움직인 덕에 늦은 오후에 일을 마칠 수 있었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던 시절이라 문경새재 버스 정류장에서 충주로 나가는 버스를 기다리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올 시간이 한참 지나도 버스는 나타나지를 않았다. 정류장에 붙은 시간표를 보고 또 보고, 그래도 버스는 오지를 않고, 그다음 버스는 한참 뒤에나 있으니 걸어서라도 나가야 할 참이었다. 걸어가다 늦게라도 버스가 지나가면 세워서 타야지 하는 생각으로 충주 시내를 향해 걸어갔다. 인적이라곤 전혀 없는 국도에는 지나는 차량도 드물었다. 간간이 들리는 새소리는 깊은 숲속에 있는 착각마저 일으켰다. 그렇게, 천지간에 혼자인 것처럼 도로 위를 걷다가 간혹 빵빵 경적이 울리면 좁은 흙길로 내려서서 걸어가곤 했다.

출처 - pixabay


 

얼마나 걸어야 할지 몰랐지만 걷다 보니, 걷는 게 힘들다기보다는 주변 풍경에 눈길이 가면서 무언가 모를 희열 같은 게 느껴졌다. 아, 세상에 이렇게 고즈넉한 길이 있다니~ 이런 풍경을 어디서 보겠나 하는 생각도 들고. 그러다 또다시 뒤에서 “빠~앙” 경적을 울리는 자동차가 지나가면, 비키라는 소리구나 싶어 도로 옆으로 내려서서 걸어갔다. 그런데 “비켜!” 하듯이 바~앙 소리를 내던 자동차가 앞으로 쭈우욱 가더니 서는 게 아닌가. 아, 도로 위에서 걸어간다고 한소리를 하려나 하는 생각으로 천천히 걸어가니, 보조석의 차창을 내린 운전자가 “어디까지 가요?” 한다. “네? 아, 충주시외버스터미널 가려고 하는데요.” “그래요, 그럼 타요. 충주 시내까지 태워다 줄게요.” “네? 아니 괜찮아요.” “뭘 모르시나 본데, 여기서 충주 시내까지 얼마나 되는 줄 알고 그래요? 터미널 가는 거면 더 갈 길이 있나 본데, 타요! 너희는 자리 좀 좁혀!” 차 안에는 가족인 듯한 이들이 타고 있었고 조금씩 좁혀 앉으면 한 사람쯤은 더 타고 시내까지는 갈 만하다고 하였다.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는 차에 탔다.

 

“그런데 어디까지 가요?” “네, 서울에요.” “무슨 일로 거길 걸어가고 있었어요?” “아, 네 일 때문에 왔다가 버스가 오지를 않아서 걸어가다가 버스를 만나면 타려고 했어요.” “그동안 지나가는 차가 없었어요?” “아니, 여러 대 지나갔는데….” “그런데 태워주는 차가 없었나요?” “네, 그냥, 경적이 울리면 비키라고 하는 것 같아서 차도 아래로 내려서고….” “하하, 머리가 나쁘면 몸이 좀 고생하면 돼요. 경적을 왜 울렸겠어요, 하하하….” “아하~ 그래서 차들이 멈칫거리며 천천히 갔었구나!”

 

그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순식간에 충주 시내에 들어섰다. “여기가 충주 시내니까, 터미널은 알아서 갈 수 있죠? 하하하!” “고맙습니다. 저기~” “괜찮아요, 나중에라도 곤란해하는 사람 만나면 도와주면 돼죠~” 그렇지, 그러면 되는 거지!

 

“내일은 뒷산에 올라 두릅이나 따자!” “그러지 뭐.” 놀러 간 친구네 집, 뒹굴뒹굴하는 내 모습이 탐탁지 않았는지, 아니면 오랜만에 온 친구한테 뭐라도 보여 주고 싶었는지 친구가 그랬다, 뒷산에 가자고. 그런데 정선에서 뒷산은 야산이 아니라 먼 데서도 찾아오는 1500고지의 높은 산이다. 나른한 봄날 그 뒷산, 두리봉을 올랐다. 산을 오르면서 보니 산 아랫마을엔 드문드문 빈집이 보였다. 사북 탄광촌이 쇠락하면서 마을에 빈집이 늘어난다고 친구는 말했다. 그러다 한 집에서 눈길을 뗄 수가 없었다. 대문 문고리에 숟가락을 걸어놓은 집. 마치 지금은 떠날 수밖에 없어 이곳을 떠나지만 머잖아 곧 돌아올 거라고 말하는 것만 같아, 가슴 한쪽이 뭉클해졌다. 문틈으로 들여다보니 말끔하게 비질이 된 마당 이곳저곳에는 살림살이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사람 기운이 아직 남은 집에서 발길을 돌리지 못하고 머뭇거리는데, 허망하게도 봄 햇살이 찬란하게 쏟아졌다.

헉헉거리며 산 중턱쯤 올라가니 친구가 여기서 따면 되겠단다. 두릅나무 끝에 올라온 새순을 땄다. 가지고 간 바구니에 반쯤 채우자 친구가 이제는 내려가자고 했다. “아직 딸 만한데….” 내가 그랬더니 “이만하면 오늘 저녁 거리는 돼. 그만 가자.” 그러자고 했다. 해도 뉘엿거리고, 올라올 때는 몰랐는데 배에서 꼬르륵 소리도 나고 내려가는 길이 여간 긴 게 아니다. 그때 뒤에서 커다란 차가 산길을 돌아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커다란 화물트럭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내려오고 있었다. 손으로 코와 입을 막고 한쪽으로 비켜 서 있자니 화물차가 천천히 내려가다 선다. 고장이라도 났나 생각하며 지나가려는데 트럭 기사가 고개를 내밀고 “타세요!” 한다. 친구를 보니 고개를 흔든다. “타세요. 짐 부리고 나가는 길인데 저 아랫마을까지는….” “괜찮아요, 그냥 걸을 만하네요? 어차피 산행하는 건데….” “늦었어요. 어차피 시내 나가는 거니까.” 못마땅해하는 친구를 눈짓으로 달래서 트럭에 올라탔다. 처음 올라탄 트럭은 다른 세상이었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본 세상이 그렇게 멀리 보일 줄이야.

 

우리 또래로 보이기도 하고 어려 보이기도 하던 트럭 기사는 말은 많지 않았지만, 돈을 벌면 부모님을 호강시켜 드리고 싶다고 했다. 우리가 내릴 때가 되자, 저녁 맛있게 먹으라는 인사도 했다. 산 아랫마을의 대문에 꽂아둔 숟가락과 수줍은 듯 선한 표정의 기사가 부모님 호강시켜 주고 싶다는 말은 세월이 한참 흐른 뒤에도 가끔 생각나곤 한다.

 

3.

지리산 토끼봉에서 내려와, 산 아랫마을에서 하동으로 나가려면 하루 몇 대 다니지 않는 버스를 기다려야 했다. 시간을 맞추지 못하면 오전에 나가고 없는 차를 오후까지 기다려야만 한다. 버스 정류장 주변에서 하릴없이 버스를 기다리는데, 깊은 산골 마을에 확성기 소리가 들렸다. 트럭 가득 생필품을 가득 실은 상인이 들어온 것이다. 지난번에 왔을 때 부탁한 물건을 찾으러 온 아주머니, 엄마 치마꼬리 붙잡고 나온 꼬마들이 무언가를 사 달라고 조르는 소리, 살 만한 물건이 있나 싶어 나온 아저씨들로 왁자지껄하면서 마을에 활기가 도는 것 같았다. 그렇게 한 시간여, 필요한 물건을 사거나 다음에 올 때 가져올 물건을 주문하거나 볼일을 다 본 사람들이 썰물 빠지듯이 빠져나갔다. 그 와중에 한 아주머니가 상인 아저씨한테 부탁을 한다. “저 아가씨 하동 읍내에 내려줘요! 하동 가는 버스가 아직 안 들어와서….” “예, 그러죠!” 하고 아저씨가 선선히 응대를 한다. 덕분에 나는 흥겨운 트로트가 흐르는 트럭을 타고 구불구불한 산길을 돌고돌아 나올 수 있었다.

 

“하동 송림은 가보셨소?” “아뇨.” “하동서 하동 송림을 못 보다니, 괜찮으면 구경 한번 하시죠!” 그렇게 가게 된 하동 송림에서 연신 감탄하는 나를 보며, 아저씨는 하동 송림의 역사까지 멋들어지게 들려주었다. “그럼, 다음에 와서 찬찬히 둘러보시고 오늘은 갈 길도 먼데 그만 가죠!” 아저씨의 따뜻한 호의에 나는 그저 고맙다는 인사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