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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이 없었다면...(이유정 변호사)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7-20 16:52
조회
179

이유정/ 변호사



5월은 좋은 달이다. 어린이날과 어버이날, 스승의 날, 성년의 날 등 달력에 빼꼭히 기념일이 적혀있는 달이다. 5월은 신록의 계절이기도 하다. 갓 피어난 여린 잎들이 하루가 다르게 무성해지면서 보석처럼 찬란한 초록빛으로 세상을 뒤덮는 아름다운 계절이기도 하다.

그러나 5.18 광주를 기억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5월은 슬픔과 분노의 계절이기도 하다. 그러한 5월의 슬픔과 분노를 담아낸 노래가 ‘님을 위한 행진곡’이다. 광주항쟁의 마지막까지 도청을 지키던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 열사와 노동운동에 헌신한 박기순 열사의 영혼결혼식에서 처음 만들어졌다는 그 노래. 그 비장한 가락을 듣고 있노라면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는 맹세를 할 자신이 없고,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고 외칠 수 있는 용기가 없는 사람들도 저절로 마음이 뜨거워지곤 한다. ‘님을 위한 행진곡’이 울려 퍼지지 않는 5월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나는 가끔 생각해 본다. 그 때 공수부대가 광주시민들을 무고하게 총칼로 짓밟았을 때 시민들이 겁에 질려 뿔뿔이 흩어졌다면 지금 이 나라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죽음의 공포를 무릅쓰고 도청에 남아 끝까지 남아 저항한 사람들이 없었더라면 우리나라의 민주주의가 과연 가능했을까 하고... 만약 그 때 시민군의 목숨을 건 저항이 없었더라면 군대가 총칼로 장악한 숨죽인 세월은 지금까지도 계속되었을 것이고, 사람들은 각자 패배주의에 젖어 술잔을 기울이며 ‘모난 돌이 정 맞는다’거나 ‘계란으로 바위치기’라는 말을 속삭이며 뒷골목에서 슬픔과 분노를 삭였을 것이다.

만약 5.18 광주항쟁이 없었다면 87년 6월 항쟁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거리에서 최루탄을 맞아가면서 독재타도를 외치던 사람들, 시위대에게 박수를 보내고 손수건을 흔들고 모금에 동참하던 사람들... 그 모든 일은 광주에 대한 분노와 부끄러움이 있어 가능했던 것이다. 그리고 87년 6월이 없었다면 그나마 최소한의 민주주의라도 가능했던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10년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흥구 교수의 말처럼 우리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 모두는 ‘광주의 자식들’이다. 그리고 광주의 정신은 지금까지도 ‘촛불’로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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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민중항쟁 30주년을 하루 앞둔 지난 17일 광주 금남로에서 열린 전야제에
참가한 시민들이 옛 전남도청으로 향하고 있다.
사진 출처 - 경향신문


올해 정부가 주최하는 5.18 기념식에서 ‘님을 위한 행진곡’을 금지했다. 한술 더 떠서 한나라당의 대표라는 사람은 축하화환을 보냈다고 한다. 공수부대가 수많은 시민을 총칼로 짓밟은 과거를 축하하겠다는 것인가. 잃어버린 10년을 되찾자는 구호를 내걸고 정권을 차지하고, 지난 정부의 흔적을 모두 없애느라 혈안이 되어 있는 그들에게는 수많은 시민들이 목숨을 걸고 지켜낸 5.18 광주의 기억마저도 지워버려야 할 대상인가보다. 그렇지 않고서야 5.18 기념행사에 ‘님을 위한 행진곡’ 대신에 ‘방아타령’을 틀겠다는 희한한 발상을 할 수 없는 일이다. 이러한 행태는 5.18 광주와 그로부터 시작된 우리의 민주주의를 모욕하는 것이고, 현 정부와 한나라당의 뿌리가 5.18 광주 시민을 무고하게 학살한 전두환, 노태우의 ‘민정당’에 닿아 있음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화가 나지만 차라리 잘 된 일이다 생각한다. 그들이 자신들의 본질을 드러낼수록 무엇이 미워하고 분노할 대상인지 더 분명해질 테니까.

오늘은 5.18이다. 온종일 하늘이 무겁게 내려앉고 비까지 추적추적 내리니 고맙다. 마음속으로 조용히 ‘님을 위한 행진곡’을 불러본다. 비장한 가락이 이런 날씨에 딱 어울려서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