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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민주주의(이재승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7-20 16:54
조회
199

이재승/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고역을 누군가 해야 한다면 이를 계층에 관계없이 평등하게 부담할 때 우리는 정의롭다고 말한다. 이 일을 시민의 일부만이 부담해야 한다면 그들에게 보다 높은 보수를 지급하는 것이 정의롭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고역의 대표가 군복무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군복무 이행실태를 보면 평등하게 부담하지도 않고, 보수도 적절하지 않기 때문에 군대와 관련한 대중들의 감정이 좋을 리가 없다. 따라서 지난 10년간 양심적 병역거부가 인권문제로서 부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군복무에 관한 부정적인 밑바닥정서가 문제해결의 장애물이 되었다. 그래서 당시에 병역거부 지지자들은 모병제가 시행되면 양심적 병역거부자의 문제가 저절로 해소될 수 있다고 간단히 생각하였다. 그러나 우리 사회와 군대를 고려한다면 모병제는 더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었다. 모병제의 군대는 이른바 저소득층의 집단적인 작업장으로 전락하고, 모병제가 자칫 동의와 금전보수를 매개로 인권 침해적 군대관행을 정상화할 것이고, 때로는 모험주의세력의 도발적 사병집단으로 변질될 수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군대에 혈육을 보낸 일반국민들의 집중적인 비판과 감시가 여전히 작동하고 있는 징병제가 군인의 인권보장이나 민주적 통제에 유용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군인의 인권 보장, 군대에 대한 정치의 우위 즉, 민주적 통제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널리 확산된 헌법적 원칙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사고가 한국사회에서 제도화되기 시작한 것은 노무현 정부 시절이다. 군인인권교육, 군과거사정리, 군의문사진상규명, 병영문화개선 작업 등을 거론할 수 있다. 이러한 작업은 그 후 종적이 묘연해졌다. 최근까지 신자유주의적 경제 살리기에 앞장서는 빵굽는 군인, 인권과 담을 쌓는 불온도서반입금지와 새로운 이성교제규칙, 남북적대를 공식화하는 주적 개념 등을 통해 군대가 어수선함과 몽매 속으로 미끄러져 갔다는 인상을 받는다. 물론 국가안보, 국익, 전쟁, 전쟁위협 앞에서는 이성이 아주 곧잘 멈춘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역사이다. 정부수립 이래로 박정희는 미국이 부당하게 시작한 월남전에 한국의 청년을 파병하였고, 최근에 노무현 정부도 이라크 전쟁에 군대를 기어코 파병하였다. 우리가 얻을 국익(달러수입, 경제적 지원, 복구사업기회, 석유, 동맹관계강화)이 침략전쟁에 가담하는 것을 어떻게 정당화할 수 있겠는가? 이라크 전쟁의 참여는 노무현 정부의 한계를 절감하게 하는 대목이었다. 그러나 노무현 정부 시절에는 남북 간의 적대적 분위기를 정치의 밑천으로 삼으려는 천박함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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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대통령이 지난 5월 24일 오전 전쟁기념관 호국추모실에서 천안함 관련 대국민담화문을 발표하고 있다.
사진 출처 - 청와대


6.2 지방선거 결과를 놓고 '이명박 정부가 천안함의 역풍을 맞았다'는 분석, '천안함에 대한 국정조사를 실시해야 한다'는 주장, 나아가 '지난 김영삼 정부의 막바지처럼 대북 적대정책들이 임기의 종료일까지 발목을 잡을 것이다'는 예측이 신문지상에 도배되었다. 전쟁도 불사한다던 대통령은 금세 전쟁이 없을 것이라며 해외자본을 다독이려고 한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대체로 영리한 통상정책을 통해 적대국과 평화를 만들어가는 것--몽테스키외가 <법의 정신>에서 이를 '상업의 정신'이라고 표현하였다--이 우파정책의 진수라고 한다면, 남북화해의 물꼬를 튼 노태우 정부, 햇볕정책을 시행한 김대중 정부나 노무현 정부만이 진실로 한반도에서 우파정부라고 할 수 있다. 나머지 정부는 성격이 무엇일까? 무엇이든지 정치의 판돈으로 삼으려는 세력은 정치집단이 아니다. 보통의 국민들에게는 국민 개인의 전존재--그 안에는 자신과 가족, 군대 간 자식의 생명, 자신의 직장과 재산, 주식, 그리고 아름다운 아파트가 포함되어 있다--을 밑천 삼아 한판 뜨겠다고 겁박하는 모험주의 집단의 안보 착란증에 편승하여 얻을 이익은 더 이상 없다. 지난번에 아파트 값 올려주겠다는 것까지는 고맙게 생각할 것이다. 어쨌든 모험주의 세력들은 안보와 전쟁을 10억원치, 100억원치, 1조 원어치 식으로 펀드처럼 관리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지난 9.11테러 이후 미국의 이라크 전쟁, 천안함 사태 이후 무모한 전쟁불사론을 보면서 전쟁의 정치를 다시 생각해보았다. 대의정치는 본질적으로 부와 권력, 석유와 표를 위하여 무엇이든 불사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도달한 결론은 외부의 적들이 비이성적이기 때문에 군대가 불가피한 제도라고 하더라도, 상비군제도를 폐지하고 민병제를 확립하자는 생각이다. 단순히 누구나 전쟁 앞에서 공평하게 죽을 기회를 제공하자는 물귀신 작전을 도모하려는 것이 아니다. 전쟁과 평화의 결정을 직접 전쟁에 참여하는 말단의 병들에게 맡기자는 것이다. 전쟁에서 직접민주주의를 관철시키자는 것이다. 서울광장은 넓고, 지하철망은 잘 발달되어 있다. 전쟁을 통해 죽을 일이 별로 없는 정치인들, 전쟁지휘관들, 전쟁에서 돌아온 호전적인 잔소리꾼들, 심지어 군대도 안간 아저씨들이 계속 전쟁을 운운하고 결정하는 정치(대의제도)가 지속되는 한 세상의 민중들은 끝없이 전쟁노동을 강요받게 될 것이다. 민병제는 남의 아들의 목숨을 대가로, 전쟁 위기를 판돈으로 삼는 엘리트 적대정치를 직접적으로 근절하는 방법이다. 상비군제도를 폐지하는 것이 영구평화의 첩경이라는 철학자 칸트나 민병대를 주창한 버지니아 권리선언이 요즘처럼 분명하게 이해된 때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