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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산책’에는 박록삼(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박상경(인권연대 회원), 서보학(경희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이윤(경찰관), 이재환(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책임관), 조광제(철학아카데미 대표), 황문규(중부대학교 경찰행정학과 교수)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행복하다, 부족한 사람 (이은규)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7-21 09:45
조회
128

이은규/ 인권연대 '숨' 사무국장



여백은 끔찍하다. 무슨 말이냐고? 원고 마감이 코앞에 닥쳐서야 노트북 앞에 앉아 있노라니 빈 문서의 여백이 끔찍하다 못해 징그럽기까지 하다. 점 하나만 찍어볼까?

참으로 난감하다. 한자 한자 모습을 나타내는 글자들을 보고 있노라니 두서없는 생각들이 주저 없이 어디로 튈지 모르겠다. 뭉게뭉게 이런 생각 저런 생각들이 마구 밀려드는 시간이다.

애시 당초 거절했어야 했다. 글보다 말이 앞서는 나에게 글을 쓴다는 것은 형벌이다. 재미있는 것은 말은 앞서지만 행동은 글보다 더디다는 것이다. 생각이 앞서고 말이 그를 따르고 어찌 어찌 쥐어짜다보면 글이 말을 따르지만 행동은 참으로 더디다는 것이다. 고백하건데 미처 행동으로 옮기지 못한 말과 글들이 참으로 많다. “거봐 내 이럴 줄 알았어. 또 자기고백으로 흘러가잖아. 뭐 어쩌겠어 이것이 내 세계인 것을.”

나는 민주적인가? 아니 그렇지 않다. 생각과 말, 그리고 글 따위들로 민주주의를 찬양하고 민주주의가 우리사회 전반에 걸쳐 실현되어야만 사람 사는 세상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확신범이지만 나는 민주적이지 않다. 특별히 가장 가까운 사람들과의 관계 안에서 나는 민주적이지 않다. 그들은 무조건 나의 말과 행동, 생각을 지지하여야만 하는 사람들이며 그렇지 않을 때 나는 가차 없이 그들을 심판한다. 경험에 따르면 심판은 때에 따라 수위가 다르다. 삐침이 있고 냉정한 침묵이 있고 그리고 결별 따위의 수순을 밟는 것 같다. 하지만 적당히 거리를 유지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나는 민주주의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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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 NAVER


나는 인권적인가? 아니 그렇지 않다. 감수성만으로는 최고의 인권적 감성을 가졌다 자부하지만 삶을 통해 맺어진 관계 안에서 차별과 배제는 습관처럼 몸에 배어 있다. 이 또한 특별히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적용되고 있다. 아빠니까, 가장이니까, 아들이니까 그리고 친하니까 적당하게 둘러대고 을러대며 나만의 방식을 지혜롭게 구사하는 삶을 살고 있다. 담장 안에서 일어나는 가정사를 알리없는 사람들에게 나는 감수성이 철철 넘쳐흐르는 인권적 사람이다.

나는 진보적인가? 아니 그렇지 않다. 진보! 진보! 저마다 진보임을 자처하는 이 세태를 두고 참 지랄 맞다 여기며 진보를 넘어서는 세상을 꿈꾸지만 삶의 방식은 구태의연한 자본주의와 권력의 프레임에 갇혀 사는 사십 육세의 소심한 국민(!)일 뿐이다. “아 나는 커서 우리 아빠 같은 꼰대가 되지 않게 해주소서”라는 기도를 우리 아이들이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왜 독재자들은 데모하는 젊은이들을 탄압했을까? 그냥 그들이 나이가 들기를 바라면 되었을 것을. 아무튼 굳이 행세를 하지 않지만 말과 글로는 진보적인 사람이다.

말과 글, 그리고 행동의 삼위일체가 사람됨의 삶이라 가정한다면 아직 나는 사람됨이 부족하다. 아주 허약한 체질인 셈이다. 일상의 어느 지점에서 나는 매우 친밀한 사람들에게조차 민주적이지도 인권적이지도 진보적이지도 않다. 그가 알고 모르고는 중요하지 않다. 나는 나 자신을 잘 안다.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이렇듯 허약한 체질을 가졌음에도 민주주의와 인권과 진보적 가치들을 포기 하지 않았다. 더디게 진전되고 한순간에 거꾸로 퇴행하는 현실들에 실망하지만 나의 삶을 통해 민주주의와 인권이 실현되어지는 흐뭇한 삶을 포기하지 않았다. 나의 보이지 않는 혹은 알려지지 않은 삶의 여백에 사람됨의 가치들이 촘촘히 채워질 때 그것이야말로 흐뭇한 삶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웃음이 머무는 시간이다. 어찌 어찌 주절이다 보니 여백이 나름 채워져 있으니 말이다. 군데군데 숭숭 구멍이 나있지만 뭐 어쩌랴. 나는 말도 그렇고 글도 그렇고 삶에서 많은 억지를 부리고 사는 사람이다. 해서 노력할게 많은 참 부족한 사람이다.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