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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 청춘, 중년여성 그리고 불안 (신하영옥)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7-21 09:44
조회
110

신하영옥/ 전 여성단체 활동가



내일은 엄마의 팔십 몇 번 째 생신이다. 올 초 갑자기 몸이 많이 안 좋아져 자녀들을 초 긴장상태에 몰아넣으셨던 엄마는 다행히 털고 일어나 다시 걸을 수 있게 되었다. 지난 해 몇 년 간 떨어져 지내던 내 가족(남편과 나와 딸)이 살림살이와 구성원을 합치게 돼 집을 옮기게 되었다. 그리고 집도 옮겼겠다, 그동안 무던히도 엄마 속 긁어놓았던 딸이 딸을 낳고 키워 형성된 엄마에 대한 아주 조금의 이해가 원인이었는지 엄마 생신을 내 집에서 내 손으로 차려드리고 싶었다. 그보다는 집도 이사했으니 한 번 놀러오시라는 말이 생신을 치르는 것으로 와전 혹은 확대된 것이라 하겠다. 여튼 걸음이 불편하신 엄마를 고향에서 모시고 올라오니 좀 지친다. 솔직히 많이...그래서 저녁을 나가서 먹고 싶었다. 가족들이 나가서 먹는 사이 얼른 이 글도 마치고, 홀가분하게 술도 한잔하고, 무엇보다 저녁을 먹기 위해 음식을 만들고 차리고 씻는 것이 귀찮아서였다. 그러나 엄마는 거절하신다. 아무래도 외식비용에 부담이 크신 듯하다. 자녀들이 얼마씩 부담하여 그 정도 외식은 충분히 가능함에도 그러하다. 자신을 위해 돈 한 푼 쓰는 것이 아까웠던 엄마는,-그러한 엄마의 모습이 궁상스럽고 때론 지겹기까지 했던 우리들이건만- 여전히 아끼고 아끼는 엄마는 여전히 우리를 약간 질리게 한다.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에도 당신을 위해 소비되어야 할 돈에 대한 미련, 내일에 대한 불안을 떨치기 어려운가보다. 이는 살아있는 자로서의 당연한 본성일지도 모른다. 항구적인 삶에 대한 희망과 불안은. 그리고 자본주의에서 그 희망과 불안의 대상이 돈임은 당연할지 모른다.

엄마를 모시고 같이 올라온 언니는 50대 중반이다. 안정적이고 비교적 실력을 인정받던 교사생활을 청산하고 야인처럼 살아온 지 벌써 30년 가까이 된다. 교사직을 그만두고자 할 때 많은 이들이 걱정 혹은 반대했었다. 결혼하지 않은 여성이 직장까지 그만두면 ‘무엇을 해 먹고 살 것’ 이며, ‘누가 데려가느냐는 것’이었다. 혼자 사는 여성일수록 돈이라도 있어야 한다는 논리다. 그러나 돈은 단지 필요조건일뿐이고, 자율과 정당함을 충분조건이라 여겼던 언니는 과감히 교사직과 더불어 부당함과 차별, 권위를 버렸다. 그 뒤로 제도와 비제도 혹은 탈제도 교육을 넘나들면서 생계와 자유를 꾸리고 누리고 있다. 때로 결혼제도 밖의 언니는 내겐 부러움의 대상이다. 훌쩍 떠나고, 훌쩍 돌아오고, 자신의 해방을 위해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그러한 시간과 에너지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이 부러움이었다. 한꺼번에 수 개의 일을 동시 처리해야하고, 오늘처럼 하루 종일 운전하고 녹초가 되어서도 집에 와선 다시 저녁상을 차리기 위해 서둘러야 하고, 또 이처럼 원고도 마감해보내야 하는 나로서는 온전히 자신의 삶에 집중할 수 있는 그런 언니가 부러울 수밖에 없다. 이는 대개의 여성들이 남성들에게 가지는 부러움이기도 하다. 그러나 남성과 언니의 다른 점은 대체로 남성들은 누군가의 도움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도우미가 곁에 있다. 엄마든, 아내이든, 딸이든 아니면 공적인 가사노동서비스를 소비하든... 그리고 그것이 항상 여성보다 우월한 기회를 가진다는 것이다. 당연히 그러해야 한다는 것이고 당연히 그러한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여성들은 싸우고, 요구하고, 혹은 더러워서 죽자고 혼자 감당해내는 그런 것들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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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바도르 달리 作,1945


언니에 대한 부러움 뒤에는 비혼여성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구조적인 억압와 소외가 존재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을 돌보기 위한 모든 것을 스스로 만들고, 돌파해내야 했다. 생물하적 생존과 사회적 생존이 가능하기 위해선 가끔 훌쩍 떠나고 돌아오는 자유는 그렇게 치열하게 생존하는 자신을 위한 작은 선물이자 휴식, 즉 그 또한 생존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었던 것이다. 그래도 언니는 당당하다. 그리고 여전히 치열하다. 그리고 넉넉하다. 그럼에도 노년을 앞두고 건강에 불안해한다. 그동안 주변의 말처럼, 돈도 빽도 없는 비혼여성을 누가 돌보아 줄 것인가? 라는 걱정이 현실로 닥치면 어쩔까 하는 불안감이다. 그래도 언니는 말한다.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들춰내고 그것을 철폐할 것을 주장하는 것도 옳지만 자본주의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살려고 노력하는 것, 돈을 넘어서는 삶에 대해 고민하고 실천해보는 것, 즉 자본주의적 불안을 인정은 하지만 넘어서려는 노력을 하는 사람이 더 많아지는 것이 필요치 않을까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나이지만, 그럼에도 가슴 깊은 곳에서는 나의 노년에 대한 불안이 자리 잡고 있다. 누군가 그렇게 말한다. ‘정말 100세까지 살면 어떡하지?’ 그렇다 100세까지 사는 것은 누군가에겐 대책 없는 희망이다.

딸아이도 요즘 몇 달간 불안을 말하며 때론 집을 ‘귀곡산장’으로 만들고 있다. 어젯밤도 그랬다. 긴 방학 끝에 개학 후 첫 등교한 날이었던지라 안 그래도 요리조리 눈치를 보며 학교생활이 어땠을까 살짝 묻기도 하고 눈치로 때려잡기도 하던 중 열두시가 넘은 시간에 불안에 젖어 어찌할 줄 모르겠다는 낯빛으로 때 아닌 산책을 간다고 하여 간을 철렁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대화...불안의 실체를 모르는 불안감이다. 실체를 모르는 불안감은 온종일 아이를 넋 잃은 사람처럼 만들고 일상에 전념치 못하게 하고, 스트레스로 잠 못 이루게 하고 누군가 곁에 있어도 외롭고 없어도 외롭게 만들고 있었다. 사춘기 탓이라고만 하기엔 그 불안감의 무게가 너무 크게 느껴진다. 작년 하반기부터 그 불안이 시작되었다. 그 때의 불안은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 미래를 적당한 선에서 스스로 타협한 듯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두려움은 다시 학교로 돌아가 오로지 공부만 요구하고 공부에 순종하는 아이들을 대면함으로써 다시 직면하게 된 것이다. 스스로 대학이 아닌 다른 삶을 선택했으나 그 선택이 완벽히 내 맘을 그리고 학교가 원하는 대답을 만족시키지 못한 것이다. 혼자있을 때는 1% 부족한 것 같이 보이던 결정이 학교라는 현실로 돌아가자 99% 모자란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뭔가 뒤로 밀리는 불안감이다. 누구는 열심히 공부하고 하루 20시간씩 공부해도 불안해하는데 자신은 더 불안해야 정상인 듯한 것이다. 그저 편안하고 안정된 삶을 살고 싶다는 욕망이 자신을 더 불안으로 빠뜨리는 것 같은 것이다. 자본주의에서의 경쟁은 그렇게 청춘을 시작하는 아이의 삶도 불안으로 빠뜨리고 있다.

요즘 백수생활로 인해 TV를 자주 보게 된다. 다양한 광고가 나오지만 단연 으뜸은 보험상품이다. 누구나 다 암과 뇌질환에 걸릴 것이라는 암시, 대책을 세워놓지 않으면 어쩔 거냐는 협박, 죽음마저 상품화하여 상조회라도 가입하지 않으면 자식들에게 몹쓸 짓을 하는 것이라는 단죄, 이 모든 보험상품광고들을 보면서 ‘정말 100세까지 살면 큰일이다’라는 생각이 든다. 살아있는 존재로서의 존엄성보다는 상품을 소비할 수 있느냐로 가치를 가지는 세상, 내가 사는 옷이 나의 개성을 만들어내는 세상, 보고싶지 않고 쓰고 싶지 않아도 보고 써야만 하는 소수재벌들의 상품들... 이 모든 것들은 끊임없는 소비의 가치를 강조하고, 그리고 그 소비의 가치를 가지라고 유혹한다. 그리하여 그렇지 못한 자는 도태될 것이라 경고하면서 항구적으로 불안을 조장하고 있다. 그것이 내가 사는, 이 사회이다. 그리하여 세대를 초월한 여성들의 불안은 당연한 것이다. 다만 잠시라도 일상에서 이러한 불안을 내려놓고 맘껏 먹고, 마시고, 나누고, 떠나고 즐길 수 있기 위해 내공을 가져야 한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부족하다. 개인의 내공이 사회의 구조와 긍정적으로 조우할 수 있을 때 선한 사회가 가능한 것이다.

인간이 생산수단이자 소비의 수단의 되지 않는 사회, 다음 선거를 통해 이러한 변화를 기대하기는 어렵겠지만 궁극적으로 기대하는 것은 이러한 사회이다. 누가 이러한 비전을 갖고 체계적으로 접근해낼 수 있으려나? 난 그러나 아직은 뉴스를 안 보고 싶다. 당분간 안 볼란다. 사회와 조우할 내안의 공과 더 많이 놀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