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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 위로 스러져가는 생명을 보며 (송기춘)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6-13 11:36
조회
66

송기춘/ 전북대 법학과 헌법학 교수


도로 위로 스러져가는 생명을 보며
- 인간을 위해서라도 모든 생명 존중해야

 
사방에 봄이 완연하다. 매화향기 날리고 산수유, 회양목도 꽃이 만개하였다. 보리밭이 파래지고 이름 모를 들꽃들이 피어나고 있다. 쑥이 고개를 내밀고 소나무도 신비한 색을 머금고 있다. 더 이상 아름다운 빛을 찾지 못할 만큼 아름답다. 가끔 어설프게 바람이 불고 비도 오지만, 봄은 그렇게 온다. 봄은 생명의 계절이다.

자동차 운전을 하다보면 하루에도 몇 번씩 차에 치여 죽은 동물의 시체를 본다. 그 위로 차들이 쉴 새 없이 지나가서 붉은 피는 마르고 가죽마저 닳아 흔적도 남지 않고 사라져 버린다. 이 땅에서 가장 강한 종족인 인간이 좀 더 편하게 살고 빨리 가기 위해 닦은 길이 동물들의 삶을 변하게 하고 있다.

산길을 따라 먹이를 찾아 이동하던 산길이 뚝 잘려 나가고 길에는 차들이 질주한다. 동물들은 이동을 포기하거나 목숨을 무릅쓴 횡단을 하여야만 한다. 이러한 개발은 생태계를 흔들어 놓고 있다. 요즘 동물 이동통로를 만든다 하지만 예산 탓인지 실효성이 없다 여기기 때문인지 눈에 자주 띄지는 않는다.

얼마 전에는 도로교통으로 인한 동물살해인 이른바 ‘로드킬’(road kill)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이 발표된 적이 있다. 아예 도로 양편을 막다시피 하는 해결방법이다. 도로에 동물이 진입할 수 없도록 한다면 도로 위에서 동물들이 차에 치이는 일이 없을 테니 방법은 방법이다.

그러나 문제는 단지 도로 위에서 동물들이 죽는 것만은 아니다. 이 땅이 사람만 사는 곳이 아니라 동물들도 함께 살아갈 터전임을 생각한다면 그런 방법을 해결책이라고 제시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동물들이 찻길에서 죽는 것은 도로가 동물들의 생활을 위한 이동경로를 단절시키기 때문이다.

 
‘로드킬’ 막기 위해 도로 양편 막겠다는 ‘인간’

지난 달 한 신문에 실린 사진기사는 참으로 마음을 아프게 하면서 많은 것을 가르친다. 길을 건너던 개가 차에 치어 죽자 같이 가던 개가 차에 달려들고 짖어대는 모습이다. 거세게 차를 몰고 문명의 이기를 누리는 잘난 ‘사람들’을 향한 시위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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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킬’ 견공(犬公)들의 항의[한겨레 07.02.24] (매일신문 박노익 기자의 사진기사)


① 22일 오후 대구 달성군 다사읍 세천리에서 강아지들이 도로를 건너고 있다.
② 앞서가던 강아지가 달려오는 화물차에 치이자 뒤따르던 강아지가 일으켜 세워보지만 이미 숨이 멈춰진 상태.
③ 주위에 강아지들이 도로 한 가운데 버티고 서서 떠나지 않고 있다.
④ 화가 난 강아지 한 마리가 지나가는 차량에 달려들어 범퍼를 물어뜯고 있다.
⑤ 사고 차량은 떠났지만 강아지들은 이곳을 지나는 같은 종류의 화물차만 보면 거칠게 짖으며 달려들었다.




인간 이외의 자연을 정복이나 지배의 대상으로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는 근대 과학적인 세계관에서 비롯된다. 자연은 인간에게 정복과 개발의 대상일 뿐이다. 사람을 품어주는 어머니도 아니고 신비한 그 무엇도 아니다. 다만 무생물인 지질일 뿐이다. 또한 동물들은 함께 살아가는 생명이라기보다는 이용할 물건에 불과하다. 그리하여 자연은 무참히 파헤쳐지고 잘리고 말 못하는 짐승은 상품으로 거래된다. 물건은 값어치가 없어지면 과감하게 버려진다.

철저히 개발의 대상이 되고 상품이 된 자연은 인간에게 무엇을 주고 있는가? 이러한 자연관은 현대의 과학세계를 가능하게 하였지만 또한 이 세계에서 발생하는 위험은 그로부터 오는 것은 아닌가? 이미 환경오염으로 인하여 피해를 보고 있고, 동물들의 생명을 가볍게 여기는 생각은 사람들의 생명마저도 가볍게 여기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오로지 강자인 인간의 편의만을 위주로 한 삶은 가능할까?
개발 중심의 자연관에서 시작된 위험

예로부터 감을 딸 때도 몇 개를 남겨 두었고 흘린 이삭도 샅샅이 거두지 않는다 하였다. 쥐를 위하여 밥 한 덩이 남겨 두고 나방을 불쌍히 여겨 불을 켜지 아니한다(爲鼠常留飯 憐蛾不點燈)고도 하였다. 콩을 심으면 하나는 하늘 나는 새를 위해서, 하나는 땅에 사는 벌레를 위해서, 하나는 사람을 위해서라는 가르침을 떠올린다. 뜨거운 물을 함부로 버리지 말라는 말도 떠올린다.

법률상 소유자가 물건의 사용, 수익, 처분의 권능을 가진다 하지만 이 세상이 오로지 인간만 살아가는 곳이 아니라 여러 생명이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는 곳임을, 사람으로 인하여 다른 생명들이 죽어서는 안 된다는 어진 마음이 담긴 가르침이라 생각된다.

어쩌면 인간이 살아가는 것 자체가 다른 생명 위에서 가능한 것인지 모른다. 선인들이 발걸음 무겁게 하라는 말씀도 단지 의젓한 걸음걸이만을 가르친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신발 아래 깔리는 생명을 걱정하였던 것은 아닐까.

요즘은 까치 때문에 귀한 과실 농사 망치지 않을까 염려하여 과수원에 철망을 씌우고 폭발음을 낸다. 쥐는 퇴치의 대상이고 나방은 전기그물망에 태워진다. 이런 형편에서 앞의 얘기들은 한가로운 소리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세상에 사는 온갖 생명들에 대해 측은히 여기는 마음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깨우쳐 주고 있다 생각된다.

 
인간의 삶을 위해서라도 모든 생명 존중해야

살아 있는 것에 대한 존중과 연약한 생명을 측은히 여기는 마음이 사람의 어진(仁) 바탕의 시작이 아닌가? 우리는 어느덧 이 본성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인간 이외의 생명에 대한 연민을 잃어버리는 것은 인간들만 모여 사는 세상에서 아무 뜻도 없을 것 같지만, 그것은 결국 인간에 대한 경시로 이어지는 것은 아닐까?

노예를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거나 여자를 남자와 동등한 권리를 가지는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았던 것도 결국은 모두 같은 맥락이 아닐까? 인간이 인간 이외의 생명에 대해 가지는 마음과 사람 사이에서 나타나는 이러한 마음에 무슨 질적인 차이가 있을까? 차를 운전하는 사람이 보행자를 보호하려 하지 않는 것도 근본적으로는 생명에 대한 근본적인 경시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닌가?

근원적인 생명에 대해 경외와 존중을 하는 것은 사람에 대한 경외와 존중으로 이어진다고 믿는다. 사람이 편하자고 파헤치고 깎고 다듬고 하는 일이 인간의 삶을 파헤치지 않으려면 이것이 적어도 모든 살아 있는 것들에 대한 배려와 존중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 인간의 풍요를 위하여 알지 못하는 사이에 희생되는 이름 모를 생명의 죽음 앞에서 경건하여야 한다.

이 땅에는 지배자, 강자만 사는 것은 아니다. 동물의 삶의 환경은 인간의 문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