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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칭)인종주의적 선동에 대한 처벌법’ 제정이 시급하다 (정재원)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7-21 11:42
조회
136

정재원/ 서울대 국제대학원 강사



러시아에서 유학할 당시의 일이었다. 선정성, 독립성 등에 있어서 악명 높은 러시아 언론 매체들에서 인권이나 민주주의를 기대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기는 하지만, 총선에 즈음하여 이와는 차원이 다른 충격적인 사건이 있었다. 즉 공산당으로부터 이탈한 민족주의적 분파들이 ‘조국’이라는 독자적인 정당을 창당, 선거에 임하면서 선거 광고가 공중파 방송에서 방영되기 시작했는데, 그 내용은 우리네 상식을 초월하는 인종주의적인 것이었다. 내용은 이렇다. 러시아의 이슬람계 소수민족들이 거리에 앉아 수박 씨(수박은 소수민족들의 대표적 상품이다)를 바닥에 지저분하게 뱉으면서 지나가는 러시아 여성을 희롱한다. 게다가 이들은 러시아어가 아닌 자신들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를 본 ‘조국’ 당의 당수가 그들에게 다가가 여기는 러시아 땅이니 러시아어로 이야기하라고 하면서 훈계한다. 그러고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거리의 쓰레기들을 치우자. 그리고 프랑스 외곽에서의 이민자 폭동을 보여 주면서 이들은 경고한다. 지금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우리도 곧 저런 대혼란에 빠질 것이라고.

더 놀라운 것은 이러한 인종주의적 선거 광고가 국제사회의 비난이 일어 의회에서 제약이 가해지기 전까지 버젓이 공중파 방송에서 방영되었다는 사실이었다. 이후 마지못한 의회의 방송 금지 조치가 있었지만, ‘조국’ 당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문제의 화면을 그대로 내보내되, 단지 이것은 프랑스의 상황이라며 프랑스어로 더빙하고, 아래에 러시아어 자막이 나오는 버전으로 바꾸어 광고를 계속하는 꼼수를 부렸다. 그리고 이 새로운(?) 버전 속에서 수박을 먹던 소수민족 청년들은 아랍어를 구사하는 것처럼 더빙되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사회주의 체제의 붕괴와 체제 전환 선언 이후 벌어졌던 상상을 초월한 끔찍한 사회경제적 붕괴는 거의 모든 옛 사회주의 국가들에서 스킨헤드로 대변되는 각종 극우민족주의, 인종주의, 파시즘 등의 부활을 야기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일련의 스킨헤드들의 인종주의적 행태들이란 반드시 특정 파시스트 집단의 조직원이 행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인종주의적이고 타민족배타주의적인 분위기는 일반대중들에게서도 만연되어 있다 보니 인종혐오범죄의 상당수는 일상적인 것이 되어버렸다. 여러 여론 조사에 따르면, 방법에 있어서는 이견이 있으나, 러시아인들 중 인종주의적 범죄자들의 주요 주장에 동의하는 경우가 과반수를 넘는 충격적인 결과들을 볼 수 있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이러한 반인류적, 반인권적 광고가 버젓이 공중파를 탈 수 있었던 데에는 정치엘리트들 뿐 아니라, 러시아 일반 대중들 또한 비러시아 민족에 대한 혐오감이 극도에 달해 있어서 가능한 것이었다.

그런데 현재 우리의 상황은 러시아와 과연 크게 다르다고 할 수 있을까? 최근에도 독도, 정신대, 욱일승천기 문제 등으로 크게 불거지고 있듯이, 우리는 일본 제국주의와 군국주의에 대해서는 늘 비판하고 분노하면서도, 우리가 타민족에 대해 차별과 억압을 자행한 역사 혹은 현재 상황에 대해서는 저들과 다를 바 없는 논리로 자신들의 언행과 행동을 정당화하곤 한다. 특히 사회경제적 불평등이 심화될 경우 대중들은 불만을 사회의 약자들에게로 터뜨리곤 하는데, 최근 우리 사회도 이러한 길을 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사실상 결혼 이주민 여성들의 동화와 이주 노동자 가족 등 다른 형태의 이주민들의 배제 정책에 다름 아닌 현재의 다문화 정책과 외국인 고용 정책에 대한 불만은 엉뚱하게도 정부나 기업이 아니라 이주민들에게 향하고 있다. 즉 기업들이 저임금 외국인 노동자 고용을 선호함으로 인해 일자리가 부족해지고, 임금 인상이 저해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외국인들 더 받아들이자는 정부의 다문화 정책은 특히 경제 위기와 사회 양극화, 사회안전망 부재의 현실 속에서 고통 받는 하층 집단들에게 커다란 불만을 갖게 하였고, 특히 사실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로 인해 상대적으로 내국인이 차별받고 있다는 식의 논리는 한국 고유의 순혈주의에 대한 환상과 겹치면서 가히 폭발적인 수준의 적대감으로 돌변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특히 지난 총선에서 필리핀 이주 여성이 국회의원으로 당선되는 등 상징적으로나마 정치권력까지 부여할 기미를 보이자 이러한 불만은 극에 달했고, 비슷한 시기에 발생한 오원춘 사건은 온라인을 중심으로 확산되던 인종주의와 외국인혐오증이 현실에서도 조직화되는 단계로 접어드는 계기가 되었다. 물론 아주 오래전부터 공장과 건설 현장, 심지어는 출입국관리소나 단속공무원들에 의해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차별과 착취, 구타 등 다양한 인종주의적 만행들은 비일비재했지만 이는 창피한 일로 취급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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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필리핀 이주 여성으로 국회의원에 당선된 이자스민 의원이 주최한 다문화정책 토론회에서
외국인 혐오 단체 소속 회원들이 소란을 피웠다.
사진 출처 - 노컷뉴스


그러나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가령, 불법 체류자 단속으로 도주하다 사망한 이주노동자들이나 침몰한 중국 어선에서 사망 실종된 선원들에 대해서도 잘 죽었다는 댓글이 쉽게 발견되고, 성범죄 사건 때마다 혐의를 즉각 외국인들에게 돌리며, 전혀 상관없는 과거의 사건들과 연관시켜 인종주의적 모독을 서슴지 않는 댓글이 훨씬 더 압도적으로 많은 현실은 결단코 우리네 현실이 러시아의 그것보다 낫다고 하기 어렵다. 중국동포에 대한 적개심에서 보듯, 향후 본격적으로 특정 이민자 집단의 수가 더 증가하게 되면 갈등은 심각한 수준에 이를 수 있다. 사회경제적으로 심각한 상황에 놓인 하층 집단들의 불만이 소위 ‘묻지마’ 범죄 등으로 폭발하고 있는 현재, 그 불만이 이주민들에 대한 공격으로 바뀌는 것은 시간문제일 수 있다. 이주민들은 다 선하다거나 약자라는 것이 아니라, 그들 역시 우리 사회 구성원들과 똑같이 다양한 모습을 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 동안 우리 사회는 이민자, 특히 비서구권 이민자들에 대해 심각한 인권 침해를 방조하여 사실상 용인해 온 것이 사실이다. 욱일승천기를 철십자와 동일시하는 노력의 근본정신이 어디에 있는지를 파악하여, 과거의 상징이 아닌 현재의 인간에 대한 문제가 훨씬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올림픽 당시 말만으로도 스위스 축구 선수와 그리스 육상 선수가 자국 국가대표를 박탈당한 것을 상기하자. 법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는 것은 절대 아니지만, 국제적 수준으로 인종주의와 파시즘 선동에 대해 단호하게 처벌할 수 있는 법제정이 시급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법과 제도의 한계를 넘기 위해서라도 아직은 낯선 인종주의 문제에 대한 시민사회의 관심이 절실하며, 이주 노동자나 이주민 권리 운동은 반드시 인종주의에 대한 반대 운동과 결합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