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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제도 존폐 문제의 토론을 보면서 (조광제)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8-07 10:09
조회
153

조광제/ 철학아카데미 상임위원



한 개인이 지닐 수 있는 감정의 폭과 깊이는 어느 정도이며, 그리고 감정의 종류는 얼마나 될까? 이 물음을 던지게 된 것은 새벽 2시에 이르도록 진행된 MBC-TV의 <100분 토론>에서 사형제 존속이냐 아니면 사형제 폐지냐 하는 의제로 토론 하는 것을 보고 난 뒤였다. 한쪽에서는 인간이기를 아예 포기한 흉악무도한 자들은 그야말로 사형을 통해 사회에서부터 아예 제거해버려야 한다는 주장을 하면서 사형제 존속뿐만 아니라 사형 선고를 받은 사형수들을 하루속히 사형 집행을 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또 사형 선고와 집행이 무고한 시민들의 목숨을 함부로 해하는 범죄를 예방하는 심리적인 효과가 크다고 주장했다. 다른 쪽에서는 국가가 살인을 금하면서 국가가 사형 제도를 통해 살인을 하는 것은 정의에 어긋난다고 하면서 기본권 중의 기본권인 생명권의 고귀함을 국가가 나서서 숭상하는 태도를 보임으로써 인권 국가로 거듭날 수 있어야 한다고 하고, 또 국가가 피해자 가족의 감정을 헤아려 정의를 실현해야 하지만 그 실현에서의 정의로움을 염두에 두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사형 제도보다는 절대적인 종신형 제도를 통해 가해자가 끝없이 후회하고 자책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토론을 시청하는 내내 나 스스로 알 수 없는 어떤 힘에 이끌리는 듯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 이유가 양쪽 모두의 주장이 분명히 대립되는 데도 전체적으로건 부분적으로건 양쪽 모두 옳은 것 같다는 느낌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다. 인간이라는 존재의 가능성과 잠재성의 방향이 얼마나 극단적으로 대립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가를 생각하게 되면서, 도대체 우리 인간이 그와 같이 극단적으로 나뉘는 방향으로 자신의 존재와 자신의 삶을 몰아가게 되는 원인에 대해 나 자신의 논리적인 상상력을 비롯한 일체의 합리적인 사유가 무능력한 상태로 빠져 버린다는 것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아울러 나에게서도 경우에 따라 살의가 알게 모르게 꿈틀거리기도 한 적이 있었음을 떠올리면서, 그런데도 내가 당당하게 그 책임을 지겠다는 결의에 의거한 살의가 아니라, 그 살의가 나도 모르게 솟구쳐 올라온 것과 마찬가지로 그런 살의에도 불구하고 나 자신은 죽고 싶지 않다고 하는 생존에의 근본 욕망이 자연스럽게 발동되고 있었다는 것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전쟁에서의 적국 군인들에 대한 살인이나 국가의 사형 제도에 의한 살인을 흔히 합법적인 살인이라고 말한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자행되고 있기도 하거니와 인류 역사를 통해 점철되어 온 온갖 종류의 전쟁을 통해 그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는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서 집단적인 삶이 근원적으로 배타적인 데서 비롯되었다는 것, 그 배타성에 강력한 폭력성이 잠재되어 있다는 것, 그 폭력성에 일상적으로는 느낄 수 없는 이질적 감각의 폭발성이 그 본질인 양 결합되어 있다는 것, 그 이질적 감각의 폭발의 충동에 몸을 내맡길 때 일체의 합리적인 판별력이 마비되어 파생될 자기 파괴적인 결과를 거의 예측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설사 어렴풋이 예측한다고 할지라도 그렇게 예측되는 결과마저 이질적 감각의 폭발력에 대한 그 괴물적인 향유를 강화하는 쪽으로 활용되고 만다는 것, 그런데 그런 집단적 삶의 형태가 개인에게 이관되어 언제 어디서든 나타날 수도 있는 새로운 사회구성체가 조직되어 현재 우리의 삶을 규정하고 있다는 것 등을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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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서대문형무소 사형장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대다수의 인간을 생명 내지는 생존 차원에 묶어 둠으로써 유지되는 사회구성체에서는 생명 간의 충돌과 격돌이 불가피하게 된다. 한 개인의 생명이란 다른 사람의 생명으로 대체될 수 없는 절체절명의 유일한 것이기 때문에, 이 생명들 간의 충돌과 격돌은 그야말로 처참하게 전개될 충분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절체절명의 배타성을 띤 생명과 생존의 차원에서 벗어나도록 해야 한다. 그럴 때에, 그리고 그런 만큼 인간이 인간적인 동물성을 넘어서서 인간만의 이른바 인간 고유의 인간성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회의 수준에 따라 생명과 생존이 제대로 유지되는가에 대한 기준은 달라지는 것은 물론이다. 아울러 인간 고유의 인간적인 삶이 어디에서부터 시작되는가 하는 기준이 달라지는 것 또한 물론이다. 중요한 것은 인간 고유의 인간성은 결코 배타적인 소유의 대상이 아니라 함께 즐기면서 그 즐김의 강도와 밀도가 더욱 강화되는 대상들을 인식하고 개발하고 전승해서 심화 확대함으로써 이른바 전반적인 공향유의 세계를 중심으로 삶을 영위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체제는 근본적으로 대다수 사람들을 가능한 한 배타적인 생존의 차원에 묶어 둠으로써 유지된다는 데 그 본질적인 특징이 있다. 그 최상 최종의 매개가 바로 돈이다. 대다수의 사람을 돈에 묶어두는 것은 바로 대다수의 사람들을 배타적인 생존 차원 즉 인간적인 동물성의 차원에 묶어두는 것이다. 이를 넘어서는 인간 고유의 인간성의 차원마저 인간적인 동물성을 위한 하나의 장식으로 만드는 것이 자본주의 체제이다.
이런 생각에 이르게 되면서, 다소 역설적인 생각을 하게 된다. 사형 제도에 의한 국가의 살인은 절체절명의 생명 개념을 대다수의 사람들의 뇌리 속에 심어 넣어 자본주의적인 배타적인 생존을 절대적인 것으로 만드는 경향을 띠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 생명 자체의 고귀함을 강조함으로써 사형 제도를 폐지하고 그 대신 절대적인 종신형 제도를 두는 것은 어떤가? 그것은 절체절명의 생명 개념과 그에 따른 배타적인 생존의 절대성을 강화하는 것은 아닌가? 이 물음에 대해서는 왜 인간 생명이 고귀한가를 성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답변을 하게 된다. 적어도 사안이 되고 있는 사형 제도에 관련해서 볼 때, 인간 생명이 특별히 고귀한 까닭은 일체의 생명체의 생명이 고귀하기 때문은 분명히 아니다. 인간 생명의 고귀함이 일반 동물 생명의 고귀함에 비해 특별히 탁월한 까닭은 인간적인 동물성을 바탕으로 한 배타적인 생존 자체의 차원에서 연유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고유의 인간성을 바탕으로 한 공향유의 세계를 심화 확대해서 심지어 신성의 영역조차 안출하여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인간 생명이 특별히 고귀한 것은 그런 까닭에 흔히 하는 말 그대로 온 우주를 주고서도 바꿀 수 없기 때문이다. 이를 감안하지 않은 채 인간 생명의 맹목적인 고귀함만을 내세우게 되면 그 역시 자본주의적인 배타적인 생존을 절대적인 것으로 만드는 경향을 띠고 말 것이다.
이런 등속의 생각을 하면서 다시 묻게 된다. 한 개인이 지닐 수 있는 감정의 폭과 깊이는 어느 정도이며, 그리고 감정의 종류는 얼마나 될까? 배타적인 소유에 의한 감정 역시 그 폭과 깊이가 다대하고 따라서 그에 따른 감정의 종류도 다양할 것이다. 하지만, 인간 고유의 인간성을 바탕으로 한 공향유의 세계에서 펼쳐지는 감정은 그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무궁무진하며 그 감정의 종류도 그만큼 무궁무진할 것이다. 갑자기 니체의 말이 떠오른다. “아직 가보지 않은 천 개의 길이 있고, 천 개의 건강이 있다.” 배타성과 배타성에 내재된 폭력성 그리고 폭력성의 본질인 충동적인 이질적 감각의 잔인성 등으로 향한 길과는 전혀 다른 길인데도 그런 폭력적인 감각에 못지않은 강렬한 건강한 감각의 충만이 충분히 주어질 수 있음을 사회 전체적으로 예사로 확인할 수 있었으면 하고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