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산책

home > 인권연대세상읽기 > 수요산책

‘수요산책’은 각계 전문가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수요산책’에는 박록삼(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박상경(인권연대 회원), 서보학(경희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이윤(경찰관), 이재환(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책임관), 조광제(철학아카데미 대표), 황문규(중부대학교 경찰행정학과 교수)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사무라이들(이광조 CBS PD)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7-20 16:26
조회
174

이광조/ CBS PD



뱀 꼬리보다는 닭대가리가 되라. 어릴 적 어른들로부터 가끔 듣던 얘기다. 대학에 가서는 ‘데모를 하려면 아예 총학생회장이 되든지 주동자가 되라’는 얘기도 가끔 들었다. 학생회 간부나 이른바 운동지도부가 아니라도 실컷 얻어맞는 건 기본이고 여차하면 고문까지 당하는 터라 가까운 사람들은 이런 조언을 하지 않았지만 나름 세상이치를 좀 안다고 생각하는 분들 중에는 이런 얘기를 하는 분들이 적지 않았다.

뭘 하든 남들의 주목을 받는 존재가 되라! 나이를 조금씩 먹으면서 이 조언 속에 참 많은 함의가 담겨 있다는 걸 느끼게 된다. 그 중에서도 시간이 갈수록 무섭게 다가오는 게 있으니 그건 ‘어느 쪽이든 권력에 접근하는 것이 좋다’는 메시지였다. 이런 제기랄. 권력에 환장했나? 20대 때는 이런 생각이 먼저 들었었다. 하지만 그 말 속에 켜켜이 담겨 있는 경험과 역사를 조금씩 체감하면서 때론 열패감에 때론 분노에 휩싸이곤 한다. 왜? 그 때 그 어른들의 충고를 새겨듣지 않아서?

언론사라는 곳에 있다 보니 우리사회에서 방귀 꽤나 뀐다는 사람들을 직접 보기도 하고 그들의 얘기를 자주 접하는 편이다. 그러면서 우리나라의 이른바 정치엘리트(?)가 충원되는 경로를 비교적 가까이서 지켜보기도 하는데, 이 과정에서 ‘뱀 꼬리보다는 닭대가리가 되라’는 말이 왜 이토록 오랫동안 우리사회의 처세술로 유지되고 있는지를 절감할 때가 종종 있다.

이와 관련해 우선 가장 흔히 목격하는 사례는 대통령 선거다. 선거 때가 다가오면 이른바 캠프라는 것이 꾸려진다. 선거운동을 하는데 캠프가 없을 수야 있겠는가? 하지만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이 선거캠프라는 것이 참 재미있다. 가치관과 정책에 공감해 자원봉사를 하는 분들도 없지 않겠지만 우리사회에서는 대선 캠프라는 곳이 취업 창구로 통용되기 때문이다. 대통령 후보를 돕던 참모들이 후보가 당선된 이후 보좌진으로 일하는 걸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건 어느 사회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여기서 취업 창구라고 말하는 건 국정운영을 위해 꼭 필요한 정책참모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이런 저런 떡고물을 생각하며 캠프에 이력서를 들이밀었던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지지했던 후보가 당선된 뒤 그들의 전문성이나 가치관, 목표의식과는 관계없이 높은 연봉과 영향력이 보장되는 자리로 취업이 되기 때문이다. 소위 말하는 낙하산이다. 대통령 한 사람이 일자리를 마련해 주는 이런 낙하산이 얼마나 될까? 세 보진 않았지만 너무 많다.

090812web03.jpg
지난 7일 오전 서울 광화문 방송통신위원회 회의실에서 방문진 신임이사로 선임된 이사들이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으로부터 임명장을 받고 있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1987년 대통령 직선제가 도입된 이후 몇 차례 이런 과정을 겪다보니 어느 때부터인가 선거를 통한 취업이라는 관행이 굳어진 것 같다. 그리고 이 취업전선에 뛰어들어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는 사람들은 이른바 지식인들이다. 교수, 기자, 변호사, 시민단체 활동가 등등. 그래서 선거철이 되면 잘 다니던 직장에 사표를 던지고 캠프에 가담하는 사람들도 눈에 띈다.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가 당선이 되면 누구는 국회로 가고 누구는 청와대로 가고 누구는 공기업 이사와 감사로 가고... 대선 후보 캠프라는 곳이 이렇게 취업 창구가 되다보니 정책이나 가치관 따위는 별 문제가 안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먹고 살려고 직장 구하는데 까짓것 정책이니 가치관이야 뭐 대수겠는가. 취직시켜주고 인정해주고 돈 많이 주면 그만이다. 반대로 취직 제대로 안 시켜주고 똑똑한 나를 제대로 대접 안 해주면? 볼 거 뭐 있나, 안녕이지. 하여 김대중 후보 캠프에 얼쩡거리던 사람이 ‘친북좌파’니 어쩌니 하면서 반 김대중 투사가 되기도 하고 노무현 후보 캠프에 취업원서 넣었던 사람이 ‘잃어버린 10년’이니 어쩌니 하면서 이명박 정부에 참여해 투사가 되기도 한다. 거 참. 이런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능력을 인정해 주고 일자리를 보장해 주는 주군이 최고다. 더 이상 무엇이 필요하겠는가? 칼만 차지 않았지 이들은 사무라이들이다. 자신을 알아주는 주군을 찾아 권력의 주변을 떠도는 사무라이들.

문제는 이런 사무라이들의 눈에는 주군만이 보일 뿐 정작 자신들을 먹여 살리는 세금을 내는 국민들은 안중에 없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능력은? 뭐, 주군에게 충성하고 반대세력을 효과적으로 공격하면 충분한 것 같다. 뭐 또 사회라는 게 시스템으로 굴러가는 거지 나 하나쯤 어떻게 한다고 조직이 안돌아가고 세상이 망하고 그런 건 아니지 않은가. 과거에 뱉었던 말들? 세월이 가면서 생각도 변하고 그런 거지 그게 뭐 중요하겠는가.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 시절이라고 이런 사무라이들이 없었을까마는 요즘은 아닌 게 아니라 좀 걱정스럽다. 왜냐고? 단순히 취직하는데 만족하지 않고 너무나 전투적이기 때문이다. 문화방송의 대주주인 방송문화진흥회 이사회에도 이런 사무라이로 의심되는 몇몇 이사들이 입성했다. 이들은 ‘왜곡, 편파방송을 일삼아 온 문화방송을 바로잡겠다’는 굳센 결의를 다지며 출사표를 던졌다. 그래, 문화방송이라고 왜 문제가 없겠는가. 문제가 있다면 충분한 검토와 논의를 거쳐서 고쳐야겠지. 그런데 왜, 당신들이 ‘왜곡, 편파방송’의 대표적인 사례로 손꼽는 PD수첩의 미국산 쇠고기 수입협상 관련 보도에 그토록 많은 국민들이 공감하고 최근의 여론조사에서 문화방송이 언론 신뢰도 1위를 차지했을까? 국민들이 왜곡, 편파 방송에 세뇌가 되어서?

칼이든 펜이든 입이든 마구 휘두르면 화를 부르게 되어 있다. ‘왜곡, 편파방송’이라는 당신들의 진단이 과연 제대로 된 것인지, 대한민국 방송 산업과 언론에 대한 당신들의 고민과 지식이 어느 정도인지, 제발 그것부터 냉정하게 생각해보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