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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무사의 참을 수 없는 공안본능(이유정 인하대 법대 교수)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7-20 16:27
조회
190

이유정/ 변호사, 인하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국군보안사령부(약칭 보안사)라는 곳이 있었다. 1980년대에 안기부와 함께 공안 사건에서 악명이 드높던 기관이다. 원래 보안사는 군사에 관한 정보수집과 군인들에 대한 수사를 목적으로 창설된 국방부 내의 정보수사기관이지만, 한때는 공공연히 민간인들에 대한 간첩수사도 했었다. 국정원 진실규명위원회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조사보고서를 보면 보안사라는 기관이 얼마나 어마어마한 불법을 저질렀는지 잘 나타나 있다.

수사권한도 없는 기관에서 민간인들을 불법으로 연행해서 수 십 일간 구금하고(불법체포. 감금죄), 잠을 안 재우고, 거꾸로 달아매고, 각목으로 기절할 정도로 구타하는 등 온갖 종류의 고문을 다 해서 간첩이라는 허위자백을 받아내고(특가법상의 독직폭행죄), 민간인에 대한 수사권이 없으니 안기부 수사관들의 명의를 도용해서 수사서류를 만들기도 했다(공문서 위조죄).

보안사에서 이렇게 불법을 저지르는 동안 수사지휘권을 가진 검찰은 수사권도 없는 보안사의 민간인 수사를 전혀 문제 삼지 않았다. 오히려 사건이 검찰로 송치되기 전에 보안대 수사관들에게 “이 정도면 기소할 요건이 성립되었다”고 법률검토까지 해 주었다. 보안사가 수사권한도 없이 민간인들에 대한 간첩수사를 하는 점에 대해서는 “보안대가 민간인에 대한 수사 권한이 없는지도 잘 몰랐다”고 변명하기도 한다.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지만 절대 꾸며낸 말이 아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보고서에 들어있는 내용이다.

이렇게 민간인들에 대해서 무시무시한 권한을 행사하던 보안사는 1990년대까지도 본연의 업무와는 전혀 무관하게 야당정치인 등 민간인을 사찰하다가, 윤석양이라는 청년의 양심선언에 의해 그 전모가 밝혀지자 다시는 민간인에 대한 사찰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 명칭도 ‘국군기무사령부’(약칭 기무사)로 바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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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동당 당원 엄윤섭씨(가운데)가 지난 17일 오후 국회에서 국군기무사령부가
자신의 일상 생활을 몰래 찍은 동영상(오른쪽)을 공개하고 있다.
사진 출처 - 한겨레


그런데 최근 기무사가 다시 민간인 사찰을 재개한 증거가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흘러나온다. 민주노동당의 당직자와 가족까지 미행하고 촬영을 한 증거가 발견되었다는 내용이다. 수구세력들이 잃어버린 10년을 되찾자고 외치더니 드디어 20년 전으로 돌아갔구나 싶어 가슴이 답답하다. 이명박 정부가 출범할 때만 하더라도 민주주의가 이렇게까지 후퇴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민주주의의 틀이 정착되었으니 어떤 사람이 대통령이 되더라도 국가기관이 버젓이 법을 어기는 일은 더 이상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놀랍게도 불과 1년 만에 이 정부는 온갖 불법이 난무하던 20년 전으로 시계바늘을 돌려버렸다.

더욱 염려스러운 것은 수구언론이나 청와대, 여당에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뻔 한 변명조차 하지 않는다. 국민들을 철저히 무시하는 것이 분명하다. 냄비근성의 국민들이니 금세 잊어버릴 것이라고 생각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기무사의 민간인 사찰문제는 절대로 흐지부지 넘어가서는 안 될 중대한 사건이다. 87년 국민들의 힘으로 군부독재를 종식시킨 이후에 나름대로는 정치적인 중립을 지켜오던 군이 다시 정치에 개입하기 시작했다는 징표이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민간인 사찰에서 시작하지만, 국가안보라는 명분을 내세워 민간인을 수사하고, 불법 체포하고 고문하는 일이 다시 벌어지지 않으리라고 장담할 수 없다. 지금도 “건국 이후 전 공안기관 검거 간첩의 43%를 검거”한 사실을 자랑스럽게 내세우는(그 사건들 중에는 보안사의 고문으로 조작된 간첩 사건도 상당히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기무사의 참을 수 없는 공안본능을 조기에 잠재우지 못한다면, 최근 민주주의의 후퇴 속도로 보아 30년 전으로 돌아가는 일도 순식간일 것 같다.

누군가 나를 끊임없이 감시하고 미행하고, 나의 사생활이 낱낱이 군 수사기관에 보고되는 상황을 상상해보라. 창살이 없다 뿐 그것이 감옥이 아닌가. 새삼스럽게 보안사의 민간인에 대한 고문 수사 이야기를 먼 옛날이야기처럼 할 수 있었던 지난 10년을 잃어버린 것이 참으로 안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