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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누구를 죽이는가, 기독교의 물량주의적 논리(이찬수 전 강남대 교수)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7-20 15:12
조회
264

이찬수/ 전 강남대 교수, 현 종교문화연구원장



기독교 믿어야 잘 산다?

어렸을 때, 기독교를 믿는 나라는 다 잘사니 우리나라에도 기독교인이 더 많아져야 한다는 원로목사님의 설교를 종종 들었었다. 이것은 백여 년 전 한국 개신교 선교 초기에 회자되던 논리였고, 교회 나가야 미국처럼 잘 살것 같은 민중적 욕망과 어울리면서 한국 기독교가 양적 성장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해방 후 월남했던 노목사님으로부터 그런 설교를 들을 때마다 어린 나는 기독교인도 별로 없는 일본은 왜 잘 사는지 궁금했다. 그래서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몇 차례 질문을 던지기도 했지만, 아무에게서도 제대로 된 답을 들은 기억은 없다.

물론 일본이 잘 사는 것과 기독교는 별 상관이 없다. 일본의 경제적 발전은 일본 특유의 집단적 세속주의가 자신의 정신적 전통은 지키면서도 서구의 근대 문물을 적극적으로 소화해낸 결과이다. 그 정신은 기독교가 아니고, 도리어 신도(神道)나 불교 등 전통 종교에 가깝다. 오늘날의 일본문명이라는 거대 공장을 굴리는 무수한 톱니바퀴와 같은 것이 신도 내지 불교와 같은 것들인 것이다. 그 결과 일본은 서구화와 동일시되지 않은 근대화를 이룬 대표적인 나라가 되었다. 한국에서 전근대는 타파되고 근대는 추구되어야 할 것이었다면, 일본에서 전근대는 지켜야 할 질서적인 것이고 근대는 낯설고 무질서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신도나 불교와 같은 ‘전근대적’ 정신을 유지하는 가운데 세계 최고 수준의 물질적 풍요를 이루는 근대화에 성공한 것이다.
여전히 통하는 물량적 논리

현 정부 관료들의 친기독교적, 불교소외적 발언과 행보로 불교계의 불만이 극에 달한 상황에서 장경동이라는 유명세 있는 목사가 ‘불교가 들어간 나라는 다 못산다’, ‘석가모니 선생은 불교를 만들면 안 되는 것이었다’, ‘(석가의 나라 인도가 지독하게 가난하니) 소들을 확 잡아 고아먹으면 영양실조도 안걸릴텐데...’ 등등의 기독교 우월적, 불교 폄하적 설교를 했다 한다. 개신교 목사들의 그러한 설교가 어제 오늘의 이야기는 아니지만, 어찌되었든 무지하기 짝이 없는 발언인 것은 분명하다. 사회적 문제가 되자 ‘교회 내부적 발언인데 그 정도는 가능한 것 아니냐’는 식의 해명을 했다 하니, 발언만 무지한 것이 아니라 발상도 무지하다. 전 인구 1억2천8백만 명 중에 가톨릭 개신교 합쳐 기독교인은 100만 명 남짓하고, 1억 명 이상의 사람들이 여전히 신도와 불교가 습합된 문화를 소중히 여기며 사는 일본은 어찌해서 잘 산단 말인가.

물론 일본을 설명하려는 것이 이 글의 의도는 아니다. 말하고 싶은 것은 이른바 종교 지도자들이 인간의 내적이고 초월적인 신앙을 외적이고 물량적으로 재단하고 정당화시키는 행위의 유치함이다. 그리고 기독교인을 자처하는 사람들이 자신이 따라야 할 신앙의 속뜻에 대해서는 외면한 채 물량적 희망과 달콤함만을 신의 이름으로 누리려는 현실이다. 종교의 근본 의미 내지 내면적 가치를 볼 줄 아는 안목은 거의 없이, 권력이나 재물을 신앙의 결과 내지 신의 축복과 동일시하는 유아적 종교관이 근본 문제인 것이다. 시민보다 시장이 더 큰 축복이고, 국민보다 대통령이 더 큰 축복이라는 식의, 과거 수직적 사회를 반영한 물량주의적 논리는, 인간의 권력욕과 소유욕을 신앙의 이름으로 부추기고 투사시키는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예수가 권력을 쟁취해 왕이라도 되었단 말인가. 그래서 그 길을 따른다는 말인가. 불교가 들어간 나라는 못산다는 식의 말을 듣노라면, 돈을 소유하려는 인간적 욕망을 종교의 이름으로 포장해온 지난 역사를 살펴보노라면, 지구상에 유일한 기독교인은 예수뿐이 없다는 말이 다소 과장되었기는 하지만 이해는 충분히 되고도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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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사 앞마당에 장경동 목사의 불교 폄하 발언과 국회의원들의 종교 행위를 비판하는 내용이 걸려 있다.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GNP가 하느님인가

불교가 들어간 나라는 못산다거나 기독교를 믿어야 잘 산다는 식의 논리가 유력한 목사들에 의해 여전히 유통되고 기독교인을 자처하는 대중에 의해 소비되면서 확대되는 현실은 자괴감을 느끼게 한다. 내면적 신앙을 외형적 물질로 환원시키는 이런 류의 사고방식은 그저 과자 하나 내밀면 유괴범도 좋아라 따라가는 어린아이 수준을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다. 물론 누구든지 어린 아이로부터 시작한다. 하지만 좀 더 크면 그 과자 한 봉지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게 되지 않는가. 신앙도 그래야 한다. 달콤한 과자 한 봉지의 미래도 볼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어떻게 종교성 내지 신앙의 본질을 물질적 욕망 안에 가둘 수 있는가. 기독교 문화권 국가가 불교 문화권 국가보다 GNP가 높은 경향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렇다고 해서 GNP를 기독교적 진리로 도치시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느님이 온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하는데, 그 온 세상, 그러니까 우주의 눈으로 바라보면 한 점 먼지만도 못한 지구에서, 결국 먼지처럼 사라질 재물을 움켜쥐는 행위를 우주적 신이 자신의 현존의 증거로 삼는다는 말인가. 그것은 더 말할 것도 없이 신의 이름으로 인간의 욕망을 합리화시키는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좀 더 우주적인 시각에서 보는 훈련을 좀 했으면 좋겠다.
누가 누구를 죽이는가

한 번 더 생각해보자. 누가 죽이고 누가 살리는가. 신의 축복이라는 그 소유와 재물이 도리어 지구를 죽이고 있지 않은가. 누가 이산화탄소 발생량을 높여 지구 온난화를 가속시키고 지구를 죽음으로 몰고 가는가. 많이 소유한 자 아니던가. 물질적 풍요를 누리는 이가 지구를 살리는가, 가진 것이 적어서 쓸 것도 없는 이들이 지구를 살리는가. 벌레 한 마리도 죽이지 않으려 조심해서 걷는 자이나교 수행자들이 지구를 살리는가, 벤츠를 타고 매연을 내뿜으며 호텔 조찬기도회에 참여하는 이들이 지구를 살리는가.

누군가 많이 소유한다는 것은, 의도적이든 아니든, 다른 누군가의 소유를 제한할 수밖에 없다. 많이 가지는 자가 있으면 그만큼 적게 가지는 자도 있을 수밖에 없다. 잘 살려면 기독교 믿으라는 식의 말은 소유 쟁탈전을 벌여 더 많이 갖도록 하는 투쟁이 예수의 진리라는 식으로 가르치는 꼴이다. 다른 이로 하여금 적게 가지도록 하는 것이 신의 뜻이란 말인가.
티벳 산골의 수행자가 미국의 대통령보다

소유의 욕망을 제어하고 비움의 실천을 통해 이웃을 살리던 이가 붓다이고 예수 아니었던가. 과자 한 봉지 들고 좋아하는 어린 아이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목사든 신자든 나이가 들어도 내적으로 성숙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이다. 따지고 보면 옳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사람들은 비움이라는 부담스러운 요청에는 슬쩍 눈감고, 소유라는 욕망과 희망을 슬슬 자극해주기를 바란다. 그것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그것이 신의 뜻으로 포장되는 현실이 문제이다. 거기에 종교가 어디 있는가, 그저 욕망만이 있을 뿐이다. 붓다나 예수처럼 ‘집도 절도 없이도’ 행복하고, 그 힘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것이 종교라고 가르칠 수 있어야 한다. 애당초 돈을 목표로 하는 기업가임을 자처했다면 모를까, 재물욕이나 권력욕을 신앙의 이름으로 정당화하는 일은 이제 더 이상 사라졌으면 좋겠다. 예수 믿기보다는 예수 따르기라는 어려운 요구를 그대로 실천하기는 힘들어도, 제발 기독교 믿으면 잘 산다거나, 불교 들어간 나라는 못산다는 식의 저급한 발상이나 발언은 이제 좀 보지도 듣지도 않게 되었으면 좋겠다. 내가 보기엔 불교가 들어간 나라 티벳 산골의 불교 수행자가 기독교가 들어간 나라 미국의 현 대통령보다 더 예수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