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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름, 느림, 그리고 아픔들의 연대 (신하영옥)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8-07 11:14
조회
174

신하영옥/ 여성활동가



요즘은 이런저런 이유로 부모들의 가슴이 미어지는 시간들의 연속이다. 세월호로 생떼같은 아이들을 잃은 부모들과 군대총기사건으로 자녀들을 잃고만 부모들을 보면서, 그들의 한숨과 절망과 분노에 공감하면서 대체 왜 이런 일들이 반복되고 있는지 화가 난다. 이런 화와 분노가 국가에 대한 절망으로 이어져 이 나라를 떠나겠다는, 버리겠다는 부모들이 늘고 있다. 소고기 FTA로 촛불이 한참이던 시기, ‘5년을 어떻게 기다리나?’ 고 했지만 그 5년은 10년으로 늘었고 얼마가 더 늘어날 지 가늠되지 않는다. 그동안 근대의 산물이라던 ‘합리’와 ‘이성’은 찾아보기 힘들고 확인될 수 있는 것은 사소한 일상까지 침투한 ‘권력’뿐이다. 대통령을 풍자한 그림을 그렸다는 이유로 체포되어야 하는 예술가, 세월호 구조작업의 현실에 대해 말했다는 이유로 입을 봉쇄당한 잠수부. 한국인이 부지런하지 않다는 근거도 역사도 없는 주장을 해대는 무개념 인사의 뻔뻔함. 이 모든 것이 가능한 건 국민 위에 군림하는 권력 때문이다. 국가는 유일하게 폭력을 합법적이고 정당하게 사용가능한 조직이다. 그러나 그 폭력은 국가존재의 토대가 되는 국민들의 안전과 생명, 평화에 대한 위협에 대항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존재해야 한다. 지금 폭력은 국민들의 안전과 생명, 평화를 앗아가는 쪽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사소한 일상까지 침투한 권력으로 인해 많은 이들이 스스로 자기감시와 검열을 자행하는 웃지 못 할 일들이 21세기에 벌어지고 있다. 대한민국이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가진 국가라면 당연히 표현의 자유는 보장되어야 한다. 돈보다 생명이, 국가기밀과 국가안전보다 국민의 생명이 먼저 보장되어야 함에도 현실은 ‘자유민주주의’에 대해 회의하도록 한다. 대다수 서민들에게 국가는 없다. 다만 국가로부터 소비되는 존재들일 뿐이다. 누군가의 국가를 위해. 그 누군가란 기독교의 현세금욕적 부지런함을, 자본주의의와 결합해 인간을 재화축적의 노예로 만드는 것을 합리화라 믿는 역사적, 사회적 맹인으로서의 누군가와 같은 부류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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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1일 오후 서울 중구 청계광장에서 열린 세월호 침몰사고 진상규명을 위한 시민대회에
참가한 한 시민 손피켓을 든 채 눈물을 닦고 있다.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난 요즘 부지런과는 먼 일상을 보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상 머릿속 어딘가엔 이렇게 살아도 되는가? 라는 압박감이 있다. 항상 노동과 자기계발과 성장이란 강박에 갇힌 삶을 살다가 놓아버린 그 강박적 삶이 습관처럼 들러붙어 버린 것이다. 노동이 신성한 것이라고는 하지만, 현실에서 노동은 사실 ‘돈’이기도 하다. 자기계발과 성장은 말이 그럴듯할 뿐, 실제로는 좀 더 자본주의에 맞는 인간, 멀티플한 인간이 되기 위한 투자일 뿐이다. 이렇게 우린 노동하면서 동시에 자신을 계발하기 위한 다양한 활동들을 하면서, 항상 쫓기듯이 살아간다. 그것이 열심히 사는 대다수 사람들의 삶이다. 그렇게 열심히 성실히 살면서 언젠가는 나아질 미래를 꿈꾼다. 꿈과 희망은 국가와 사회가 정의롭다고 믿는 한 만 가능하다. 그러나 요즘 국가가 정의롭지 못한 것을 깨닫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배신감과 절망감에 스스로 이 공동체를 버리려는 사람들이, 그것이 능사가 아님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선택하고 있다. 너무 절망한 나머지 다른 길이 보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생명보다 돈, 권력이 우선되는 사회에서 이런 배신감은 예고된 것이었다. 돈과 권력이 없는 대다수의 국민들은 돈과 권력을 쥐고 있는 몇몇을 위한 소모품이 되는 사회. 부지런함과 근면성을 강조하며 대다수 국민들의 고혈을 짜내어 소수의 손에 쥐어주는 사회. 현실의 고통을 이성애적 사랑이라는 환상으로 도피하도록 하는 그리하여 온통 성애만이 넘쳐나는 사회에선 인간마저 상품으로 소비될 뿐이다. 지친다. 헐떡이며 살아가는 것에 지치고, 부정의가 정의로 둔갑되는 현실에 지치고, 한줌 혀로 사람들을 농락하는 부류들에 지치고, 그 농락에 놀아나는 군상들에 지친다. 주체로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돌아보니 나 역시 하나의 부품이었다. 주체로, 주인으로 살기위해 필요한 것은 어쩌면 더 느린 생활방식이 아닐까 한다. 느린 시간 속에서야 타인이 보이고, 그들의 아픔이 보이고, 그들의 애절한 삶들이 보인다. 그리고 공감할 수 있다. 느린 시간이어야 현실을 분석하고 미래의 대안을 고민할 수 있다. 느린 시간일 때 분노를 연민과 동정과 희망으로 승화시킬 수 있다. 그래서 느리게 사는 연습을 해볼 참이다. 더 많이. 그래서 이 아픈 시대, 사회, 국가에서 일어나는 아픔들을 더 많이 기억하고 사랑하고자 한다. 아픔들이 서로 사랑해야 아픔 없는 세상이 가능하다. 아픔들이 가진 힘이다. “더 이상 아픔이 없기를...그리고 아픔들이 연대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