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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자기 배려’는 어떤 것일까 (정보배)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8-07 11:12
조회
195

정보배/ 출판 기획편집자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뜬금없는 문자를 받았다. 그 문자는 이 회사와 직원들을 깔보지 말라는 것과 그러면 너도 똑같은 대접을 받을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왜 이런 문자를 받게 된 것인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자신을 밝히지도 않고 다짜고짜 협박하고 비아냥거리는 문자를 보내는 게 조직 문화인지 그 사람의 특징인지 따지고 싶진 않다. 다만 무엇이 그런 거칠고 예의 없는 방식으로 자기표현을 하게 한 것인지 궁금하다. 익명의 문자를 받고 난 후 나는 평소보다 좀 더 남의 눈치를 보았고 언행에 자기검열을 강화했다.

이제껏 회사에 경력자로 여러 번 입사해본 경험이 있지만 동료가 이런 식의 반응을 보인 것은 처음이었다. 회사에 대해 발언한 적이 꽤 있었기 때문에 보통은 사장이나 임원진과 껄끄러웠던 적은 있지만 동료들과 그런 일은 없었다. 위 경우를 겪고 보니, 내가 조직의 눈치를 보지 않고 공개적이든 비공개적이든 의사를 밝혀온 것들이 어쩌면 그렇지 못한 조직원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겠구나 하는 생각에 미치게 되었다.

할 말 다하고 사는 것처럼 비쳐지는 내게도 실은 마음 불편한 경우가 꽤 있다. 나는 핸드폰 발신번호가 1588이나 1599이면 전화를 잘 받지 않는다. 텔레마케팅 전화임을 경험상 알고 있기 때문인데, 그런 통화를 하고 나면 마음이 늘 조금씩 불편했다. 최대한 상대방을 무시하지 않는다고 길게 응대했다가 십여 분을 넘기게 되면 애초에 끊지 못한 본인에게도 화가 나고, 계속 거절하는 나를 향해 일방적으로 말을 하는 전화기 너머 상대에게도 화가 난다. 또 식당이나 지하철에서 물건을 팔거나 구걸을 하는 사람들을 나는 대체로 외면하는 편인데, 꼭 마음에 뒤끝이 남는다. 지하철에서 서명을 받고 후원을 요청하는 단체 사람들을 그냥 지나칠 때도 마음이 불편하다. 그건 구세군 냄비를 만날 때도 마찬가지다.

이 마음 불편함의 정체는 무엇일까?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런 마음들은 ‘착한 사람 콤플렉스’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다. 그리고 ‘착한 사람 콤플렉스’와는 다르지만 비슷한 맥락을 가진, 다른 사람에게 개념 있고 동정심도 있고 사회의식도 있고 사회적인 매너도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무)의식 속에 숨어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누구에게나 마음 불편한 상황이 있을 것이다. 직장이나 친구 사이에서 있을 수도 있고, 시댁과의 관계에서 벌어질 수도 있다. 혹시 그런 상황에서 내 마음 불편함을 감추려고 성급하게 타인에게 화를 내거나 비아냥거리지는 않는지, 자신의 마음이 어떤 상태인지 깨닫지 못하는 사이 혹시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는 말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아니면 그 반대로 뭔가 하고 싶은 말을 못하거나 부당한 경우에 항변하지 못해 마음 불편해하고 있지는 않은지. 만약 그렇다면 세심하게 자신의 마음을 관찰하고 사회적 페르소나 속에 숨어 있는 자신을 찾아보는 시간이 꼭 필요하다.

근래 마스다 미리의 만화를 읽었는데, 주인공들의 독백이 단순하지만 울림이 있어 인상적이었다. 그 짧은 독백 속에는 누구나 한번쯤 생각해 봤음직한, 하지만 남에게 드러내놓고 얘기하지 못한, 자신이 느낀 마음 불편함의 이유들을 객관적으로 담담하게 짚어보는 성찰이 담겨 있다. 매일 똑같은 일상 속에서 그날의 사소한 일이나 마음 쓰임에 대해 돌아보고, 자신의 마음이나 생각을 들여다보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자기 배려’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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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 예스24


다시 회사 상황으로 돌아가 보자. 어느 조직이든 누군가 입바른 소리를 하면 구성원들 중에는 노골적으로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는 사람이 있다. 말한 사람이 그 조직의 뉴 페이스라면 ‘누군 몰라서 안 하는 줄 아느냐, 뭘 얼마나 안다고 그러느냐’ 하는 핀잔 혹은 뒷소리를 듣게 된다. 잘 알든 모르든 조직에 의견을 제시하는 것인데 왜 자신을 공격하는 말로 받아들이는 것일까. 그 속마음은 아마도 이런 것이 아닐까. 나도 잘못된 줄은 알지만 조직의 논리에 맞춰 사느라 마음 불편한데 왜 그걸 후비고 드나, 라는. 이제껏 고쳐야 하는 줄 알면서도 암묵적으로 지금의 상태를 유지하는 데 동의해온 자신을 잘 알기 때문에, 그 마음 불편함을 타자를 공격하는 것으로 상쇄하려는 것은 아닐까.

조직의 구성원이 자기 의견을 내는 일은 쉽지 않다. 사장이 자기 의견을 얘기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다. 자본이 권력인 사회에서 권력을 가지지 못한 자가 내는 목소리는 그 사람의 지위와 경제력과 신변을 위험에 빠뜨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밥줄이 걸린 것이다. 그 위험을 겪을 소지가 있는 발언을 하는 자가 있다면, 발언 내용에 동의 여부를 떠나 감히 조직이 권력의 이름으로 발언자를 함부로 하지 못하도록 조직의 구성원들이 힘을 모아야 하지 않을까? 노조가 있든 없든 조직의 구성원이라면 그런 목소리가 자유롭고 풍부하게 발현되는 조직문화를 만들기 위해 개개인의 ‘마음 불편함’ 정도는 과감하게 떨쳐 버릴 순 없는 걸까.

사람은 누구나 관성의 법칙처럼 익숙한 것을 더 선호하고 그 패턴을 지키려 한다고 했을 때, 새로운 변화에 대한 거부반응은 인간이 가진 보수적인 본능일지도 모른다. 행동하지 않는다고, 침묵한다는 것만으로 그 사람을 판단할 수는 없다. 사람마다 성격이 다른데다 실제로 몰라서 그럴 수도 있고 용기가 없어서 그럴 수도 있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객관적인 눈을 갖고 있다면, 타인을 통해 새롭게 뭔가를 깨닫거나 배울 수도 있고 용기를 낼 수도 있을 것이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고 그것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자존감을 갖는다’의 다른 표현이다. 자존감과 자기 배려가 있다면 타인의 말이나 행동에 '마음 불편함'이 아니라 찬찬히 들여다볼 '마음의 여유'를 가질 수 있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