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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산책’은 각계 전문가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수요산책’에는 박록삼(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박상경(인권연대 회원), 서보학(경희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이윤(경찰관), 이재환(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책임관), 조광제(철학아카데미 대표), 황문규(중부대학교 경찰행정학과 교수)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누가 쫓고 누가 쫓기는가 (조광제)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8-07 11:11
조회
234

조광제/ 철학아카데미 상임위원



그들만의 배타적인 명칭으로 불리는 ‘구원파’를 일으켰다는 유병언 씨와 그의 장남 유대균을 비롯한 일족들이 한국사회 전체로부터 쫓기고 있다. 유병언에 대한 현상금이 5천만 원에서 5억 원으로, 유대균에 대한 현상금이 3천만 원에서 1억 원으로 올랐다. 그런가 하면, 최종적인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고 한 대통령 박근혜 씨를 지목해 시위대들은 “박근혜 퇴진”이라는 종이팻말을 손에 든 채 까치발로 조금이라도 더 공중으로 높이 들고자 애를 쓰고 있다. 이 두 장면이 필자의 상상 속에서 교차 환위되면서 잠시 혼란이 인다. 마치 구원파 신도들 사이에서 “유병언 퇴진”이라는 구호가 난무하는 것 같고, 흡사 대한민국 국민들이 박근혜와 그 일파들에게 현상금을 붙여 체포에 열을 올리고 있는 것 같다. 이건 착시인가, 현실인가?

착시와 현실이 교차 환위를 일삼게 되면, 어디에서부터 어디까지가 진실인가를 진단할 수 없게 되고, 범죄적인 사건이 났을 때 유죄와 무죄가 뒤범벅이 되어 가늠을 할 수 없게 된다. 체포되어야 할 사람이 체포되어 마땅한 사람을 뒤쫓고, 그렇게 해서 쫓기는 사람이 쫓는 사람을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붙여 쫓기는 사람으로 만들고, 그렇게 해서 쫓기는 사람이 쫓는 사람을 더욱 더 강력하게 쫓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든다. 이른바 구원파 신도들은 자신들을 희생양으로 만들지 말라고 말하면서 그들의 ‘교주’로 알려진 유병언을 쫓기는 자에서 쫓는 자로 만들어 검찰을 최종 지휘하는 대통령 박근혜 씨를 쫓기는 자로 만들고자 한다.

아닌 게 아니라, 대통령 박근혜 씨가 쫓기는 자임에는 틀림없다. 그녀 나름으로는 쓰디 쓴 울분에 아마도 제대로 잠을 잘 수 없으리라, 예전과 다르게 부풀어 보이는 그녀의 얼굴에서 짐작하게 된다. 작년에 국가정보원에 의한 부정선거로 당선되었다고 해서 곳곳에서 대통령직을 내놓고 물러나라는 국민들의 아우성에 한없이 쫓기고 쫓기는 신세였는데, “나로서는 선거에서 덕 본 게 없다.”라는 핑계로 일관하면서 이제 겨우 그 현상 수배의 그물에서 벗어나는가 싶었는데, 엉뚱한 곳에서 300명 이상의 꽃다운 생명이 애처롭게, 너무나 고통스럽게 죽어간 사건이 터져 다시 쫓기는 신세가 되고 말았으니 이제는 꼼짝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자신의 수족들로서 일사분란하게 움직여야 한다고 여긴 모든 부서들이 결정적인 시간에 다 같이 약속이나 한 것처럼 똑같이 부실하기 짝이 없이 절름거리면서 허위와 오류와 무책임을 남발하고 그녀 자신을 쫓기는 자로 만들었던 것이다. 몸이 무거우면 쫓기면서 달아나는 데 얼마나 불리할 것인가. 그래서 수족들을 잘라낸다. 한결 몸이 가벼워지면서 달아나는 데 유리한다는 느낌이 역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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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참사가 발생한지 40일째인 지난 25일 전남 진도군청에서 열린 범정부사고대책본부 정례브리핑 도중 브리핑룸에 비치된 텔레비전에서 검찰의 수사를 피해 도피중인 유병언 전 세모회장의 수배전단이 방영되고 있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쫓기는 자의 신세가 얼마나 무참한가에 대해서는 현재 현상금 5억 원이 걸린 유병언 씨가 절실하게 느끼고 있을 것이다. 모르긴 해도 유병언 씨 역시 그 나름으로는 쓰디 쓴 울분에 휩싸여 있을 것이다. ‘아니, 내가 뭘 잘못했다는 것인가? 세월호 참사하고 나 하고 무슨 직접적인 관계가 있단 말인가.’ 하고서 속으로는 자신을 뒤쫓고 있는 대통령 박근혜 씨를 한없이 원망하고 있을 것이다. 자신이야말로 대통령 박근혜 씨와 그의 부친인 박정희 씨의 경제성장 으로 환원되는 애국적인 정신을 곧이곧대로 실현했다고 자임하고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래서 제 스스로 국가의 일등 공신이라고 여기고 있을 가능성도 매우 높다. 각종 아이디어 상표들을 안출하여 자본주의적인 상품 판매에서 창의력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입증했고, 사진 작품 1점 당 수억 원을 호가하는 평가를 받음으로써 한국 사진 예술의 격을 한껏 높였고, 창조적 기업인이 한 번 실패했다고 해서 영원히 사장되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지 일어서서 도전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것에 대한 성공적인 실례를 그 누구보다도 보란 듯이 보여주었고, 경제 민주화라는 허울을 과감히 내던지고 어떻게든 경제 성장을 이루어 대내외적인 국력을 신장시켜야 한다는 ‘애국적’ 신념으로 일관했고, 10만 명에 육박하는 신도들로부터 한없는 존경을 받으면서 경제와 종교를 하나로 묶어내는 위업을 이루었고, “원수이자 암 덩어리인 규제”를 혁파한 그 열매를 가장 멋지게 거두어들인 실업가로 올라섰고 기타 등등.

이렇듯 쫓기는 자의 핑계와 항변은 끝이 없다. 그 핑계와 항변이 쫓는 자의 심정과 판박이처럼 똑같다는 점에서 모두에게서 냉소를 자아내는 대대적인 비극이 연출되고 있다. “내 탓이요, 내 탓이요, 내 탓이요.” 자신의 애꿎은 가슴을 두드리고 참사 현장에서 “진정한 영웅들”을 거명하면서 눈물을 흘리는 것은 이 대대적인 비극의 연출에서 관객들의 폭소를 유발해서 잠시나마 쉬어가도록 하는 에피소드 양념에 불과하다. 쫓는 자들은 과연 누구인가? “국가를 개조하겠다.”고 쫓기는 자가 쫓기다가 멈칫 뒤돌아서서 기염을 토한다. 국가 전체가 자신을 뒤쫓고 있으니, 더 이상 자신을 뒤쫓지 못하도록 국가 전체를, 그 주권과 영토와 국민을 개조해버리겠다고 말하고 있는 셈이다. 제아무리 쫓으려고 해도, 제아무리 체포하려고 해도, 제아무리 감옥에 집어넣으려 해도 집어넣을 수 없는 국가를 쫓아가 체포하고 감금시켜버리겠다는 무의식이 작동하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착시를 불러일으킨다. 착시와 현실의 교차 환위가 다시 일어난다.

국가의 정권을 맡은 대표 통치자가 국가를 쫓기 시작하자 당연히 쫓는 자와 쫓기는 자 사이에 대대적인 혼동이 일어난다. 자신의 꼬리에 붙은 불을 끄려고 한없이 맴을 도는 고양이처럼, 그래서 비록 고통에 찬 신음소리를 내면서 큰 상처를 입는다 할지라도 꼬리를 잘라버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한참 그 맴을 바라보면서 휘둥그레 초점을 잡지 못하는 강 건너 불구경을 하는 구경꾼이 되고 만 사람들은 고양이의 꼬리에 붙은 불이 자신의 몸에 옮아 붙을까봐, “어느 누구도 참사로부터 책임을 면할 수 없다.”라는 누군가의 물타기 전법의 외침에 놀란 나머지 노심초사 가슴을 쓸어 내렸지만, 대통령이 꼬리를 자르자 자신이 쫓기는 일은 없겠구나 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쉴 뿐만 아니라, 환호의 박수를 보내기도 한다.

이래저래 쫓고 쫓기는 연쇄 과정이 순환되는 그 원환에 끌려들고 말면 틀림없이 역사는 실천적으로 아무런 교훈도 얻지 못한 채 되돌이표 합창을 할 가능성이 크다. 쫓기는 줄 몰랐는데 막상 쫓기고 보니 그동안 알게 모르게 쫓기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이미 쫓길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었던 것이다. 참사의 희생자 가족들 역시 이미 쫓기고 있었다. 그렇게 쫓기고 있는 줄을 알지 못한 채 자신의 생명을 주고서라도 결코 놓칠 수 없는 금쪽같은 자식들을 세월호에 태웠던 것이다. 당하고 보니 아무 잘못도 없이 한껏 쫓기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아니, 쫓기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것이 원죄인 양 망연자실 통곡한다. 어떻게 쫓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대통령을 쫓기 시작했다. 쫓기게 된 대통령은 자신이 왜 쫓기는가를 미처 깨닫지도 못한 채 쫓기고 있으니 무조건 쫓길 수밖에 없었으나, 잠시 생각해 보니 자신 역시 누군가를 쫓을 수밖에 없음을 깨닫게 되고, 국가를 쫓아야 한다고 생각하다가 해경을 쫓아야 한다고 생각하다가 해운협회를 쫓아야 한다고 생각하다가 급기야 정확한 사냥감인 유병언과 그 일족을 쫓는 것이 가장 확실한 길이라고 작정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유병언의 무엇을 쫓아야 하는지 감이 오지 않는다. 자칫 엉뚱하게 유병언의 부와 권력에 대한 욕망을 쫓다가는 도리어 자신의 욕망을 쫓는 꼴이 되어 겨우 진화했다고 여겨지는 꼬리에 붙은 불을 스스로 재점화 하여 심지어 폭발해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정도쯤 생각을 하고 보니, 불세출의 천재 시인 이상의 오감도 시 제1호가 떠오른다.
오감도 시 제1호

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오.
(길은막다른골목이적당하오.)

제1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2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3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4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5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6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7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8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9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10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11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12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13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13인의아해는무서운아해와무서워하는아해와그렇게뿐이모였소.
(다른사정은없는것이차라리나았소.)

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좋소.
그중에2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좋소.
그중에2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소.
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소.

(길은뚫린골목이라도적당하오.)
13人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지아니하여도좋소.

쫓기는 자들만 있을 뿐, 쫓는 자는 아무도 없다면 어떻게 되는가? 쫓는 자도 무엇인가에 의해 또는 누군가에 의해 쫓기고 있기에, 그래서 무조건 쫓지 않으면 안 되는가 보다 싶어 누군가를 또는 무엇인가를 열심히 쫓다 보니 어느덧 쫓는 자가 되고 말았다면 어떻게 되는가? 한참 열심히 쫓다가 뒤를 돌아보니 아무도 자신을 쫓는 자가 없다는 것을 확인했을 때 틀림없이 닥치고 말 그 다행스런 낭패감은 자신이 쫓기고 있음에 틀림없음을 알리는 신호가 아니고 도대체 무엇이겠는가.

우리 모두를 뒤쫓고 있는 거대하기 이를 데 없는 그 유령의 정체를 정확하게 캐내어, 그 유령이 그야말로 유령에 불과하다는 것을, 따라서 그 유령이 발휘하는 권력이 본질상 그 어떤 근거도 없다는 것을, 알고 보니 전혀 쫓고 쫓길 까닭이 없다는 것을, 쫓고 쫓기는 통에 단 한 번 주어진 생명의 시간들을 우왕좌왕 얼마나 방향을 잃고서 낭비하고 있었는가를 우리의 무의식의 심층에 이르기까지 만천하에 폭로하여 뒤집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