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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산책’에는 박록삼(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박상경(인권연대 회원), 서보학(경희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이윤(경찰관), 이재환(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책임관), 조광제(철학아카데미 대표), 황문규(중부대학교 경찰행정학과 교수)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약속은 어디에, 어떻게, 어디로? (조광제)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8-07 11:30
조회
209

조광제/ 철학아카데미 상임위원



1. 철학을 향한 변

철학을 업으로 삼다보면 인생 전체를 싸잡아 크게 묻는 질문을 받게 된다. 그중에 대표적인 것이 “인간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다. 왜 이런 걸 묻게 되는 것일까? 물음을 던지는 사람 역시 인간이기 때문이고, 인간으로서의 삶 즉 인생을 살고 있고 또 앞으로도 계속 그 인생을 가능하면 의미 있게 살아내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럴 때면, 질문을 받은 나는 대답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심지어 강박이라 할 수도 있는 의무감에 사로잡힌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글을 쓴다는 것은 불특정한 누군가가 던진 물음에 대해 대답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불특정한 익명의 사람들이 나의 두뇌를 붙들고서 한 시도 놓아주지 않는다. 이때 나 역시 여기 이 불특정한 익명의 사람들 속으로 녹아들어가 한통속이 된다. 그런데도 ‘조광제’라는 고유명사의 명패를 내려놓지 못한다. 다들 그러할 것이다. 익명과 기명의 결합과 교환, 어디에서부터 그 경계를 그어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는 네트워크 속에서 삶을 영위한다. 그런 가운데 그 네트워크를 재형성한다.

방금 쓴 글에서처럼 철학은 추상적인 대규모의 사유를 예사로 자행한다. ‘익명과 기명의 결합과 교환의 네트워크’라는 말은 이른 새벽 일일 노동시장에 나가 과연 가능할지조차 함부로 기약할 수 없는 하루벌이 일을 얻기 위해 단칸방 월세의 집 문을 나서는 어느 가장의 무거운 발걸음과 애타는 심경에 비하면 얼마나 추상적이며 또 얼마나 큰 이야기인가. 이렇듯 관념의 허기진 구조물 속으로 자진해서 걸어 들어가기를 서슴지 않는 철학자의 심경 역시 그 성격은 다르지만 한껏 시리다.

그러나 현실을 관념으로 담아내지 못하는 풍토를 용납해서는 안 된다. 관념에서부터 현실에 대한 방향이 나오고, 현실에 대한 방향에서부터 현실을 제대로 살 수 있는 방법이 나오고, 그 방법에서부터 힘을 끌어 모아 현실을 바꾸어낼 수 있는 실천의 길이 열리기 때문이다. 관념 속에 파묻혀 살자는 것이 결코 아니다. 관념은 현실의 수단일 뿐이다. 설사 관념이 현실을 구성하는 중요한 뼈대가 된다고 할지라도, 관념 그 자체는 파생적인 현실에 불과하다.

문제는 의식되지 않고 성찰되지 않는 관념이 삶의 현실을 지배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관념에 얽매이지 않는 자는 아무도 없다. 그때 관념은 욕망과 뒤범벅이 된 이른바 은폐된 관념이다. 성찰되어 의식된 관념을 함부로 무시하는 자는 이런 은폐된 관념에 휘둘리고 있기 십상이다. 은폐된 관념이라고 해서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니다. 철학은 은폐된 관념들을 끄집어내어 함께 성찰해서 그 좋고 나쁨을 가려내고 나쁜 은폐된 관념은 버리고 좋은 은폐된 관념을 부추겨 욕망을 좋은 방향으로 몰고 가기 위한 또 하나의 관념이다. 근원에 있어서 욕망은 감정을 이끌고 사유를 낳으며 의지를 일으켜 행동으로 이어진다. 현실은 다름 아니라 행동의 연속이요 복합이다. 이에 철학이 현실을 해석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현실을 변혁하는 데 동참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2. 은폐된 공동의 관념, 약속

글을 읽다보면, 특히 목숨을 걸고서 자신의 사상을 피력해마지 않는 인물의 글을 읽다보면 크게 배우게 된다. 히틀러의 파시즘뿐만 아니라 스탈린의 이른바 공산독재에 대해 비판적 사유의 날을 세웠던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1892~1940)이 쓴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발터 벤야민 전집 5』, 최성만 옮김, 도서출판 길, 2008)를 읽다가 크게 깨닫는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과거는 구원으로 지시하는 어떤 은밀한 지침을 지니고 있다. 우리 스스로에게 예전 사람들을 맴돌던 바람 한 줄기가 스치고 있지 않은가? 우리가 귀를 기울여 듣는 목소리들 속에는 이제는 침묵해버린 목소리들의 메아리가 울리고 있지 않은가? 우리가 구애하는 여인들에게는 그들이 더는 알지 못했던 자매들이 있지 않을까? 만약 그렇다면 과거 세대의 사람들과 우리 사이에는 은밀한 약속이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지상에서 기다려졌던 사람들이다.(위 책, 331-2쪽, 강조는 인용자가.)

“은밀한 약속”, 이 말에 눈이 번쩍 뜨이면서 크게 고무된다. 순간적으로 추상적이지만 결코 스쳐 지나가서는 안 되는 긴요한 인간관계의 원리를 포착하게 된다. 과거 사람들과 우리 세대 사이에만 은밀한 약속이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현실을 살고 있는 우리 모두 서로 은밀한 약속으로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다. “현실의 모든 일들은 약속으로 점철되어 있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만남 자체가 곧 약속이다. 그 눈빛과 표정에, 설사 흘깃 쳐다보고 지날 뿐인 행인들 서로간의 눈빛과 표정에도 이미 늘 약속이 서려 있다. 함부로 얕잡아 보거나 노려보아서는 안 된다는 약속, 서로의 불행에 대해 안타까운 나머지 손을 내밀어야 한다는 약속, 누가 어떻게 약속을 어기는지에 대해 제대로 판단해야 한다는 약속, 자칫 약속을 어길 경우 부끄러워해야 마땅하다는 약속, 누구나 단 한 번 살다가 죽어갈 수밖에 없음을 깨달아 한 사람 한 사람이 이 운명적인 인생을 사는 것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다고 긍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약속, 어쩌다 욕망과 행동이 서로 대립되면 상대가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성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약속, 그렇듯 모든 삶의 여정이 이미 늘 약속을 했고 그 약속을 이행하고 약속을 이행하는 것 자체가 생의 의미와 가치가 된다는 것이다.

“은밀한 약속”, 그것은 인간이 태어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약속의 얼개 속에서 태어난다는 것을 일컫는다. 인간의 욕망과 행동 자체에 이미 늘 은폐된 관념인 약속이 스며들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아무도 약속을 하지 않았지만, 그렇게 아무도 약속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약속은 더욱 굳건하게 자리를 잡고서 우리의 생을 이끌고 있는 것이다.

약속은 지켜야 한다. 설혹 어쩌다가 하나의 약속을 어긴다 할지라도 그렇게 어길 수밖에 없는 까닭은 더 크고 중요한 다른 약속을 지키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나는 약속을 하지 않았는데, 저쪽에서 약속을 지키라고 요구하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어느 경우에건 근본적으로 약속을 하지 않은 자는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누가 어느 쪽이 폭 좁은 아둔한 약속을 믿고서 행동하는가를 놓고서 모든 대립과 분쟁이 일어난다.

배타적인 약속은 약속이 아니다. 약속을 하지 않을 수 없기에 약속을 하는 척 해 놓고서 상대방이 그 약속을 믿고서 행동하도록 함으로써 그를 통해 그저 나 혼자만 이득을 보겠다고 하는 그런 약속은 약속이 아니라 사기다. 모든 대립과 분쟁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배타적인 사기에 의한 대립과 분쟁이야말로 잘못된 것이다. 자신은 제대로 약속을 한다고 했는데, 자기도 모르게 사기가 될 수도 있다. 자신은 제대로 된 약속을 지키기 위해 대립과 분쟁에 목숨을 걸기까지 하지만, 자기도 모르게 사기에 연루되고 심지어 적극적으로 가담할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욕망과 행동에 은폐된 관념으로서 작동하는 약속을 끊임없이 가능한 한 더 큰 공공의 장을 바탕으로 성찰해야 하는 것이다.

모든 말은 약속이다. 은폐된 관념이었던 약속은 말을 통해 공공의 장에 명시적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공공의 장을 책임지는 자는 그만큼 약속의 규범에 엄격해야 한다. 한 나라의 통치를 책임진 자는 그 나라 곳곳에서 이루어지는 약속들에 민감해야 한다. 약속은 곧 생의 의미와 가치를 결정하는 것임을 정확하게 깨달아야 한다. 생의 의미와 가치를 향한 약속이 결집될 때, 생을 기약할 수 있고 긍정할 수 있다는 것을 깊이 깨달아야 한다. 옛 선인(先人)들이 왜 한 마디 말이 천금처럼 무겁다는 것을 강조했겠는가. 하물며 통치자의 말은 오죽하겠는가.

인간성은 약속을 통해 이루어진다. 약속이 깨지면 관계가 깨지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관계가 깨지면 공동의 삶이 깨진다. 공동의 삶이 깨지면 각자 한 마리의 짐승처럼 발버둥 치면서 기약 없는 발가벗은 존재로 전락한다. 인간성을 바탕으로 한 인권은 바로 서로 약속을 할 수 있고, 그 약속을 지킬 수 있고, 약속을 어기는 일에 대해 힘껏 추궁할 수 있는 권리에 다름 아니다. 인권은 약속의 삶을 누릴 수 있는 권리이고, 그에 따라 남은 생을 기약할 수 있는 권리인 것이다.

당연하지만 약속은 일방의 것이 아니다. 쌍방을 전제로 한 것이 약속이다. 철학자 레비나스(Immanuel Levinas, 1906~1995)는 타인의 얼굴 자체에 ‘살인하지 말라’라는 계명이 새겨져 있다고 힘주어 말했다. 타인은 곧 약속을 통해 성립하는 나의 존재를 가능케 하는 근본 조건인 것이다. 내가 만나는 사람들은 여러 다양한 처지에 놓인 타인들이다. 그들은 이미 늘 나에게 그렇게 다양한 만큼 여러 다른 약속들을 맺은 것이고, 그 약속들을 이행할 것을 나에게 요청한다. 나의 존재는 내가 얼마나 많은 다른 종류의 약속들을 염두에 둘 수 있고, 또 그 약속들을 얼마나 어떻게 다채롭게 이행할 수 있는가에 따라 열리기도 하고 또 닫히기도 한다. 여러 약속과 이행을 향해 열린 나의 존재는 그만큼 남은 생의 의미와 가치를 기약할 수 있을 것이다.

약속은 항상 미래를 향해 있다. 그러나 또한 약속은 항상 과거에 맺은 것이다. 약속을 통해 우리는 과거와 미래를 연결한다. 두툼하게 축적된 과거를 지니지 못하게 되면, 그만큼 미래가 한없이 얇아진다. 개인도 사회도 국가도 민족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약속은 결코 무한정하게 연기될 수 없다. 약속 불이행은 더 크고 알찬 새로운 약속을 위한 것이고, 그럴 수 있기 위해서는 더 두툼하고 심중한 과거를 새로운 약속의 밑돌로 분명하게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은 경우, 약속 불이행은 그 자체로 악일 뿐이다. 악이란 근본적으로 약속을 어기는 데서 성립하기 때문이다.

법은 국가적인 공공의 약속이다. 만약 약속 아닌 약속, 특별히 배타적인 약속, 사기로서의 약속에 입각한 현행법이 있다면, 그 법은 이미 법이 아니다. 하물며 함부로 약속을 해서 국가의 통치권을 획득하고, 그 약속을 예사로 어기고도 한 점 부끄러움조차 느끼지 못하는 태도를 보이는 통치자를 선택한 국민들은 얼마나 불행할 것인가. 국가는 그야말로 공공의 열린 약속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체계이다. 약속을 역용하고 무시하는 통치자에 의해 통치되는 국가, 그 국가에서 생을 영위해야 하는 국민들은 더 이상 생을 기약할 수 없는 암울함으로 인해 비참한 인생을 살 수밖에 없다. 그러니 약속 어기기를 밥 먹듯이 하는 통치자는 곧 국가적인 악의 표상이 아닐 수 없다.

신용은 약속 이행의 능력에서 비롯된다. 그러고 보면, 신용은 다른 사람들을 이용해서 내가 이득을 얻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과거와 미래를 공유하고 그럼으로써 다함께 남은 생을 기약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신용 자체를 화폐로 바꾸어 약속 아닌 약속, 사기인 배타적인 약속으로 전락시키는 금융자본주의는 얼마나 그 자체로 악인가. 더욱이 이런 금융자본주의에 국가 통치자마저 편승해 있다면, 악에 악을 더한 현실을 형성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어느 누구도 믿을 수 없다는 심사가 현실 전체에 편만하게 되면, 그것으로 공동의 생은 끝이다. 공동의 생이 끝나면, 내 개인의 남은 생을 전혀 기약할 수 없다. 남은 생을 기약한다는 것은 곧 약속과 이행의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것이고, 약속이란 이미 늘 타인들과의 공동의 생을 위한 약속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연 민주공화국이라는 명패를 높이 치켜 든 오늘날 대한민국은 얼마나 어떻게 계속 새로운 약속을 하고 이행해 가며, 그럼으로써 과연 얼마나 어떻게 각인들이 자신의 남을 생을 기약할 수 있도록 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과연 우리들의 약속은 어디에, 어떻게, 어디로 사라지고 만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