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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산책’에는 박록삼(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박상경(인권연대 회원), 서보학(경희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이윤(경찰관), 이재환(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책임관), 조광제(철학아카데미 대표), 황문규(중부대학교 경찰행정학과 교수)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엄마는 아직도 모른다 (정보배)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8-07 11:30
조회
208

정보배/ 출판 기획편집자



“하지 말란 말이야!” “저리 가!” “저리 치워!”

딸아이의 목소리가 한껏 고조된다. 근래 부쩍 엄마 아빠에게 소리를 지르는 일이 많아졌다. 정확하진 않지만 두어 달 전부터 그런 것 같다. 얘가 어린이집에서 소리 지르는 것만 배워왔나. 일부러 목소리가 갈라질 때까지 악을 쓰면서 소리를 지른다. 가만 생각해 보니 어린이집에서 배워온 것보다는 엄마에게 들은 소리를 다시 되돌려주고 있는 것 같다. 엄마가 자신에게 화내고 혼낼 때, 억울하고 무서웠던 감정을 고스란히 내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1시간. 밤에 같이 누워서 잠들 때까지 아이를 토닥거리며 포근한 엄마 노릇을 해낼 수 있는 최대의 시간. 1시간을 넘기면 토닥거리느라 아픈 손목과 옆으로 어정쩡하게 누워 있는 불편한 자세에 속이 부글거리고 화가 난다. 아이는 잠이 잘 들지 않는지 계속 딴소리다. “엄마, 배 아파.” “엄마, 물마시고 싶어.” “엄마, 여기가 간지러워” 등등. 이럴 때 나는 “네가 자지 않으니까 엄마가 너무 힘들다”고 애를 협박하면서 네가 잘못해서 그렇다는 식으로 아이가 죄책감을 느끼게 한다.

아이는 집에서 돌봐주시는 할머니와 식사를 할 때는 무난히 밥을 먹는다. 휴일이 돼 엄마와 같이 밥을 먹을 때는 몇 배는 더 엄마를 힘들게 한다. 잘 먹지도 않고 (내가 볼 때) 터무니없는 요구를 하며 밥상머리를 정신없이 만든다. 물론 할머니가 엄마보다 몇 배 아이를 잘 구슬리기도 한다. 돼지꼬리만큼 짧은 나의 인내심은 금방 바닥을 드러낸다. 한두 번 구슬려도 밥을 먹지 않으면 즉시 불같이 화를 내버린다. 밥을 먹지 않을 거면 굶으라며 거칠게 식판을 치우면서 소리를 질러댄다.

나는 왜 아이가 징징거리면서 터무니없는 생떼를 쓰거나 요구를 하면 화가 나는 것인가. 아이는 바빠서 자신과 시간을 잘 보내지 못한 엄마에게 어리광을 피우고 있다고 짐작된다(40개월쯤 되는 아이들이 보이는 평범한 행동일 수도 있지만). 그럼 난 왜 이렇게 아이의 어리광을 받아주지 못하는 걸까. 외동인 아이가 어리광쟁이가 되지 않도록 엄하게 키우려고 하다 보니 그렇다기엔 아이를 너무 받아주지도 견디지도 못하는 것 같다. 그러다 문득, 엄마가 어린 나의 어리광을 받아주지 않았던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1남 5녀 중 막내인 내가 기억하는 어릴 때의 엄마는 ‘엄격한 엄마’이다. 어리광을 받아줘야 할 때는 마음껏 품어줘야 엄마에게 사랑받고 있다는 충족감을 가질 텐데, 내가 정한 시간과 규칙대로 애가 따라오지 않는다고 다그치기만 하니 아이의 욕구불만은 커지고 스트레스는 더 심해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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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맘&앙팡


안다고 행동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작년 봄 재취업을 하면서 아이에게 버럭 화를 내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그건 단지 직장에 나가서 아이와 함께 있어주지 못해서 미안하기 때문은 아니다. 나의 화는 너무나 갑작스럽고 폭력적이라는 걸 스스로 깨달았기 때문이고 주변에서 가장 약한 존재인 아이를 맘대로 제압하려는 나를 봤기 때문이다. 사람은 근본적으로 바뀌는 것이 아니라 계속 참는 것일까. 마치 금연이 담배를 끊는 게 아니라 피는 것을 계속 참는 것이라는 말처럼. 분명 무언가 깨달아서 행동을 바꿨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스스로에게 어떤 교육적인 학습 내용을 주입한 것에 불과했는지도 모르겠다. 막상 작년보다 아이가 말을 잘하게 되고 말귀를 더 잘 알아듣는다고 판단한 순간, 이제는 엄마의 요구를 당연히 이해하고 따를 것이라는 말도 안 되는 기대를 하게 되었다. 아이를 제대로 모르니까 터무니없는 기대를 한 것이고, 엄마에겐 더없이 달콤한 기대는 수행하기 어려운 학습효과보다 더 강력했던 것이다.

늦게 아이를 낳은 데다 맞벌이를 하면서 떨어진 체력이 바닥 근처에서 올라오질 않으니 인간적으로 자제력을 발휘하기 싶지 않다. 최근 공동육아 어린이집에서 보낸 면담설문지에 이런 질문이 있었다. “자녀의 바람직한 성장을 위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무엇이며, 그것을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계십니까?” 나름대로 답을 달아서 제출하긴 했다. 내 아이가 이런저런 아이로 자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긴 하지만 솔직히 그것을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아이의 양육을 그렇게까지 목적의식적으로 받아들이고 수행해야 하는 어떤 것이라면, 나는 지금보다 더 나은 엄마가 될 자신이 없다. 아이가 이해할 수만 있다면 정말이지 꼭 말하고 싶다. 엄마도 처음이라 모르는 게 많아. 네가 성장하면서 생기는 변화들을 너도 엄마도 겪어나가면서 알게 되면, 좀 더 나은 관계가 되지 않겠니. 안다고 다 잘하는 건 아니라 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