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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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산책’은 각계 전문가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수요산책’에는 박록삼(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박상경(인권연대 회원), 서보학(경희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이윤(경찰관), 이재환(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책임관), 조광제(철학아카데미 대표), 황문규(중부대학교 경찰행정학과 교수)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당신의 사랑이 버겁습니다 (정지영)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8-07 11:24
조회
144

정지영/ 서울DPI 회장



장애인생활시설, 장애인거주시설, 장애인수용시설. 이름은 달라도 본질은 달라지지 않는 이런 곳에서 살다 지역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모여 ‘시설생존자연대’라는 모임을 만들었습니다. 장애인의 자립을 보장하기 위한 정책마련, 장애인활동보조 하루 24시간 지원 등을 요구하는 일인시위를 국회 앞에서 200일간 진행하기도 하고, 장애인대회에서 퍼포먼스를 하기도 하였습니다. 퍼포먼스를 준비하는 중에 시설생존자연대의 회원이었던 한 후배가 시설이 완전히 없어져야한다는 주장에는 동의할 수 없다고 하자 설전이 벌어졌습니다.

그 이유는 본인같이 부모에게 버림받은 중증장애인에게 그런 시설이라도 없었다면 지금까지 살아올 수 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그래서 나를 거두어준 그 시설이 고맙다고 했습니다.

단지 옷을 입고 비를 피하며 잔다고, 죽지 않을 정도의 음식을 먹고 산다는 게 자유를 빼앗기며 사는 것보다 나을 것이 없다며, 그런 시설이 존재하는 것 자체가 반 인권적이라는 주장도 부모가 양육을 포기해서 당장 오갈 곳 없어진 중증장애아 앞에선 마땅히 반박할 말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 때의 논쟁이 최근 프란치스코 교황의 꽃동네 방문으로 다시 떠올랐습니다.

이미 많은 기사에서도 보셨다시피 장애인활동가들은 교황의 꽃동네 방문을 환영하지 않았습니다. 방문 일정이 발표되자마자 장애인활동가들은 명동성동 앞(결국 명동성동 안에는 못 들어갔죠) 등에서 온몸을 바닥에 던지며 저항했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해서는 장애인당사자들도 의견이 엇갈립니다. 혼자 살아갈 수 없는 중증장애인에게 그나마 그런 곳이라도 필요하고 한국에서 세월호 유가족 분들의 인간적 고통에 공감해주시는 모습 등 물질과 경쟁에 매몰되어있는 한국사회에 낮은 곳과 소통하고 사람이 중심되라는 메시지를 전달해 주실 교황의 방문에 ‘너무 작은 일’로 큰 가르침을 그르치지 말자는 뜻인 듯합니다.

꽃동네에 살다가 탈시설지원프로그램을 통해 자립을 하신 분께 물었습니다. “교황님이 가신데요”, “거길 왜 가신데요.”

장애인활동가들이 그토록 교황의 꽃동네 방문을 반대했던 이유는 ‘방문 후’의 상황전개입니다. 역시나 교황님은 ‘어린 천사’와 같은 장애아동을 한 명 한 명 안아주시며 내미는 손가락을 입에 가져가 축복해 주셨습니다. 사람들은 생명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되새기며 헌신과 사랑을 배웠겠지요. 음성 꽃동네가 그런 역할을 했던 시절은 있었습니다. 그러나 전국 최대의 수용인원으로(시설 소규모화 정책에도 끄떡없는) 전국 최대의 지원금을 통해 운영되고 있을 뿐입니다. 돈이라는 댓가를 받더라도 TV에서나 나오는 그런 장애인을 돌보는 일은 아무나 못하는 일이다라고 칭송하실 분도 많으시겠죠. 그러나 주위를 조금만 둘러보면 여러분이 직업으로 택하지 못할 일을 하시는 분이 많습니다.

앞으로 낮은 곳에 임하신 교황님의 축복을 받을 곳은 꽃동네이지, 결코 교황이 손을 잡은 꽃동네의 아이들은 아닙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수많은 언론에 보도된 사진 속의 아이들에게 축복이 갈 것이라고 착각하고 꽃동네를 비롯한 전국의 장애인시설들에게 축복을 내려줄 것입니다. 사진 속 아이들의 인생은 ‘희망’만으로는 변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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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장애인자립생활센터 김정훈 권익옹호국장이 지난 9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장애인차별철폐연대 등 장애인 단체들이 진행하는 프란치스코 교황 장애인수용시설 꽃동네
방문 취소를 위한 릴레이 1인시위를 하고 있다.
사진 출처 - 뉴시스


책도 많이 읽고 글도 잘 쓰는 선배가 있습니다. 책 소개와 함께 ‘내 인생에 있어 책의 의미’라는 주제로 원고를 청탁받은 후 고민에 빠졌습니다. 그 선배에게 책은 그저 ‘시설에서 살면서 현실을 견디기 위해 세상의 가치를 파괴하는 도구로 사용했을 뿐’인데.

장애인시설에서 살았을 때는 ‘시’를 잘 쓰던 지적장애인분이 ‘자립’한 이후 ‘시’를 도통 쓰지 않아 걱정이라는 사회복지사의 말을 들었습니다. 그저 자립하니 ‘시’도 좋지만 그보다 더 흥미로운 게 많았을 뿐일 지도요.

장애인인 친구에게 “내가 너라면 못 살고 죽어버렸을거야”라고 말한 친구에게 화를 내니 “어려움을 극복하고 열심히 노력하는 너를 칭찬한 말인데 왜 나에게 화를 내냐”며 도리어 ‘몸도 마음도 삐뚤어진 장애인’ 취급을 받았던 사람도 이 땅의 흔한 장애인의 모습입니다.

보도에 턱도 없이 잘 정비된 인도를 휠체어 타고 지나가니 ‘친절한’ 시민이 도와주셨습니다. (사실은 긴말하기 귀찮아) 도움을 받아들이니 “정말 대단하십니다”라고 인사를 건네셨습니다. 길거리를 활보하는 일이 ‘대단한’ 일이 될 때 도 많습니다.

교황의 방문으로 아마도 이런 ‘친절한’ 시민이 더 많아질 듯합니다. 친절한 시민이 많아지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왜 ‘장애인’에게는 친절‘만’할까요. 가족이 될 기회, 부모가 될 기회, 동료가 될 기회는 ‘보호’, ‘선의’, ‘친절’로 유예(사실은 박탈)되고 덩달아 ‘권리’까지 양보해야하는 것이 장애인이 가질 수 있는 유일한 국민으로서의 역할이라는 암묵적 동의의 배경은 바로 이 ‘온정주의’입니다.

물론 유럽의 복지국가들도 노인을 위한 요양원도 있고, 중증의 장애아를 돌보는 의료시설도 있습니다. 그러나 꽃동네와 다른 것은 그런 곳에 살아도 여전히 ‘인격’은 남아있고 ‘관계’는 단절되지 않는 ‘편의’가 있다는 것입니다.

많은 신체적 후유증이 남은 상태로 목숨만은 살려내는 진일보한 의료기술이 단순한 의사들의 기술 자랑이 아니라면 우리 사회는 ‘어떤 모습’의 ‘사람’이라도 살 수 있게 되어야 합니다.

교황님의 방문을 손꼽아 기다렸다는 그들의 말. 시설생존자들은 그 말을 믿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들도 한번쯤은 ‘후원자’의 방문만을 손꼽아 기다린 날이 있었고, 어떤 이에게는 그런 날도 없었겠지요. 왜냐면 독지가와의 만남을 위해서는 그들의 선의에 가장 많은 만족을 줄 수 있는 ‘장애아’가 선택되었을 테니까요.

“가난한 사람을 돕는 활동은 자선사업에 국한되지 않고 인간 성장을 위한 구체적인 노력으로 확대되어야한다. 가난한 이들을 돕는 것은 반드시 필요하고 좋은 일이지만, 그것으로 충분하지는 않다. 인간적인 자립과 성장을 이룰 수 있도록 노력을 기울여 달라”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메시지는 전해지지 않은 것 같습니다.

꽃동네가 한 때 우리사회의 소외되고 소외된 자를 위한 곳이었다면, 이제는 그 ‘힘’을 교황님의 말씀처럼 ‘인간적인 자립과 성장’을 위해 장애인에게 돌려주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