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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산책’은 각계 전문가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수요산책’에는 박록삼(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박상경(인권연대 회원), 서보학(경희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이윤(경찰관), 이재환(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책임관), 조광제(철학아카데미 대표), 황문규(중부대학교 경찰행정학과 교수)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장애인이여, 일상을 장악하자! (정지영)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8-07 14:19
조회
250

정지영/ 전) 서울DPI 회장



지난 4월 20일 제35회 장애인의 날 기념식에서 보건복지부는 바른 표현 사용 캠페인 선포식을 함께하며 “장애우·장애자 대신 장애인이 올바른 표현입니다”라는 캠페인을 했습니다.

아시다시피 한 집단을 이르는 용어는 그 집단의 사회적·정치적 위치를 내포하고 있기에 억압받는 집단이 어떻게 정의되고 있는지는 대단히 중요한 일이며 저항의 시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장애인은 예로부터 불구자, 장애자 등 비하의 뜻을 담고 있는 용어를 바꾸기 위해 노력하였고, ‘심신장애자복지법’을 ‘장애인복지법’으로 바꾸어 내며 비로소 ‘장애인’이라는 이름을 획득하였습니다.

그러나 장애인을 뜻하는 말로 많은 사람들이 쓰고 있는 ‘장애우’라는 단어는 딱히 장애인을 비하하기 위하여 쓰인 말은 아닙니다. 장애인 스스로가 사용할 수 없어 장애인을 ‘비주체적’으로 만드는 것으로 쓰지 말 것을 이 사회에 주문하였지만, 여전히 장애인을 바라보는 따뜻한 마음이 담겨있다는 온정적이고 시혜적인 이유로 많이 쓰이고 있습니다. ‘장애우전용주차장’, ‘엘리베이터는 장애우에게 양보합시다’ 등등.

그런데 이번에는 보건복지부까지 나서 장애우를 장애인으로 바꿔 쓰자고 하니, 어쩌면 장애인운동사에 기록될 만한 일입니다(그러나 여전히 단체명에 ‘장애우’라는 말을 쓰고 있는 보건복지부 소관 사단법인에 대해서, 보건복지부가 어떻게 할지는 두고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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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5회 장애인의 날' 기념식의 장애 인식 개선 캠페인 슬로건
사진 출처 - 뉴스1


그런데, 이렇게 장애인당사자들의 요구로 장애자에서 장애인으로, 장애우라는 말까지 퇴출된 것만으로 장애인의 권익이 보호될 수 있는가는 아닌 것 같습니다. 예전에 사람들이 조금 모자라거나 부족한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병신’, ‘쪼다’, ‘바보’라고 부르던 욕을 이젠 ‘이 장애인아!’라고 대체해서 사용하는 것을 보면, 장애인에게는 용어의 혁명도 중요하지만 ‘장애인집단’의 사회적 위치를 끌어 올리는 노력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장애인이 돈이 많아지면 사람들이 이렇게 무시하지 않을까요? 제 주변의 부자 장애인도 여전히 가끔 지하철에서 용돈을 받는 것을 보면(아무 이유 없이 쯧쯧하며 열심히 살라고 천 원, 오천 원씩 준다네요...) 그것도 딱히 정답은 아닌 것 같습니다. 장애인의 학력이 높아지거나 좋은 직장에 다니면 해결될 까요? 제 주변의 박사 장애인도 사람들 많은 곳에선 동정의 시각을 받는 것을 보면 사회적 위치를 끌어 올리는 것도 전부는 아닌 것 같습니다.

여전히 세상 사람들은 여성을 비하하고, 흑인보다 백인을 선호하고, 성소수자를 혐오하며 장애를 욕으로 사용합니다.

결국은 ‘모든’ 사람의 가치를 존중해주는 인권 의식이 절박한 시절이 아닌가 합니다.

KBS에서 새로 시작하는 드라마 ‘프로듀사’의 시청소감을 보니, 주인공 김수현이 말하는 것이 ‘언어장애자’가 아니면 일반인이 누가 저렇게 말을 더듬느냐며 현실감이 떨어진다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제가 즐겨보는 웹툰에 게이커플의 일상다반사를 연재하는 ‘지지’ 님은 게이입니다. 가장 최근 연재분에 웹툰작가파티에 참석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고민하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작가파티에 등장하는 것 자체가 커밍아웃이기 때문에 망설였지만, 남들은 하지 않을 고민을 해야 하는 것이 부당하게 느껴져 참석했는데, 의외로 많은 분들이 편견 없이 대해주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저는 워낙 극중 김수현처럼 말하는 사람과 대화를 많이 하다 보니 아무생각 없이 보게 되었고, 게이인지지 님의 일상을 미리 보았으니 게이라는 편견 없이 즐겨보는 웹툰의 작가라는 생각만 하게 되는 것 아닐까요.

여전히 많은 장애인들이 시설이나 집안에 꼭꼭 숨겨있습니다. 사회활동을 하는 장애인도 사람들의 편견과 환경의 제약으로 여행이나 사교활동을 많이 하지 않기도 합니다. 시장에서 장을 보는 것도 누군가에게 부탁하게 되고, 투표도 장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부재자투표가 가능하기도 합니다.

정책의 변화, 차별의 철폐도 중요하지만, 장애인과 살아본 적 없어 본의 아니게 차별하게 되는 비장애인들에게 우리 지역에 장애인인 내가 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도 엄청나게 큰 장애인운동의 한 방법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한 장애인단체가 있던 건물에는 3cm 정도의 턱이 있었습니다. 피자가게 앞은 더 높이 경사로가 있었는데, 이번에 구청에서 보도블록 공사를 다시하면서 3cm의 턱은 사라지고 피자가게 앞의 경사로는 더 완만해졌습니다. 경사로를 손 본 것이 아니라 보도블록을 조금 높게 쌓은 결과입니다.

동네 편의점에 오는 휠체어를 탄 장애인, 동네 미장원에서 파마를 하는 시각장애인, 영화관, 술집, 식당, 공원, 도서관, 은행, 부동산, 시장, 극장, 콘서트홀, 야구장 등등을 하나하나 내 삶의 공간으로 장악해 나가는 것, 매일 매일 사람들이 이용하는 공간을 장애인도 함께 이용하며, 동네에서 마주치며 불편한 게 있다면 개선하고 살아가는 것이 말뿐인 장애복지가 아닌 사람 사는 세상을 함께 만드는 밑거름입니다.

더 많은 장애인들이 부지런히 일상의 공간에 등장하는 것, 그렇게 생활하는 것 자체가 장애인권운동입니다.